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역과
고속열차 운행
고만고만한 시골역이 죽 이어지는 경부선 중간지점 철길엔 기적도 숨이 차서 목메어 울고 간다는 추풍령도 들어있다. 갓 입사하여 대전에 있는 직장까지 고향 김천에서 열차통근을 했다. 아침저녁으로 아들에게 따순 밥을 해먹이고 싶었던 어머니의 모성애가 만든 일이었다. 그런데도 난 가끔씩 6천원이 채 안 되는 봉급으로 대전 변두리 하숙비 1500원가량과 하숙비의 절반이 넘는 통근열차 운임을 따져보곤 했다. 당시 매일 아침저녁으로 10군데가 넘는 시골역을 오가며 차창을 통해 바라보았던 대자연이 6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잊히지 않은 게 신기할 따름이다.
개발되기 전의 자연풍광. 산은 헐벗었고 들판은 메말랐다. 그런데도 추억은 늘 아름답게 채색된다는 말처럼 나에겐 잊지 못할 풍경으로 남았다. 초등학생 때 봄가을 소풍으로 자주 찾았던 직지사와 중학 때 가을소풍에서 만난 월류봉 그리고 6.25 때의 비극현장 노근리도 이 구간 안에 있다. 2년을 채우지 못한 대전생활에서 업무출장으로 대전을 출발하여 거꾸로 추풍령까지 남하한 적도 있었다. 그때 이미 영동 시가지 가로수는 감나무였다. 출장에 동행한 동갑내기 M에게 추풍령 여관에서 숙박하던 날 가까운 우리 집에 가서 자자고 했지만 그는 부담스럽다며 응하지 않았다.
시골역이란 게 거의 엇비슷했지만 목적지가 가까워진다는 생각에선지 늘 다음에 나타날 역이 기다려졌다. 어쩌다 사정이 생겨 통근열차가 아닌 통일호나 무궁화호에라도 오르면 열차는 영동역에 딱 한 번 정차한 후 바로 목적지에 닿곤 했다. 시간이 곧 돈이란 격언을 보여주는 열차가 아닐 수 없었다. 그 무렵이었던가. 어느 소설에서 ‘시골역을 묵살하고 오만스럽게 지나가는 급행열차처럼…’이란 문구를 접한 것이. 그때 소설이 말한 급행열차란 오늘날로 따지면 고속열차이리. 대다수가 초근목피로 연명하던 시절이라 당시 무시당하는 것이야 어찌 시골 기차역뿐이었으랴.
12만으로 전국 224개 읍 중 최다인구를 기록한 물금읍. 도시 전체인구는 35만이 넘으니 당연히 기초단체로선 물금역에 경부선 고속열차 KTX가 서주길 간절히 바랄 터이다. 시에선 홍보매체인「양산시보」에다 KTX가 물금역에 곧 설 것처럼 수차례 보도했지만 철도공사에선 들은 척도 않는지 열차는 물금역을 그야말로 묵살하며 쌩하고 내달린다. 양산시보 기사에서나 가로에 내걸린 현수막에서나 ‘물금역 KTX’는 메아리 없는 짝사랑이 아닐 수 없겠다. 그런데도 이번엔 홍보책자에까지 ‘봄바람에 물금역 KTX정차 소식이 실려 오길 바란다’고 했으니 이건 또 무슨 소린가 싶다.
어디 열차가 바람에 실려 다닐 정도로 구름처럼 가벼운 물체란 말인가. 때가 되면 또 열차운행 기준에 도달하면 철도도 사업인데 어련히 알아서 정차시키지 않을까 싶은데 왜 이리도 안달이란 말인가. 차라리 철도공사가 물금역에 왜 고속열차를 못 세우는지 그 이유를 나처럼 시민들도 알고 싶어 할 것이다. 구포역에 정차한 후 거리가 지척인 물금역에 세우는 게 힘드는 것인지 아니면 다음에 정차하게 될 밀양역과의 거리 관계인지를 사실대로 알려주면 얼마나 속 시원할까. 시에선 지난 2010년부터 국토교통부와 철도공사에 고속열차 정차요청 건의문을 보내기 시작했다.
2017년 초엔 시민 2만2천 명이 서명한 건의문을 보냈고 그해 8월엔 시의회 건의문까지 발송했다. 이어 작년 4월엔 경남도의회에서 대정부 건의문까지 보냈지만 도대체 무슨 말못할 사정이 있는지 지역민들이 애타게 바라는 열차운행을 철도공사는 왜 승인하지 못하는 걸까. 나 역시 지난 날 물금역에서 KTX만 탈 수 있었다면 편하게 서울을 오르내렸을 터인데 그렇질 못해 고생깨나 했다. 6년 동안 봄가을 정기출장 때마다 하루 전에 서울에 도착해야만 했던 것. 당시 한전본사가 있었던 서울 강남까지 오전 8시 반까지만 도착하면 되었으니 당일 첫 KTX만 탔다면 시간은 충분했었다.
물금역 역사는 꽤 오래다. 1905년 개통하여 1939년 첫 역사를 지었고 2003년 지금의 역사가 들어섰다. 물금은 신라와 가락국이 강을 사이에 두고 국경을 접할 때 두 나라 관리들이 상주하면서 왕래하는 사람과 물품을 조사 검문하던 곳. 관리들의 검색횡포가 심해 강을 건너 오가는데 불편이 심하자 양국 대표가 나서서 의논한 결과 이 지역만은 서로 ‘금하지 말자’는 합의를 했다. 그 뒤부터 이곳은 서로 금하지 않고 자유롭게 왕래하도록 하였으므로 勿禁금하는 게 없다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랬으니 물금은 국가 간의 접경지로 교통의 요충지이자 최초의 자유무역지대였던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