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조 최용궁(崔龍宮)은 전주최씨의 시조 최순작의 8세손이다. 전주최씨가 경주최씨에서 갈라졌으니 초계최씨도 경주최씨의 계열인 셈이다. 최용궁은 고려 충열왕 때 판사 등을 지낸 뒤 팔계군에 봉해져 자손들이 초계를 관향으로 삼았다. 팔계현은 초계현의 옛 이름이다. 초계는 경남 합천군 초계면의 지명이다. 2세 최징은 한림학사와 찬성사를 역임했고, 3세손 최덕강은 한림을 거쳐 호부상서에 이르렀다. 4세손 최성일은 삼사찬성, 평의사를 지냈다. 그의 큰아들 최희동은 예부상서를 지내 조부인 최덕강과 함께 상서에 올랐다. 둘째 아들 최부동은 장사랑, 셋째 아들 최수동은 통덕랑을 지냈다. 이상은 모두 최징계이다. 시조공의 둘째 아들 최휘는 무과로 경성부판관을 지냈고, 셋째 아들 최당은 충숙왕 때 문과에 올라 한림을 지냈고 찬성을 거쳐 대광량절공신이 되어 문간이라 시호되었다. 그 아들 최문도는 광록대부 첨의참리 상호군에 올랐으며, 그의 큰 아들 최검영은 현감을 지냈고 셋째 아들 최현은 평장사를 지냈다. 이상은 5세손까지의 초계최씨의 고려조 관력(官歷)이다. 고려조에 있어서 초계최씨는 대단한 현족(顯族)이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견주면 조선조에 들어와서 크게 돋보이지 않는 느낌이다. 최동희의 아들 최맹하는 태종 조에 현감을 지냈고, 그 아들 최제남은 세종조에 문과에 올라 벼슬이 부사에 이르렀고 아들 최종복은 문종 조에 현감이 되었다. 최호원은 단종 조에 문과에 올라 첨지로 있을 때 수양대군파의 등장을 예견하고 벼슬을 버리고 백운산에 들어가 숨어 살며 자손들에게 출사(出仕)를 말렸다. 그 뒤 단종의 피살을 듣고 두문불출, 통곡하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상이 10세손까지의 관력(官歷)이다. 그리고 11세손과 12세손 최한영 대에는 이렇다 할 벼슬을 얻지 못했다. 최산두는 초계최씨가 배출한 인물이다. 조선조 성종 때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그는 김종직, 김굉필 등의 문하에서 공부했다. 19세 때 조광조 등과 더불어 학문을 강론했으며 23세 때 성균관에 들어가 퇴계 이황에게 수학했다. 여러 벼슬을 지내다 기묘사화 때 동복으로 유배된다. 유배지에서 유명한 하서 김인후 등을 가르친다.
최산두의 큰아들 최병길은 어모장군을 지냈고, 둘째 아들 최정길은 홍문관수찬, 사헌부장령 등을 역임했다. 손자 중 최종원은 선무원종공신으로 병조참의에 증직되었으나, 둘째 손자 최종언은 벼슬을 버리고 순창에 은거했다. 최산두의 아우 최산후는 승문원박사를 지내다 회령에 유배됐다. 최득리는 최산후의 아들로 사포서별제, 광주부판관을 지냈고, 아들 최호립은 승사랑, 손자 최우성은 선무랑을 지냈다. 최계최씨의 관열(官閱)은 여기에서 멈추는 듯하다. 말하자면 조선 중기 이후에는 이렇다 할 벼슬이 없어 보인다는 말이다. 그래서 최산두가 더욱 거목으로 종사에 자리 잡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런 때문인지 초계최씨의 후손들은 신재공(新齋公) 최산두에 대한 위선사업(爲先事業)이 활발했다. 동복(同福)에 있던 도원서원이 철폐되자 고종 13년에 기정진 등의 발의로 재건을 꾀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 뒤 1973년 지방 유림과 후손들의 노력과 성금으로 1977년 4월에 도원서원을 복건했고 그보다 앞서 유허비도 세운 일을 들 수 있다. 이 일에 적극 참여한 후손은 최학두, 최동주, 최익주, 최상만, 최형구 등 10여명이었다. 조선시대 과거 급제자는 최경모(崔璟模, 1840 庚子生) : 문과(文科) 고종10년(1873) 정시 병과(丙科), 최순(崔淳, 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해(崔海, 1598 戊戌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영종(崔永宗, 1593 癸巳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형우(崔亨祐, 1636 丙子生) : 무과(武科) 현종13년(1672) 별시 병과(丙科), 최산호(崔山浩, 1577 丁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몰로(1601 辛丑生) : 무과(武科) 인조15년(1637) 별시 병과(丙科), 최유헌(崔裕憲, 1601 辛丑生) : 무과(武科) 효종2년(1651) 별시 병과(丙科), 최득린(崔得麟, 1594 甲午生) : 무과(武科) 인조11년(1633) 식년시 을과(乙科) 등 모두 9명이 문과 1명, 무과 8명이다. 현대 인물은 최인호(동서식품(주) 부사장), 최영철(국회부의장) 씨 등이 있다. (무순, 전 현직 구분 안 됨). 항렬자는 24世 모(模), 25世 병(炳), 26世 균(均), 27世 종(鍾), 28世 영(泳), 29世 락(樂), 30世 열(烈), 31世 재(載), 32世 흠(欽), 33世 용(溶), 34世 주(柱), 35世 광(光)이다. 본관 초계(草溪)는 현재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 지역으로 신라 때는 초팔혜현(草八兮縣)이라 불리었고, 757년(신라 경덕왕 16) 팔계로 고쳐 강양군의 영현으로 삼았다. 940년(고려 태조 23) 초계로 명칭을 고쳤고, 1334년(고려 충숙왕 3)에는 초계현이 군으로 승격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합천군 초계면이 되었다.
집성촌은 전남 승주군 송광면, 전남 승주군 상사면, 전남 고흥군 봉래면, 경남 남해군 삼동면, 전북 순창군 일원, 전북 정읍시 일원, 전남 강진군 일원, 전북 군산시 일원, 전남 여천군 일원, 전남 담양군 일원 등이다. 초계최씨의 선계는 묘영이 파주 등 경기 지역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이곳에 세거했던 것으로 보이고, 10세손 최호원이 단종 조에 전남 광양에 있는 백운산으로 퇴거한 이래 자손들이 전라도 일원에 자리 잡게 되었던 것 같다. 15세손 최완언의 대에 이르러 일부가 광양에서 순창으로 이거했던 것 같고, 또 16세손 최석린의 대에 와서 일부가 순창으로부터 장성 땅으로 옮겨갔다고 믿어진다. 16세손 최경린의 자손들이 전남 해남군에 터를 잡았고 최천상의 자손들은 완주군의 구이 들지에 세거해 온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최종린이 전북 정읍으로 옮겨간 이래 이곳에도 자손들이 살았던 것 같다. 한편 15세손 최종국의 후손들은 경남 남해군에서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것으로 보이며, 16세손 최왕린의 아들 최준의 대 이래로 전남 신안군의 도초에도 후손들이 살았던 것 같다. 또한 18세손의 대에 와서 최동석의 후손들이 전북 옥구에 정착하게 되었고 최우송이 완도군의 청산에 살았다는 사실이 밝혀진 점으로 미루어 이 무렵부터 완도군 일원에 세거하게 되었다고 믿어진다. 그밖에 초계최씨의 후손들은 19세손의 대로부터 약 4-5대에 걸쳐 전남 승주, 담양, 곡성, 고흥의 점암-남양-포두 등지에, 그리고 순천, 강진, 여천 등지와 전북 남원, 부안, 멀리 북제주군 등지로 옮겨가 정착하였던 것 같다. 이들 지역은 여려 대 동안 초계최씨의 세장지지(世葬之地)로 지켜지고 있기 때문이다. 1930년에 이르러 전북 순창군, 남원군, 부안군 일원, 정읍, 옥구군 일원, 전남 승주군, 여천군, 담양군, 강진군, 해남군, 장성군, 경남 남해군 일원에 많은 후손들이 모여 살았다. 특히 전남 고흥과 완도에는 2백여호 이상이 집성촌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1970년대에는 전남 승주군 송광면-상사면, 여천군 일원, 고흥군 봉래면, 완도군 일원, 전북 순창군, 부안군, 정읍군 등지와 경남 남해군 삼동면 등지에 모여 살았다.
통계청의 인구 조사에 의하면 초계최씨는 1985년에는 총 5,158가구 22,209명, 2000년에는 총 8,612가구 27,213명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1985년 당시 전국의 지역별 인구 분포는 서울 3,975명, 부산 1,812명, 대구 112명, 인천 479명, 경기 1,306명, 강원 168명, 충북 151명, 충남 293명, 전북 2,585명, 전남 10,196명, 경북 118명, 경남 784명, 제주 230명이다. 전체 인구 가운데 전남 지역에 절반가량이 살고 있다. 그 뒤 15년 후인 2000년 현재는 서울 5,400명, 부산 2,332명, 대구 135명, 인천 1,274명, 광주 2,537명, 대전 328명, 울산 213명, 경기 4,088명, 강원 209명, 충북 244명, 충남 305명, 전북 2,245명, 전남 6,591명, 경북 195명, 경남 883명, 제주 234명이다. 전남, 광주, 전북 지역에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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