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신칭의의 위대함 –롬 1:16~17
(한마음 개혁교회 김성일 집사 묵상의 글)
오늘날 한국교회의 이신칭의 교리가 흔들리고 있다. 보수교회라 표방하는 곳에서 혼합주의적 알미니안주의적 이신칭의를 가르침으로 성도들이 구원에 확신을 못 갖고 낙담하게 되고 자신이 신자인가에 대한 확신도 흔들리고 있다. 착하게 성실하게 살아야 구원을 받을 수 있고 그렇지 못하면 구원에서 탈락할 수 있다고 하고 구원은 죄로부터의 구원이 아닌 사회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라고 가르치고 있다. 오직 은혜,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고 구원은 인간이 어떻게 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혼란한 시대에 로마서를 통해 정통 개혁주의에서 말하고 가르치고 있는 이신칭의 교리를 바로 확립해야 할 것이다.
로마서 1장 17절의 이신칭의에 대한 다양한 이해와 논쟁이 있다. 첫째로 로마 카톨릭과의 논쟁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은혜와 믿음을 이야기하지만,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윤리적 선행도 필요하다고 하는 신인협력주의를 주장하였다. 그와 반대로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믿음과 은혜를 말했다. 루터는 독일어로 성경을 번역하면서 17절에 원문에 없는 오직 이라는 말을 의역해서 집어넣었다. 이 논쟁의 핵심은 ‘오직’에 있다. 오직 은혜와 믿음이 아닌 인간의 행위를 포함시키면 이것은 공로주의가 된다.
두 번째로 알미니우스와의 논쟁이다. 믿는 것은 우리가 하는 것이고 회개도 우리가 하는 것이니 인간의 종교적 열심과 결단이 믿음에 있어서 중요하다고 해석하였다. 예수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으심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결단과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믿음을 구원의 조건과 원인으로 본다. 그러나 우리 정통 개혁주의 장로교에서는 믿음은 수단과 방법이지 원인이 아니라고 가르쳐 왔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믿음을 통해서 구원받는 것이지 믿음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은 아니다. 이 논쟁은 믿음을 구원의 원인으로 보느냐 수단으로 보느냐의 싸움이었다.
세 번째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때의 논쟁으로서 칭의에 있어서 의가 무엇인가에 대한 것이다. 정통적으로 의에 대해서 말할 때 죄를 전제로 하였다. 인간의 첫 조상이 아담이 인류의 대표로서 하나님의 율법인 행위언약을 어김으로써 아담과 그 이후로 태어난 모든 인류가 죄인이 되었다. 하나님의 무서운 정죄를 받게 되어 전적으로 부패되었고 정녕 죽으리라는 죽음의 형벌을 받게 되었다. 그로 인해 인간의 실제로 죽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지고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게 된 것이다. 인간이 죽는 이유는 이 죗값 때문이다.
하나님께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죄에 대한 책임(죄책)이 생기고 하나님의 무서운 정죄를 받아 실제적으로 의를 상실하고 전적으로 부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원죄이고 이 원죄를 해결하는 것이 구원이다. 죄사함 받고 상실한 의를 획득해야 한다. 예수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사함을 받고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시고 부활하심으로 의를 완벽하게 획득하셨다. 이것을 그리스도의 수동적 순종, 능동적 순종이라고 말한다.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함으로 아담에게 약속하였던 영생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 영생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이다. 단순히 피조물로써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서 영생하는 것이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께 전가되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죄책이 해결되어 죄사함을 받고 율법에 완전하게 순종하신 의가 우리에게 전가되어, 하나님으로부터 의롭다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의 복을 받게 되는 것이 의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능동적 순종을 부정하고 수동적 순종만 강조함으로써 정통적으로 가르쳐 왔던 이신칭의 교리가 깨지게 된 것이다.
네 번째로 1800년대 신비주의와 경건주의 확장으로 믿음에 대한 정의가 문제가 되었다. 정통적으로 믿음이란 성경을 믿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교리를 깨닫고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신비체험과 은사 체험을 하는 것이 자신의 소원을 이루는 것이 믿음이라고 본 것이다.
마지막으로 새관점학파이다. 그들은 믿음도 중요하지만, 삶도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결국 인간의 행위를 구원에 필요조건으로 보는 것이고 공로주의이다. 그리고 회심 준비론이 있는데 그들은 중생 전에 회심을 준비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전적으로 부패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신의 힘으로 구원을 준비할 수 없다.
이신칭의와 구원에 있어서 인간의 행위를 넣는다면 그것은 공로주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은 깨지게 되고 하나님은 무능력한 신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아무리 은혜를 줘도 인간이 거부하면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구원과 칭의의 주체가 인간이 되는 것이다. 구원과 칭의는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서 이루어지는 것이고 신인협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구원과 칭의의 원인은 믿음 때문이 아니다.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고 구원과 칭의의 수단이지 원인이 아니다.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예수그리스도를 믿어 죄사함 받고 의롭다 여김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영생의 복을 누리며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순종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게 해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부자가 되고 사회정의와 평등을 이루는 것이 구원이고 복음이 아니다. 우리가 착해서, 열심히 해서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로, 오직 예수그리스도의 공로로 구원받고 칭의 받음으로써 선을 행하고 성화해 가게 되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봐도 얼마나 나약하고 악하고 부패한 존재인가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의 법을 완전히 지킬 수 없으며 날마다 말과 생각과 행동으로 범죄한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가 아니면 선을 행할 수 없고 우리의 행위로서는 하나님의 공의에 완전하게 만족시킬 수 없다.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로 주어진다는 정통적인 개혁주의 장로교의 이신칭의 교리만이 구원에 대한 확신을 주고 부족하고 연약하지만 힘을 내서 하나님의 자녀로서 감사하며 부단히 하나님의 계명을 순종하며 살아갈 수 있게 한다.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