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물축제가 다가온다지만, 예양강 그 뿌옇게 고인 듯한 물을 보면, 늘 마음이 불편해진다. 두텁게 가라앉은 뻘 위로 마지못해 꿈틀대는 듯한
수류(水流). 그 옛날 백림소를 오르내리던 날렵한 은어(銀魚)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 큰물 난리가 그리워진다. 강변 자갈밭에 천막 공연을
하던 서커스단은 홍수 피해를 입고, 학생들은 모금 운동을 했다. 건산~평화 ‘한들(大野)’ 들판이 온통 잠겼는데, 제암산 금성저수지는 드디어
터진다는 말인가? 동교 다리와 제방은 과연 무너질 것인가? 광주 가는 길은 끊어지고, 사람들 가슴은 큰물난리에 타들어갔다. 둥둥 떠내려가는
돼지와 소를 구경하며, 동동 두 발을 구르면서도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큰 고통과 초조함 속에, 한편으론 흥분과 즐거움도 수반되던
연례행사였다. 그 시절 장흥읍 사람들에겐 ‘이번 큰비도 곧 그치리, 그치지 않는 비가 어디 있으랴, 오늘 떠밀려가도 내일 또 시작해야하리’, 그
고단했던, 홍수(洪水)의 추억이 있었다. 1521년 겨울, 곤장에 온몸이 터진 30세 문과급제자 ‘영천 신잠(1491~1554)’이 장흥에
나타났다. ‘신숙주’의 증손자인데, 예양강변 언덕에서 17년 유배살이를 했다. 1522년 음7월 초2일에 장흥의 大雨 大水를 처음 겪으며,
예양강 범람(泛濫)에 관련한 詩 한수를 남겼다 -“7월 초2일, 大雨(대우)” ..雨脚大如注(우각대여주/빗발은 크게
쏟아붓듯),,泛濫大野沒(범람대야몰/한들大野 온통 잠기고),,水災年年雨(수재년년우/水災는 매년 거듭되고) ..등이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표현이다. (다른 부분 내용은 생략한다) 그런데 장흥사람이면 더 공감할 수 있는 한마디를 꺼내놓았다.
“黃漲(황창)”. 그 상황을 일거에 정리해주는 “黃漲”
“黃漲迷四顧(황창미사고) /황창(黃漲)에 주변 四方이 혼미해졌다”고 하면서, 함께 한탄했다. ‘황창(黃漲)’에는 드물게 ‘황사 하늘’
용례도 있지만, 그 시제(詩題)가 ‘大雨’이고, ‘大水 泛濫(범람)’을 노래하는 만큼 ‘흙탕물 洪水(紅水)’로 보아야 할 것. 예양강 大水는 늘
황톳물이 범람하는 ‘黃漲’이 특징이었다. 콸콸콸 도도하게 흐르던, 黃土色 大水 위력을 유배객 역시 놓치지 않았다. 그 누렇고 붉은 흙탕물로
넘쳐나던 ‘黃漲’이야말로 장흥사람들 심경을 바로 꿰뚫는 한 마디 아니겠는가? 적어도 ‘예양강 黃漲’에 관한 한, ‘영천 신잠’ 그가 처음 읊었을
것도 같다. 그 이후의 장흥 유배객 심동구(1594~1660)와 그 아들 심유(1620~1688)도 “예양강 대수, 觀漲(관창)”을 노래하긴
했다. ‘大水(큰물) 물구경’에 관한 통상적 용례는 ‘觀漲’이고, 그 물줄기 溪,川에 따라 ‘溪漲, 川漲’도 된다. ‘물고기 구경(觀魚)’,
‘물고기잡이 구경(觀漁)’도 있다. 어쨌거나 장흥지방 옛 시인들이 따로 ‘黃漲’을 말한 적은 없어 보인다. 서울 ‘한강 동호’에서 장흥선비
‘남파 안유신(1580~1657)’이 ‘東湖 觀漲’을 읊은 적은 있다. 예양강의 시인, 남도비가사(南道悲歌士) ‘옥봉 백광훈’은 수심(愁心)에
젖은 예양강을 노래했을 뿐이고, ‘黃漲, 觀漲’을 언급하지는 아니했다.
아, 지나간 시절 ‘黃漲’이여, 다시 그 ‘黃漲 洪水’가 진다면, 저 뻘바닥과 끈적한 흐름은 단박에 뒤집히며 쓸려가고 말 일이다. 방류된
은어, 방사된 오리, 답답한 잉어는 그 틈에 잠시 하늘을 보고 큰 숨을 내쉴 수 있을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