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체찰사에게 글을 올리니 다음과 같다.
삼가 생각건대, 지금 회복할 형세를 7도에는 믿을 데가 없고 오직 호남 한 도가 회복의 근거입니다. 영남의 적이 항상 삼키려 하여 여러 번 방자히 덤볐으나 지금껏 마구 몰아 충돌하지 못하고 한 귀퉁이가 보존된 것은 임(任)ㆍ최(崔)의 두 군사가 그 요해지를 질러 막아 보거(輔車)의 형세가 되어 방어하는 방책을 설정한 까닭이니, 두 군사는 실로 호남의 울타리요 국가의 병풍입니다. 지금 근왕(勤王)하려는 행동은 비록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이나, 울타리를 스스로 걷어서 흉한 놈들이 먹어 들어오도록 한다면 아마도 중흥의 큰 계책이 아닐 듯합니다. 의로써 말하면 왕실을 호위함이 신자의 직분으로 국난을 급히 여기는 데 먼저 할 바이니, 조정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호종하려는 계획이 두 장수의 당초의 마음이지마는, 사세를 가지고 말한다면 영남이 없으면 호남을 잃는 것이요, 호남이 없으면 국가가 회복될 가망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남도 백성이 두 장수를 만류하고자 하는 것은 감히 한 도를 사사로이 하고 군부를 뒤로 하려는 것이 아니라, 회복할 근거를 잃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은 나라 전체를 위한 것이요 한 도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나라 전체를 가지고 호남에 비교하면 한 몸에 털 하나가 있는 것과 같으니 한 도의 존망을 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7도가 함몰된 뒤에는 돈ㆍ곡식ㆍ갑옷ㆍ칼이 모두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이니, 이도가 국가에 관계됨이 큽니다. 하물며 지금 멀고 가까운데서 유민들이 귀한 이나 천한 이나 구름처럼 모여들어 전라 한 도로써 목숨을 부치는 곳으로 하고 있는데, 이 도가 또 함락되면 유민들은 어디로 돌아가며 국가는 또한 누구에 의지하여 회복하리오. 두 군사가 올라가는 데는 또 낭패될 사세가 있으니, 지난해 가을ㆍ겨울 사이로부터 두 군사가 영남의 적진에 깊이 들어와서 얼음 얼고 비 오는 속에 매복하고 서리와 눈을 맞는 가운데 서서 적의 총칼을 무릅쓰고 거의 죽다가 살아난 것이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 뒤로부터 역질(疫疾)이 전염되어 죽음이 연이어졌으므로 모든 군사들이 전쟁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여 도망한 자가 반이 넘고 유진(留陣)한 자는 피곤합니다. 만약 또 멀리 만리 길을 달려간다면 두 장수의 충성은 비록 근왕하기에 간절하나 군사가 흩어져 남음이 없다면 아마 하상(河上)에서 소요(逍遙)함[《시경(詩經)》〈청인편(淸人篇)〉의 내용으로 정(鄭) 나라 임금이 고극(高克)이란 신하에게 병권(兵權)을 주고 자신은 하는 일이 없이 하상에서 소요하며 놀고만 있는 것을 풍자한 것이다]이 될 것입니다. 그런즉 이미 난을 방어하는 이익도 없고 또 회복의 효과도 잃을 것이니, 아마도 두 장수가 가는 것은 해가 있고 이익은 없을 것입니다. 이뿐만 아니라 호남이 본래 정예하다고 칭해졌으므로 왜적이 간 곳마다 거칠 것이 없어도 오직 이 도만은 완전할 수 있었는데, 생등(生等)의 망령된 계책으로는 대가(大駕)가 파천하였으니 사세가 서쪽 한구석만 보존할 수 없습니다. 전란의 나머지에 경비도 부족하고 기계도 갖추지 못할 것이니 이것이 어찌 오래 머물 곳입니까. 진(晉) 나라의 건업(建業)과 송 나라의 임안(臨按)은 다 사세가 부득이한 데서 나와서 마침내 중흥의 업을 이루었는데[외족(外族)에게 중원(中原)을 뺏기고 강동(江東)으로 건너간 동진(東晉)의 도읍은 건업이요, 남송(南宋)의 도읍은 임안이다], 우리나라에 호남이 있는 것은 건업과 임안에만 견줄 것이 아니니 이 도를 완전히 보존하여 회복을 도모함이 오늘의 급무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명공(明公)께서는 어리석은 생등의 억측한 계책을 용서하고 살피시어 급속히 임금께 아뢰어 주시면 국가에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경상도 우순찰사의 장계는 다음과 같다.
지난해 10월에 진주(晉州)가 장차 함락되려 할 때에 신이 장악원 첨정(掌樂院僉正) 조종도(趙宗道)와 공조 정랑 박성(朴惺)을 보내어 호남 좌우 의병에게 구원을 청하였더니, 임ㆍ최 두 장수가 호남과 영남은 보거(輔車)처럼 서로 의지하는 형세가 있는데 존망과 성패에 기회가 급하다 하여 곧 군사를 이끌고 서로 잇달아 응원하였습니다. 전 주부 민여운(閔汝雲)이 또한 태인(泰仁)으로부터 와서 비록 진주의 싸움에 미처 참가하지 못하였으나, 성주(星州)ㆍ지례(知禮)의 경계에 주둔하여 본도의 의병대장 김면(金沔)ㆍ정인홍(鄭仁弘) 등과 더불어 협력하여 적을 쳐서 누차 접전하여 적을 죽인 것이 심히 많으니, 적이 자못 기운이 꺾여 숨고 나오지 못하므로 한 도의 사람들이 바야흐로 중하게 의뢰하여 거의 의각(猗角)의 형세[한 손으로는 그 뿔을 잡고 한 손으로는 그 발을 비튼다는 뜻이다]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호남 사람이 행재소에서 돌아와서 전하기를, 조정의 의론이 두 의병장을 불러 근왕하려 한다 하매, 두 장수가 기별을 듣고 바쁘게 곧 올라가려 합니다. 본도가 함몰된 나머지에 겨우 보존된 것이 5, 6곳의 피폐한 고을이니, 흉악한 적이 사면에 가득하여 반드시 집어 삼키고야 말려 합니다. 이때를 당하여 호남의 군사가 비록 여기에 머물러 서로 응원하여도 역시 염려가 있는데 하루아침에 군사를 걷어 물러간다면 적이 응원이 없는 것을 알고 마구 덤빌 걱정이 결단코 아침 저녁에 있을 것이니, 이 도가 이미 함몰되면 호남이 차례로 침범을 당할 것이요, 호남이 지탱하지 못하면 국가가 회복할 근거는 여지가 없어질 것입니다. 생각함이 이에 미치니, 마음이 찢어지려 하여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겠나이다. 조정에서 십분 참작하여 두 장수를 본도에 머물기를 허락하여 보장(保障)을 견고하게 하도록 상세하게 잘 아뢰어 주소서.
체찰사가 또한 사정을 열거하여 급히 장계하니 조정에서 두 의병 부르는 것을 중지하다.
○ 제독 이여송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부터 황해도를 지나서 바로 임진강을 건너는데 초마(哨馬)가 회보(回報)하기를, “선봉장 사대수(査大受) 등이 왜적 1백여 급을 창릉(昌陵) 밖에서 잡아 베었다.” 하니, 여송이 크게 기뻐하여 다만 수하의 장관(將官)과 가정(家丁)들만 거느리고 달려서 벽제역(碧蹄驛)에 이르렀더니, 적이 유인하여 진흙 속에 몰아넣고 좌우에서 공격하니 용사들이 많이 죽었다. 여송은 여러 장수와 더불어 후진(後陣)이 되어 퇴각하는데 적이 추격하여 앞 고개에까지 이르렀다가 관군이 크게 이르는 것을 보고 달아나 경성으로 돌아왔다. [고사(考事)에서 나온다.]
이보다 먼저 선봉 사대수가 부총병(副總兵) 이여남(李如楠)과 더불어 정예한 기병을 뽑아서 거느리고 승세를 타고 적을 추격하여 경성 서소문(西小門) 밖에 이르렀다가 적병이 맞아 싸워서 어지러이 죽이니 관군이 패하여 여남이 사령(沙嶺)에서 죽었다 한다. ‘[이보다 먼저’ 이하는 들은 바가 고사에서 나온 말과 다르니, 길에서 들은 것으로 믿을 수 없다.] 중국 조정의 병부에서 내고(內庫)의 은 3천 냥을 내어 본국에 보내주어 공이 있거나 전사한 인원들에게 주기를 청하여 황제의 허락을 얻었는데, “조선이 왜적을 방어하는 데 공이 있거나 전사한 인원에게서 족히 충용(忠勇)을 보겠으니 상을 주기를 허락한다. 국왕에게 전유하여 각 도의 장령(將領)을 엄하게 독려하고 힘껏 회복을 도모하여 중국이 구원하는 뜻을 저버리지 말라 하라.” [고사에서 나온다.]
15일. 성주의 적이 군사를 철수하여 퇴각하여 내려가므로 연로(沿路)에 있던 호남ㆍ영남 여러 군사가 본성에 들어가 점거하다.
○ 각 도 신민에게 내린 교서는 다음과 같다.
왕은 이렇게 말하노라. 아! 임금과 신하의 의리는 천지에 뻗쳐 항상 있고, 충의의 마음은 천성에 뿌리 박혀 없어지지 않아 사람마다 다 있는 것이니 어찌 권하기를 기다리랴. 비록 군사의 많고 적음이 같지 못해 소탕하기는 쉽지 않았으나, 이제 이미 천자의 위엄이 떨쳤으니 어찌 떨쳐 일어나지 아니하랴. 공손히 생각건대, 성천자께서 우리의 조종이 대대로 충성을 도탑게 한 것을 생각하고 과인이 풀밭에 파천한 것을 민망히 여기시어, 이에 천하 대도독(大都督) 이여송에게 명하여 정예한 군사 수만 명과 복건(福建)과 절강(浙江)의 화포수(火炮手)를 거느리고 이미 본월 8일에 평양성을 쳐서 함락시켜 전성(全城)을 수복하여 왜적 2만여 명을 무찔러 죽이고, 적추(賊酋) 행장(行長) 이하는 찍고 베고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어서 벗어나 도망한 자가 없었다. 원래 본국의 인민으로서 역(逆)을 버리고 순종해 온 자는 일체 죽음을 면하여 모두 복적(復籍)을 허락한다. 황제의 은혜는 천지와 같아서 초목이 다 자라나고, 황제의 위엄은 뇌성 번개와 같아서 부딪고 범하면 타고 부서지지 않음이 없다. 흠차경략 병부시랑(欽差經略兵部侍郞) 송응창(宋應昌)이 친히 명령을 받들어 적을 토벌하매 무릇 지휘하는 바가 일마다 귀신의 계산과 같고, 찬획경략 병부원외랑(贊畫經略兵部員外郞) 유황상(劉黃裳)과 병부주사(兵部主事) 원황(袁黃)이 마음을 한가지로 해 협찬하여 적을 멸하기를 맹세하고 본국에 와 싸우면서 격려하고 권유하기를 조목조목 타이른 것이 명백하고 간절하니 무릇 사람의 마음을 가진 이라면 누군들 감동하지 아니하리오. 또 접견하는 날에 대면하여 군사를 불러 모으라는 말을 들었으므로 이 열 줄의 글을 내려 팔방의 사람들에게 두루 타이르노니, 너희 각 도의 대소 관사(官司)와 초야에 있는 충의의 선비들은 각기 마음을 분발하고 목숨을 바치며 몸을 잊고 순국(殉國)하여 혹은 의병을 소집하여 관군을 돕고 혹은 호걸들에게 타일러서 왕사(王師)을 맞이하며, 혹은 적이 돌아가는 길을 막고 혹은 적이 군량 소송하는 길을 끊어서 무릇 기회에 맞는 바를 모두 스스로 편한 대로 따르기를 허락하노라. 아! 국중의 풍진에 오늘의 충절을 바치면 능연각(淩煙閣)과 운대(雲臺)에 만세의 공훈을 함께 누리리라[한 명제(漢明帝)는 남궁 운대(南宮雲臺)에 중흥한 28장수의 화상을 그렸고, 당 태종(唐太宗)은 능연각에 창업한 공신의 화상을 그려서 기념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타일러 보이니 잘 알리라고 생각한다.
○ 경상 우병사 김면(金沔)이 졸(卒)하였으므로 전라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를 임명하고, 황진(黃進)으로 충청 병사를 삼고 고언백(高彦伯)으로 경상 좌병사를 삼다.
전라 감사 권율(權慄)이 수원으로부터 군사를 나누어 두 패로 만들어 4천 명을 병사 선거이(宣居怡)에게 주어 금천산(衿川山)에 둔쳐서 응원이 되게 하고, 스스로 1만여 명을 거느리고 양천강(楊川江)을 건너서 고양(高揚)의 행주 산성(幸州山城)에 나아가 둔쳤다. 창의사(倡義使) 김천일(金千鎰)은 강화로부터 나와서 바닷가 언덕에 진을 치고 충청 감사 허욱(許頊)은 통진(通津)에 진을 쳐서 아울러 응원이 되었으며, 충청 수사 정걸(丁嵥)도 또한 응원 중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