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후, 다리가 너무 이상해. 이상하지 않아? 그렇지? 아냐, 이상해.” 카메라 앞에 선 엄정화는 시종 종알거리며 코디네이터의 의견을 물었다. 카메라 뒤편의 모두가 ‘이상하긴커녕 예쁘기만 하네’라 생각하고 있는데도 그녀는 구시렁대곤 했다. 그런데도 별로 거슬리지 않는 것은 신기한 일이었다. 그건 그녀의 애교섞인 말투와 표정 탓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쨍한 스포트라이트 속에서 정상의 가수로 군림해온 그녀의 프로 의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리라.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통해 배우로 확실하게 ‘재발견’된 엄정화가 1년 가까운 기간 동안 요가 비디오를 출시한 것 외에 눈에 띄는 활동을 펼치지 않은 건 의외의 일이지만, 그녀 말을 들어보면 이 또한 프로 의식의 발로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시나리오는 좀 들어왔는데, 별로 하고 싶은 건 없었어요. 대부분 남자 캐릭터를 뒷받침해주거나 뒷배경에 해당되는 역할이었으니까. 늦게 물이 올랐는데 정말 마음에 드는 걸 해야 하지 않겠어요?”
그러던 차에 만난 <싱글즈>는 기분좋게 선택할 수 있는 작품이었다. 세상과 당당히 맞설 줄 알고 성적 욕구에도 솔직한 여성인 동미라는 캐릭터도 마음에 들었다. “시나리오의 발랄한 분위기도 좋았지만, 그 와중에 생각할 여지를 주고 사회에 존재하는 어떤 사람들을 대변한다는 점이 정말 괜찮았어요.” 아닌 게 아니라 동미는 현대 한국사회의 여성들의 고민을 한몸에 보여주는 인물이다. 이성친구와의 우정, 사랑, 동거, 미혼모 등의 문제를 피하지 않고 쿨하게 승부한다. <싱글즈>의 동미는 <결혼은…>의 연희와 일면 비슷하지만 상당히 다르기도 하다. 연희가 ‘연애 따로 결혼 따로’라는 생각을 품었다면, 동미는 ‘섹스 따로 연애, 결혼 불필요’식의 사고를 한다. 룸메이트인 정준이 사귀던 여자가 갑자기 조건이 좋은 신랑과 결혼을 하자, 동미는 ‘그 계집애는 지금 장사하고 있는 거야. 평생 잘 먹고 잘살려고’라고 말한다. “좀 그렇대요. 내가 내 욕을 하는 셈이니까. 이율배반인가?”
그러고보니 동미 역할이야말로 엄정화랑 딱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초대> 같은 섹시한 노래의 이미지와 <결혼은, 미친 짓이다>의 도발적인 인상 때문인지 실제 엄정화의 삶도 솔직하고 거침없을 거라 여기게 된다. 그런데 반응이 엉뚱하다. “어후, 근데 왜 다들 실제의 내가 동미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거죠? 많이 다르거든요.” 그렇다고 드라마 <아내>에서 보이는 수동적이고 지고지순한 여성의 엄정화의 본모습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란다. “가끔 내게서 도발적인 모습을 발견할 때도 있지만, 그게 그렇게 많은 부분 같진 않아요. 글쎄, 남들도 다 그렇지 않나?”
엄정화의 다음 계획은 가수 ‘컴백’이다. <싱글즈>를 개봉시킨 뒤 곧바로 음반작업에 들어가 8월말이나 9월초 8집을 발표할 계획. “영화? 아무 데나 나갈 순 없고, 좋은 게 주어지면 하는 거죠….” 콧소리에 실린 묘한 여운은 <싱글즈>를 통해 배우로서 한 단계 더 뛰어오르고픈 갈망의 메아리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