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10)
말씀: 계 3:1-6. 2024년 3월 3일 일요일 오전 11시
3장은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는 주님의 명령으로 시작됩니다. 성경 사전을 찾아보면 ‘사데’는 소아시아 서쪽 해안에 있던 루디아(리디아)의 수도로서 서머나 동쪽 약 80키로 지점 트몰러스 산 북쪽 기슭 헐머스 평야 남단에 자리 잡고 있으며 B.C 1200년경에 세워진 난공불락의 요새였습니다. 사데는 상업 도시로 번영하였으며 직물과 귀금속 생산지로 이름난 곳으로 고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였습니다.
사데는 B.C. 6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 크로수스 왕은 서구인들에게 부를 상징하는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당시 부유한 상업도시로 직물, 귀금속 생산 및 사금이 유명했으며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든 곳으로 알려져 있고, ‘마이다스의 황금의 손’ 전설의 근원지이기도 합니다.
이곳에는 아데미(아르테미스-다산과 풍요의 신) 신전이 있었는데 그 크기가 무려 100M X 50M의 거대한 건물이었습니다. 사데란 지명 이름에는 “붉은 자들”이란 뜻과, “남은 자” “도피한 자” 혹은 “기쁨의 통치자”란 뜻도 있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기간을 A.D. 1000-1500년의 교회사로 보고 또 다른 학자는 1520-1750년까지의 시기에 해당된다고 말합니다.
A.D 1,000-1,500년으로 보는 이들은 이 기간에 가장 많은 성도들이 로마 캐톨릭에 의해 죽은 순교자들의 붉은 피를 의미한다고 말합니다. 당시 스페인에 종교 재판소가 등장하고 로마 교회는 군대를 사용해서 기독교인들을 살해했습니다. 위그노의 대학살, 바돌로매의 대학살 등은 거짓 교회, 음녀 교회가 저지른 살인 사건들로 이들이 본질상 살인자요 거짓말쟁이인 마귀의 자녀들임을 너무나 잘 보여 줍니다(요8:44). 역사적으로는 그 기간엔 십자군 전쟁이 있고 칭기즈 칸의 침략이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 간에 100년 전쟁도 있었습니다(1337-1450).
사데를 ‘남은 자, 도피자’란 의미로 받아들이면 1,520-1,750년까지의 교회사에 적용하는 것이 더 정확합니다. 두아디라 교회의 이세벨이란 여자가 통치하던 그 세대에서 남은 자들, 도피자들이란 의미가 되기 때문입니다.
1절입니다. [사데에 있는 교회의 천사에게 쓰라.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 별을 가진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 내가 네 행위를 알며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음을 아노라.](계3:1). 주님은 사데에 있는 교회를 향해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자”(1)라고 자신을 계시하셨는데 에베소 교회에게 쓴 것과 비슷합니다. 계2:1과 비교해 보십시오. [......오른손에 일곱별을 붙잡고 있는 자 곧 일곱 금 등잔대의 한가운데를 거니는 자가 이것들을 말하노라.](계2:1).
에베소 교회에는 “일곱별을 붙잡고 있는 자, 일곱 금 등잔대의 한 가운데를 거니는 자”라고 하셨는데 사데 교회에는 “하나님의 일곱 영과 일곱별을 가진 자”라고 하십니다. 주님이 “일곱 금 등잔대의”한 가운데를 거니시는 것이 아니라 가진 자라고 말씀합니다. 주님이 금 등잔대 한 가운데 거닐고 계신 에베소 교회와 일곱별을 가지고 계신 사데 교회는 큰 차이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곱 영”(1). 대개 “일곱 영”의 해석은 흔히 [{주}의 영 곧 지혜와 명철의 영이요, 계략과 강력의 영이요, 지식과 {주}의 두려움의 영께서 그 위에 머무시면서](사11:2). 주의 영 곧, 지혜의 영, 명철의 영, 계략의 영, 강력의 영, 지식의 영, 주의 두려움의 영, 이렇게 일곱 가지로 말하지만 이것은 주의 영의 속성을 말하는 것이지 일곱 개의 영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항상 성경의 해석을 우선해야합니다. 계시록 4:5절입니다. [그 왕좌로부터 번개들과 천둥들과 음성들이 나오고 왕좌 앞에는 일곱 등불이 타고 있었는데 그것들은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4:5). 왕좌 앞에서 타고 있는 일곱 등불이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고 말씀합니다.
신약에는 여러 가지 영을 말합니다. 진리의 영(요14:17), 생명의 영(롬8:2). 양자 삼으시는 영(롬8:15), 약속의 영(엡1:13), 은혜의 영(히10:29)은 우리가 받은 주님의 말씀에 관한 것입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 그것들은 영이요 생명이니라.](요6:63) 주님의 말씀들이 곧 영이요, 생명입니다.
주님이 우리 속에 주신 일곱 가지 영이라면 거룩의 영(롬1:4), 온유의 영(고전4:1, 갈6:1), 믿음의 영(고후4:13), 지혜와 계시의 영(엡1:17), 능력과 사랑과 건전한 생각의 영(딤후1:7), 영광의 영(벧전4:14), 진리의 영(요일4:6)입니다. 이것들은 개개의 영들이라기보다는 우리 안에 두신 성령의 열매와 관련된 특징이며 성령님의 속성입니다.
성령의 여러 가지 이름에 대해서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하나님의 성령(마3:16) 2,아버지의 영(마10:20) 3,주의 영(눅4:18) 4,그리스도의 영(롬8:9) 5,아들의 영(갈4:6), 6,예수 그리스도의 영(빌1:19) 7,성령(Holy Ghost)입니다. 그러므로 일곱 영이란 일곱 가지 성령의 속성(특징)을 말하는 것입니다.
“일곱별을 가진 자가...”(1). 일곱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입니다. [네가 본, 내 오른손에 있는 일곱 별과 일곱 금 등잔대의 신비에 대해 기록하라. 일곱 별은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요 네가 본 일곱 등잔대는 일곱 교회니라.](계1:20)
또한 일곱 영은 하나님의 왕좌 앞에 있는 일곱 등불입니다(계4:5).
나의 등잔불(시18:28). 사람의 영은 주의 등잔불(잠20:27), 사악한 자의 등잔불(잠24:20). 주님은 [너희 허리에 띠를 띠고 너희 등불을 타오르게 하며](눅12:35)라고 말씀하십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고, 영은 우리 자신의 등불입니다. 자기 등불(마25:1,3,7). 다윗은 주님이 자신의 등불이라고 했습니다. “주는 나의 등불이시오니...”(삼하22:29). 등불은 어둠을 밝히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불이요”(시119:105). “그 명령은 등불이요...”(잠6:23).
우리에게 있는 등불은 주님, 또는 주의 말씀, 주의 명령 그리고 우리 안에 있는 영입니다. 성경에 내장된 사전을 보십시오. [또 내가 보니, 보라, 왕좌와 네 짐승의 한가운데와 장로들의 한가운데에 전에 죽임을 당한 것 같은 [어린양]께서 일곱 뿔과 일곱 눈을 가진 채 서 계시는데 이 눈들은 온 땅 안으로 보내어진 [하나님]의 일곱 [영]이라.](계5:6).
본문에 따르면 “일곱 뿔과 일곱 눈”이 하나님의 “일곱 영”입니다. 주의 왕좌 앞에서 타고 있던 등불로 묘사된 일곱 영은 온 땅으로 보내어졌습니다. 이들은 또한 온 땅에 보내어진 천사들입니다. [너희가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업신여기지 않도록 주의하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그들의 천사들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얼굴을 항상 뵈옵느니라.] (마18:10) 지금 이 시대에 온 땅에 보내진 일곱 영(천사)은 무엇을 합니까? 성도들을 섬기는 영입니다. [그들(천사)은 다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라고 보내어진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 (히1:14)
또한 주님은 천사들을 통하여 사역하시는 것을 보아 본문의 하나님의 일곱 영은 하나님을 보필하며 사역하는 천사들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또 천사들에 관하여는 이르시기를,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을 영들로 삼으시고 자신의 사역자들을 불꽃으로 삼으시느니라, 하시되] (히1:7). 자신의 천사들을 영들, 불꽃으로 삼으신다는 말씀에서 일곱 영들, 일곱 등불, 일곱 뿔과 일곱 눈은 천사들을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큰 환란 때에 이들은 온 땅에 재앙을 쏟아 붇고 심판을 집행합니다(계16:1).
[......내가 네 행위를 알며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음을 아노라.](1). 주님은 각 사람의 행위대로 갚아 주시고 각 사람의 행위대로 보상해 주시는 심판자로서 당연히 모두의 ‘행위’를 아십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주께서 보고 계시고, 알고 계심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행위뿐만 아니라 마음의 생각까지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내가 네 행위를 알며......”라고 하십니다.
사데 교회는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실제로는 죽어 있습니다. 이스라엘이 주의 명령을 버리고 사람들의 전통과 규례, 명령을 교리로 가르친 것처럼 이 교회는 죽은 정통을 가졌을 뿐 각종 이교도의 풍습과 철학, 천사 숭배, 교회법과 교회 전통 등으로 가득한 교회입니다.
“네가......죽어 있음을 아노라.”(1). 영이요,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교회란 몸을 통해 드러나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눈은 있는데 시신경이 죽으면 보지 못합니다. 청신경이 죽으면 귀는 있어도 듣지 못합니다. 근육이 끊어지면 손과 발이 있어도 움직일 수 없습니다. 아무런 활동 능력(힘)이 없는 것을 일컬어 죽었다고 합니다. 감각이 무뎌졌다, 감각이 죽었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교회가 죽었다는 것은 영적인 파워가 전혀 없고 하나님의 말씀에 어떤 반응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데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교회란 이름은 가지고 있지만 실제로는 생명이 없습니다.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음을 아노라.](계3:1). 죽은 교회란 교회의 고유한 생명, 활동이 없다는 것입니다. 육체가 아무 활동이 없을 때 죽었다고 판단합니다. 심장 박동도 없고, 뇌파도 없고, 호흡도 없으면 그 사람의 몸은 죽은 것입니다. 몸이 죽으면 흙으로 돌아가고 영은 본래 그것을 주신 하나님께로 돌아갑니다(전3:20-21, 12:7).
그럼 교회가 죽었다면 그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영(호흡, 숨)이 없는 몸이 죽은 것처럼 성령(영-말씀)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사람들의 전통, 관습, 철학, 제도, 의식 등은 있는데 주의 말씀, 주의 영이 없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그리스도의 빛도 없고, 향기도 없고, 그리스도의 살아 있는 서신도 없고, 아무런 행위의 열매가 없다면 그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성경이 말하는 죽은 것들에 대해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죽은 몸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롬6:23). 죄가 완료된즉 사망을 낳습니다(약1:15). 모든 사람이 죽는 것은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입니다. 사람이 죽는 것은 노화나 질병이나 사고 때문이 아니라 ‘죄’ 때문이며 그 죄들을 회개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둘째, 죽은 자들입니다. 죽은 여자, 죽은 남자, 죽은 아들, 죽은 동생 등 분명히 몸은 이 땅에 살아 있는데 죽은 자들로 불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예르 봅시다. [쾌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살아 있어도 죽었느니라.](딤전5:6). 이 여자의 몸은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으니까 죄를 짓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죽었느니라.”고 말합니다.
쾌락에 빠져 사는 여자는 (몸)은 살아 있어도 (영)은 죽었느니라. 하는 주의 말씀은 죽음과 삶에 대한 가치관, 생각을 정립해 줍니다. [또 그분의 제자들 중 다른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 하였으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그리고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 하시니라.](마8:21-22).
주님께서 친히 “나를 따르라.”고 부르셨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아버지를 장사 지내고 나서 주를 따르겠다고 말한 어떤 사람을 향해 주님은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이 세상의 불신자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먹고 마시고 장가가고 시집가며 놀고 일하는 사람들을 “죽은 자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생명, 영원한 생명을 얻기 전까지 모든 사람은 살아 있으나 죽은 자들입니다. 영이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은 이미 죽은 자들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자신의 구원자로 받아들임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기 전에는 죽은 자들입니다. 미래 시제를 현재로 사용하거나 과거 시제로 사용하는 예는 일상에서도 허다합니다.
“너희들, 다 죽었어!”(미래를 과거 시제로),
“다 죽겠네, 다 죽네, 다 죽었네.”-같은 사건을 3가지 시제로 사용합니다.
누가복음의 돌아온 탕자 비유를 읽어 보십시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그를 잃어버렸다가 찾았노라.](눅15:24),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잃어버렸다가 찾았으니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니라.](눅15:32).
아버지는 자신의 둘째 아들이 돌아왔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라고 했습니다. 아버지를 떠났던 아들, 방탕하게 죄 가운데 살았던 아들은 죽었던 아들, 잃어버렸던 아들이었습니다. 이것은 관계성의 문제입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교제가 불가능합니다. 아버지와 아들은 연락이 단절되고 관계가 완전히 끊어졌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들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아들의 뜻이 아버지에게 전달되지 않습니다. 단절을 죽음이라고 말합니다.
셋째, 죽은 교회입니다. [내가 네 행위를 알며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음을 아노라.](계3:1). 교회가 죽어 있다는 것은 그 속에 더 이상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영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런 행위도 열매도 맺을 수 없는 그런 교회를 죽은 교회라고 말합니다. 여러분들이 구원 받았음이 기쁘고 하늘의 소망이 확실하다면 세상의 구원 없는 자들에게 구원을 자랑해야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는 성도나 교회는 그의 영이 쇠약하고 매 말라 있고 힘없는 죽은 상태입니다.
넷째, 죽은 믿음입니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그렇게 행위 없는 믿음도 죽었느니라.](약2:26). 믿음은 살아 있고 활동합니다. 믿음은 열매를 맺습니다. 숨을 쉬지 않는 몸이 죽은 것처럼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구원 받았다는 믿음이 있다면 복음을 전하여 자신의 영이 살아있음을 행동으로 나타내십시오.
다섯째,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었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 것 같이 그렇게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게 되리라.](고전15:22). 성경은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는다(죽었다)고 말합니다. [......이는 한 사람의 범죄를 통해 많은 사람이 죽었다면 .....](롬5:15).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을 사망의 종이 되게 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한 사람을 통해 군림하였다면.....](롬5:17).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이 정죄에 이르게 했습니다. [그러므로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심판이 모든 사람에게 와서 정죄를 받게 한 것같이](롬5:18). 아담의 죄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게 했습니다. [이는 한 사람의 불순종에 의해 많은 사람이 죄인이 된 것같이......](롬5:19).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도다.](엡2:1).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죽었던 자들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습니다. 죽었던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선물로 얻는 순간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 [참으로 우리가 죄들 가운데서 죽었을 때에.....](엡2:5). 모든 사람은 죄들 가운데서 죽었습니다. 우리 역시 그러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이 죽은 줄도 모른 채 살고 있습니다.
[또 너희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골2:13). 성경은 우리가 죽었던 자들이었다고 말해 줍니다. 지금 우리는 살아 있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 증언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고 이 생명이 그분의 [아들] 안에 있다는 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쓴 것은 너희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너희가 알게 하고 또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라.](요일5:11-13).
주목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예수)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습니다. 아들의 유무가 생명의 유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우리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또 [하나님]의 [아들]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고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 이분(예수 그리스도)는 참 하나님이시오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아들이 없는 자는 모두 죽은 자들입니다.
여섯째, 그리스도와 함께 죽는 죽은 자들입니다. 이 진리는 단단한 음식과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전에 자신이 죽었던 자들이었고 지금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자들이란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이 진리가 믿어집니까? 전에는 죄 가운데서 죽었고 지금은 죄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전에는 율법 때문에 죽었고 지금은 율법에 대해 죽었습니다(롬7:6, 갈2:19). 이전에는 세상 속에 살았지만 이제는 세상에 대해 죽었고, 세상의 유치한 원리들에 대해 죽었습니다.
이전에는 아담 안에서 죽었고 이제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서 죽었습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세상의 초보 원리들로부터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거든 어찌하여 세상에 살고 있는 것 같이 규례들에 복종하느냐?](골2:20). 이것이 (성도들의 죽음)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고 말합니다. 죽은 것은 우리의 옛 사람입니다. 죽은 것은 우리의 자아(육신)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2:20).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우리의 옛 사람, 육신(죄의 몸)입니다. 사는 것은 우리의 속사람, 영입니다. 우리가 죽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혔다, 묻혔다는 사실은 놀라운 진리입니다. [우리는 이 사실을 아노라. 즉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이 멸절 되어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6:6).
옛사람이란 죄의 몸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습니다(롬6:8). 로마서 8:10절을 보십시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롬8:10). 죽은 것은 죄의 몸입니다. 이것을 옛 사람, 또는 육신이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은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5:24). 크리스천들은 예외 없이 애착들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이 십자가에 못 박혔고 죽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었습니다. [너희는 죽었고 너희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느니라.] (골3:3)
2절입니다. [너는 깨어 있으면서 아직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을 강하게 하라.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가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였나니](계3:2). 주님은 “깨어 있으면서 아직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을 강하게 하라.”(2) 하십니다. 이들은 지금 잠든 상태, 죽은 상태에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은 자를 마치 잠든 자를 깨우듯 다시 깨우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죽은 나사로를 깨우셨습니다. 주님은 죽은 여자 아이의 손을 잡고 “달리다굼”(소녀야, 내가 네게 이르노니, 일어나라)고 하시자 죽은 아이가 일어났습니다(막5:41).
주님은 죽은 사데 교회에게 “깨어나라”(Be Watchful)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서 이르시되, 너 잠자는 자야,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빛을 주시리라, 하시느니라.](엡5:14). 성도들은 깨어 있어야 합니다. “깨어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라.”는 말씀은 사데 교회에만 주신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날 너무나 많은 크리스천들이 살아 있다는 이름만 가지고 있으나 죽어 있습니다. 마치 곰이나 뱀들이 겨울잠을 자듯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못합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교회는 죽은 공동묘지처럼 조용합니다. 주님의 이름이 선포되고 성령의 열매들이 맺어지고 마귀들을 대적하여 싸우는 전쟁터의 모습이 아니라 묘지의 모습처럼 외관만 단장되어 있습니다. 잠든 자가 일어나서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깨어 있으면서 아직 남아 있으나 죽으려 하는 것들을 강하게 하라.”(2). 연약한 성도들을 돌보고 섬겨야 합니다. 지친 성도들을 일으켜야 합니다. 교회는 휴거의 나팔소리가 울려 퍼지기 직전까지 한 혼이라도 더 많이 구원으로 인도해야합니다. 환난 성도는 큰 환란이 끝날 때까지 믿음과 예수님의 증언을 지킬 수 있도록 강하게 해야 합니다.
사람을 강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누구나 은혜 안에서 강건해집니다(딤후2:1).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강하게 하시는 분입니다(빌4:13). 모든 은혜의 하나님은 우리를 부르사 완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고 정착시키십니다(벧전5:10).
다시 2절입니다. [......내가 [하나님] 앞에서 네 행위가 완전함을 발견하지 못하였나니](2).
사데 교회는 죽었다고 하는데도 행위가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의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완전함을 찾아내지 못했다고 말씀합니다. 그들의 행위는 죽은 행위였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행위가 아닌 육신의 행위는 죽은 행위입니다. 성령의 행위가 아닌 율법의 행위는 죽은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에 관한 기초 원리들을 떠나서 완전함으로 나아가 죽은 행위들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히6:1). 죽은 행위들이란 말씀을 보십시오. 사람들의 종교 행위는 죽은 행위입니다.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성자들이나 천사들을 부르는 기도, 미사를 비롯한 각종 종교 의식들은 모두 죽은 행위들입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이 지키고 있는 음식 규례, 절기 준수, 안식일 준수 따위는 모두 죽은 행위들입니다. 육신의 행위, 율법의 행위는 죽은 행위들입니다.
[영원하신 성령을 통해 자신을 점 없이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는 너희 양심을 죽은 행위로부터 얼마나 더 많이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겠느냐?](히9:14).
믿음이 없는 행위, 사랑이 없는 수고, 성령이 없는 육신의 섬김은 모두 죽은 행위입니다. 우리는 저 하늘 그리스도의 심판석에서 “금, 은, 보석”이 아닌 “나무(wood)나 건초(hay)나 짚(stubble)”으로 세운 것들은 모두 불태워지는 것을 볼 것입니다(고전3:12). 마음이 없는 외적 행위는 죽은 행위입니다. (사29:13, 마23:17-18)
3절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며 굳게 붙잡고 회개하라. 그러므로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가리니 내가 어느 시각에 네게 갈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계3:3). Remember therefore how thou hast received and heard, and hold fast, and repent. If therefore thou shalt not watch, I will come on thee as a thief, and thou shalt not know what hour I will come upon thee.
주님의 세 가지 명령이 주어져 있습니다.
1, 네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라(how thou hast received and heard,). 우리는 복음을 받은 것이지 만들어 낸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받은 것이지 지어낸 것이 아닙니다. 성령도 받은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주께 받은 것입니다. [누가 너를 다른 사람과 구별되게 하느냐? 네가 가진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더욱이 네가 그것을 받았거든 어찌하여 그것을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어떻게 받았는지 기억해 보십시오. 모두 은혜로 값없이 받은 것입니다. 믿음으로 받은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며” (3) 이 말씀은 우리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을 말해 줍니다. 우리는 복음을 듣고 믿음으로 구원을 받고 성령을 받았습니다(갈3:2). 우리는 주의 말씀을 받았습니다. 어떻게 받았고 들었는지 기억하시오.
2, 굳게 붙들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 안에서 네가 내게 들은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들고](딤후1:13). 성령님의 감동하심을 따라 대언자들을 통하여 보내어진 말씀들을 사람들의 말로 받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은 자들은 그 말씀을 굳게 붙잡아야 합니다. 성도들이 타락하고 배교하는 가장 큰 원인은 주님의 말씀을 붙잡지 않는 것입니다. 건전한 말씀들의 틀을 굳게 붙드십시오. 내가 말씀을 붙잡으면 말씀이 나를 더 굳게 잡아 주고 세워 줍니다.
주의 말씀은 살아 있고 권능이 있습니다(히4:12). 주의 말씀을 흘려듣지 않도록 하십시오(히2:1). 복음을 헛되이 믿어서는 안 됩니다(고전15:2). 쉽게 잊어버리는 자가 되지 않도록 하십시오(약1:24-25).
마음속에 받은 말씀을 마귀에게 빼앗기지 않도록 하십시오(막4:15). 마귀는 마음의 밭에 뿌려진 말씀의 씨앗을 빼앗기 위해 찾아옵니다. [자기가 가르침을 받은 대로 신실한 말씀을 굳게 붙들어야 하리니 이것은 그가 반박하는 자들을 건전한 교리로 권면하고 논박할 수 있게 하려 함이라.](딛1:9). 굳게 붙들어야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신실한 말씀”입니다. 여러분의 마음, 혼이 말씀을 굳게 붙잡고 있다면 여러분은 결코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머리를 붙들지 아니하지만 온 몸은 이 머리로 말미암아 마디와 힘줄에 의해 영양을 공급받고 서로 결합되어 [하나님]께서 자라게 하시는 대로 자라느니라.](골2:19).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세상의 철학, 교육, 학문, 사상 따위를 붙들고 종교와 전통을 붙들고 이성과 과학을 숭배하는 이 시대에 우리가 붙들어야 할 것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모세의 율법은 그리스도의 그림자이지 실체가 아닙니다.
천사는 주님의 사역자들이요 종들이지 결코 붙들어야 할 머리가 아닙니다. 성모 마리아는 많은 여자들 중에서 복을 받은 한 여자이지 결코 여자들 위에 있는 머리가 아닙니다(눅1:28, 42). 천사들이나 마리아나 죽은 성인들이나 그 누구도 붙들어야 할 머리가 아닙니다. 모세나 엘리야나 어떤 대언자나 사도들도 우리와 같은 성정을 가진 자들이지(약5:17) 붙들 머리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머리이시고 우리는 그분의 머리를 붙들어야 합니다.
[그런즉 위대하신 대제사장 곧 하늘들로 들어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니 우리가 우리의 신앙 고백을 굳게 붙들자.](히4:14). 우리가 붙들어야 할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고백하는 분,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고백)하는 분(롬10:9,10)을 굳게 붙들어야 합니다.
3, 회개하라. 주님은 사데 교회에게 “회개하라”고 하십니다. 신약 성경은 “회개하라”는 선포로 시작됩니다(마3:2). 주님의 첫째 선포 사역은 “회개하라.”(마4:17)입니다. 이 말씀은 온 세상의 모든 사람에게 주신 명령입니다. [[하나님]께서 이같이 무지하던 때를 눈감아 주셨으나 이제는 모든 곳에서 모든 사람들에게 회개하라고 명령하시나니](행17:30).
주님은 교회에도 회개를 명하십니다(계2:16, 3:3, 3:19).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합니다(눅13:3,5). 회개하지 않으면 꾸짖으십니다(마11:20). 회개하지 않으면 슬퍼하십니다(고후12:21). 계시록에 나오는 일곱 교회는 회개하지 않을 때 그에 상응하는 보응이 주어집니다(계2:5,16,22). 사데 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사람은 죄를 지어서 지옥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죄를 회개하지 않고 복음을 믿지 않기 때문에 멸망합니다.
다시 3절 하 반절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네가 깨어 있지 아니하면 내가 도둑같이 네게 가리니 내가 어느 시각에 네게 갈지 네가 알지 못하리라.](3). 이 구절은 현재 이 땅에 있는 교회에 적용할 수 없음을 보여 주는 좋은 예입니다. 우리는 지금 계시록의 일곱 교회를 2,000년 교회사와 현재 우리의 삶을 조명해 보지만 계시록의 주제는 신약 교회가 아니라 큰 환란 때의 유대인과 이방인들 즉 땅에 있는 자들입니다.
우리(교회)는 큰 환란 전에 모두 저 하늘로 들림을 받고 주님은 이 땅에 도둑같이 오십니다. 지금 이 구절은 신약 성도들에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그렇게 오는 줄을 너희 자신이 완전히 아느니라. 그들이, 평안하다 안전하다, 하고 말할 때에 아이 밴 여자에게 해산의 고통이 닥치는 것 같이 갑작스러운 파멸이 그들에게 닥치리니 그들이 피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형제들아, 너희는 어둠 속에 있지 아니하므로 그 날이 도둑같이 너희를 덮치지 못하리라.](살전5:2-4).
본문의 대명사 “그들”(3)과 “너희는”(4) 구분되어야합니다. 본문에 따르면 주의 날이 밤의 도둑같이 그들에게 이르지만(살전5:2), 그 날이 도둑같이 우리(크리스천들)를 덮치지는 못합니다(살전5:4). “(2)절의 주의 날, 곧(4)의 그 날”입니다. 계시록에서 도둑같이 오는 것은 큰 환란의 ‘날’이 아니라 ‘주님’ 자신의 지상 재림이며 심판의 날입니다. “내가 도둑같이 가리니...”라고 하십니다.
[보라, 내가 도둑같이 가리니 깨어 있어 자기 옷을 지킴으로 벌거벗고 다니지 아니하며 그들에게 자기 수치를 보이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계16:15). 주님은 “보라, 내가 도둑같이 가리니...” 하시는데 이는 큰 환란 중에 있을 환란 성도들의 휴거를 말합니다. 유대인들 144,000명의 하나님의 종들은 땅에서 사역을 마치고(계7:4) 어느 시점에 저 하늘로 들림을 받습니다. 그들은 저 하늘에서 주님과 함께 시온에 있습니다(계14:1). 그 때에 이 땅에 있던 수많은 환란 성도들이 그들과 함께 저 하늘로 들림을 받을 것입니다.
4절입니다.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 그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계3:4). 주님께서 죽었다고 말씀하신 사데 교회에도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남은 자들’이 있는데 그들만 구원을 받습니다. 일찍이 대언자 이사야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사야도 이스라엘에 관하여 외쳐 이르되, 비록 이스라엘 자손의 수가 바다의 모래 같을지라도 남은 자만 구원을 받으리라.](롬9:27).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않는 7천명의 이스라엘과 같은 자들이 구약에서 남은 자입니다. 지금 현 시대에도 유대인들 중에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그런즉 이와 같이 이 현 시대에도 은혜의 선택에 따라 남은 자가 있느니라.](롬11:5). 기록된 말씀을 믿지 못하는 자들은 큰 환난 초기에 무슨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가 십사만 사천이 나올 수 있느냐? 반문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큰 환난 가운데에서 사역할 자들을 봉인하십니다.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 안에 인을 찍어 그들을 봉인할 때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들을 해치지 말라, 하더라. 또 내가 봉인된 자들의 수에 대하여 들었는데 이스라엘 자손의 모든 지파에서 봉인된 자들이 십사만 사천이더라.] (계7:3~4)
야곱의 고난의 때인 큰 환난에서도 남은 자들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슬프도다! 그 날이 커서 어떤 날도 그것과 같지 아니하니 그 날은 곧 야곱의 고난의 때니라. 그러나 그가 그 고난에서 구원을 받으리라.](렘30:7) 주님은 “두아디라에 있는 남은 자들”(계2:24)이 있다고 하셨고 “사데에도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 몇 이름이 네게 있어”(계3:4) 라고 하십니다.
신약 시대에는 이스라엘의 남은 자와 이방인들 중에 믿는 자들이 그분의 몸 된 교회를 이룹니다. [이것은 사람들 중에서 남은 자들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이방인들이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주]가 말하노라, 함과 같으니](행15:17).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아니한”(4).
성경에서 옷이라고 하면 세 가지입니다.
첫째, 몸입니다. 지금 우리가 입고 있는 몸을 옷이라고 합니다. [이 장막 안에서 우리가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노니 우리가 옷 입고 있으면 벌거벗은 채 드러나지 아니하리라.](고후5:2,3). 몸은 영과 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요, 옷입니다. 죽음은 옷을 벗는 것이고 부활은 새 옷을 입는 것입니다.
둘째, 사람(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으라고 말씀합니다(롬13:14). 빛의 갑옷,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으라고 합니다. 새 사람을 입으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셋째, 옷은 몸의 행실입니다. 흰옷, 깨끗한 옷은 의로운 행실이고 더러운 옷은 불의, 부정, 더러운 행실입니다.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자신의 몸을 더럽히지 않고(by 음행/잠자리, 동성애, 혀/약3:6-온 몸을 더럽히고 본성의 행로에 불을 붙인다) 쓴 뿌리(히12:15) 죄로 자기 행실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주님의 말씀을 보십시오. [그러나 입에서 나오는 그것들은 마음에서 나오며 그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느니라. 마음에서 악한 생각, 살인, 간음, 음행, 도둑질, 거짓 증언, 신성모독이 나오는데 이것들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들이니라. 그러나 씻지 않은 손으로 먹는 것은 사람을 더럽게 하지 아니하느니라, 하시니라.](마15:18-20).
[....... 그들이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걸으리니 이는 그들이 합당한 자들이기 때문이라.](4). 큰 환란 때 남은 자들 즉 이긴 자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습니다. 흰옷은 성도들의 의를 말합니다(계3:18, 16:15). 중세 교회사에서 소수의 남은 자들이라고 하면 재침례교도, 왈덴시안, 폴리시안, 롤라즈, 알비겐시안 등으로 불리던 박해 받던 성도들입니다. 큰 환란 때에도 이런 남은 자들이 있습니다.
5절입니다. [이기는 자 바로 그자는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 그의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계3:5).
이 구절은 많은 사람들이 신약의 크리스천들에게 적용해서 구원받은 자들도 자칫 잘못하면 이름이 지워진다, 구원 받았으나 이기지 못하면 환난을 통과 한다는 근거로 자주 사용됩니다. 그러나 구원받은 크리스천들은 절대 그 이름이 생명책에서 지워지지 않습니다. 우리는 모두 장차 이기는 자가 아니라 이미 믿음으로 이긴 자이기 때문입니다(요일4:4, 5:4).
구원의 문제는 견고합니다. 주님을 믿는 자는 이미 생명으로 옮겨졌다고 과거시제를 쓰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정죄에 이르지 아니할 것이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요5:24) 크리스천은 모두 믿음으로 이기는 자, 승리자입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는 과거 시제는 이미 결정 난 것이므로 변경될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본문 5절의 “이기는 자”는 과거가 아니라 미래의 일입니다. 큰 환란 때 이 땅에 있는 성도들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짐승과 그의 형상과 그의 표와 그의 이름의 수를 이기고 승리한 자들”(계15:2)을 말합니다. 큰 환란 기간 동안 그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고 어린양의 피를 믿고 죽기까지 짐승의 표를 거부했습니다. [그들이 [어린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의 말로 그를 이겼으며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사랑하지 아니하였도다.](계12:11).
오늘날 은혜시대에 구원 받은 자들이 세상과 죄와 자기를 이기지 못하고 휴거에 탈락되어 큰 환난에 들어가 이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는 이론은 마귀의 이론이요, 거짓이며 저주받을 다른 복음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겼기 때문에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이기는 자들이란 큰 환란에서 남은 자들, 주 예수의 이름을 굳게 붙들고 부인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증언과 계명을 지키며, 짐승의 표를 거부하고 죽기까지 신실한 자들을 말합니다. 주님은 그의 이름을 하나님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십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워 버리지 아니하고”(5).
이 부분은 정확히 구분해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 주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옵소서. 그러지 아니하시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서 나를 지워 버리소서, 하니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 버리리라.] (출32:32-33). 모세는 “주님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 이미 자신의 이름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때 주님께서는 누구든지 내게 죄를 지으면 ‘내가 그를 내 책에서 지워버리겠다’고 하셨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구약의 주의 책과 신약의 어린양의 생명책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면 진리의 말씀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은 이미 주의 책에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누군가 주를 믿고 율법을 지키고 의를 행하면 그 때 그 사람의 이름이 주의 책에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기록하신 주의 책에 이미 (이스라엘 민족)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데” 그들이 죄를 범할 때 그의 이름이 지워지는 것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은 민족적으로, 단체적으로 구원 받았습니다. 이집트를 떠나기 전에 주의 말씀을 믿고 문설주에 어린양의 피를 바른 모든 사람들은 죽음의 저주가 그 집들을 넘어갔으므로 다 구원 받은 자들이고,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은 자들입니다(고전10:2).
이들은 다 그 이름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백성들을 자신의 책(주의 책)에 기록하셨는데 이집트에서 구출된 사람들, 모세와 더불어 바다와 구름들 사이에서 침례를 받은 사람들은 다 하나님의 책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한 날 구원 받았고, 한 날 침례를 받았고, 한 날 주의 반석에서 나온 영적 음료를 마신 주의 백성입니다. 그 이후로도 이스라엘 백성을 태어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태어나면서 주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됩니다.
누구든지 구원 받은 고백으로 침례를 받지 침례를 받아야 구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것을 모르는 것을 원하지 아니하십니다. [형제들아, 또한 나는 너희가 이것을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라. 즉 우리 조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었고 모두가 바다를 지나갔으며 모두가 구름과 바닷속에서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았고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었으며 모두가 같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는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이셨느니라.](고전10:1~4) 주님께서 친히 세운 왕국인 이스라엘은 세상 여느 나라와 마찬가지로 세 가지의 기본 요건을 갖추고 있습니다. 그것은 국토와 국민과 헌법입니다.
1. 국가의 영토- 약속의 땅 가나안 땅.2. 국민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3. 헌법- 모세의 율법. 이 셋은 모두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국민들은 태어나는 순간 그 나라 백성으로 호적이 등재됩니다. 죄를 범할 때 전과자란 줄이 그어지고, 죽을 때(사망신고와 더불어) 그 이름에 붉은색 또는 검은 색 X 자가 그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유월절의 한 날에 태어난 민족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군대로 불렸고, 하나님의 아들들이요, 모든 백성들의 이름은 호적부 즉 주의 책에 기록되었습니다. 이들은 죄를 범할 때 그 이름이 지워집니다. 주의 책에서 이름이 지워지는 자들의 간단한 예를 말씀을 통해보면 이렇습니다.
01, 할례를 받지 않는 혼(창17:14).02, 성소에 쓸 향 기름을 혼합하거나 타국인에게 붓는 자(출30:33),
자기가 냄새를 맡으며 즐기려고 그것(향)을 만드는 자(출30:38).03, 안식일을 더럽히는 자(출31:14).04, 부정함을 지닌 혼이 주께 속한 화평 헌물을 먹는 자(레7:20,21).05, 불로 예비하여 주께 드리는 헌물 짐승의 기름을 먹는 자(레7:25)06, 피를 먹는 자(레7:27).07, 수간하는 자, 동성과 눕는 자(레18:29).08, 근친상간 하는 자(레20:17).
09, 마술하는 자(fp20:27)10, 유월절을 지키지 않는 자(레23:29). 기타 등등....
주님은 죄를 범한 이스라엘 민족 모두의 이름을 단번에 지워 버리실 수도 있었습니다. [나를 홀로 내버려 두라. 내가 그들을 멸하여 그들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고 너로부터 그들보다 강력하고 큰 민족을 만들리라, 하시기에](신9:14). 이 구절을 통해 멸망당할 뻔 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 모두가 그들의 이름들이 주의 책에 기록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버리고”......이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범죄하는 혼들의 이름을 지워 버리신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주께서는 그를 용서하지 아니하실 것이며 오히려 그때에 주의 분노와 그분의 질투가 그 사람을 대적하여 연기를 뿜겠고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가 그에게 놓이리라. 주께서 그의 이름을 하늘 아래에서 지워 버리시고](신29:20). [그의 후손이 끊어지게 하시고 다음 세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시109:13). 이름이 미리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 지워버릴 필요도 없습니다.
주님은 사악한 자들의 이름을 없애 버리셨습니다! [주께서 이교도들을 책망하시고 사악한 자들을 멸하시며 그들의 이름을 영원무궁토록 없애셨나이다.](시9:5). 지옥에 간 부자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 것은 그의 이름이 없기 때문입니다(눅16). 이스라엘백성들은 그 이름이 지워질 수 있습니다.
그럼으로 성경을 볼 때 신약과 구약을 구분할 줄 알아야합니다. “주의 책”과 “어린양의 생명책”을 구분해야합니다. 그것을 올바로 나누지 못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알아들을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사람들의 이름은 출애굽당시 주의 책에 기록되었다가 누구든지 죄를 범할 때 지워졌다면 신약에서는 누구든지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날 때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요1:12-13).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들의 이름을 생명책에 먼저 올릴 수는 없습니다. 일반 교회의 성도들이 흔히 말하는 모태신앙이란 근거 없는 말입니다. 누구든지 주 예수를 믿어야 구원 받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누구든지 태어나면 그 아이의 이름이 호적에 기록됩니다. 마찬가지로 복음을 듣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께 태어난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그의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영들이 너희에게 굴복하는 이 일로 기뻐하지 말고 오히려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었으므로 기뻐하라, 하시니라.](눅10:20).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 받을 때 그 이름이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됩니다. [또 참된 멍에 동료인 네게도 내가 간절히 권하노니 복음 안에서 나와 함께 수고하고 또한 클레멘트와 함께 또 나의 다른 동료 일꾼들과 함께 수고한 저 여자들을 도우라. 그들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느니라.](빌4:3). 모든 사람의 이름이 생명책에 있다면 바울은 이런 사실을 쓸 필요가 없습니다.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이름은 어떤 경우에도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습니다. 주의 책과 어린양의 생명책을 같은 것으로 혼동해서 구원 받은 성도들의 이름이 지워질 수 있다고 말하고 가르치는 것은 오류입니다. 이는 구약의 이스라엘과 신약의 교회를 분간하지 못하는 소치입니다.
크리스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뼈에 속한 지체들로서 그분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습니다. [이는 우리가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들이기 때문이라.](엡5:30). 구약과 신약, 신약과 큰 환란 때는 하나님의 경륜에서 확연한 차이가 있습니다(딤후2:12-13).
큰 환란 때 주님을 부인한 자들은 이기는 자가 아닙니다. 이기는 자는 주님께서 다양한 복을 주십니다. 이기는 자들은 흰옷을 입고 주님과 함께 걷고 생명책에서 그 이름이 지워지지 않고 주님께서 친히 그 이름을 아버지와 그분의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십니다(계3:4-5).
6절입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계3:6). 우리는 귀 있는 자들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학자의 귀를 주시고 어떻게 듣는가? 무엇을 듣는가? 주의해서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들을 듣고 믿고 지키고 굳게 붙들어야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