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양산시 원동명 원동중학교의 야구소녀·소년들. 원동중은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는 학교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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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게, 야구를 꼭 살리게. 이 나라에선 언젠가 그게 필요하게 될 걸세.”
- 미 토크쇼 진행자 빌 스턴이 임종 직전의 미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에브너 더블레이 장군에게 했다는 익살 한토막 -
양산의 가을은 따뜻했다. 교정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가을빛으로 자글거렸고, 학교 뒤에 자리 잡은 토곡산엔 과실의 풍요로움이 가득했다. 2010년 9월 경남 양산시 원동면 원동중학교에 부임한 김주만 교장의 눈에 비친 원동면은 한폭의 멋진 산수화였다. 그러나 김 교장의 표정은 산수화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얼굴엔 먹을 흘린 것처럼 시름이 가득했다. 김 교장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일을 어쩐다…’하는 말이 새어나왔다.
“김 교장, 미안하오.” 교장으로 부임한 첫날. 전임 교장이 꺼낸 첫마디는 그랬다. 김 교장은 어째서 전임 교장이 “축하한다”는 말 대신 “미안하다”는 소릴 먼저 하는지 영문을 몰랐다. 그저 작은 시골학교를 물려준 게 미안해서 그런가 싶었다.
“미안하시다니요. 이렇게 좋은 학교를 잘 이끌어주셔서 오히려 제가 감사할 따름입니다.” 김 교장의 얼굴엔 미소가 흘렀다. 그도 그럴 게 김 교장은 원동중 부임 전까지 경남 김해에서 고등학교 교감으로 일했다. 교장은 원동중이 처음이었다. 모든 교사의 꿈이 교장이듯 그도 자신의 꿈을 이뤄 벅찬 자긍심을 느끼고 있었다.
“저, 김 교장. 아직 모르셨소?” 전임 교장이 흠칫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아직 모르다니요. 뭘…”
전임 교장은 잠시 곰곰이 생각하다가 이윽고 입을 열었다.
“어차피 알게 되실 테니 말씀드리지요. 이 학교는 곧 통폐합이 될 예정입니다.”
“네? 통폐합이요?” 김 교장의 눈이 외투 단추처럼 동그래졌다.
“그렇소. 학생수가 적어 도 교육청으로부터 즉각적인 통폐합 대상학교로 지정된 상태요. 1, 2년 내 폐교가 될 수 있단 말입니다. 난 김 교장이 아시는 줄 알고. 허허 참.”
순간, 김 교장은 화석이 된 듯 온몸이 굳어지는 걸 느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이런 날벼락이 없었다. 교장 부임 첫날, 폐교 소식을 듣다니. 하지만, 사실은 사실이었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사실을 뒤집을 순 없었다.
2010년 원동중의 전체 학생수는 34명이었다. 그러나 3명이 시내 학교로 전학 가며 31명으로 줄었다. 다음 해 3학년생들이 졸업하고 신입생을 받아도 25명에 불과했다. 문제는 2012년이었다. 3학년 16명이 졸업하고 나면 신입생은 7명에 지나지 않았다. 2012년도 인근 초교 졸업생이 7명밖에 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원동중 전교생은 16명. 도 교육청의 통폐합 안에 따르면 전교생 60명 이하 학교는 통폐합 유도, 20명 이하는 즉각적인 통폐합이다. 전교생이 20명도 안 될 원동중은 2012년 폐교 절차를 밟을 게 분명했다.
김 교장은 그날 이후 교정에 나와 언제 사라질지 모르는 학교와 그 학교에서 뛰노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탄식하고 또 탄식했다. 자신이야 다른 학교로 옮기면 그만이지만, 이 학교가 사라진다면 원동면의 역사가 단절되는 것과 같았다. 가뜩이나 시골이 황폐화하고 있는 지금. 면에 하나뿐인 중학교마저 폐교한다면 주민들은 아이들 교육을 위해 시내로 이주할 게 자명했다. 그렇게 되면 시골은 더 황량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때 김 교장의 눈에 운동장에서 열심히 야구수업 중인 아이들이 들어왔다.
매화꽃 같은 아이들
원동중학교 운동장에 마련된 그라운드. 원동중 학생들은 인터넷 게임 대신 시간이 날 때마다 야구로 건강한 몸과 정신을 만든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사랑만이 겨울을 이기고 봄을 기다릴 줄 안다고 했다. 꽃으로 치면 매화다. 매화는 모진 겨울을 견뎌내고 봄이면 하얀 눈송이 같은 꽃을 피운다. 사람들이 매화를 가리켜 고난을 이겨내는 ‘절개의 상징’, ‘희망의 전령’으로 묘사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2010년 3월 원동중에 부임한 체육교사 최윤현은 학교를 병풍처럼 둘러싼 매화를 보고 한눈에 반했다. 학교 주변만이 아니었다. 원동면 전체가 매화에 둘러싸여 있었다. 온종일 종소리처럼 은은한 매화향이 온 마을에 가득했다.
그러나 지금은 가을. 매화향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하지만, 운동장엔 순백의 매화꽃들이 바람에 날려 이리저리 떠다니고 있었다. 바로 아이들이었다. 아이들은 반으로 편을 갈라 야구에 집중하고 있었다. 더러의 아이들은 흙먼지를 일으키며 도루를 시도했고, 일단의 아이들은 야구공을 쫓아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최 교사가 부임하기 전까지 원동중 학생들은 체육 시간이면 축구를 했다. 구도(球都) 부산이 근처라, 야구를 좋아하는 아이들이 많았지만, 남학생이 부족했다. 남학생이라곤 1학년 4명, 2학년 7명, 3학년 15명이 전부였다. 이 인원으로 야구는 꿈도 꿀 수 없었다. 남학생들이 축구에 매달릴 때 여학생들은 교정 한쪽에 삼삼오오 모여 자기들만의 시간을 가졌다. 여학생 역시 1학년 2명, 2학년 5명, 3학년 8명으로 턱없이 적었다.
최 교사는 전체 학생이 땀을 흘릴 무언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착안한 게 야구였다. 최 교사는 부임하고 한 달이 지나자 일주일 두 시간의 체육수업 가운데 한 시간을 야구수업으로 배정했다. 기초적인 야구규칙 강의부터 아이들이 직접 글러브와 배트를 손에 쥐고 야구를 경험하도록 했다. 최 교사는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도 참여하게끔 했다. 그러나 학습 여건은 좋지 않았다.
운동장은 작았고, 변변한 야구장비도 없었다. 헌 글러브와 오래된 배트가 전부였다. 야구를 가르치는 것도 최 교사의 몫이었다. 최 교사는 여학생들의 안전을 고려해 경식공 대신 테니스공을 썼다.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체육 시간만 되면 여학생들이 달려와 ‘야구를 하자’고 난리였다. 애초 야구를 좋아해 다년간 사회인야구팀에서 뛰었던 최 교사는 큰 보람을 느꼈다. 하지만, 아이들의 반응이 좋아질수록 도넛 구멍처럼 가슴 한가운데가 뻥 뚫린 기분을 느끼곤 했다.
‘우리 학교에 야구부가 생기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바람이 생겨난 것이다. 최 교사가 판단하기에 원동면을 상징하는 구심체로 운동부만한 것도 없었다. 이 작은 마을에서 제2의 이대호, 제2의 조정훈이 나온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현재로선 불가능한 욕심이었다. 원동중은 전체 학생수 34명에 불과한 시골학교였다. 거기다 원동중은 학생수 부족으로 언제 폐교가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때 최 교사의 눈에 교문을 들어오는 승용차가 보였다.
양산을 떠나야 하는 야구소년들
양산시야구협회의 노력으로 2면의 사회인야구장이 확보됐다. 그러나 1천600명이 넘는 사회인야구 동호인들이 뛰기엔 아직 야구장이 부족하다. 다행인 건 시에서 야구 지원에 적극적이라는 사실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양산야구협회장 박치병의 차가 양산 배내골을 지나고 있었다. 공기처럼 투명한 계곡물이 흘러내리고 여름에도 냉기가 감도는 배네골은 양산의 자랑이었다. 그러나 이날따라 배네골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시선만 차창 밖에 있을 뿐, 머릿속은 철사 덩어리가 엉킨 것처럼 복잡했다.
‘죄송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야구부는 안 되겠습니다.’ 박 회장은 잠시 전 들었던 완곡한 거절의 말이 떠오르자 무의식적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왜 하필 학교 운동부로 야구는 안 된다는 겁니까’하고 항변했던 자신의 목소리가 떠오르자 이번엔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랬다.
박 회장은 모 중학교에 야구부 창단을 제안했다가 거절을 당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그 학교 교장은 “교사들과 학부모들의 반대로 야구부 창단은 불가능하다”는 뜻을 전했다. 따지고 보면 그 학교뿐만이 아니었다. 양산의 중학교를 죄다 찾아다니며 야구부 창단을 제안했지만, 돌아오는 건 ‘죄송합니다. 야구부는 안됩니다’는 답변뿐이었다.
박 회장도 수긍하지 못하는 건 아니었다. 야구부가 있으면 사고 위험이 크고, 야구부원들 때문에 일반 학생들이 학업에 열중할 수 없다는 소릴 수도 없이 들었다. 그러나 야구부는 사고집단이 아니었다. 학업과 야구를 충분히 병행할 수 있는데다 야구를 통해 학교구성원들을 자긍심을 고취하고, 지역민의 일체감을 조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운동부에 대한 편견과 선입견은 그 어떤 설득보다 강력했다.
주변에선 “기존 운동부가 있는 학교를 찾아가보라”는 조언을 하기도 했다. 박 회장도 운동부가 있는 학교라면 편견이 덜 하지 싶었다. 그래서 양산에서 규모가 큰 중학교를 찾아가 야구부 창단을 설득했다. 설득이 먹히는가 했다. 학교장은 야구부 창단에 호의적이었다. 하지만, 기존 운동부의 반발이 심했다. ‘야구부가 생기면 우리 운동부가 사라지고 말 것’이란 위기감 때문이었다. 박 회장이 아무리 ‘공생’을 외쳐도 결국엔 메아리로 돌아왔다.
양산시야구협회 박치병 회장. 그에게 '회장'이란 직함은 남보다 더 일을 많이 하라는 의미에 지나지 않는다. 그는 원동중 야구부 창단에 이어 고교 야구부 창단에도 박차를 가할 예정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박 회장이 학교 야구부 창단에 매달리는 덴 이유가 있었다. 인구 25만 명의 양산엔 리틀야구 2개 팀과 60여 개의 사회인야구팀이 있다. 양적으론 많지 않으나 실력과 열정에서 다른 지역을 압도한다.
실례로 지난해 10월 양산 리틀야구단은 ‘용산구청장기 전국리틀야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양산이 들썩였다. 수도권과 부산의 강팀을 차례로 이기고 우승컵을 안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양산시야구협회가 운영하는 사회인야구리그 역시 전국에서 가장 깨끗한 리그로 꼽혔다. 투명한 회계를 위해 협회는 홈페이지에 그날의 금전출납을 상세히 공개했다. 여기다 협회 관계자들이 양산지역 야구 인프라 확충을 위해 밤낮없이 뛰어다녔다. 잡음이 날리 만무했다.
하지만, 이런 노력에도 양산을 대표할 학교 야구부가 없다는 게 문제였다. 특히나 리틀야구 선수들이 야구를 더하고 싶어도 진학할 중학교가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지난해 양산 리틀야구 선수들은 야구를 더할 요량으로 고향을 떠나 부산지역 중학교로 진학했다. 학부모들도 아이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고향을 등졌다. 그러나 부산으로 가도 중학교 야구부에 입단하는 건 극소수였다. 왜냐? 부산도 리틀야구 선수는 많은 반면 야구부가 있는 중학교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었다.
박 회장은 양산의 인재들이 다른 도시로 떠나는 걸 더는 지켜볼 수 없었다. 큰 꿈을 안고 부산에 갔으나 중학 야구부에 들지 못하고, 결국 글러브를 내려놓아야 하는 현실을 더이상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어떻게든 양산에 중학교 야구부를 창단해 지역 리틀야구 선수들이 외지로 떠나는 걸 막아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 지역 중학교를 찾아다니며 야구부 창단을 호소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는 언제나 박 회장의 바람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때 박 회장의 눈에 학교 운동장에서 야구를 하는 중학생들이 보였다.
야구 특성화 학교를 제안하다
김주만 교장(사진 왼쪽부터)과 최윤현 교사. 두 이의 지혜와 희생이 폐교 직전의 학교를 살렸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이봐. 차를 원동중학교 운동장에 잠시 대보게.” 박 회장이 운전대를 잡은 일행에게 말했다. 일행은 박 회장의 느닷없는 요청에 고개를 갸웃했다. 박 회장은 차에서 내려 한참 동안 야구수업을 지켜봤다. 그의 눈빛은 지붕 위의 고드름처럼 차가웠지만, 예리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수업이 끝날 즈음. 박 회장이 최 교사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십니까. 양산시야구협회장 박치병입니다.” 박 회장이 명함을 내밀었다.
“아, 네” 최 교사가 머뭇거리며 명함을 받았다.
“아이들이 야구하는 게 참 인상적입니다.” 박 회장의 덕담에 최 교사는 경계심을 풀었다.
“일주일에 한 번씩 체육 시간에 야구수업을 하고 있습니다.”
박 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최 교사에게 다음과 같은 제안을 했다.
“선생님. 야구부를 창단해보시는 게 어떻습니까.”
갑작스러운 제안이었다. 그러나 최 교사는 내심 반가웠다. 자신이 늘 꿈꾸던 야구부가 아니었나.
“저야 적극 찬성입니다만, 저 혼자 결정할 문제가 아닙니다. 교장 선생님께서 결정할 문제라서….” 최 교사는 즉답을 피했다.
“알겠습니다. 그러면 교장 선생님께 여쭤봐 주십시오. 야구부만 창단한다면 우리가 힘닿는 데까지 도와드리겠습니다.”
교무실로 돌아온 최 교사는 꿈을 꾼 것 같았다. 하지만, 손엔 분명히 박 회장의 명함이 들려져 있었다. 최 교사는 곧바로 교장실로 들어갔다.
“교장 선생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최 교사는 김 교장에게 10분 전 박 회장에게서 받은 제안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그러나 김 교장이 제안을 받아들일지는 의문이었다. 다른 학교처럼 원동중에서도 운동부는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거기다 운영비도 많이 들었다. 무엇보다 학교는 폐교 직전이었다. 김 교장이 일언지하에 거절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일이었다. 아니나다를까.
“그래요? 야구부라….” 김 교장은 신중했다. 사실 김 교장은 폐교를 막으려고 다양한 아이디어를 생각하던 차였다.
“폐교를 막으려면 학생수가 늘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일반 학교로는 학생 부족을 막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어, 음악 특성화 학교로 전환해 신입생을 유치해볼까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이미 다른 학교에서 썼던 방식이었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학부모들의 흥미도 줄어든 상태였다. 좀 더 별난 특성화 프로그램이 필요했다. 그즈음 야구부 창단이 귀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야구부 창단의 ‘창’자만 꺼내도 ‘학생선수가 한 반에 한 명이라도 있으면 전체 학업 분위기가 흐려진다’며 학부모들과 교사들이 반대할 게 뻔했다.” 김 교장의 회상이다.
최 교사는 김 교장의 걱정과 우려를 박 회장에게 전달했다. 하지만, 박 회장에게 원동중은 마지막 보루였다. 이 학교마저 야구부 창단을 외면하면 양산 리틀야구 선수들은 야구선수의 꿈을 접어야만 했다. 박 회장이 휴대전화를 들었다.
“아, 허 위원님. 저 박치병입니다.”
박 회장이 ‘허 위원’이라고 부른 이는 MBC 야구 해설위원이자 한국야구위원회(KBO) 실행위원장인 허구연이었다. 허 위원은 박 회장의 양산지역 중학교 야구부 창단 노력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고 있었다. 직접 양산을 찾아 중학교를 돌며 야구부 창단을 설득했고, 시장을 만나 야구 인프라 확충에 힘써달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허 위원의 노력에도 양산지역 중학교들은 자신 있게 창단 선언을 하지 못했다. 역시 학부모와 교사의 반대가 심한 까닭이었다.
박 회장은 허 위원에게 “전교생이 30명 남짓한 원동중학교라는 곳이 있습니다”며 “그 학교가 야구부를 창단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하고 요청했다.
허 위원은 단번에 요청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이전과 다른 접근방식을 주문했다.
“박 회장. 단순히 야구부를 창단해달라고 읍소하는 건 현명한 해결책 같지 않아요. 그보다 학교가 야구를 통해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설득하는 게 중요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박 회장이 휴대전화에 귀를 바싹 갖다댔다.
“교장 선생님을 만나 ‘야구특성화 학교를 시도해보자’고 제안하는 게 어떨까 싶어요. 야구 특성화 학교가 되면 야구부 창단은 물론이려니와 운영 면에서도 큰 효과를 볼 수 있어요. 학교에서 걱정하는 폐교도 야구를 통해 막을 수 있고요.”
박 회장은 그때까지 허 위원의 진의를 제대로 짚지 못했다. 허 위원이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야구인재를 육성하는 ‘야구 특성화 학교’가 되는 겁니다. 특성화 학교로 지정받으면 야구부 창단과 운영이 쉬워져요. 생각해보세요. 학교에서 가장 걱정하는 게 뭡니까. 학생선수들이 공부는 등한시하고 야구에만 올인하는 거잖아요. 야구 특성화 학교가 되면 야구와 학업을 병행해야 하기 때문에 그런 우려에서 벗어날 수 있어요. 운영비도 그래요. 잘 아시겠지만, 거의 모든 야구부의 운영비가 어디서 나옵니까. 감독, 코치 월급은 또 누가 줍니까. 그게 다 학부모의 지갑에서 나오는 거잖아요. 하지만, 야구 특성화 학교로 지정되면 교육청이 감독, 코치 인건비가 지원할 수 있어요. 학부모들과 지도자들의 마찰과 대립을 미리 막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박 회장은 허 위원의 말을 듣고 나무망치로 뒷목을 맞은 듯한 충격을 느꼈다. 생각지도 못한 해결책이 나왔기 때문이다. 하지만, ‘야구가 폐교를 막을 수 있다’는 말이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원동중학교에 야구부가 생긴다 치지요. 누가 야구부원이 되겠습니까. 기존 학생들이 중심이 되겠습니까. 아니면 전학생들이 될까요. 당연히 후자겠지요. 야구를 하고 싶은 학생들이 부산을 비롯해 전국에서 몰려들겠지요. 가뜩이나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는 야구 특성화 학교라면 전국의 학부모들이 관심을 두지 않겠습니까. 결국, 타지의 학생들이 입학하면 원동중의 학생수가 늘어날 겁니다. 그렇게 되면 폐교 직전의 학교를 구할 수 있어요.”
박 회장은 전화를 끊고 무릎을 쳤다. 모두가 ‘윈-윈’할 방법이었다. 특성화 학교는 1998년 3월 개정, 공포된 초·중등교육법시행령 제91조에 따라 운영되는 학교의 한 형태다. 특성화 학교는 기본 교과과정을 중심으로 특정 분야 인재와 전문 직업인 양성을 위한 특성화 교육과정을 동시에 운영한다. 지금까진 예술중, 체육중, 국제중 등 예술과 체육 그리고 외국어 중심의 특성화 중학교가 존재했다. 이들 특성화 중학교는 시와 교육청으로부터 별도의 예산을 지원받는 장점까지 있다.
3월 21일 원동중 야구부 창단식에 참여한 주민 풍물패. 야구부 창단식은 오랜만에 경험하는 지역공동체의 큰 행사였다(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하지만, 지금껏 체육 특성화 학교가 있었어도 특정 체육종목의 특성화 학교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만약 원동중이 야구 특성화 학교가 된다면 큰 이슈가 될 게 자명했다. 박 회장은 허 위원의 아이디어를 김 교장에게 전달했다.
“좋은 아이디어였다. 축구, 야구와 같은 인기종목은 교육청에서 창단비 정도만 지원할 뿐, 지속적인 지원은 해주지 않는다. 학교 자체적으로 운영하거나 외부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하지만, 학부모나 동창회의 지원을 받게 되면 잡음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렇다고 교육청에 ‘우리만 지원해달라’고 요청하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했다간 다른 학교 운동부에서 ‘특혜’라고 항의할 게 뻔했다. 그러나 야구 특성화 학교로 지정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특성화 학교이니만큼 지도자 인건비를 정당하게 지원받을 수 있다.”
김 교장은 덧붙여 “야구와 공부를 병행한다면 학부모, 교사들의 반발도 누그러트릴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놨다.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낙동강을 따라 철길과 흐드러지게 핀 매화가 보인다. 강변은 현재 4대강 정비사업이 한창 진행 중이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허 위원의 아이디어를 폐교의 위기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라 생각한 김 교장은 즉시 교직원 회의를 주재했다. 이미 교직원 사이에선 ‘학교에 야구부가 생긴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많은 분이 우려하신다는 걸 압니다. 하지만, 야구부 창단이 폐교에서 벗어날 유일한 방법이란 걸 이해해주면 고맙겠습니다. 덧붙여 우리 학교가 야구 특성화 학교가 될 수 있도록 많은 노력 부탁합니다.”
김 교장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교사 가운데 한 이가 손을 들었다.
“교장 선생님. 뜻은 알겠는데요. 그런데 지금 우리 학교에 돈이 어디 있습니까. 돈이 수월찮게 들어갈 텐데 그 돈을 어떻게 충당하시려고 합니까.”
김 교장은 “학교 살림살이는 축내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외부 지원을 받으면 운영하는 덴 큰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은 아이들 교육에만 온 힘을 다해주시면 됩니다.”
야구 특성화 학교 추진을 통해 폐교를 막아야 한다는 김 교장의 역설에 교직원은 하나로 뭉쳤다. 이젠 학부모였다. 섣불리 야구부 창단을 이야기했다간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학부모들의 역공에 부딪힐 수 있었다.
김 교장은 학부모들에게 가정 통신문을 보냈다. 가정통신문엔 폐교를 막아야 한다는 당위성과 ‘야구부가 생겨도 일반 학생들의 학업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시골 중학교가 뭐하러 야구부를 만드느냐”고 의구심을 나타냈던 학부모들도 결국, ‘이런 식으론 학교가 존속할 수 없다’는 김 교장의 뜻에 따르기로 했다.
야구 특성화 학교로 돌파구를 찾았으나, 난관은 수두룩했다. 김 교장이 창밖으로 학교 옆을 흐르는 낙동강을 바라봤다. 김 교장의 깊이 파인 주름처럼 낙동강은 산들을 따라 굽이굽이 흐르고 있었다.
원동중은 1969년 개교했다. 지금까지 2천617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푸른 토곡산과 배내골을 낀 원동중은 1980년만 해도 학생들로 넘쳤다. 전교생이 400명에 이르렀다. 당시는 원동면도 활기에 넘쳤다. 원동역 주변엔 시장이 섰고,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교통이 불편했던 시절이라, 원동면 사람들은 인근 김해까지 배를 타고 왕래했다. 도시로 나가는 이들보다 고향을 지키는 이들이 더 많았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양산시가 커지면서 원동면을 떠나는 이들이 늘어났다. 주민 사이에선 '시내로 나가야 먹고 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았다. 그도 그럴 게 양산 시내엔 넥센 타이어 등 큰 공장들이 하나 둘 들어섰다. 원동면뿐만 아니라 양산 전체가 농업을 외면하기 시작했다. 급격한 도시화는 농업인구와 경작지의 축소로 이어졌다.
1999년 5천170가구였던 양산의 농가수는 2009년 1천775가구로 34.7%나 줄었다. 같은 기간 농업 종사자도 1999년 1만 8천212명에서 2009년 9천413명으로 8천799명이나 감소했다. 경지면적도 줄었다. 1999년 5천966ha였던 경지면적은 10년 후 5천403.94ha로 9.4%나 축소됐다. 그렇다고 고향을 떠난 이들이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반대였다.
원동면의 한 주민은 “고향을 떠난 이들이 이젠 돌아오고 싶어도 돌아올 수 없는 처지가 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자본이 있나 장사 기술이 있나. 시골 사람들이 도시로 나가 어떻게 살겠나. 가게를 열었다 실패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려고 해도 10년 전 평당 100만 원에 판 땅이 지금은 1천만 원 식으로 급격하게 올랐다. 고향을 떠나는 사람만 있고, 돌아오는 사람이 없는 이유다.”
사실이다. 원동면 땅 주인의 절반 이상이 외지인이다. 그들은 농사와는 담을 쌓은 이들이다. 가는 곳보다 벼와 딸기가 가득했던 논과 밭은 이제 잡초만 자란다. 여기다 정부의 4대강 정비사업이 시작하며 고향을 떠나는 이는 더 증가했다.
한 주민은 “4대강 사업으로 고향의 특산물인 원동딸기와 원동수박이 사라졌다”며 금방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말했다.
원동면은 낙동강변 사질토에 깨끗한 지하수가 흐르고, 일조량이 충분해 딸기와 수박농사에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다는 평을 들었다. 딸기 당도가 15.7브릭스로 높아 부산, 울산을 비롯해 수도권에서 큰 인기를 누렸다. 전국 딸기 최대 재배지인 인근 밀양 삼랑진 딸기보다도 1kg당 1천 원 이상을 더 받은 것도 맛과 품질이 뛰어난 덕분이었다. 덕분에 원동면 용당리 일대의 90여 농가에서만 연간 70, 80억 원의 소득을 올렸다.
그러나 정부가 4대강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강폭을 넓히기로 하면서 원동면 용당리 낙동강변 일대의 딸기밭과 수박밭이 사라졌다. 주민들은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았지만, 그들이 경작할 땅은 없었다. 생계 터전을 잃은 주민들은 또다시 도시로 떠났고, 원동면은 더 고립된 섬이 됐다.
원동중 3학년생 16명 가운데 농업 가구는 이제 단 3가구뿐이다. 2년 전엔 절반이 넘었다. 학년이 내려갈수록 학생수가 적어지는 것도 농업 인구 감소와 직접적인 영향이 있다. 젊은 아버지들은 더는 농사를 짓지 않는다. 설령 농사를 짓겠다손 쳐도 땅이 없다.
김 교장은 원동면의 미래를 위해서도 반드시 학교를 살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대로 주저앉다간 원동면은 사람이 살지 않는 마을이 될 게 분명했다. 4대강 정비사업이 성공적으로 끝났을 때 다시 고향을 찾는 사람이 있다면 아이들을 어느 학교로 보낼 것인가. 김 교장은 불끈 주먹을 쥐었다.
야구부 창단을 위해 팀을 이루다
원동중 야구부 창단과 지역 회생에 애쓴 주역들이다. (사진 왼쪽부터) 원동면 면장, 박말태 양산시의회 부의장, 허구연 MBC 해설위원, 최영호 시의원, 박치병 양산야구협회장(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원동중을 야구 특성화 학교로 추진키로 마음먹은 김 교장은 박 회장, 허 위원과 함께 각개전투에 들어갔다. 먼저 김 교장은 시 관계자들을 찾아다녔다. 야구부 지원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어찌나 열심히 뛰어다녔는지 시에선 해마다 2천500만 원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한편, 박 회장은 양산시야구협회 임원들을 설득해 해마다 원동중 야구부에 2천만 원을 지원하기로 했다. 특히나 시의원들을 만나 구체적인 야구부 지원방안을 이끌어내려고 노력했다. 시 관계자들이 2천500만 원을 지원한다고 약속해도 시의원들이 거부권을 행사하면 아무 소용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관이 많았다.
우선 양산시 시의원 가운데 야구와 관련된 인사가 전무했다. 반면 축구 쪽 인사는 넘쳤다. 대표적인 이가 최영호 시의원이었다. 축구 선수 출신의 최 의원은 양산시 축구협회장을 역임하는 등 지역 축구계를 대표하는 인사였다. 최 의원을 설득하지 않는 이상 원동중 야구부 지원은 공염불에 그칠 가능성이 컸다.
박 회장의 주변에선 최 의원을 설득하는 게 어려울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괜히 야구부 지원 이야기를 꺼냈다가 본전도 못 뽑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우려가 새어나왔다. 하지만, 박 회장은 ‘축구인도 체육인’이라고 생각했다. 박 회장의 생각이 옳았다. 최 의원은 원동중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적극 지원을 약속했다.
한발 나아가 최 의원은 “시에서 양산지역 중학 축구부에 해마다 2천500만 원을 지원하니 야구부도 똑같은 규모의 지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혹여 지역 축구인들의 인심을 잃을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최 의원은 단호했다.
“지역과 학교를 살리는 일인데, 축구와 야구가 무슨 상관이냐”는 것이었다. 최 의원과 함께 양산시의회 박말태 부의장도 야구부 지원에 소매를 걷어 올렸다. 정치가 스포츠를 이용하는 대신 스포츠를 통해 정치가 지역을 살리는 데 앞장서는 장면이 연출된 것이었다.
허 위원은 양산시장과 경남 교육청을 상대했다. 김 교장 혼자서는 야구 특성화 학교를 추진할 수 없었다. 허 위원은 시장을 만나 야구부 지원을 약속받았고, 경남 교육청을 찾아 원동중의 야구 특성화 학교 지정에 애써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경남 교육청은 허 위원의 청을 듣고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애초 경남 교육청은 특성화 학교 등 다양한 교육방안을 연구하고 지원하는 것으로 정평이 난 곳이었다.
각개전투의 결과는 예상 밖이었다. 시와 시의원, 도 교육청 모두 원동중 살리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꿈같던 야구부 창단은 어느덧 현실이 되고 있었다.
순풍에 돛을 단 야구부 창단
야구단 창단식의 백미는 고사였다. 지역 주민들은 원동중이 지역사회와 함께 오랫동안 남길 바라고 있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지난해 12월. 원동중과 양산시야구협회는 한화 이글스에서 뛰었던 신민기를 감독으로 선임하며 본격적인 야구부 창단 작업에 들어갔다. 은퇴 후 지도자가 꿈이었던 신민기는 박 회장을 도와 원동중 야구부 창단을 이끌어냈던 인물이었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과연 야구부를 지원할 학생이 있겠느냐’는 막연한 불안감이 있었다. 일부에선 “시골학교 야구부로 누가 오겠느냐”며 “공연히 짓”이란 말까지 했다. 아니나다를까 문의전화는 오지 않았다. 신 감독은 답답했다. 온종일 전화기 앞에 얼굴을 파묻었다. 그때였다. 전화 한통화가 걸려왔다. 신 감독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거기, 원동중 야구부지요?”
“네, 그렇습니다.”
“저, 여기 서울인데요. 제 아들을 그곳에 보낼 수 있을까 싶어서 전활 드렸습니다.”
신 감독이 모르는 새 원동중 야구부 창단 소식이 서울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그 전화를 시작으로 여기저기서 문의전화가 빗발쳤다. 결국, 원동중 야구부는 모집공고를 낸 지 한 달 만에 13명의 야구부원을 모으는 데 성공했다.
“서울에서도 연락이 많이 왔다. 하지만, 일단 지역 리틀야구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는 게 옳다고 생각해 양산, 부산, 울산지역의 리틀야구 선수 위주로 뽑았다.” 신 감독의 말이다.
선수단 구성을 마쳤지만, 곧바로 넘어야 할 산이 나왔다. 숙소였다. 13명 가운데 절반 이상이 부산과 울산에서 온 아이들이라, 이 아이들이 잘 곳이 있어야 했다. 그러나 학교 예산으로 숙소를 짓거나 구하는 건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었다. 신 감독은 학교 주변을 샅샅이 찾아다녔다. 그리고 결국.
“예전 버스 기사님들이 쓰던 숙소를 하나 찾았다. 학교 근처고, 시설도 깨끗했다. 주변 분들의 도움으로 이곳을 숙소로 쓰기로 결정했다.”
임대료는 월 50만 원. 이 역시 건물주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야구장도 발 빠르게 지어졌다. 시의 지원으로 운동장에 그물망이 설치됐고, 야구장비도 속속 들어왔다.
그러나 야구부 창단이 진행될수록 ‘자칫 면학분위기가 저해될까’ 두려워하는 학부모들의 우려도 커졌다. 김 교장은 13명의 학생선수 부모들에게서 각서를 받았다. 각서 내용은 ‘야구부 운영을 위한 학교 방침 10가지’였다. 김 교장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부터 학생선수 부모님들께 ‘우리 학교는 공부와 야구를 병행한다’는 사실을 알렸다. 기존 학부모들께도 그러한 학교 방침을 상세히 전달했다. 그러나 이건 구호로 끝날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학생선수 부모님들께 몇 가지 원칙을 알려 드렸다. 먼저 교과목당 70% 이하의 학업성취도를 기록하면 학생선수라도 예외 없이 자발적으로 보충수업을 참여하도록 했다. 두 번째 70% 이하의 학업성취도를 나타낸 과목이 세 과목 이상일 때는 강제적으로 보충수업을 받도록 했다. 세 번째 보충수업에 의무적으로 참가하지 않으면 대회 참가를 허용하지 않겠다고 알렸다. 학생선수 부모님들이 흔쾌히 동의해주셨다. 기존 학부모들도 ‘학교 방침이 그렇다면 믿고 따르겠다’는 뜻을 전달해주셨다.”
신 감독도 학교 방침에 전적으로 따를 생각이다.
“모든 훈련은 방과 후에 할 계획이다. 학생선수라도 숙제가 먼저다. 아이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대회 참가도 내년부터 하기로 했다.”
야구부 창단에 누구보다 앞장섰던 최윤현 체육교사는 내심 ‘야구부 학생선수들과 일반학생들이 잘 어울릴까?’ 걱정했다. 사건 사고 없이 강물처럼 조용히 유지됐던 학교가 자칫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리면 어떻게 하나 싶었다. 그러나 기우였다.
“야구부 학생선수 대부분이 전학생이다. 일반학생들은 예전부터 한마을에 살았던 아이들이다. 이 아이들이 잘 어울릴까 걱정했지만, 의외로 무척 잘 어울렸다. 수업시간뿐만 아니라 평상시에도 오래된 친구들처럼 스스럼없이 장난치고, 숙제도 함께했다. ‘야구부가 일반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는 말이 왜 나왔을까’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야구, 폐교를 구하다
개교 이래 최대 인파가 모인 야구부 창단식 날. 차들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사진=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
3월 21일 원동중에선 성대한 야구부 창단식이 열렸다. 학교 앞 슈퍼 주인은 “개교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학교를 찾은 것 같다”며 “다 죽어가던 학교가 야구 때문에 살아났다”고 기뻐했다. 사실이었다.
주민들은 생업을 뒤로하고, 학교를 찾았다. 일부 주민은 풍물패를 조직해 창단식의 흥을 돋웠다. 지역 경찰은 풍물패를 에스코트하며 야구단 창단을 축하했다. 지역 유지들과 시의원, 시 관계자, 교육청 인사들이 바쁜 일정을 뒤로하고 원동중을 찾았다. 지역 인사들은 고사를 지내는 등 야구부 창단을 제 일처럼 기뻐했다.
수액이 마른 나무처럼 고사 직전이었던 원동중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재미난 건 주변 중학교 교사들이었다. 박 회장은 야구부 창단식장에서 야구부 창단을 제의했다가 한마디로 거절했던 모 중학교 교장과 교사들을 다시 만났다. 모 중학교 교장은 연방 “그때 박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여야 했는데”하며 입맛을 다셨다. 교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렇게 야구부가 지역사회에 미치는 순영향이 클 줄 몰랐다”며 아쉬운 한숨을 토해냈다.
창단식장에서 김 교장은 감격 어린 눈빛으로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는 모범 중학교가 되겠다”고 공표했다. “도 교육청의 허락이 떨어지면 기본 교육과정을 그대로 이수하되 야구 특성화 학교다운 별도의 전문교과과정을 준비하겠다”고 당찬 포부를 밝혔다.
학생선수들의 각오도 남달랐다. “반드시 우승을 하겠다”는 선언이나 “훌륭한 야구선수가 되겠다”는 포부 대신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고, 예의 바른 학생이 되겠다”며 “야구를 통해 배운 교훈을 바탕으로 사회에 꼭 필요한 구성원이 되겠다”고 약속했다.
원동중 야구소녀, 소년들의 다짐(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이날 시는 2천500만 원의 증원증서를 학교에 전달했다. 총동창회에서도 알음알음 모은 500만 원을 쾌척했다. 박 회장 역시 2천500만 원의 지원금을 냈다. 경남 교육청 관계자는 “원동중이 야구 특성화 학교로 거듭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며 응원의 박수를 보냈다. 바쁜 시간을 쪼개 양산까지 찾아온 허 위원도 ‘무한 지원’을 약속했다.
이날 창단식에서 흥미로운 장면이 하나 있었다. 13명의 학생선수를 제외한 25명의 일반학생도 야구 유니폼을 입고 있던 것이었다. 3학년 최민진 군은 활짝 웃으며 “13명을 제외한 25명의 학생도 야구부의 일원”이라고 말했다.
“교장 선생님의 방침이 전교생 38명 모두가 야구에 참여한다는 거예요. 우리 모두가 야구부의 일원이라는 거죠. 물론 대회엔 13명이 참가하지만, 공부와 야구를 병행하고, 야구를 즐기는 건 다 똑같으니까요.”
창단식이 끝나고 학생선수들은 간단히 몸을 풀었다. 그리고 학생선수들이 떠난 자리에 일반학생들이 야구를 즐겼다. 한창 야구를 즐기던 3학년 양석원 군은 야구의 장점을 이렇게 표현했다.
“다른 스포츠는 운이 좋아도 득점할 수 있는데요. 야구는 협동심이 좋아야 점수를 낼 수 있는 것 같아요. 투수가 아무리 잘 던져도 타자가 못 치면 그만이잖아요. 반대로 타자가 잘 쳐도 투수들이 못 던지면 경기에서 지잖아요. 나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힘을 모아야 한다는 점이 야구의 매력인 것 같아요.”
원동중이 그랬다. 학교 구성원과 야구 관계자 그리고 정치인과 행정가들이 한데 뭉쳐 야구부를 창단했다. 어느 한 사람의 노력이 아니라 모든 이가 손을 모으고 지혜를 모아 죽어가던 지역에 생기를 불어넣었고, 지역민의 추억과 꿈이 서려 있는 모교를 폐교 직전에서 살렸다.
우리는 가혹한 운명 앞에서 좌절하곤 한다. 그러나 운명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행동을 달리할 때만 가능하다. 원동중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바로 그것이다.
매화가 눈처럼 덮힌 도로를 지나 서울로 올라갈 때였다. 허 위원의 휴대전화에 한통의 문자메시지가 도착했다.
‘안녕하세요. 허 위원님. 00중학교 교장입니다. 우리 학교도 야구부를 창단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전국에 야구가 매화가 돼 피어오르고 있다.(끝)
원동중 야구소녀·소년들이 말하는 '공부하는 학교, 원동중'(동영상=스포츠춘추 박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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