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철도 전동차를 탔다. 오전 아홉 시, 전동차 안 풍경이 달라졌다. 평소 때보다 승객들이 확 줄었고 노약자석은 한산하다. 여기저기서 자주 터져 나오던 기침 소리도 사라졌다. 대신 누가 재채기만 해도 옆 사람과 맞은편 사람이 미간을 찌푸리고, 마른기침 한 번엔 사방에서 차가운 시선이 날아든다. 사람들이 다른 이의 숨결을 피하기 시작했다.
치사율 높은 전염병이 돌고 있는 게다. 중동에서 온 ‘메르스’라는 호흡기 증후군으로 나라 안이 벌집 쑤셔 놓은 듯하다. 병원 정보가 베일 속에 있는 동안 바이러스는 곳곳으로 번졌다. 확진 환자와 감염된 의사가 격리되었고 환자가 다녀갔던 병원은 일부 폐쇄했다. 환자와 접촉한 사람들도 음성 환자로 분류되어 자택 격리에 들어갔으며 사망자의 유가족인데 이별의 시간도 제대로 못 가졌다. 사람들은 마스크로 입을 막고 다니며 노약자들은 외출을 삼간다. 각종 행사가 무기한 연기되고 여행 계획이 취소되고 학교도 휴교 조치가, 내려졌다. 대한민국은 지금 감염과의 전쟁 중이다. ‘육이오 난리’는 난리도, 아니라 한다.
흉흉한 풍문이 불안을 달고 날아다닌다. 엄습하는 두려움은 인심마저 변질시켜 놓았다. 자고 나면 감염 환자가 늘고 사망자가 발생했다는 보도에 공포감이 확산되면서, 누구도 믿어선 안 된다는 의심의 눈길과 불신이 퍼져 간다. 병의 잠복기가 14일이니, 그 이상이니 확실하지도 않다. 나와 내 가족만 지키면 된다는 이기심 때문에, 그나마 남아 있던 이웃의 정도 사라져 가고 있다.
“우리를 보호해 줄 시스템은 마스크 한 장보다 넓지 못하다.”
어느 신문기자의 말처럼 몇몇 사람의 희생과 헌신만이 우리를 지켜 주고 있는 것일까. 책임과 신뢰가 사라진 바닥에 무능과 무력으로 사람들이 패닉에 빠졌다. 하지만 감염의 위험을 무릅쓰며 환자에게 매달려 있는 의료진에겐 무어라 감사하며 어떻게 격려해야 하나. 아예 보름 동안은 집에 들어가지 못할 거라며 일러두고 나왔다는 간호사도 있다. 이런 때의 감기 증세란 위험천만이면서 밀폐란 생각이 들 정도다. 남보다 먼저 감기와 한판, 승부를 벌였던 나는 뒤끝이 개운치 않아 이번엔 결단코 끝장을 봐야 했다. 약속된 모임에도 펑크를 내고 두문불출, 나름의 갈무리를 했건만 으슬으슬한 몸이 불안한 사회와 닮아있다.
환승역에서 좀 더 많은 사람들이 타고 내렸다. 그 틈에 잡상인이 끼어든다. 때맞춘 상품으로 일회용 마스크를 들고 나타나 불행을 중계하며 판매에 열을 올리는 남자, 목구멍이 포도청임에야 어쩌겠는가, 다들 감염의 공포에 대중교통이나 사람이 모이는 곳조차 꺼리는 상황에도 그는 물불 가릴 여유가 없었던가 보다. 그나마 ‘일회용 마스크’라는 순발력 있는 상품 선택에 살짝 감탄하고 있는데 웬걸, 누구도 구매하는 사람이 없다. 요즘 약국에선 동났다고 야단인 마스크인데 힐끗 한 번 쳐다보는 것으로, 관심을 거두어 버린다. 질적으로나 위생적으로 미심쩍은 물건이 탐탁하진 않겠지만, 그렇다고 각자 손에 쥔 스마트폰에만 꼼짝없이 빠져있는 사람들도 수상쩍다.
내 옆의 젊은 할머니는 카톡으로 날아온 손주 사진을 보며 혼자 웃고 중얼거린다. 맞은편에 앉은 대학생은 이어폰을 꽂은 채 듣고 보며 모바일 세상을 한창 즐기고 있다. 그 옆의 아저씨도 다리를 꼬고 앉자 작은 스마트폰 화면에 열중하느라 몸을 앞으로 수그렸다. 히죽히죽 웃는 사람, 심각해 보이는 사람, 두 엄지손가락을 바쁘게 움직여 대는 사람, 전동차 안은 메르스가 아니어도 분명 어떤 감염 상태이다.
스마트폰 속 세상도, 그리 조용하지만은 않다. 지구촌 어지러운 정보들이 흘러넘친다. 사실과 거짓이 섞여 있기도 하고 신뢰할 수 없는 과장된 소문이 서로 엉켜 유언비어가 되어 떠다닌다. 그 와중에 제주도에선 야생 진드기에 물려 사망한 소식이, 어젯밤 어느 아파트에선 층간 소음으로 다투다 이웃을 살해했다는 사건 사고가 쏟아진다. 그것들을 무덤덤하게 ‘서핑’하는 우리는 얼마나 이상한 것들에 오래 감염되어 있는지. 무심한 승객들 앞에서 주섬주섬 상품을 챙겨담은 남자는 다음 칸으로 사라진다. 단 한 개도, 팔지 못한 그를, 나는 망설이다, 부르지 못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못마땅한 나는 또 뭐란 말인가.
어제 동생과의 안부 통화에서는 잘 먹어야 병도 퇴치할 수 있다고 입을 모았다. 허약 체질엔 꼬박꼬박 챙겨 먹는 음식만 한 것이 없다며 ‘먹자’ 에 한참 동안이나 열을 올렸었다. 그런데도 입맛이 쓰다. 입맛, 밥맛만 쓴 게 아니다. 세상을 사느라 별짓을 다 하는 사람들과 쓸쓸하고 죽어라, 고생하다 병들어 죽어 간 누군가의 생이 쓰다. 잘 먹어도 허기지는 나이에, 통통
튀는 탄력도 없는 터에, 누가 내 입맛까지 잘라먹은 듯 쓰린 맛인, 내가 쓰다.
껌껌한 늪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하는 내 글도 소태맛이다. 뜨거운 글눈 하나, 발아시키지 못한 끝 문장도 쓰다. 필홍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문장에다 ‘작가’라는 빛 좋은 타이틀이, 전동차 안에서 한참을 선전하다 끝내 팔지 못한 상품을 거둬 사라진 그 남자의 목멘 삶만이나 한가. 이런 나는 대체 무엇에 감염되었을까…….
“그래도 우리는 끝까지 환자 곁에있을 겁니다.”
이 말이 올해 상반기 최고의 말이 되었다. 앉으나 서나 마음을 쓰고 머리를 쓰고 몸을 쓰는 사람들, 어리석고 이기적인 존재가 사람 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명석하고 아름다운 사람이기도 하다. 이 순간에도 공동체를 위해 메르스와 싸우는 의료진들이 있고, 이웃을 위해 기꺼이 개인적인 고통을 감수하고 있는 수많은 격리 대상자들도 있다. 사람이 여전히 희망이어서 감사하다.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을 터, 희망의 싹이 있는 한 모두 회복되리라. 당연히, 곧, 제자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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