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삼의 세계사-22】
중국에서 인삼 재배를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은 송나라 때 편찬한 ‘본초도경’(1061년)이다
청나라가 건립된 후 장백산(백두산)을 신성시하고 장백산 지역의 자연자원을 독점하기 위해서 봉금정책이 시행되는 등 엄격한 인삼 통제 정책이 실시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재배한 삼은 가짜라고 여겨 약용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일은 억압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건륭제(재위 기간 1736~1796) 시기 야생삼 채취량이 점점 감소하자 길림성 주민들은 은밀하게 인삼 재배에 돌입했다.
산속에서 어린 삼을 발견하면 표시를 해두고 보호했다가 수년 후에 채취하거나, 더 나아가 어린 삼을 산중에 이식하거나 종자를 뿌려서 키우는 일을 시작했다.
1794년부터 청 정부는 여러 차례에 걸쳐 산속에서 인삼을 재배하는 사람들을 색출해서 처벌했다.
재배삼이 官蔘에 섞여 유통되는 바람에 인삼의 품위가 손상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1820년대가 되면 비밀리에 이루어지던 인삼 재배가 점차 공공연해지고 인삼 수급이 심각해진 정부도 결국 인삼 재배를 허락하게 된다.
처음에 사람들은 큰 수익을 얻기 위해 어린 야생삼을 빨리 생장할 수 있는 환경으로 옮겨 심어 키우는 식으로 배양했다.
그렇게 얻은 인삼 종자를 파종하고 번식시키는 과정에서 園蔘 재배 기술이 정립되었다.
원삼의 주산지는 장백산 지역으로, 시간이 흐르면서 그 주변으로 재배지가 확대되었다.
중화민국 건립(1912) 즈음이 되면 인삼 재배업은 다시 궤도에 오르게 된다.
이때부터 길림성은 중국의 인삼 재배업 중심지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은 인삼 재배자들에 대해 잔혹한 통제정책을 시행한다.
抗日 역량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산간 지역에서 삼광 정책(모두 죽이고,불태우고,빼앗는다)을 실시하면서 장백산 지역의 인삼업을 파괴했던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인삼 가격을 낮추고 대량수매를 강행하여 인삼 재배자들의 수익을 탈취했다.
이러한 혹독한 압박 정책으로 인해 중국 동북 지역의 재배삼 생산량은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다.
설혜심의 저서 '인삼의 세계사'에서 인용하는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