유박사, 자유로부터의 도피
〇 태아는 탯줄을 통해서 산모로부터 공급을 받고 살다가, 출산 후 탯줄은 절단되었을지라도 여전히 엄마로부터 보호와 교육을 받고 성장합니다. 어머니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해서 독립하면 자유를 얻은 대가로 많은 것들을 해결해야 합니다. 비슷한 사례로 새터민에게 자유는 좋지만, 경쟁이 너무나 심해서 사는 것이 힘들다는 하소연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 1차 세계대전으로 낡은 군주제를 대신하여 민주체제가 강화된 것으로 보였으나 ‘자유는 견디기 어려운 고독과 통렬한 책임을 동반한다’하기 때문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부담이 되어 사람들이 도피하는 현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의 명저「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자유를 포기하고 권위주의 (나치즘, 파시즘)의 빠지는 심리학적 기원을 밝혀 민주주의 사회가 가져야 할 자세를 알려 제시하였습니다.
〇 내용요약
= 중세 이전에는 태어날 때 신분을 갖고 태어났다. 신분이 높을수록 넓은 영토와 노예를 부릴 수도 있어서 자유를 누리면서 살았다. 또한 신분이 낮은 계급도 견고한 신분제와 종교교리의 영향으로 귀족은 귀족으로, 농노의 자신은 농노로 살 수밖에 없었고 넘을 수 없는 한계를 인정하고 안정감을 느끼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자본주의가 발전하면서 중세사회가 붕괴되고 근대 자본주의가 확산되면서 계급과 운명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 바꿀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러한 현상을 통해서 종교와 가족의 개념도 퇴색되었다. 현대사회에서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결과 경제적 자유를 누리게 되었지만 점차 외로워진 인간은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권력자에게 자유를 바치게 되었다.
= 중세 체제가 붕괴되면서 그것이 개인에게 제공하던 안정과 안전도 파괴되었다. 특히 자본주의가 꿈틀대면서 고정된 자리나 지위는 사라졌다. 개인은 외톨이가 되어 오로지 자신의 노력으로 모든 난관을 돌파해야 했다. 그 와중에 돈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 마침 종교개혁이 일어났다.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나님과 인간 중간에서의 교회의 권위를 부정하고 하나님과 직접 만날 수 있다고 주장하여 자유를 주었으나
신과 직접 마주한 인간은 좌절과 공포를 느낄 수밖에 없다. 이때 자신을 극도로 비하하며 신에게 절대 복종함으로써 개인은 새로운 안도를 얻었다.
칼빈의 예정설을 통해 운명은 바꿀 수 없지만 고결한 삶과 부단한 노력이 구원의 증거라고 설파했다. 이로 인해 그런 노력의 결과로 얻어진 세속적 성공도 구원의 증거가 된다는 생각이 널리 퍼졌다.
- 종교개혁은 중세의 붕괴와 자본주의의 등장으로 초래된 정신적 혼란에 대한 해답이었다. 나아가 자본주의가 더욱 발전함에 따라 전적으로 고립된 상태에서 자신보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외부적 힘과 맞서야 했다. 이런 경제적 개인주의는 종교개혁의 정신적 개인주의와 일맥상통한다. 교회의 중재 없이 신과 직접만날 수 있다는 중교개혁의 신앙은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에게 복종하는 성향으로도 표출되었다.
- 원초적 유대의 해체로부터 오는 불안을 억누르기 위해 근대인들은 재산·명성·권력 등을 추구했다. 즉 그런 것들에서 자아를 찾으려고 발버둥쳤다. 특히 미천한 사람들은 가족·민족·계급 등에 매달렸다. 어딘가에 소속됨으로써 다른 집단 사람보다 자신이 ‘우월하다’고 느꼈다. 하지만 이런 방식들은 고독과 불안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은폐하는 것에 불과하다.
= 이런 은폐 상태에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는 여전히 무거운 짐일 뿐이다. 그런 소극적 자유에서 ‘무엇을 위한’ 자유, 즉 적극적 자유로 나아가지 못하면 사람들은 자유로부터의 도피를 통해 자신의 불안과 고립을 극복하려고 한다. 실제로 우리 시대에는 주요한 사회적 도피가 두 가지 있다. 하나는 나치즘 체제에서 일어났듯이 지도자에게 굴복하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근대 민주주의 사회에 널리 퍼져 있듯이 서로 간에 강박적으로 동조하는 것이다.
- 사회적 도피 유형 ① 나치즘에서 전형적으로 드러난다. 거기서 사람들은 독립성을 포기하고 어떤 사람이나 사물과 자신의 자아를 융합시킨다. 피학적 충동은 자신을 비하하고 외부의 힘에 복종하려는 경향이다. 개인은 그런 감정을 공유하는 수많은 사람과 자신이 결합되어 있음을 깨달으며 그 속에서 안전과 위안을 얻으려고 한다.
한편 가학적 충동은 타인을 의존시켜 지배하며, 착취하고 이용하려고 하는 경향이다. 그래서 자학적 충동보다 우월한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가학적인 사람은 지배할 대상이 필요하다. 안전을 얻기 위해 전자는 복종을, 후자는 지배를 활용할 뿐 그 뿌리는 같다. 그것은 모두 고독과 무력감에서 벗어나려는 발버둥이다. 특히 권력욕은 겉으로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함에 뿌리박고 있다. 그것은 진정한 힘이 부족할 때 2차적인 힘을 얻으려는 필사적 노력이다.
그래서 두 성격은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가학·피학적 성격으로 공생한다. 이런 성격은 유럽의 중하층 계급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이 성격을 특징 짓는 것은 언제나 권위에 대한 태도다. 따라서 이를 ‘권위주의적 성격’이라고 부를 만하다. 나치즘은 이런 성격 구조를 가진 사람들에게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권위를 우러러보고 권위에 복종하는 경향이 있지만, 동시에 권위자가 되어 남들을 지배하고 싶어 한다.
- 사회적 도피적 유형 ② 자동인형적 순응이다. 그것은 개인이 자아의 개체성을 포기하고, 문화적 유형이 자신에게 제시한 성격을 그대로 수용하는 것이다. 그도 모든 타인과 똑같아지고 그들이 그에게 기대하는 모습도 똑같아진다. 나와 외부 세계의 차이는 사라지고 외로움과 무력감도 사라진다. 하지만 그 대가는 실로 크다. 바로 자아의 상실이다. 이런 자동인형적 순응은 오늘날 소비주의·민주주의 사회에 만연되어 있는 풍조다.
- 자유를 획득한 근대인은 고립감과 무력감에 시달렸다. 그들은 이 위기를 지배하거나 지배를 당하는 경향으로 표출되었다. 나치즘은 사라지고 민주주의가 보편화되었다고는 해도 그런 어두운 그림자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 이런 위기에 대한 근본적 해결책은 ‘무엇을 위한’ 자유, 즉 사랑과 일 속에서 자아의 독립성을 지키면서도 감정적·감각적·지적 능력을 오롯이 발휘하는 적극적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바깥 세계와 새로운 관계를 맺어 진정한 안전을 얻는 것이다. 이를 정치에 대입해 보면 절제·상호존중·토론·협력 등 민주적·시민적 덕성을 함양하여 민주주의를 꽃피우는 것이다.
정리하면, 중세 봉건제도로부터 벗어나기까지 많은 희생을 치루면서 16세기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으로 자유를 얻었지만 시민들은 자유에 따르는 고독과 책임감 때문에 불안을 해소하는 방식으로 사회라는 톱니바퀴에서 작은 부품이 되어 자유로운 인간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수동적인 자동인형”으로 전락했다.
개인이 느끼는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중세 사회의 전통적 유대로부터 해방된 것은 독립이라는 새로운 느낌을 개인에게 주었지만 동시에 고독과 고립으로 회의와 불안하게 하여 결국 새로운 복종과 강박적이고 비합리적인 행동으로 자유를 내던지고 파시즘의 전체주의에 열광한다.
〇느낀점
- 자유의 사전적 의미는 “남에게 구속을 받거나 무엇에 얽메이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일 또는 그러한 상태이다”고 설명합니다. 프롬은 자유에 따르는 고통을 피하기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유로부터 도피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고, 이것이 나치즘과 파시즘에 따르는 결과로 이어졌다는 지적이 너무도 명쾌하여 시원함을 느꼈습니다.
- 프롬은 신이 인간에게 남겨 놓은 위대한 유산이 바로 자유이므로 사이비 정치가에게 자유를 저당 잡히거나, 자유로부터 스스로 도피하는 것은 인간이기를 포기하고 인형이나 기계로 전락하는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 구약성경에서도 유대인들이 애굽의 노예생활에서 해방되어 출애굽하지만, 모세가 자리를 비운 사이 불안해서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었고, 가나안땅을 정복하고도 하나님의 보호로 만족하지 못하고 왕을 달라고 하고, 계명안에서 자유를 만족하지 못하고 우상을 따르다가 이방인의 종으로 끌려가고 말았습니다.
-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룩했지만 자유의 가치를 모르거나, 지나치게 환상적인 자유를 추구하면서 우리사회는 서서히 빛을 잃어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두려운 발자국 소리를 듣는 것이 나만의 착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첫댓글 에리히 프롬, 『자유로 부터의 도피』, 휴머니스트,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