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E 5세기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는 파르테논 신전에 낙서처럼 쓰여 있는 '너 자신을 알라'를 보고 커다란 깨침을 얻는다.
하여 그 깨침의 소리는 2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앞으로도 수많은 젊은이들의 마음을 훔칠 것이다.
그런데 알아야 한다. 테스형과 동 시대를 살아간 누군가 신전에 있는 '너 자신을 알라'는 단 줄 문장을 보고 느낀 바가 있어 세상에 전했다면..
그 말은 이미 말라 버렸을 것임을.. 그러나 소크라테스님이 입을 열자 지금도 빛을 잃지 않고 전해지고 있지 아니 한가..
단지 모를 뿐인 명진큰스님이 만든 단지불회(但知不會) 의미는..
숭산큰스님의 '오직 모를 뿐' 과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단 줄 문장 뜻과 일맥상통한다.
'다만 모를 뿐' 의 뜻을 새기며 큰 깨침을 얻었다는 명진스님은 숭산스님이 얻은 것 또는 소크라테스가 얻은 것과 같은 것 같은데..
그게 무얼까?.
앞 내용에 명진 스님 스스로 설명을 보면..
명진 스님의 '단지불회' 체험 요약
선방에서 화두를 들고 용맹정진하던 시절, '이것이 무엇인가', '마음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알기 위해 머리로 헤아리고 지식과 논리로 파고들수록 번뇌와 막막함은 더 커졌다.
발상의 전환 "알려고 하니까 번뇌가 생기는 것이다. 알 수 없다는 사실 자체를 아는 것, 분별을 내려놓은 그 자리가 바로 본래 성품(견성)이다."
이 구절을 마주하는 순간, 무언가를 알아내어 얻으려 했던 조급함과 분별심이 완전히 무너지며, 알 수 없는 본래 마음자리에 그대로 머무는 해탈감을 맛보았다.
라고 하셨다.
여기서 해탈이란 번뇌와 분별을 내려놓으니 마음이 해방되어 이제는 보이고 느껴지는 것을 그대로 말과 행동으로 해도 (나에게는) 걸림이 없는 단계가 된다.
그랬기에 자기 이익과 조계종 이익을 하나로 보며 조계종 최고 권력자인 양 행동한 자승승려를
명진스님은 목소리를 높여 면전에서 크게 비판하셨던 것이다.
그렇다면 스님이 말하는 '알 수 없는 본래 마음자리' 를 석가세존께서는 제자들에게 어떻게 설하셨을까?.
나와 세상은 12처인 6내처와 6외처의 만남에서 생긴다.
그리고 12처는 마음을 연해 생긴다.
고로 12처인 마음이 일어나면.. 일체 괴로움이 일어나고,
12처인 마음을 내려놓으면.. 나가 사라져 무아가 되고, 괴로움이 사라진다.
명진큰스님의 단지불회(但知不會)를 깨닫는 것은 곧
12처가 마음에서 생긴 것임을 깨닫는 것이다.
명진큰스님의 가심을 아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