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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강좌(8)】 "씨 뿌리는 비유" 信天함석헌
요한복음 8
씨 뿌리는 비유
재미있는 것의 하나가 씨 뿌리는 비유, 거기 진리(眞理)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가서 싹이 터서, 나오게 되고, 자라고, 결실(結實)하는데 이르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마음이 옥토(沃土)처럼 되어야 된다”, 이제 그 네 가지를 비유하잖아요?
마음이 길바닥 같은 사람, 또 돌짝밭 같은 사람, 가시덤불 같은 사람, 옥토 같은 사람, 그 네 가지를 마음의 상태를 빌어서, 말씀이 우리 속에 들어가서 싹이 터서, 자라고 결실을 하려면 옥토처럼 돼야 해. 그래 옥토라는 조건이 뭐냐? 그 반대쪽을 생각하면 길바닥 같지 않은 거, 또 돌짝밭 같지도 않은 거, 가시덤불 같지도 않은 거. 그러기 위해서는 ‘그럼 어떡하냐?’하면 우리가 농사할 때는 밭을 갈아 뒤집어엎고, 이제 덩이를 깝니다. 그러면 길바닥 같이 굳던 게 이제 부드러워져! 또 새 흙이 나와! 또 옅던 것이 깊어지고, 또 잡초 있던 게 없어지고, 이렇게 앉아서 우리가 생각을 하려면, 말을 서로 주고받고 생각을 하려면 마음을 한번 갈아 뒤집어엎는 작용을 할 필요가 있어.
농사해보면 알지만, 가는 것은 한번만 가는 거 아닙니다. 될수록은 자주 갈수록 좋습니다. 심기 전에는, 봄에는 물론 갈지만, 이제 여름 동안에도 이제 또 갈아요. 곡식이 있으니까 이제 완전히 다 못하지만, 그걸 휘친다고 그러잖아요? 여기 서울 지방에서는 뭐라고 그러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우리게 말로는 휘친다고 그래. 한문자로는 중경(中耕)이라고 그러는데, 가운데 중(中) 자, 갈 경(耕) 자, 중경을 한다, 풀 매지만, 풀 매는 것만이 아니라 또 휘쳐 줘야 돼. 휘치는 것도 이제 또 그건 (한 두 마디가 정확하게 들리지 않음) 여러 가지입니다. 조금 옅게 하는 것도 있고, 또 깊이 하는 것도 있고, 그것도 잘 하는 사람은 한 벌만이 아니고 잘 하는 사람은 세 벌까지 휘쳐요. 한 벌, 두 벌, 한 벌 휘치는 것이 웬 만큼 매는 것보다 좋아요. 그래 그 가는 조건이 그렇게 중요하다고 하는 거. 그 갊으로 인해서 생겨나는 게 효과가 뭐냐 그러면 첫째는 우선 부드러워지는 거예요. 씨 날라면 부드러워져. 그럼, 왜 부드러워질 필요는 뭐냐? 농사 강습같이 말을 하고 있습니다만, 다 아는 거지만, 다 아는 거 같으면서도 모르는 때가 많이 있어요. 농사꾼도 사실은 모르는 거예요. 그걸 모르고 하니까 농사 잘 못하는 거예요.
그런 의미로는 손문(孫文)의 행이지난(行易知難)이라는 말이 행하기는 쉽고, 보통 말은 이지행난(易知行難)이라고 그럴까요? 알기는 쉽고 행하기는 어렵다고 그러는데, 손문(孫文)은 그걸 뒤집어서 행이지난이라, 행하기는 쉽지만 알기는 어렵다. 그 다음에 참 힘 있는 행동이 나올려면 자기 하고 있는 일에 그 의미를 알아야 정말 힘 있는 행동이 나온다, 그래서 행이지난이라고 그런 말을 하는데, 농사하는 사람도 전통에 따라서 습관으로 모방으로 남들이 이렇게 한다더라, 이렇게 하는 법이다, 그래가지고 인제 밭을 갈고 풀을 매는데, 그래가지고는 안 된다, 그것도 물론 그렇게 하면 어느 정도효과가 나오지만, 정말 참 효과가 나오려면 이것을 왜 가는지, 뜻을 알아야 이제 그 효과가 있게 되잖아요?
종교 믿는 사람은 객사한다
인제 농사도 그렇지만 정신계(精神界)의 일은 더구나 그렇지 않아요?허되“남이 한다더라” “기독교의 예배식은 이렇다” “기독교인의 살림식은 이런 거다”, 그렇게 해서 훌륭한 이들이 체험하고 실험하고 해서,“ 인생(人生)이 마땅히 이럴 거다”, 하는 거를 그 표준을 작정해 준 것이 있어! 그걸 하기만 하면 안전해! 그건 마치 신작로(新作路) 길을 달리는 것 같아서 아주 좋아요. 쉽게 갈 수 있고 또 빨리 갈 수 있고 그래.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안 돼! 그럴수록, 그럴수록 그 뜻을 알아야지. 어째 이 길로 가게 된다, 그래 그 전에도 한 말 또 합니다만, 또 다시 하게 됩니다만, “한다드라”의 종교를 가지고는 안 돼. 난 그래 종교 믿던 사람은 객사(客死)한다고 그래. 길바닥에서 죽는다고 그래. 어~ 종교가 뭐냐? 그러면, 신작로 같은 건데, 그건 모든 사람이 갈라면 다 그리 가야된다 하는 게 그래 도(道)라고 그러잖아요? 기독도(基督道), 천도(天道), 옛날엔 무슨 교(敎)라고 안 그러고 도(道)라고 그랬어요.‘ 저 사람 도 믿는 사람인가?’도(道) 믿는 사람, 종교를 신앙하는 거를“도 믿는다”고 그랬어요. 도는 길 도 자인데, 그러면 기독교를 믿는다고 하는 거는 기독교라는 신작로 위를, 요새 말로 하면 고속도로라고 하는 게 좋을는지 몰라요. 고속도로 위를 나도 가는 겁니다. 그러나 고속도로를, 고속도로만 가는 사람은 길바닥에서 객사한다고 난 그래요.“ 왜 어찌 그러냐?”하면, 길은 아무리 좋은 길이래도 내거는 아니에요. 모든 사람이 다 다니는 길이지, 구경 마지막에는 내 갈 자리에를 가야 그게 정말 구원을 얻는 자리이지, 길만 가는, 길이 나 가는 자리에 가기, 그 수단이지, 그 자리는 아니에요. 그래 내가 다 가다가도 고속도로 아무리 좋은 길이래도 가다가는 그 길 그만 두고 소로(小路) 길로 들어가고, 소로 길도 그만두고 우리집 문간으로 들어가고, 문간도 그만 두고 뜰에, 뜰도 그만 두고 이제 나 잘 방(房)엘 들어가야, 그래 승당입실(昇堂入室)이라, 당(堂)에 들어가고 방에 들어가고.
정말 참 깨달은 자리에 들어갈 땐 승당입실이라 그러잖아요?“ 저 사람은 승당입실을 한 사람이다”, 아주 그 저 정말 참 저 갈 자리에, 제 자리를, 저 갈 자리엘 간 사람이라고. 기독교식 말로 하면, “아버지 우편에 가 앉게 되었다” 그말에요. 하늘나라에서 아버지의 우편에, 오른 편에가 앉게, 그 밑에 가 앉게끔 되었다 그 말예요. 그렇게 되었는데, 그러는 데는 거기는 종교는 없단 말입니다. 종교라는 건 보통으로 신작로 같아서, 일반으로 적어도 하려면 이러한 것쯤은 알아야 된다 그 말예요. 그걸 안 다음에는, 그 다음에는 자기로서의 그걸 개척한 지경(地境)이, 자기는 자기의 지경이 이제 있는, 나와야 될 거예요. 그걸 못하면 죽었어도 그건 객사한 거란 말예요. 길바닥에서 죽었지 이제 방안에 들어가 죽지, 죽으려거든 그래도 죽을 자리에, 나 죽을 자리가 하나 있어야지, 길바닥에서 죽으면 어디 좋은 일이예요? 그걸 끝을 옳게 맞았다고, 객사했다면 참 불행한 일로 알잖아요? 그러니까 자꾸 거듭하는 말입니다만, 자기체험이 있어야 돼. 자기는 자기로서의 이루는 지경이 있어야 된다, 그 말이에요.
밭 가는 일은 뭐냐?
그런데 인제 밭가는 것도 아까, 밭가는 게, 밭을 가는데 “왜 그런다?”하는 뜻을 모르면 그건 농사(農事)가 아니야, 농사를 못해 봤어. 농사 일생 했지만, 일생 농사를 하면서도 참 농사를 못해보고 죽은 사람이 많아! 남의 집 일은, 남의 집 일을 심부름을 했을 뿐이지, 남이 하는 대로 그저 그 종살이를 했을 뿐이지, 참 농사를 못해본 거요.
농사는 내가 정말 곡식을 참 만들어내고, 만들어낸 걸 내가 먹어봤고 그래야 할 건데, 그러려면 “밭을 가는 일은 뭐냐?” 그걸 알아야 할거 아녜요? 괜히 그저 긴 얘기가 직접 필요치 않은 얘기가 길어졌습니다만, 밭가는 건 첫째 어디 있냐 그러면, 부드럽게 만드는, 부드러운 건 왜? 부드러워야 거기 공기, 이제 공기와 일광(日光)이 들어간다 그말예요. 그게 이제 농업학교에서 첫 번에 할 강의일 겁니다. 종자(種子)가 발아가 되려면 땅 속이지만, 땅 속에도 일광이 들어가야 하지, 일광은 그저 바깥에 여기만 있는 거 아녜요. 거기서만 일광이 소용 있는 게 아니라, 땅 속에 있는 씨 속을 저 햇빛이 찾아 들어가야 또 바람이 그리로 들어가야, 공기가 들어가야 씨가 그 흙 속에 있으면서도 공기를 호흡을 하고, 일광을 받고, 그렇게 해야 싹이 트고, 아구가 트게 되는데, 땅이 딴딴하면 그게 들어갈 수가 없어. 그렇기 때문에 가는 것에 첫째 의미는 부들부들하게 해서, 그 이제 속된 말로 다 그러거든. “어~ 호미 끝이, 호미 끝이 들어가야 먹는다”, 그 땅이 딴딴하면 안 된다고 그래서 호미 끝을 파면서 “어~ 호미 끝이 들어가야 먹는다” “거 왜 그렇습니까?” “그건 모르지. 그저 그 호미 끝이 들어가야 먹는다, 그저 옛날부터 그러더라”, 그러지만 그 뜻이 무슨 뜻이냐 하면, 호미를 잡고, 호미를 이렇게 이렇게 해서 부드럽게 이렇게 해야 흙이 푸석푸석 이렇게 돼서, 그 틈틈이로 광과 공기가 자유로 드나들 수 있다 그 말예요. 밭이라 해서 저 심은 곡식이라고 좋아해서 아침에 나가보고 저녁에 나가 자꾸 밟아 밟아 딴딴해지면 거 딴딴해지면 그만 일광도 못 들어가고 공기도 못 들어가요. 그럭하면 곡식이 잘 안 되지 않아요?
그러니깐 굳어지면 곡식이 잘 안 되는 줄 알아. 하지만, 왜 안 되는 줄 이치(理致)를 몰라. 그걸 모르니깐 그만 그걸 잘 바로 못해. 그걸 알고 보여야, 그래 “응 그건 왜 이런고 하니 물렁물렁 이렇게 하여야 일광과 공기가……”. 일광과 공기란 무슨 소리냐? 그러면, 씨는 생명인데 땅속에 있어도 그 놈이 생명이, 제 생명에 일광을 받고 호흡을 하고 그래야 이게 산다, 그게 씨는 산 물건이라는 걸 아는 사람인 다음에는 그 조건을 생각 안할 수가 없을 거예요.
그런데 보통 농사꾼이라고 하는 사람이 농사를 하면서 씨는 산 물건이 돼서 그것도 호흡을 하는 줄을 도무지 모르잖아요? 학문을 배왔다고 하는 사람도 그걸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이 있어요.
딴딴하면 안 된다
그런데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 속에, 이 속에 마음이라는 것도 생명체(生命體)인데, 씨인데, 여기 씨가 떨어져 들어온 건데, 이것도 호흡을 해야 돼. 하늘에서 오는 빛을 이제 받고 또 공기를 숨을 쉬고, 이래야 하는데 그게 딴딴하면 안 된다, 그럼“딴딴이 왜 딴딴이 되냐?”하면, 한번 두번 모르고 자꾸 그리로 다니고 다니고 그러면 딴딴해져. 또 작년에 한 해 농사를 해먹으면, 해 먹는 동안에 비가 오고 비가 오고, 아무리 좋던 땅도 비가 온 다음에 그대로 내버려두면 그럼 딴딴해지고 말아요. 비(雨)가 없으면 안 되건만, 비 있어야 되건만 비를 맞고 그대로 둬 두면 땅이 딴딴해져. 그러니깐 비 온 다음에 그 이튿날은 반드시 나가서 이걸 또 파서 물렁물렁하게 해야 돼. 우리집에 와보시면 우리 화초가 잘 자란 걸 여러분들이 볼 겁니다. 그런데 내가 비 오면 이튿날 반드시 내가 그걸 매줍니다. 그건 왜, 그걸 내가 잘 알기 때문에.
그러기 때문에 뉘 집에 가서 화초를 봐도 그 사람이 화초를 잘 다루는 사람인지 못 다루는 사람인지 나는 그거는 이제는 알 자신이 있습니다. 잘하는 사람인지 못하는 사람인지. 그런데 그게 어디 있냐 하면, 그 이치 알고 모르는데 있어요. 비가 그저 오기만 하면 좋은 거 아니야. 물론 그렇지만, 비 자꾸 자꾸 와서 다지어지면, 도리어 그런 거로 물 잘 빠지지도 않고 안 되잖아요? 그게 이제 적당하게 이렇게 부드럽게 돼야 일광도 들어가고 공기도 들어가고 물도 술렁술렁 새버리고 그렇게 해서 그게 효과가 있게 되는, 그러니 우리 마음에도 그렇다 그 말입니다. 그렇다면 농사 해먹는 일이 그 다음에 씨에 방해가 돼 도리어. 내가 그거 안하고 그러니까. 어제까지, 지금 이 시간까지 하는 종교 살림이 요 다음에 오는 진리를 못 받게 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그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따금 농사 해먹는 사람일수록, 잘하자는 사람일수록 한번 해먹곤 힘이 들어도 또 뒤집어, 갈아 뒤집어엎고 말야, 휘치고 해서, 곡식이 있는데 휘치면 죽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그거 해 본 사람은 대담해요. 그러게 뭐라고 하니 농사꾼은 “에, 뿌리를 끊어 줘야 된다”, 그건 농사일을, 여러분은 잘 모를 거예요 농사일을. 농사해 본 사람은 뿌리를 끊어 주어야, 될수록은 인제 논에 이, 저 요새 이 모 있습니다, 모심은 것도 말야, 그 맬 때는 어떻게 하는지 아세요? 틀어 이 밑에 손을 넣어서 이렇게 해서, 건들건들 볏대가 넘어질 정도로 그렇해야 벼가 잘됩니다. 뿌리를 끊어 줘야. 뿌리를 끊어줘야 그 놈이 새 뿌리가 많이 나요 이제. 예~ 그러니 가만 둬 두어야, 건드리지 말고 가만 둬 두어야, 둬두어야 하는 점도 있지요. 하지만 둬 두어야 되는 줄만 아는 사람은 잘 못해. 건드려야해.
왜 생명 자체에 모순이 들어있나?
그러니까 사람 기르는데도 마찬가지야. 자식이라고 이쁘다고 건드리지 말고 가만 둬두면 못쓰게 돼. 사랑하는 자식일수록 자꾸 일시키고, 어느 정도는 참 못 살게 굴고, 그래야 사람이 되는 걸 우리가 알잖아요? 그러면, 이 산다고 하는 우리 생명에, 우리 자체에 그 목적에 반대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어요.
이게 참 어려운 점. 이제 왜 그러냐 하는 건 딴 시간에 또 따로 생각을 해야지 그 아주 근본 문제가 되는 겁니다. 하나님이 창조했다는 이 생명에, 어째 살아가노라면 사는 일이 내 그다음에 생명이 발전되는데 방해되는 요소를 그 속에 내포하고 있나? 왜 이 생명의 자체 속에 모순이 들어 있나? 그거 모르는 사람은 결코 바로 못살 겁니다.
국가 살림 해가면 국가 살림하는 그 자체 안에 국가를 망치는 원인이 거기 있어. 그걸 아는 사람이 정치를 하게 되지. 이제 가정 살림을 하면 가정 살림이 바로 가정에서 사람을 썩게 만드는 원인이 거기 있어. 그러니까 가정 없어도 안 되지만 가정 있어도 안 되고. 가정 살림은 가정을 아끼면서도 가정을 부정할 줄 아는 사람이 가정을 살리지, 가정이 좋다고만 있는 사람도 못쓰고 가정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사람도 못쓰고.
이게 어려운데 아닙니까? 모든 이치가 다 같아, 생명의 원리가 다 그렇게 돼 있어! 그러니까 이제 말이 좀 심한 말 같지만, 종교 믿던 사람은 객사한다 하는 말. 그러니까 “밭 간다는 건 무슨 소리냐?” 그러면, 지금 이 시간까지 내 이것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주로 오늘. 지금 이 시간까지 온 종교생활은 뒤집어엎어야 돼! 그것이 지금 보기에 대단히 아까운 것 같지? “어이구 이렇하면 어떨까요? 어이구 여기다가 보습를 넣으면 모처럼 이때껏 가꾼 것 뿌리 다 끊어지고 죽지 않겠나?” 그럴는지 모르지. 그렇게 겁이 날는지 모르지만, 농사꾼인 다음엔 그 밭에다가 황소를 넣고 말야, 소를 넣어가지고 갈 때 맘이 어떻겠나 생각해야(돼). 아마 서생(書生)인가가 보구, “저 사람이 저거 어떻게 할라나?” 모르지. 하지만 농사꾼은 태연하게하지. 왜? 해봐서 경험이 있어. 확신이 “이럭해야 잘된다, 이럭해야” “뿌리를 들춰내야 이놈이 된다” “왜?” 뿌리 속에는 이제말야, 생명 속에는 자기가 살아가는데 스스로 자기를 해치는 모순도 내포하지만 또 그 대신에 밖에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그 항의를 하고 나가는, 항의를, 이 리시스트(resist)하는 또 근본성이 있어요. 그러기 때문에 뿌리를 끊어 주어야 뿌리가 더 많이 나요. 휘치질하는 건, 뿌리를 끊어주는 건, 그건 왜 그러냐? 뿌리를 끊어줘야 이놈이 뿌리를 더 많이 낸다, 끊어지면 더! 그러니까 더 많이 내는 것이, 가만히 둬 두면 도리어 안 나지만, 이는 어느 정도 휘쳐서 뿌리를 끊어주면 뿌리가 더 많이 난다. 그 이치가, 생각을 하고 나면 재미있지 않아요?
소련이 없었더라면 미국놈이 벌써 썩어져 망했을 거다
여러분이 산보를, 건강하려면 아침 산보를 해야 되는데, 아침산보 중에서 5시, 6시 해가 올라올 무렵이 제일 좋다고. 왜 그런가 물으면, 거 뭣도 모르고 그저 “아침이 좋아서”,알고 보면 왜 그러냐? 아침 5시 해가 나오려고 그럴 때 자외광선이 많아요.
그래서 아침 산보가 좋다는 거예요. 자외광선이, 눈에 뵈이지 않는. 그런데 자외광선이 뭐냐, 그러면 사실은 생명을 해치는 거예요. 그러게 타서, 나가기만 하면 타서 시커멓게 되는 건, 이게 이 피부가, 이 일광에 녹아서, 그러니까 나 좋게만 하는 걸 받아가지곤 못 살아! 자외광선은 사실은 많이 받으면 독(毒)인데. 그러니 곡식을 새로 또 옮긴 다음에는 한 동안은 그늘 속에 놓아야 돼. 그걸 당장 자외광선을 받으면 못 살잖아요? 그러니깐 어느 정도는 보호하느라고 그렇게 하지만, 고 시간이 지나간 다음엔 가차 없이 일광 속에 놔서, 들어가서 해독을 끼치는 자외광선 속에 놓아야 그 놈이 거기 자꾸 항거해 싸우느라고 해서 이제 곡식이 튼튼해지고, 많이 열매가 많이 맺히고 그러지 않아요? 이게 생명의…, 소위 생물적인 생명도 그렇지만 정신적인 생명에 대해서는 더구나 그렇지 않아요?
그러니까 내게 좋은 소리만 듣자는 사람, 아무것도 그 될 리가 없어요. 아주 맹자(孟子)가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 입즉무법가불사(入則無法可拂士)하고 적외환자국항망(出則無敵外患者國恒亡)이니라. 안으로 들어오면 날 못살게 자꾸 구는, 비평하고 책망하는 그러는 친구, 또 외부에 바깥으로 적(敵)도 있고 외환(外患) 있고, 나라에 정치 자꾸 비판하고 욕하고 그러는 선비, 그 법가불사라는 건 그거예요. 요새로 말하면 아주 신랄한 언론인. 그런 사람이 없고, 바깥에 적국이 없으면 국항망이라, 나라는 언제든지 망하게만 마련이다.
그럼 나라가 어떻게 돼? 나라는 안에서 자꾸 욕을 해주고, 바깥에서는 적국이 자꾸 오구. 쉬운 말로 말야, 이렇게 하는 이 정치에 말야, 이북에서 이제 넘어온다고 걱정하지마! 이북에서 간첩 이따금 안 넘어 왔으면 벌써 썩어졌을 거야. 못 살게 되었을 겁니다. 다행이 더러, 이게 못할 소리입니다만, 더러 넘어 오니깐 정신을 차리지. 이 사람들이, 이렇게 하는 사람들이 저 저 그 간첩 넘어온다고, 거기다 빙자하고 사람을 못살게 구는 점도 있긴 있습니다만, 간첩 넘어온다고 하는 거 없었다면 벌써 망한지 오래 되었을 거예요. 소련이 없었더라면 미국놈이 벌써 썩어져 망한지가 오랬을 거예요. 그렇지 않아요? 그러면 어느 게 은혜요, 어느 게 대적이냐? 참 말하기 어려워요. 뻔한 거, 쉬운 거지만 말예요. 그렇게 하는 건 어디 있냐 그러면 우리 속에 근본이, 해가 들어오면 그걸 항거하는, 근본이, 생명이 그거예요, 생명이 다른 게 아니고 그거예요. 세상에 좋은 것만 있으면 살 것 같지만, 그렇질 않어! 내게 해(害)되는 게 있으면 거기 대해서 항거할러고, 싸우는 동안에 이게 생명의 발전이 있다 그 말이예요.
그러니까 그런 의미로 하면, 생명이 원체 처음부터 그건 아주 싸움이라고 그럴 수 있지요. 그러면 이론으로 할 때는 하나님이 만들었다는 천지에 사탄은 왜 있을까? 에덴동산에서, 아니 선악과는 왜 만들어놓고 사람은 범죄를 하게, 범죄를 할 줄 알고 했나 모르고 했나? 알고 했다면 잔인한 이요, 모르고 했다면 하나님이 어리석은 이요. 그러면 이래두, 하나님은 완전치 못한 이다, 그건 모르는 말이고. 만일 에덴동산에 그저 만물을 다 그대로 먹여 그렇게만 있었다면, 인류 타락 없다고, 타락 안해 좋겠다고 그러갔지만, 그럭하는데 역사(歷史)의 진전이 있었겠어요? 그러는 것을 유혹을 받은 일이 좋다는 말도 아니고, 하나님 거역했다는 말이 좋다는 말도 아닙니다마는 그렇게 어떤 유혹이 되고 잘못이 들어온대서도 이 생명이란 문제가 자꾸 거기 내가 잘못하면서도 이 속엔, 양심 속에는 자꾸 싸우는 게 생명인데, 그러는 동안에 이 역사가 이렇게 됐고, 역사가 이렇게 있었으니까 예수도 오셨고 기독교도 있고 불교도 있고, 지금 문명이라고 이렇게 되지 않았어요?
한번 뒤집어엎어 봐!
그러니까 불행, 나쁜 것이 없을 수 없어요. 나쁜 것이 없을 수 없어요. 그 없으면 좋지 않습니까? 응, 그건 전혀 딴 세계가 돼. 물론 그렇습니다. 없어도 좋을 수가 있지만, 적어도 이 인간이, 우리 이 세계, 이 세계라는 것 밖에, 이 세계라는 데는 왜 그러냐 하는 건 우리 자격으로는 설명할 수가 없어요. 하지만, 이 세계라는 세계에서는 그렇게 돼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도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이제 그런 말을 하게 됐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까 그 우리 마음 준비하던 거기를 다시 올라가 다시 말씀을 한다면, 어쨌거나 잡아 뒤집어 갈아엎는데, 그 갈아 뒤집어엎는 것을 우리 맘에다 비긴다면 뭐냐 하면, 지금 이 시간까지 오던 살림을 일단 한번 뒤집어야 된다, 그거 그걸 긍정하질 말고 뒤집으면 이걸, 이러다간 온통 다 어떻게 되나 걱정이, 좀 걱정스러운지 몰라도 걱정 말고 뒤집어, 뒤집어 엎으면 내 이 이지(理智) 판단보다도 내 마음이 괜히 걱정을 해! 나보다도 내 속에 있는 이 하나님이 넣어주신 근본 우리의 바탈은 나보다 어질어!
하나님은 우리보다, 우리 양심보다 크시다,『성경』에 그런 말 있지 않아요? 그러셔서 근본 생명의 법칙이 죽을, 죽을 데다 놓으면 살아나게끔 돼 있어요. 그러니까 한번 뒤집어엎으면, 그러면 지금 보다는 보다 높은, 일단 높은 무슨 싹 틈이 있을 수가 있지만 말이야, 그게 아까워서 그걸 건드리길 무서워해 가지곤 아무런 진전이 있을 수 없다고 하는 거.
그러니까 여러 가지가 동시에 돼요. 가시덤불이 있던 게 뒤집어엎으니까 없어지지. 없어질 뿐만 아니라 들어가서 썩어서 거름이 되지. 돌밭짝에 있던 거 가니까 이렇게 해서 깊어지지, 딴딴한 길바닥 같은 게 부들부들해지지 하는 게 하나, 한 가지 동작, 간다고 하는데서 그게 모두 되잖아요? 하는 게 지금까지의, 이 시간까지 해오든 게 일단은 부정을 해서 왼통 그걸 무조건 긍정을 해 붙어 있으려고 그러질 말고 뒤집어엎어서,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건채에 나와 있지 않고 속에 있던 새 흙이 우로 올라올 수 있도록, 또 부드러워질 수 있도록 일광과 공기가 자유로 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그러니까 그런 말을 인제 우리 동양식의 옛날 말로 하면 허심탄회(虛心坦懷)라, 내 마음을 텅 비게 하고 생각을 평탄하게, 말하자면 씨를 심는데 이렇게 잘 고르게 하고 부들부들하게 하고 준비하게 하는 걸, 진리를 받아들일만한 마음의 준비한다고 할 때는 허심탄회라고 그래요. 그러는 것이 지금 이 시간까지 오는 동안에 대단히 좋은, 내게 대단히 좋은 교훈이요, 대단히 좋은 정신적인 재산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도 아낌없이 거기 집착을 말고. 그게 몹쓸 거라고 그러는 말 아녜요.
한번 뒤집어엎어봐! 뒤집어엎으면 그게 없어지는 것 같지만 하여간 그럭허고 마음을, 그러니까 지금까지의 가지고 있던, 거기에 의지해서, 이제 이 시간에 또 올라오려고 하는 씨를 그걸로 받아들이려고 하질 말고, 거기에 전연 거슬리더라도 관계 없다! 한번 좌우간 그대로 받아들여보자! 뭐라도 받아들일만한 태세로 이제 우리 맘을 준비하여야, 지금은 그런데 아주 더구나 그런 때 아니에요? 어렵게 되지 않았어요?
인제는 종교라는 종교가 다, 불교는, 물론 유교는 이제 그렇지도 않습니다만 불교, 마호메트교 등은 우리 여기 한국에도 있긴 있답디다만 그리 많지는 않은가 봐요. 주로 불교와 기독교입니다만 불교도 기독교도 이제 다 자랄 대로 참 자라서, 나 이제 완전히 다 자란 종교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모르긴 몰라도 토론이야 앞으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겠지만, 토론이 있겠지만 교리로 말한다고 한다면, 이 앞으로도 새로운 교리 나올 것 같지 않아요.
그러니까 같은 거라도, 같은 농사, 작년에 해먹던 농사를 또 하더라도 밭을 한번 뒤집어 갈아엎고 거기라도 그 씨라도, 새 씨를 또 넣어서 한번 해보는 모양으로 지금은 그래야 될 건데, 어렵게 됐어. 원체 이게 완전히 뭐 교회가 다, 제도가 다 구비해졌겠다, 교리가 다 설명이 다들, 조직신학이 돼 있겠다 여러 가지로 급증하게 발달된 종교이기 때문에 말하자면 곡식이 잘 길러지던 곡식 같아서, 그건 갈아 뒤집어엎기가 대단히 아마 어려울 거예요.
그렇지만 역시 시대는 우리에게 지금도 또 한 번 어느 시대도 그런 모양으로 그러한 우리 마음에 준비를 요구하고 있지 않나? 다른 거, 예수님 말씀이 내 있는 것을 다 내버리고 나를 따르라 하는 말, 모든 거라고 할 땐, 집이라든가 돈이라든지 그런 걸 아마 생각하려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내가 가지고 있는 종교적 지식이라든지, 내가 가지고 있는 신앙이라든지 하는 걸로 생각을 아마 이때까지 해보시지 않았을지 몰라. 하지만 내 집에 있는 돈이라든지, 집 등기라든지, 무슨 가족이라든지 그것보다도 가장 먼저 버려야 할 것, 가장 어려운 게 지금 이 시간까지 가지고 있는 내 신앙도 그래. 이것까지도 버릴 각오를 한다고 하는 그 점이 더 어렵지 않을까? 그리고 그게 가장 요구되는 게 아닐까? 그렇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녹음8, 28: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