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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
한국인들에게 복(福)은 오복(五福)을 의미한다.
오복은 수(壽), 부(富), 강녕(康寧), 유호덕(攸好德), 고종명(考終命)이다.
한국인들은 고래로부터 건강하고 부하게 덕스럽게 오래 살다 적당할 때 세상을 떠나는 것을 복으로 생각하였다. 오복은 곧 그 사람의 성공과 부귀영화, 출세의 바로미터이었다. 그러나 성서는 우리 한국인들의 전통적인 개념과 다른 복을 말하고 있다.
성서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복(아쉐르)을 하나님께서 주신 것으로 규정한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세기의 ‘아쉐르’는 복의 근원이 하나님이심을 선포하고 있다. 그러기에 시편 1장은 복을 악인의 꾀를 따르지 않는 것,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않는 것, 오만하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복은 삶에서 추구해야할 ‘귀한 가치’를 의미한다. 그리고 그런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인정하며 그에게 평화와 번영의 복을 주기 때문이다.
한국의 오복은 사람들 눈에 비치는 삶의 외형적인 것을 담고 있으나 구약 시편 1장의 복은 내면의 정신적인 것, 가치관을 말하고 있다. 복을 우열의 가치 개념으로 논할 수는 없지만 악인과 죄인의 삶을 엄히 경계한다는 측면에서 시편 1편의 복은 건강한 공동체, 건강한 사회 형성을 보다 더 가능케 할 것임이 분명하다.
오늘날 지구상 많은 국가들의 화두가 공생, 홍익인간, 상생사회, 복지사회이다. 통치를 위한 구호이든 진실로 염원하든 간에 이는 좋은 현상이다. 그러나 그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가치관, 복의 개념이 개인이나 가족, 가문의 흥왕과 부귀영화로 여전하면 공생, 홍익인간, 상생사회도 말장난에 불과하다. 우리는 결국 자신의 육신이라는 한계, 동굴에 갇힌 야수로 살다가 떠나는 것에 불과하다.
시편 1장의 복도 우리에게 불편하지만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 복이 있다. 마태복음 산상수훈 첫 머리에 나오는 팔복(八福)이 바로 그것이다. 복(마카리오스)은 헬라어로 ‘최고의 행복’, ‘최상의 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복의 개념은 ‘마카리오스‘와 ‘아쉐르’를 포함하고 있다. 팔복이 인간이 추구해야할 최고의 가치이며 인생 살면서 맛볼 수 있는 최상의 행복이라는 것이다.
어쨌든 팔복의 개념은 한국인의 관점, 더 나아가 세계의 보편적인 관점에서 볼 때도 ‘복’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마음의 저항, 반발이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팔복은 세상 모든 가치관과 문화와 문명의 위선과 가면을 벗기며 팔복을 진정한 복으로 선언한다.
참으로 팔복이 복인 것은 팔복의 구현만이 세상에 하나님의 나라, 공생 공동체, 상생사회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의 계급혁명과 투쟁을 주장하는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 유토피아는 오지 않는다. 인류는 이미 지난 100여 년 동안 이를 시도하여 부분적으로 자본주의의 병폐를 바로 잡으며 인류 사회 발전에 기여를 하였지만 그들이 부르짖는 대로 평등과 평화의 이상사회는 오지 않았다. 물질의 문제는 물질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이다.
복지와 자유를 주장하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 또한 세상에 유토피아를 가져올 수 없다. 과학의 발전과 교역을 통하여 질병과 빈곤의 문제를 일정 수준 해결하였지만 그들이 큰 소리로 주장하는 지속적인 낙수 효과는 없었고 인류 역사에 빈익빈 부익부의 극적인 대립과 심각한 악순환을 가져왔다. 물질로 물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기 때문이다.
팔복은 세계를 주름잡으며 인류를 세뇌시키고 있는 두 개의 경제사조와 다른 진리를 말한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나머지 모든 것을 창조주 하나님께서 공급해주신다’는 것이다. 팔복은 인류에게 창조의 처음 자리로 돌아가라고 권면하다. 그것만이 인류가 다 함께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생명이 충만한, 모두가 함께 활기찬 에덴의 삶을 살게 하기 때문이다.
팔복은 마음 가난, 애통, 온유, 의. 긍휼, 마음 청결, 화평, 희생적 고난이다. 이 여덟 가지 중에 첫 번 째 복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라고 한 심령 가난의 복이다.
주님께서 말씀하실 때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들었던 초대교회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부패하고 변질된 언어와 정신생활로 말미암아 주님께서 말씀하신 뜻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므로 몹시 난감하다.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무엇이며 왜 천국의 그들의 것인가?
구약의 가난한 자 ‘아나임’은 부자나 권력자의 경제적 수탈과 사회적 억압으로부터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는 사람을 뜻한다. 헬라어 ‘프토코이’는 ‘아나임’의 외연을 넓혀 준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가난한 자는 일용할 양식이 없는 가난상태를 포함하여 외적, 내적으로 세상에서 사람들로부터 아무런 관심과 지지, 위로와 사랑을 받지 못하는 철저히 소외된 사람, 죽어도 누구하나 찾아오거나 울어줄 사람이 없는 관계가 고립된 사람을 뜻한다.
종합하면 성서의 가난한 사람은 스스로 살아갈 능력이 없는 무능한 그래서 누군가에게 의존되어 돌봄 받아야 하는 사회의 짐이 되는 존재이다. 살기 위하여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절박하게 구걸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하다는 것은 가난이 스스로 존재할 수 없는 상태인 것처럼 자기 스스로 존재할 의미와 가치, 능력과 열정이 완전히 결여된 정신적 영적 공백상태이다. 실제로 심령이 가난한 자는 죽은 자처럼 무능하고 무익한 존재로서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 두렵고 불안하며 고통스럽다. 자신으로서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가야 하므로 날마다 절박한 심정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도움을 기다린다. 스스로는 인간답게 살 수 없음으로, 죄악과 유혹을 벗어날 수 없음으로,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원치 않는 악을 행하는 이율배반을 벗어날 수 없음으로, 정의와 진리보다 자신의 탐욕을 더욱 사랑하는 탐욕에서 자유로워질 수 없음으로 자기의 능력이나 공, 지혜와 지식, 희생과 헌신을 부인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스스로 서지 못하며 날마다 하나님의 나라를 사모하며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길 간구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안다. 자기의 무력함과 초라함을 안다. 자신의 무능과 무익, 무용과 무가치를 안다. 자기의 죄악과 과오, 허물을 안다. 인간의 온갖 방법과 치열한 노력의 한계와 문제를 안다. 인간의 부패와 위선, 탐욕과 교만, 독선과 폭력을 안다. 그러므로 세상을 위해 겸손히 중보와 회개의 기도를 바친다.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 자비와 용서를 구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탐욕과 교만이 인간에게 구원이 되지 못함을 알기에 하나님의 직접적인 통치,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린다. 그러므로 그들은 날마다 세상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며 세상을 넘어서는 종말론적인 삶을 산다.
오랫동안 심령이 가난한 사람에 대하여 묵상하여 자기를 낮추는 겸허한 사람, 자기를 부정하는 사람, 순종하는 사람, 자기 사상과 계획을 주장하지 않는 사람, 자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사람 등으로 생각하며 사람의 노력으로 이룰 수 있는 상태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인도에서 달릿들을 만나면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세상과 자기에게 희망을 두지 않는 사람으로 성령님의 도움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사람내지는 종말을 기다리며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인도 계급제도 속에서 가장 낮은 천민계급에 속하는 달릿은 자신으로서는 희망이 없는 존재였다. 그들은 인도의 정치, 경제, 사회와 문회 속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가난은 사회구조적이며, 종교 문화적이고 운명적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아무 것도 아니며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다. 그들은 하루 일해서 하루를 먹고 사는 하루살이였다. 나는 그들은 만날 때 마다 그들이 무슨 희망으로 사는가를 고민하며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가?” “언제 주님이 오시길 원하는가?” 등에 대하여 물었다. 나는 범사에 성령의 임재와 도움, 하나님의 간섭과 계획은 열망하며 기대하며 기도하였지만 주님의 재림에 대해서는 기대하지도, 기다리지도, 기도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그들은 성령의 임재를 넘어서 주님의 재림을 열망하였다. 그들은 지체함이 없이 이구동성으로 “주님, 지금 여기 오소서!”라고 고백하였다. 그들은 주님의 재림으로 새로운 세상, 곧 천국이 도래함을 믿었으며 그 천국 희망으로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는 해결할 수 없는 자신들의 고통과 고난, 세상의 불의와 악을 운명적으로 감당하며 종말론적인 삶을 살고 있었다.
그들의 재림신앙이 나의 뒤통수를 쳤다. 나는 당시만하여도 인간의 선한 의지와 희생적인 노력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 나는 달릿들의 재림신앙으로 통하여 주님의 약속인 재림을 희망을 하지 않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당황하였으며 충격을 받았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지 않는 자신을 분석하며 묵상한 결과 인간의 선함과 의지, 인간의 노력과 공로, 업적, 수고로 정의로운 세상, 천국이 가능하다고 믿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자신과 인간이 주체가 되어서 만드는 정의로운 세상, 천국에 대한 신념과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 세상 속에서 주체는 인간이었고 하나님은 주체인 인간을 축복해서 천국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보조자일 뿐이었다. 순간 나 자신의 영적 교만과 신앙의 불신앙을 보았다. 하나님을 믿어서 그 하나님의 도움으로 정의로운 세상, 천국을 이루고자하는 그야말로 선량하고 정의로운 신앙의 영웅, 살신성인(殺身聖人)을 탐하는 인간을 보았다. 나의 의로운 신앙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인간으로서 정의로운 세상, 천국이 가능하지 않음을 아는 사람이다. 그들은 세상에 희망을 두지 않기 때문에 자신을 쏟아 부어 재림을 촉구한다.
천국이 심령이 가난한 자의 것인 것은 그들이 천국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그 분의 통치를 받으므로 천국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의 것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나님께만 희망을 두고 하나님의 계획과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도록 자신들의 초라한 삶 전부를 하나님께 양도한다. 하나님은 그들의 능력이나 신분, 지식이나 경력을 보지 아니하시며 그들의 마음을 받으시고 그들을 자녀로, 종으로, 친구로, 동역자로 사용하여 그분의 역사에 참여시킨다. 그들은 쓰임을 받으며 새 하늘과 새 땅을 완성하실 주님, 재림의 주님을 기다린다.
참으로 역설적이게도 세상과는 달리 천국에서는 무능하고 못나고 초라한 사람들이 쓰임을 받는다. 자기를 하나님과 견주는 천재나 영웅, 장군이나 카리스마 정치인이 쓰임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별 볼일 없는 존재로 취급하는 비천한 사람, 가난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 낙오자 등이 믿음으로 은혜로 쓰임을 받는다.
그러므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자기가 무능하며 죄인이나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로 사는 사람임을 고백하며 영광을 하나님께 돌린다.
예수님께서 ‘심령이 가난한 사람’을 팔복의 으뜸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이라고 선포하신 것은 자기가 아무 것도 아닌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자만이, 천국을 위하는 모든 복된 행위는 오직 은혜로만 가능한 것임을 아는 자만이 진정으로 애통해할 수 있고, 온유할 수 있고, 의에 주릴 수 있고, 마음이 깨끗할 수 있고, 화평하게 할 수 있고 사심 없이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아무 것도 아닌 자처럼 세상에 오신 성탄절이 세상에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요, 축복인가! 그런 의미에서 성탄은 영적 혁명의 시작이고 영적 혁명의 완성이다.
성탄은 총칼로 이웃을 죽이는 피의 혁명이 아니고 스스로 자기의 살을 찢고 피를 흘리는 자기 해체, 자기 죽임의 혁명이다. 세상의 혁명과 전혀 다른 하나님의 혁명의 날에 자아의 죽음을 선포하고 하나님의 영으로 사는 ‘심령이 가난한 자’로서 혁명자로 종말론적인 삶을 살기로 다시 다짐한다.
2021.12.25. 성탄절 하나님의 혁명의 날에
우담초라하니
첫댓글 산상수훈
팔복 중
으뜸은 화평케 하는 자
즐감
감사합니다.~~~
즐감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산상수훈에서 주님께서 주신 팔복은 우열을 말할 수 없습니다.
다 소중하고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서두에서 총론적으로 먼저 말씀하신 것이 마음 가난한 복입니다.
그것은 마음이 가난해야만 나머지 7개의 복을 실천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가난하지 않으면 이웃의 슬픔을 애통해 할 수 없고 온유할 수도 없고 의에 주릴 수도 없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마음이 가난한 것이 제일의 복이라고 한 것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