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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505. [역경의 열매] 김광동 (1-23) "지구촌 섬기는 일을…" 하용조 목사님 마지막 당부에
국제 개발·구호 NGO ‘더멋진세상’ 설립
빈민국 가장 가난한 마을 찾아 자립 부축
38년 외교관 생활 모두 주님의 큰 그림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지난해 6월 서울 중구 더멋진세상 본부에서 아프리카 마을 개발 사업을 설명하고 있다. 신석현 인턴기자
“장로님, 온누리교회가 받은 하나님의 은혜가 큰데 우리는 세상을 위해 한 것이 별로 없어 부끄럽습니다. 재난당해 굶주리고 고통받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종 종교 이념 지역을 초월해 이웃을 섬기는 비정부기구(NGO)를 장로님이 만들어 주세요.”
2010년 여름 하용조 목사님이 소천하시기 1년 전에 이 한마디 당부로 모든 일이 시작됐다. 하 목사님 말씀은 선견지명이었다. 이 시대 그리스도인들은 예기치 않은 상황에 부딪히며 복음 전도에도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NGO는 선교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열쇠다. 지난 10년간 국제 개발·구호 NGO인 더멋진세상의 사역이 그걸 증명한다. 이제는 많은 교회가 NGO를 설립해 지구촌 곳곳에서 활발히 사역하고 있으니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행 1:8) 함께 전진할 동지들이 있어 감사할 따름이다.
나는 1973년 제7회 외무고시에 합격한 후 외교관으로 38년을 봉직했다. 초창기엔 불어가 공용어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을 시작으로 주로 불어권에서 근무했다. 프랑스 파리 국제행정대학원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하고 국제통상 전문 외교관으로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초대 공사를 지냈다. 외교부에서 국제경제국장과 통상교섭조정관을 맡아 통상 분쟁 해결은 물론 개발도상국에 대한 개발 원조도 담당했다.
이제 국제 개발·구호를 담당하는 더멋진세상의 대표가 되고 보니 외교관 시절 아프리카는 물론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가 있는 벨기에 브뤼셀, 유엔의 난민 보건 이민 노동 등 분야별 전문기구가 모여 있는 스위스 제네바 등지에서 일한 데는 하나님의 오랜 계획이 있었음을 깨닫게 된다.
NGO 더멋진세상은 전 세계에서 가장 열악한 곳을 찾아간다. 더멋진세상 이름은 2010년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서 열린 온누리교회 25주년 창립예배 당시 이재훈 목사님이 제안한 현수막 문구에서 유래한다. 가난한 나라의 가장 가난한 마을을 찾아가 아이를 입양하듯 마을을 통째로 품는다. 이 마을이 자립할 힘을 얻기까지 총체적으로 지원하고 개발하는 사업을 펼친다. 한 마을이 깨끗해지고 건강해지고 부요해져서 더 멋진 마을로 거듭날 때까지 돕는 것이다. 코로나19가 휩쓴 오늘날에도 아프리카 서남아시아 중남미 등지에서 24개국 27개 마을을 섬기고 있다.
하나님의 계획은 퍼즐과도 같다. 조각만 봐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지만, 하나하나 모여서 맞춰지면 생각지도 못한 놀라운 그림을 발견하게 된다. 내 삶의 모든 순간은 하나님의 큰 그림을 이루는 퍼즐 조각이다. 최근 출간한 회고록 ‘세상 끝에서 만난 더 멋진 세상-자원봉사자 외교관의 NGO 이야기’(두란노)를 바탕으로 퍼즐의 순간들을 부족하나마 되돌아보려 한다.
약력=1948년 충북 청주 출생, 73년 제7회 외무고시 합격, 주OECD 초대 공사, 주중국 차석 공사, 주홍콩 총영사, 외교부 통상교섭조정관(차관보), 주브라질 대사. 현 더멋진세상 대표.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 "지구촌 섬기는 일을…" 하용조 목사님 마지막 당부에
* [역경의 열매] 김광동 (2) 청주상고→연대→외무고시 합격… 주님의 '빅 피처'
* [역경의 열매] 김광동 (3) 외교관으로 분주한 삶… 집안 돌보지 못해 늘 미안
* [역경의 열매] 김광동 (4) 헛헛함에 펼친 성경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말씀이
* [역경의 열매] 김광동 (5) 브뤼셀에서 드린 부활절 예배는 잊지 못할 '회심의 날'
* [역경의 열매] 김광동 (6) 귀국 후 다닐 교회 찾다 꿈에서 본 성전 데자뷔
* [역경의 열매] 김광동 (7) 시각장애인 인도하며 암송했던 말씀… 인생의 자산 돼
* [역경의 열매] 김광동 (8) 믿음 없던 젊은 시절 술친구가 믿음의 동지로
* [역경의 열매] 김광동 (9) 복음의 불모지 중국, 기도로 캄캄한 새벽을 깨우다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0) 대통령 수행하며 바쁜 와중 외교부 선교회장까지 맡아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1) 외교부 강제 퇴직… "남 위해 살라"는 주님 뜻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2) 하용조 목사 "NGO 설립, 고통받는 이웃 돕자"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3) 우여곡절 끝 NGO 설립… 첫 사역은 일본 쓰나미 현장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4) 파키스탄의 '저주받은 땅'을 '축복의 땅'으로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5) 더멋진마을 프로젝트… 열악한 마을 통째 '업글'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6) "아프리카에 우물 하나 파는 데 얼마 드나요"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7) 네팔 한 마을선 인사 때 '나마스테' 대신 '저이 머시'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8) 태풍으로 초토화된 필리핀 섬마을… '더멋진마을'로
* [역경의 열매] 김광동 (19) 은퇴한 지 8년이 지난 어느날 청와대서 전화가…
* [역경의 열매] 김광동 (20) 난민 위한 교육센터 개설… 배움의 기회 제공
* [역경의 열매] 김광동 (21) 멕시코 국경 소외된 마을서 중남미 사역 첫발
* [역경의 열매] 김광동 (22) 팬데믹 속 생존 위기 내몰린 지구촌 빈민 긴급 구호
* [역경의 열매] 김광동 (23·끝) 더 멋진 세상을 위한 선교 여정 땅끝까지 이어질 것
정리=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역경의 열매] 김광동 (2) 청주상고→연대→외무고시 합격… 주님의 ‘빅 피처’
집안 형편 생각 상고 갔다가 진로 바꿔
수학 문제집 통째 외워 대입에 성공
고시도 5개월간 준비 1, 2차 동시 패스
김광동 대표가 1972년 대학 복학 후 서울 북한산을 등반하고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세계지도를 들여다보길 좋아했다. 역사와 지리에 관심이 많았다. 독서를 좋아해 학창시절 헤르만 헤세의 ‘수레바퀴 아래서’ ‘데미안’, 스탕달의 ‘적과 흑’,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존 스타인벡의 ‘분노의 포도’ 등을 섭렵했다.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는데 왜 그렇게 소설책에 매달렸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충북 청주 교동초등학교 6학년 때 집안이 기울어 학교에서 12㎞ 떨어진 청원군 복대리로 이사했다. 어린 나이에 왕복 4시간 거리를 통학하느라 고생했다. 청주중학교를 졸업할 무렵, 4남 2녀 중 장남으로서 어려운 집안 형편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루빨리 직업 전선에 나서 동생들을 책임져야 한다는 생각에 청주상고로 진학했다. 당시 상고 졸업생들에겐 은행이 최고의 직장이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은행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 같아 마음에 갈등이 컸다.
결국 3학년 2학기가 돼서야 대학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다. 학교의 허락을 받아 9월부터는 아예 시골 외갓집에 내려가 호롱불을 켜고 공부에 전념했다. 다른 과목은 독학해도 상관없는데, 수학이 문제였다. 상고에서는 대입에 필요한 일반 수학 대신에 상업 수학만 가르쳤으므로 사실상 수학을 배워 본 적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수학 문제집과 풀이집을 통째로 외워 버렸다.
1967년 연세대 정치외교학과에 합격했다. 대학 입학과 함께 서울로 올라와 입주 가정교사와 과외 아르바이트를 번갈아 하면서 내내 떠돌며 살았으니 외교관의 운명이 일찍 시작됐던 듯하다. 그래도 나의 영원한 고향인 청주는 늘 그립다. 지금도 좋은 친구들이 항상 나를 반겨줘 고맙다.
69년 군에 입대해 72년 제대할 때까지 꼬박 만 3년을 복무하고 사병으로 전역했다. 68년 1·21 김신조 사건 여파로 군대 복무 기간이 2년 6개월에서 3년으로 연장된 혜택(?)을 봤다. 72년 1학기에 복학 후 6월 부친이 지병인 간암으로 돌아가셨다. 헛헛한 마음에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떠났지만, 흥이 나지 않았다. 그해 10월엔 비상계엄이 선포돼 대학에 휴교조처가 내려졌다. 학교 문이 닫혀 갈 곳이 없던 차에 11월 고향에 내려가 이듬해 3월에 있을 외무고시 1차 시험 준비를 했다. 4개월가량 하루 17시간을 꼼짝 않고 앉아서 공부에 집중했다. 다행히 1차에 합격하고 다시 한 달 동안 밤을 새워 가며 2차 시험 준비에 매달렸다. 5개월간 모든 에너지를 쏟아 집중한 덕에 제7회 외무고시에 최종 합격했다. 주위에서 기적 같은 일이라고 입을 모았다.
사실 암기력은 어린 시절 나의 유일한 재능이었다. 외우는 것만큼은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그 덕분에 배운 적도 없는 수학 과목인데 책을 달달 외워 대입에 성공했다. 외무고시 합격도 하나님 큰 퍼즐의 일부였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3) 외교관으로 분주한 삶… 집안 돌보지 못해 늘 미안
아이 갓 출산한 아내 두고 첫 임지 부임
대사관 업무와 일과 후 여러 모임까지
당시 주변국과의 외교 현안 많아 힘들어
김광동 대표가 외교부 의전과장이던 1989년 국빈 방한한 보두앵 벨기에 국왕 부부를 영접하고 있다.
1976년 외교관으로서 첫 임지인 중앙아프리카공화국으로 떠났다. 첫 아이를 갓 출산한 아내와 함께 갈 만한 곳이 못 돼 할 수 없이 혼자 떠났다. 석 달 뒤 아내가 생후 90일 된 딸아이를 데리고 합류해 열흘 뒤 백일잔치를 해줬다. 별 탈 없이 건강하게 자라나 준 딸이 늘 고맙고 애틋하다.
외국에서 장기 체류한 건 처음이라 적응하는 데 애를 먹었다. 고생한 기억밖에 없어서 내게 아프리카는 다시 밟고 싶지 않은 땅이었다. 그런데 하나님께는 그때부터 나를 향한 큰 계획이 있으셨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78년 2월 주벨기에 대사관 2등서기관으로 전임했다. 열악한 환경의 아프리카에서 1년을 보낸 딸 아이는 서울 처가에 맡기고, 아내와 함께 벨기에 브뤼셀에 도착했다. 딸이 늘 눈에 밟혀 데려오려 했지만, 당시 2등서기관의 박봉으로는 서울을 왕복할 비용이 만만치 않아 장인 장모님이 딸과 함께 브뤼셀로 와주셨다. 덕분에 1년 만에 반갑게 합류할 수 있었다. 둘째인 아들은 브뤼셀에서 태어났다.
아내는 갓 난 아들과 세 살 된 딸을 홀로 키우느라 무척 힘든 시간을 보냈다. 당시 나는 대사관으로 밀려드는 수많은 업무를 처리하고 일과 후에는 여러 모임을 하느라 집안을 돌보지 못했다. 아내에겐 늘 미안한 마음이다.
당시 주변 환경은 그리 좋지 않았다. 78년 4월 프랑스 파리를 이륙해 김포국제공항으로 운항하던 대한항공 902편이 항법장치 이상으로 소련 영공에 들어가자 소련 전투기가 미사일을 쏴 날개가 파손된 채 호수에 불시착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승객 109명 중 2명이 사망했다. 83년 소련 전투기의 공격으로 대한항공 007편 승객과 승무원 269명 전원이 사망한 만행에 앞서 벌어진 일이었다. 소련과 국교가 없었기에 미국이 대리로 협상에 나서 생존 승객을 귀환시키는 등 외교적으로 분주한 때였다.
79년엔 박정희 대통령 피살 사건, 신군부의 12·12 쿠데타 등이 일어났다. 80년 서울에 돌아와 근무한 지 얼마 안 됐는데 당직 근무 중 군검열반 소령과 말다툼을 벌인 일이 있었다. 흉흉한 시국에 군부세력에게 눈총받을 만한 일을 했으니 신변을 보장할 수 없었다. 때마침 프랑스 국제행정대학원(IIAP)에서 공부할 기회가 생겨 파리로 떠났다. 81년부터 83년까지 그곳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84년엔 스위스 주제네바 대한민국 대표부 참사관으로 부임했다. 인권 난민 교역 등을 다루는 유엔전문기구를 상대하는 재외공관이었다. 87년엔 본국에 귀임해 외무부에서 경제협력과장 통상기구과장 의전과장을 역임했다. 의전과장 시절엔 청와대 외교사절 관련 실무를 맡아 휴일이 거의 없을 정도로 고되게 일했다. 90년 주유럽연합(EU) 대표부 참사관으로 브뤼셀에 부임해 개척교회에 나가면서 삶의 변화가 찾아왔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4) 헛헛함에 펼친 성경에… “일어나라 함께 가자” 말씀이
과도한 업무에 심신 고갈되고 심한 우울감
독서·운동으로도 해소 안돼 성경 펼쳤는데
군대서 경험한 고막이 터질 듯한 굉음 들려
김광동 대표가 외교관 초창기이던 1979년 벨기에 브뤼셀의 중심 광장인 그랑플라스에 서 있다.
1990년 주유럽공동체(EC)대표부 참사관으로 벨기에 브뤼셀에 부임했다. 독일이 베를린장벽을 허문 이후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언하고 유럽 22개국이 프랑스 파리에서 재래식무기감축조약(CFE)에 서명한 해였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반세기 동안 옭아매던 냉전이 사실상 종식됐다. 그해 8월 대한민국은 소련과 국교를 맺었다. 12월엔 노태우 대통령이 모스크바를 방문해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2차 정상회담을 했다. 북방외교로 분주하던 그해 나는 모스크바에 급파돼 국빈 방문 행사를 천신만고 끝에 성공적으로 마치고 크리스마스 무렵 브뤼셀로 귀임했다.
돌아와 보니 아내와 아이들이 개척교회에 다니고 있었다. 20명 남짓 출석하는 작은 교회라 우리 가족이 나가지 않으면 전 교인의 4분의 1이 빠지는 셈이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앉기는 했지만, 예배가 영 낯설었다. 교회는 의지가 약한 사람들이 다니는 곳이라 여겼기에 멋쩍어서 내내 멀뚱거렸다.
모교인 연세대학교가 미션스쿨이므로 기독교 관련 필수 학점을 이수하고 채플에도 참석했지만, 워낙 건성건성 했던 탓에 특별한 기억은 없었다. 어머니가 성당을 다니셔서 나도 성당을 다니는 척했기 때문에 교회는 절대로 안 다닌다고 그때는 생각했다.
사실 이때는 주말과 휴식 없이 수년째 진행된 과도한 업무로 심신이 고갈된 시기였다. 재충전하고자 부임할 때 가져온 교양 철학 문학 서적을 탐독했지만, 마음의 갈증은 사라지지 않았다. 운동도 열심히 하고 충분한 휴식을 하며 건강관리를 했지만, 가슴에 구멍이 뚫린 듯 스산한 바람이 지나가고 삶이 무의미한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가을이 되자 우울감이 더 심해졌는데 어느 날 아침 출근해 대표부 사무실에서 누군가가 꽂아둔 성경책을 발견했다. 성경에는 과연 뭐가 있을까 해서 마태복음부터 읽기 시작했다. 누가 누굴 낳고 누굴 낳는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성령으로 잉태된 예수 그리스도가 귀신을 쫓고 병든 자를 고치고 알아듣기 어려운 말씀을 했지만, 어쨌든 계속 읽어 나갔다.
그러던 중 마태복음 26장 36절에 이르렀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직전 제자 세 명과 겟세마네로 가서 간절히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쿨쿨 자는 내용이었다. 이윽고 46절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일어나라 함께 가자”고 말씀하신다. 그때 귀에서 고막이 터질 듯한 폭발음이 들렸다.
군복무시절 좁은 사무실에서 권총 오발 사고를 낸 적이 있다. 총알이 장전된 줄 모르고 벽을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가 ‘빠앙~’하고 귀를 찢는 총성과 함께 하얀 페인트 가루가 사무실 가득 날렸다. 다친 사람 없이 잘 넘어갔지만 아찔한 경험이었다. 그때와 똑같은 체험을 마태복음의 이 말씀을 읽으며 느꼈다. 깜짝 놀라 방금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나중에 보니 에베소서 5장 14절처럼 잠자는 자를 깨워 주님께 인도하는 말씀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5) 브뤼셀에서 드린 부활절 예배는 잊지 못할 ‘회심의 날’
개척교회 출석한 지 4개월쯤 맞은 부활절
복음에 충실한 말씀 듣고 가슴 뜨거워져
회개·감사의 고백 터져 나오며 눈물
김광동 대표가 2009년 벨기에 브뤼셀 인근 워털루 정원을 재방문해 번역가인 부인 윤미기 권사와 나란히 서 있다.
1991년 3월 31일 부활주일은 내 평생 잊지 못할 하루다.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척교회인 브뤼셀선교교회에 다닌 지 4개월쯤 된 시점이었다. 부활절을 맞아 기존 벨기에 한인교회와 우리교회가 합동으로 예배를 드렸다. 교민들이 화합할 좋은 기회로 여기고 예배 준비를 적극적으로 도왔다.
부활절 당일엔 이상하게도 설교 말씀이 내 귀에서 심장까지 엄청난 속도로 직진하는 듯했다. 세세한 내용은 잊었지만 “우리는 모두 죄인이며 죽음은 죄의 대가요 죽고 나면 지옥에 가야 마땅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니 이를 믿으면 구원받고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정도의 평범하고 복음에 충실한 내용이었다.
그런데 단순히 성경에 기록된 복음이 아니었다. 하나님이 내게 친히 들려주시는 말씀 같아 두렵기도 하고 벅차기도 했다. 가슴이 뜨거워지고 손끝이 떨렸다. 히브리서 4장 12절처럼 말씀이 내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는 경험을 한 것이다. 얼굴 위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와 감사의 고백이 터져 나오더니 이내 주체할 수 없는 환희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성령 체험임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날 이후 성경이 읽고 싶어지고 주일예배가 기다려지고 하나님을 알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다.
잊고 있던 스무 살 무렵 일이 불현듯 생각났다. 67년 대학 1학년 여름방학 때 가족들이 살던 신탄진에서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귀가하던 길이었다. 작은 언덕 위 교회에서 노랫소리가 흘러나왔다. ‘이화여대 김활란 박사 초청 심령 대부흥회’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대면 이웃 학교 아닌가. 김 박사가 무슨 일로 이 가난한 동네까지 오셨을까. 어디, 어떻게 생기셨는지 얼굴이나 한번 보자.’ 술기운에 혼자 이렇게 생각하며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저만치 앞에 모시 한복을 입은 여성이 서 있었다. 단아한 모습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분 앞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 있기에 나도 멋모르고 긴 줄 뒤에 따라 섰다.
내 차례가 돼 김 박사 앞에 섰다. 김 박사가 내게 무어라 말하더니 무엇을 하겠느냐고 묻는 것 같았다. 그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김 박사가 환한 미소로 눈인사를 하며 “반갑습니다. 축복합니다”라고 말했다. 나도 따라 웃으며 “반갑습니다”하고 꾸벅 인사를 했다. 그러고는 터덜터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 기분 좋게 잠들었던 기억이다.
김 박사는 그때 아마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세상에 복음을 전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것이다. 스무 살 철부지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네”하고 답하고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그런데 하나님은 잊지 않으셨고 25년 만에 브뤼셀에서 “내가 네 대답을 기억한다”고 일깨워 주셨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6) 귀국 후 다닐 교회 찾다 꿈에서 본 성전 데자뷔
1991년 부활절 성령 체험 후 신앙 돈독해져
하용조 목사님 말씀에 은혜 넘쳐 바로 등록
김광동 대표가 외교관 시절인 1992년 처음 등록해 지금까지 신앙 생활을 하고 있는 서울 온누리교회 서빙고성전 전경.
1991년 부활절에 성령을 체험한 뒤로 나는 이전과 다른 사람이 됐다. 주일 예배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던 사람이 주일 성수는 물론이고 수요예배, 금요 철야예배 등 예배란 예배는 다 참석했다. 업무 전 30분간 말씀을 읽고 사역지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했다. 대사관 동료들과 기도 모임도 했다. 수입이 생기면 십일조부터 철저하게 떼어 놓는 것도 습관이 됐다.
만나는 사람마다 인상이 달라졌다며 비결이 뭐냐고 물었다. 사람을 만나는 일이 주 업무인 외교관으로서 듣기 좋은 평가였다. “너희는 이 언약의 말씀을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하는 모든 일이 형통하리라”(신 29:9)는 말씀이 내 삶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체험했다.
92년 8월 의전 심의관으로 부름을 받아 본국으로 귀임했다. 귀국할 때부터 내 관심사는 교회였다. 초신자로서 배우고 싶은 것이 무척 많았다. 서울의 여러 교회를 다니며 예배를 드려 봤지만, 브뤼셀에서 다닌 교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가 커서 그런지 낯설게 느껴지곤 했다.
하루는 꿈을 꾸다 어떤 교회의 문을 열고 들어가 계단을 따라 돌고 돌아서 올라가 큰 성전에 들어갔다. 전면에 붉은 벽돌 벽이 보이고, 그 앞에 각진 턱으로 빙 둘러싸인 강대상이 있었다. 성전 뒤편 양측에 선 굵은 기둥이 높은 천장까지 이어져 있고, 2층 난간이 보였다. 잠에서 깬 나는 아내에게 꿈 이야기를 들려주며 “내가 꿈에서도 교회를 찾다니”하고 피식 웃었다.
그 주일에는 서울 용산구 온누리교회를 방문하기로 돼 있었다. 예배 시간에 맞추어 도착해 큰 유리문을 열고 로비로 들어가 계단을 따라 돌고 돌아 올라가니 넓은 성전이 나왔다. 열린 문을 들어서는 순간 데자뷔가 느껴졌다. 붉은 벽돌 벽에 각진 턱이 둘러친 강대상, 뒤편의 흰 기둥과 2층 예배 공간이 꿈에서 본 그대로였다.
하나님이 예비하신 그곳을 찾았다. 아내는 하용조 목사님 말씀에 은혜가 넘친다며 곧바로 등록하자고 했다. 더 기다릴 이유가 없었다. 예배가 끝난 뒤 바로 교인 등록 절차를 밟았다. 일주일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교회를 드나들었다. 새벽 기도회를 시작으로 월요 치유 집회, 화요 성령 집회, 수요 예배, 목요 경배와 찬양 집회, 금요 철야 예배 등 가능한 모든 예배에 참석했고, 토요일 새벽에는 하 목사님이 소그룹으로 인도하는 성경공부 모임 ‘토성회’에 나갔다.
당시 온누리교회는 ‘2000/1만 비전’을 선포하고 추진하고 있었다. 하 목사님은 설교 때마다 2010년까지 2000명 선교사와 1만명 평신도 사역자를 세울 것을 강조했다. 4주간 새가족 교육을 받고 내 교적 번호를 보니 성도 수가 이제 겨우 4000명을 넘었다. 그런데도 2000명 선교사를 파송하겠다고 하니 머리로는 말도 안 되는 목표라고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가슴이 벅차올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내가 1만 사역자로 파송 받게 될 줄 그때는 알지 못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7) 시각장애인 인도하며 암송했던 말씀… 인생의 자산 돼
새빛맹인선교회 안요한 목사님 부탁으로 매 주일 성경공부반 맡아 체계적인 수업
김광동 대표(왼쪽 첫 번째)가 프랑스 유학 시절이던 1982년 파리의 국제행정대학원(IIAP) 교정에서 각국의 유학생들과 서 있다.
1993년 외무부 의전 심의관에서 통상국 심의관으로 전보 발령을 받아 한창 바쁠 때 온누리교회 일대일 양육자반을 졸업했다. 그 무렵 브뤼셀 개척 교회에서 함께 믿음 생활을 했던 이종구 상무관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이 상무관은 훗날 특허청 차장을 거쳐 캐나다 원주민 지역과 아프리카 르완다, 남미 콜롬비아에서 선교사로 헌신한 분이다. 당시 본국으로 귀임한 그가 서울 서초구 새빛맹인선교회를 소개했다. 온누리교회 주일예배를 마치고 점심때 선교회에 들르면 맛있는 국수를 대접하겠다고 했다.
새빛맹인선교회는 이청준 소설가의 원작을 이장호 감독이 영화화한 ‘낮은 데로 임하소서’의 실제 주인공 안요한 목사님이 시각장애인을 위해 설립한 교회 공동체다. 점심때 들러 맛본 국수를 주일 오후마다 1년 반이나 더 먹게 됐다. 안 목사님이 내게 시각장애인 주일 성경공부반을 인도해 달라고 말씀하셨다.
“우리 교인 대부분은 자기 몸을 의탁할 데가 없는 시각장애인들입니다. 노숙자였던 분들도 많고요. 그분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점자 컴퓨터 침술 등을 가르치고 있지만, 무엇보다 신앙 훈련이 가장 중요하지 않겠습니까. 듣자니 온누리교회 성도들은 누구나 일대일 제자 양육을 받아 말씀을 많이 안다고 하던데, 수고스러우시겠지만 주일마다 오셔서 말씀을 좀 가르쳐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나도 초신자인데 누굴 가르치겠냐며 사양했지만, 시각장애인들이 성경을 체계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말에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주변의 어려운 교회를 돌아보고 섬기라는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알고, 매 주일 오후 1시부터 2시 30분까지 90분간 성경공부반을 맡아 인도하기로 했다.
40여명 시각장애인 성도들이 온 신경을 집중해 듣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난다. 내가 그들에게 은혜를 받아 더 열심히 성경을 읽고 더 많이 기도하며 낮은 마음으로 지혜를 구했다. 매주 말씀 암송 숙제를 냈는데, 점자를 모르거나 성경을 처음 접하는 이들이 많아 짧은 구절도 외우기 힘들어했다. 그런데 유독 한 사람만은 늘 완벽하게 외워오곤 했다. 무리다 싶은 긴 구절도 막힘없이 술술 외우는 모습을 보니 도전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명색이 선생인데 최소한 그 학생만큼은 외워야 하지 않겠느냐는 마음으로 온종일 말씀을 읽고 듣고 되뇌었다. 그렇게 해서 이듬해 중국 공사로 부임하기 전까지 1년 반 동안 성경공부반을 인도하며 암송했던 구절들은 내 인생의 자산이 됐다.
통상국 심의관으로 한·중 한·미 한·일 통상 현안을 두고 상대국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전투력을 발휘할 때가 많았다. 그 힘든 시기에도 나를 붙들어 주신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었다. 온누리교회와 새빛맹인선교회를 오가며 공부하랴 가르치랴 아무리 고되어도 생명의 말씀을 놓을 수 없었다. 하나님이 그들을 위해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그들을 보내주셨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8) 믿음 없던 젊은 시절 술친구가 믿음의 동지로
중국서 같이 근무한 문봉주·김하중 대사
회심한 후 술 아닌 말씀과 기도로 경쟁
‘외교부 돌탕 삼인방’ 함께 장로 장립
김광동 대표가 주중 대사관 근무 시절인 1995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장쩌민 당시 국가주석과 악수하고 있다.
1995년 2월 중국 베이징의 주중 대사관 경제 공사로 부임했다. 이것은 기도 응답이었다. 그 무렵 하용조 목사님은 “성령을 받은 사람은 어떤 나라가 계속 생각나고, 그 나라를 생각하면 눈물이 나곤 합니다. 그런 사람은 선교사로든 무엇으로든 그 나라로 가야 합니다”라고 설교하셨다. 중국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고 중국을 위해 기도할 때마다 눈물이 나서 언젠가 중국에서 근무하기를 원했는데 하나님이 응답해 주셨다.
지금은 목사가 된 문봉주 당시 심의관도 6개월 뒤에 주중 정무 공사로 발령받아 나와 함께 중국에서 근무했다. ‘문봉주 대사의 성경의 맥을 잡아라’ 저술로 유명한 문 공사는 사실 나와 젊은 시절 술친구였다. 나중에 알고 보니 모태신앙인이었지만 한창 어울릴 때는 그가 그리스도인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내가 본부 통상 심의관으로 부임하고 그가 아주국 심의관으로 귀국했는데 오랜만에 우연히 마주친 곳이 새벽기도를 마치고 나오던 교회였으니 얼마나 놀랐겠는가. 문 공사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그가 나보다 조금 앞서 회심한 듯했다. 우리는 역전의 용사처럼 다시 한번 의기투합했다. 이번엔 술이 아닌 말씀과 기도로 견주며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훗날 주중 대사와 통일부 장관을 역임한 김하중 장로님도 곧 믿음의 동지가 됐다. 김 장로님은 ‘하나님의 대사’ 시리즈를 포함한 여러 편의 신앙서적을 집필했으며, 국내외에서 말씀 집회를 여는 등 하나님 나라 확장을 위해 귀하게 쓰임 받고 있다.
우리는 믿음 없던 젊은 시절을 함께했기에 각자 회심한 이후 성령 안에서 무시로 소통하는 관계가 됐다. 몸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서로 기도로 응원했다. 하 목사님은 나와 김 장로님과 문 공사를 한데 묶어 ‘외교부의 돌탕 삼인방’으로 부르길 좋아했다. ‘돌탕’은 돌아온 탕자의 줄임말이다. 우리 돌탕 삼인방은 2004년 함께 장로 장립을 받고 각자 자리에서 하나님 사역을 잘 감당해가고 있으니 은혜중에 은혜다.
중국에서 신앙생활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더 긴장감이 넘쳤다. 외교관, 언론사 특파원, 상사원 등 한국인이 많이 사는 베이징 차오양구의 북경 한인교회에 다니게 됐다. 중국은 공산당의 통제를 받는 삼자교회가 아닌 이상 대외적으로는 교회로 부를 수 없다. 목사님도 선생님으로 불러야 했다. 그런데도 알음알음 모인 한인 그리스도인이 700명이나 됐다.
96년 2월 느닷없이 온 교인의 가슴을 철렁하게 하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3월 말 끝나는 임대차 계약을 연장하지 않겠다는 통보였다. 공산당 입김이 작용한 것을 교인 누구나 짐작했다. 기한이 한 달밖에 남지 않았는데, 예배 장소를 갑자기 어디서 구한단 말인가. 나는 목사님께 3월 한 달간 온 교인 새벽기도를 하자고 제안했다. 황사가 유난히 짙던 그해 우리는 또 한 번의 기적을 경험한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9) 복음의 불모지 중국, 기도로 캄캄한 새벽을 깨우다
예배 장소 못 구해 외교부 장관까지 나서
500명 수용 가능 호텔에 새 예배처 마련
교인 수 많아 예배 분산, 오히려 성도 늘어
김광동 대표가 주중 대사관에 근무하던 1995년 중국쪽 백두산 천지에 올라 기념촬영을 했다.
1996년 3월 1일 중국 베이징엔 황사가 유난히 짙었다. 새벽 5시 10여명 교인이 교회에 모였다. 중국 공산당의 압력으로 새 예배 처소를 빌려야 하는 절박함 속에서 새벽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자모실로 향하는데 안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간밤에 불을 켜뒀나’ 생각했는데 전등 불빛이 아니었다. ‘아’하고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나만 아니라 당시 함께했던 성도들이 모두 기이한 빛을 목격했다.
바로 예배를 시작했지만 말씀을 전하는 목사님이나 듣는 교인이나 모두 눈물을 흘리느라 서로 무슨 말을 하는지 듣는지 모를 지경이었다. 얼굴 위로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고 연신 코를 훔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듯했다. “고맙다. 너희들 덕분에 중국 땅에 새벽기도가 시작되는구나.”
중국은 복음의 불모지였다. 그곳에서 우리가 캄캄한 새벽을 기도로 깨운 것이다. 시작은 빛 한 점으로도 충분하다. 동이 트면 어둠이 물러갈 것이고, 곧이어 빛이 사위를 가득 채울 것이다. 나는 중국 대륙을 가득 채울 빛을 미리 본 목격자가 됐다.
예배 장소를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르던 당시 공로명 외교부 장관이 중국을 공식 방문했다. 공 장관 부인이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어서 당시 우리가 처한 상황을 전하고 도움을 구했다. 며칠 지나 중국 공산당 종교부에서 전화가 왔다. 임대차 계약을 갱신할 수는 없지만, 500명 수용 가능한 21세기호텔의 3층 공간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외부로부터 비교적 차단된 곳이라 한인 크리스천이 많이 모여도 안심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교인 수가 700명이 넘는데 500명밖에 수용할 수 없어 고민이 됐다. 회의 끝에 예배를 분산하기로 했다. 오전 9시에 성인예배, 오전 11시에 청년예배를 드렸다. 그러자 오히려 교인 수가 늘어서 몇 달 후에는 오후 2시 3부 예배까지 생겼다. 나는 경배와 찬양팀을 구성해 찬양 예배를 섬겼고 문봉주 공사는 청년부 성경공부반을 맡았다. 문 공사가 새 예배 처소를 구하기까지 중국 정부를 상대로 뛰던 모습이 선하다.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역사를 목도했다.
96년 12월 우리나라는 선진국 클럽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가입했다. 나는 곧바로 주OECD 대한민국 대표부 초대 공사로 임명돼 프랑스 파리 땅을 다시 밟았다. 시차에 적응할 틈도 없이 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해야 했는데, 우리나라 국회의 노동법 개정안 날치기 처리로 처음부터 궁지에 몰릴 상황이었다. 나는 OECD 본회의장에 들어가 프랑스어로 우리나라의 입장을 정성껏 설명했다. 5분쯤 지났을까 마리 끌로드 카바나 프랑스 대사가 손뼉을 치며 ‘브라보 꼬레’를 외쳤다. 한국 대표의 유창한 불어를 들으니 문화적 동질감을 느낀다고 했다. 노동 문제를 시비로 삼기보다 일단 한국의 OECD 가입을 환영하자는 분위기로 전환되는 순간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0) 대통령 수행하며 바쁜 와중 외교부 선교회장까지 맡아
재외공관은 종교탄압 없는 치외법권 공간
세계 각지 외교관들 신앙생활 돕기 위해
매주 설교 테이프와 신앙 서적·물품 지원
김광동 대표가 주브라질 대사이던 2003년 브라질리아 대통령궁에서 루이스 이나시우 룰라 다 시우바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제정한 후 활짝 웃고 있다.
1998년 2월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면서 외무부가 외교통상부로 개편됐다. 그해 4월 나는 본부 국제경제국장으로 발령받아 귀임했다. 돌아오자마자 국제통화기금(IMF) 금융위기대처 태스크포스팀장을 맡아 뛰었다. 6월엔 김 대통령이 미국을 국빈 방문해 빌 클린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나는 공식 수행원으로서 대통령이 뉴욕과 워싱턴을 돌며 정·재계 지도자들과 만나 새 정부의 정책비전을 설명하고, IMF 사태 극복을 위한 협력을 요청하는 일을 맡았다. 11월에는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0회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 참석하는 등 쉼 없이 달렸다.
그 와중에 외교부 선교회 회장을 맡았다. 세계 각지에 흩어진 180여곳 재외공관 외교관들의 신앙생활을 돕는 자리다. 재외공관은 주재국의 행정력과 경찰력이 미치지 못하는 치외법권 공간이므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이 극심한 지역이라도 예배를 드릴 수 있다. 그래서 그들의 신앙생활을 돕기 위해 매주 설교 테이프와 함께 신앙 서적과 물품을 지원했다. 손수 포장하는 발송 작업이 힘들긴 했지만, 여러 공관에서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소식을 전해 들으며 보람과 용기를 얻었다.
매년 열리는 재외공관장 회의 때는 외교관들이 본국으로 일시 귀국하는데, 그 일정에 맞춰 김장환 목사님이 이사장으로 계신 극동방송 주최로 재외공관장 조찬기도회가 열린다. 그리스도를 믿는 외교관들이 한데 모여 기도할 때면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나와 흰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양 앞에”(계 7:9) 서는 광경이 이렇지 않을까 상상하곤 했다. 지금까지도 외교부 크리스천을 위해 도움을 주시는 김 목사님께 깊이 감사드린다.
1999년엔 국회 요청으로 국회 통일외교통상위원회 수석전문위원으로 가게 됐다. 2001년엔 주홍콩 총영사로 부임했다가 이듬해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차관보급)으로 승진 전보돼 통상문제 전문가로 일했다. 조정관으로 근무한 1년 4개월의 절반인 7개월을 해외 출장으로 보낼 정도로 바쁘게 지냈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이후 나는 주브라질 대사로 임명됐다. 대사급으로선 최고위직 임무지만 차관보급으로서는 조금 비중이 낮은 곳이라 실망했다. 하지만 막상 부임하고 보니 참으로 할 일이 많았다. 브라질 공용어인 포르투갈어는 프랑스어와 유사해 배우기도 쉬웠다.
브라질에 도착해 먼저 찾은 곳 역시 교회였다. 한인교회 담당 목사님이 비자 문제로 1년에 3개월씩 교회를 비워야 했는데 부교역자마저 없어 그 석 달간은 내가 대신 설교해야 했다.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설교 원고를 준비하며 서울 새빛맹인선교회 성경공부반 시절 암송했던 말씀과 외교부 선교회에서 동료들을 섬기며 쌓았던 기도의 덕을 보았다. 한 나라를 대표하는 대사에서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대사로 변모해가는 걸 느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1) 외교부 강제 퇴직… “남 위해 살라”는 주님 뜻
성과· 관례 무시한 일방적 퇴직 통보
내심 유럽 주요국 공관장 기대하다 실망
사흘간 금식 기도하며 주님께 이유 물어
외교관 퇴임후 더멋진세상을 이끌게 된 김광동 대표가 2018년 미국 뉴욕의 유엔 본부에서 열린 사회개발위원회(CSocD)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주브라질 대사로 근무한 지 2년 반 만인 2005년 가을 귀국해 새 부임지로 나갈 때까지 모교인 연세대에서 국제관계론을 강의했다. 1년쯤 지난 2006년 외교부 측에서 내가 유럽 주요 국가의 공관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기다리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2007년 2월 그달 말로 퇴직하라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58세에 조기퇴직이라니, 청천벽력이었다. 퇴직 소식을 접하고 제일 먼저 나온 말은 “하나님, 어떻게 이러실 수 있어요”였다.
35년 넘게 외교관으로서 최선을 다했다. 이렇게 강제로 떠밀려 은퇴하게 되리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주브라질 대사 재임 시 미국 본토보다 넓은 영토와 막대한 지하자원을 가진 중남미 최대국 브라질과 기술 및 자본 강국인 한국의 경제·통상 관계 증진을 위해 밤낮없이 일했다. 브라질 지방정부를 부지런히 방문한 결과 양국 교역액이 3배 늘었고 투자도 급증했다. 차관보급을 역임하면 유럽 주요국 공관장으로 나가는 관례도 있었다. 성과와 관례에 따른 공관장 내정 소식을 믿었기에 더 낙심할 수밖에 없었다. 외교관 선배들은 어떻게 아무 이유 없이 강제로 퇴직시키냐며 필요 경비를 댈 테니 법적 소송을 하라고까지 했다. 말씀만이라도 고마웠다.
나의 외교부 강제 퇴직 소식을 들은 김하중 당시 주중국 대사가 메일을 보내왔다. 기도 중에 받은 말씀이라며 “너는 사람을 사랑하라. 너보다 더 큰 고통을 겪고 있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라. 그리하면 네가 거기서 나를 찾을 것이다”란 메시지를 전해주셨다. 참으로 감사했다.
하용조 목사님은 우리 부부를 담임목사실로 불러 시편 37편 말씀을 함께 읽어보라고 말씀하셨다. “악을 행하는 자들 때문에 불평하지 말며 불의를 행하는 자들을 시기하지 말지어다”로 시작하는 말씀은 “여호와를 의뢰하고 선을 행하라”로 이어졌다. ‘아 이 모든 게 하나님이 하신 일이구나’라고 깨달으며 곧바로 금식기도원으로 발길을 재촉했다.
기도원에 도착해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자마자 울음이 터져 나왔다. 원망과 억울함으로 온종일 울었다. 물 한 모금 넘길 수 없었고 한숨도 잘 수 없었다. 나오는 기도는 “하나님, 이제부터 뭘 하며 먹고 살지요”였다.
내친김에 사흘을 금식하며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려달라고 기도했다. 금식 마지막 날 새벽기도 중에 하나님이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4)는 말씀을 툭 던지듯이 주셨다. 그 순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하나님은 내게 “너는 그동안 누구의 유익을 구하며 살았더냐”고 묻고 계셨다. 직설적 질문이니 에둘러 답할 수 없었다. “주님, 그동안 저와 제 가족과 제 나라만을 위해 살았습니다”란 고백이 터져 나왔다. 그러자 “이제부터는 너 말고 남, 네 가족 말고 남의 가족, 네 나라 말고 남의 나라를 위해 살아라”는 말씀이 들려왔다. 부인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음성이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2) 하용조 목사 “NGO 설립, 고통받는 이웃 돕자”
“전 돈이 없어 감당할 능력이 안됩니다”
“하나님 일은 돈으로 하는 게 아닙니다”
단호한 말씀에 얼결에 승낙하고 기도만
2010년 10월 서울 마포구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온누리교회 창립 25주년 기념 예배 당시 대형 강대상 뒤로 ‘더 멋진 세상’ 문구가 보인다.
2010년 8월 일본 도쿄에서 투석을 받으며 요양 중이던 하용조 목사님으로부터 저녁 식사를 같이하자는 연락이 왔다. 한달음에 달려가 목사님을 뵈었다. 부쩍 수척해진 모습이 안타까웠지만, 눈빛만큼은 언제나처럼 생기가 넘치셨다. 하 목사님은 이렇게 말했다.
“장로님, 이제 두 달만 있으면 온누리교회 창립 25주년입니다. 그동안 하나님이 우리 교회에 많은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우리는 세상을 위해 한 일이 없어 부끄럽습니다. 우리가 받은 축복을 세상에 나눠야 할 때입니다. 지구촌에서 재난당하고 굶주리고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지금부터라도 손을 펴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나눠 주어야 합니다. 인종 종교 지역 이념을 초월해 섬길 수 있는 비정부기구(NGO)를 장로님이 만들어 주세요.”
당황한 나는 이렇게 답했다.
“목사님, 저는 이 일을 맡기에 적합한 사람이 아닌 것 같습니다. NGO 활동은 재정이 많이 필요한데, 평생 공무원으로 일하다 은퇴한 사람이 무슨 여유가 있겠습니까. 제게는 그런 일을 감당할 만한 재력이 없습니다.”
그러자 하 목사님은 정색하며 단호하게 말했다.
“장로님, 하나님 일은 돈 가지고 하는 게 아닙니다. 순종하면 하나님이 재정을 허락해 주시고 사람도 보내 주십니다. 올해 안으로 NGO를 설립해 보시지요.”
그 권위 있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라고 답했다. 돌아오는 길 내내 ‘NGO라니, 평생 정부 관료로 일한 내게 비정부기구 일을 하라니, 이게 무슨 뜻인가’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막막한 가운데 새벽기도회를 나가고 기도원에 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하며 매달렸다. 그렇게 두 달이 지났다.
그해 10월 온누리교회 창립25주년 기념예배가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에서 드려졌다. 하 목사님은 “이제는 우리가 받은 큰 사랑을 나눠야 할 때입니다”라며 수만명 성도가 모인 자리에서 NGO 설립을 선포하시고야 말았다. 난감해진 나는 강대상을 우두커니 바라볼 뿐이었는데, 그때 그 뒤로 ‘더 멋진 세상’이라고 쓰인 대형 현수막이 눈에 들어왔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나는 온누리교회 2000선교본부로 달려갔다. 당시 본부장이던 도육환 목사님과 김창옥 전도사님을 만나 상황을 설명했다. 김 전도사님은 현재 더멋진세상 사무총장이다. 하나님은 더멋진세상을 위해 이미 사람을 준비해 두셨던 것이다.
하 목사님은 NGO 이름을 ‘램프 온’(Lamp On)으로 제안하셨지만, 국제적으로 활동하려면 더 명확한 영문 이름이 필요했다. NGO 관련 전권을 위임받은 나는 상암 월드컵경기장 당시 현수막 문구 더멋진세상을 잊을 수 없었다. 영문으로는 ‘베터 월드’(Better World)로 하면 될 터였다. 그것이 이재훈 목사님의 아이디어로 만든 문구였다는 사실은 나중에 알게 됐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3) 우여곡절 끝 NGO 설립… 첫 사역은 일본 쓰나미 현장
청년 30명과 긴급구호팀 꾸려 복구 도와
“과거 몹쓸 짓 했는데도 우리를 돕다니…”
귀국 때 마을 어르신들 찾아와 감사 인사
더멋진세상 자원봉사자들이 2011년 3월 일본 이와테현 오후나토시 쓰나미 피해 현장에서 복구작업을 하고 있다.
더멋진세상을 외교통상부 산하 비정부기구(NGO)로 등록하기 위해 정관을 작성했다. 복잡한 행정절차가 매우 까다로웠다. 그래도 요소요소에서 돕는 이들을 만나 ‘과연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구나’라고 느꼈다. 외교통상부 국세청을 거치고 법원 등기 등을 하느라 1년 넘게 걸려야 하는데, 2010년 12월 29일 두 달 만에 가까스로 외교통상부 장관의 사단법인 설립 허가 승인을 받을 수 있었다.
예상대로 NGO 설립과 운영에 들어가는 초기 비용이 만만치 않았다. 그러나 “순종하면 하나님이 채워 주십니다”란 하용조 목사님의 말씀이 이뤄지는 것을 경험했다. 설립 비용은 이사진과 교회 등에서 채워 주셨고 나머지 사소한 경비는 어쩔 수 없이 사비를 털어야 했는데 이번에도 하나님이 놀랍게 채워 주셨다. 때맞춰 어느 기업체에서 고문직을 제안해 온 것이다. 고문료로 소소한 행정경비를 해결할 수 있었다. 나는 더멋진세상의 영원한 자원봉사자가 되기로 서원했다. NGO 대표인 만큼 무보수로 일하자고 다짐해 이를 지켜오고 있다.
2011년 3월 일본 도호쿠 지방에서 리히터 규모 9.1의 강진과 함께 대규모 해일이 일었다. 높이 10m의 파도가 태평양 연안을 덮쳤다. 동일본 대지진 쓰나미 피해였다. 설상가상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방사선 피폭 위험까지 더해졌다.
더멋진세상의 첫 번째 사역이 시작됐다. 즉시 온누리교회 2000선교본부의 도움을 받아 긴급구호팀을 꾸렸다. 청년 30명과 함께 진앙에서 동북부로 150㎞ 떨어진 이와테현에 도착했다. 현장은 참혹했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모습이 이렇지 않았을까 생각했다. 상황이 얼마나 긴박했던지 일본인 자원봉사자를 찾아볼 수 없었다. 일본 전체가 충격을 받을 만큼 피해가 광범위했다.
이재민들은 학교 건물에 단체로 수용돼 있었다. 모두 몸만 간신히 빠져 나와 먹고 입을 것이 태부족했다. 일본 정부에서 겨우 주먹밥만 나누는 형편이었다.
우리는 언덕 위 교회에 자리를 잡고 침낭에서 새우잠을 자며 복구 작업을 했다. 틈틈이 떡국을 끓이고 파전을 부쳐 이재민들과 나눴다. 따뜻한 국물을 마시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섰다. 청년들 모두가 그리스도의 대사가 돼 몰려드는 주민들을 맞이했다. 아침에는 눅눅한 공기와 매캐한 냄새가 코를 찔렀고, 밤이면 종일 흘린 땀으로 몸에서 쉰내가 진동했다.
계획했던 3주의 시간이 지나갔다. 그 사이 한국에선 방사능 유출과 여진 문제가 크게 보도됐고, 청년 자원봉사자들의 부모들이 발을 구르며 귀국을 종용했다. 귀국을 위해 짐을 정리하는데 마을 어르신들이 찾아와 촉촉해진 눈으로 인사를 했다. 그들은 “과거 우리가 당신들 나라에 몹쓸 짓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이들이 아무 연고도 없는 이곳으로 달려와 우리를 정성껏 돌봐줬으니 이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할지 모르겠다”고 말하며 허리를 숙였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4) 파키스탄의 ‘저주받은 땅’을 ‘축복의 땅’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모여사는 후쉬푸르 마을
예수 배척하려 일부러 척박한 땅 내줘
더멋진세상, 급수탑 지어 깨끗한 물 공급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2014년 파키스탄 후쉬푸르에서 마을 식수사업 준공식에 참석해 인사하고 있다.
파키스탄의 정식 국호는 파키스탄이슬람공화국이다. 수도 이슬라마바드는 ‘이슬람의 도시’라는 뜻이다. 세계에서 인도네시아 다음으로 이슬람교도가 많은 나라다. 그 안에서 그리스도인 또는 소수민족으로 살아가기란 쉽지 않다. 소수민족을 옹호하는 그리스도인 정치가라면 순교까지 각오해야 한다.
2010년 10월 상암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온누리교회 창립 25주년 기념예배에 샤바즈 바티 파키스탄 소수민족부 장관이 참석해 인사를 나눴다. 그는 파키스탄 최초의 그리스도인 장관이자 40개 부처 장관 중 유일한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파키스탄 인구의 2.5%에 불과한 고통 속의 그리스도인과 56개 소수민족의 인권과 평화를 위해 생명을 걸었다”면서 “모든 사람이 차별 없이 존귀함을 누리며 조화롭게 사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이슬람이 지배하는 파키스탄 내각에 소수민족부가 탄생한 것도 평생 인권 운동가로 살아온 바티 장관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파키스탄의 엄격한 신성모독법에 반대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이슬람 과격파로부터 살해위협을 받았다. 급기야 2011년 3월 출근길에 이슬람 근본주의자가 쏜 기관총 99발을 맞고 젊은 나이에 순교하고 말았다. 그의 이름을 딴 복지재단이 샤바즈 바티 메모리얼 트러스트(SBMT)이다. 더멋진세상은 바로 이 SBMT를 통해 ‘저주받은 땅’ 후쉬푸르의 마을 개발을 돕기로 했다.
후쉬푸르는 그리스도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로 평균 수명이 40세 안팎이었다. 땅이 소금기를 머금은 탓에 아무도 관리하지 않는 지역이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저주받는다는 인식을 심어주려고 일부러 척박한 곳을 그리스도인들에게 내줬다. 2010년부터 2년 연속 최악의 홍수가 덮쳐 주민들은 인프라가 무너진 상태로 방치돼 있었다.
2014년 6월 후쉬푸르 마을의 식수·농수 사업 1단계 여정으로 급수탑이 준공됐다. 더멋진세상 사무총장인 김창옥 당시 전도사님과 함께 준공식에 참석했다. 1만여명 주민이 참여한 가운데 축제가 벌어졌다. 마을 촌장은 인사말에서 “그동안 하나님이 우리를 버린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절대로 잊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깨끗한 마실 물과 농사를 지을 물을 보내 주시니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하며 흐느꼈다. 그러고는 우리를 가리켜 “하나님이 당신들을 우리에게 천사로 보내셨습니다”라고 말했다.
행사를 마치고 라호르의 숙소로 돌아와 귀국을 준비하는데 자정 무렵 경찰이 들이닥쳐 빨리 짐을 싸라고 했다. 소수민족부가 입수한 첩보에 의하면 한국에서 온 NGO가 저주받은 땅 후쉬푸르를 축복의 땅으로 바꿔 가는 게 못마땅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우리를 향한 총격 테러를 준비한다고 했다. 황급히 짐을 챙겨 방탄차를 타고 이슬라마바드 국제공항으로 6시간 넘게 달렸다. 위급한 상황이었지만 마음은 평온했다. 주의 일꾼을 굳게 지키시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5) 더멋진마을 프로젝트… 열악한 마을 통째 ‘업글’
깨끗한 식수 공급하고 말라리아 예방사업
유아 사망률 줄어 학교 세우고 농지 개발
전문가 투입 특수작물 기르자 소득도 쑥쑥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와 봉사자들이 2018년 아프리카 세네갈 본나바 마을에서 사막 위에 그물망을 치고 딸기를 재배하는 기술을 교육하고 있다.
외교관 생활을 접고 NGO 대표가 돼 제일 많이 받은 질문은 “더멋진세상의 차별성은 무엇입니까”였다. 준비된 답을 내놓기보다 질문에 답하기를 반복하면서 구체화한 아이디어가 바로 ‘더멋진마을 프로젝트’다.
더멋진마을 프로젝트는 가난하고 열악한 마을을 총체적으로 개발하는 사업이다. 우리가 처음 접하는 마을은 아이들 3명 중 1명이 다섯 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어갔다. 그곳에 깨끗한 식수를 공급할 우물을 파고 보건소를 세우고 말라리아 예방사업을 펼치자 유아 사망률이 현저히 낮아졌다. 살아남은 아이들이 많아지니 학교가 필요했다. 학교를 세우니 아이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을 먹일 음식이 필요했다. 농업전문가들을 투입해 땅을 일궈 농지를 개발하는 법을 교육하니 굶주림 문제가 해결됐다.
먹고사는 문제가 나아지면 삶의 질 문제로 넘어간다. 이때부터 소득증대를 목표로 특수 작물의 재배와 축산업 봉제업 등 다양한 기술을 가르친다. 이 모든 과정을 더멋진마을 프로젝트로 부른다. 성공하면 지역개발의 모델로서 주변의 희망이 되고 빈곤국 전체의 정책 대안이 된다.
더멋진마을은 아프리카 대륙에서 시작했다. 2012년 말 신종원 주세네갈 대사에게서 도움을 요청하는 전화가 왔다. 기니비사우의 대통령이 방한 중에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에 깊은 감명을 받았는데 도입에 도움을 줄 방법이 있겠느냐는 거였다. 주세네갈 대사는 당시 기니 기니비사우 말라위까지 총괄하고 있었다.
신생 NGO로서 감당할 만한 일은 아니기에 즉답은 못 하고 일단 방문해 조사하기로 했다. 2013년 3월 비행기에 올랐다. 인천에서 프랑스 파리를 경유해 세네갈까지 가는 데 하루가 걸렸다. 이튿날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서 비자를 발급받고 다시 비행기로 이동해 기니비사우에 도착하는 데 총 40시간이 걸렸다. 기니비사우의 비사우까지는 자동차로 이동했다. 군대 막사를 개조한 임시 건물 형태의 숙소에 체크인했다. 군사 쿠데타와 오랜 내전으로 도시 곳곳이 파괴돼 있었다.
다시 사륜구동차로 비포장도로를 2시간 달려 블롬 마을에 도착했다. 공동 우물은 썩어 있었고 사람들은 흙집에서 발가벗고 생활했다. 기온이 40도가 넘으니 집 안에 돼지 염소 닭 개 등 온갖 가축이 함께 지냈다. 어디를 가도 썩은 내가 진동했다. 바깥 날씨가 워낙 무덥고 습하니까 그나마 시원한 실내 흙바닥에서 사람과 가축이 함께 뒹구는 거였다. 사람과 동물이 구정물로 목을 축이며 수인성 질병에 그대로 노출돼 있었다.
슬픔과 함께 분노가 일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인간의 삶이 너무도 비참해 보였다. 숙소로 돌아와 침대 옆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했다. “하나님, 우물 한두 개 파는 것으로는 해결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저희 능력을 벗어납니다.” 그러자 “그래서 네가 온 것 아니냐. 너희가 하지 않으면 누가 이 일을 하겠느냐”는 음성이 들려왔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6) “아프리카에 우물 하나 파는 데 얼마 드나요”
한 자폐아 부모 기부로 시작된 프로젝트
열악한 마을 곳곳에 우물 파고 본격 개발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 말씀 실현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2017년 아프리카 세네갈 본나바 마을에 건립한 2층짜리 초등학교 건물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에서 귀국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사무실에서 직원이 전화로 누군가와 옥신각신하는 소리가 들렸다. 어떤 부인이 더멋진세상 대표와 꼭 통화하고 싶어 바꿔 달라고 막무가내로 요구한다는 거였다. 전화기를 건네받으니 상대방은 대뜸 “아프리카에 우물 하나 짓는 데 얼마 드나요”하고 물었다. 나는 “깊이에 따라 다르지만, 평균 1만 달러 정도 듭니다”라고 답했다. 그랬더니 “오늘 입금하겠습니다. 한 가지 부탁이 있는데요. 우리 아들의 이름을 새겨 주실 수 있나요”란 말이 돌아왔다. 알고 보니 그분은 자폐증 아들을 둔 어머니였다.
그때 기니비사우 블롬 마을이 번개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그 덕분에 블롬 마을을 위해 우물을 파게 됐고, 이것이 마을 개발 프로젝트가 시작된 계기다. 지금은 블롬 마을에만 우물이 17개나 된다.
기니비사우에서 귀국하며 세네갈 수도 다카르를 거쳤다. 다카르는 서아프리카의 관문이자 국제 장거리 자동차 경주인 파리-다카르 랠리가 열리는 곳이다. 다카르에서 40㎞ 떨어진 곳에 분홍빛 호수 혹은 장미 호수로 불리는 ‘라크 로즈’가 있다. 건기에는 소금 함유량이 1ℓ당 300g 이상으로 중동의 사해와 비슷한 수준의 염도를 보이며 염분 때문에 분홍빛을 띤다. 라크 로즈로 가는 길 위에서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여있는 본나바 마을과 우연히 처음 만났다.
본나바는 마을을 뜻하는 ‘본나’에 성씨 ‘바’가 합쳐진 것으로 바씨 마을이란 뜻이다. 이슬람교 전통이 강하고 외부와의 접촉이 제한돼 있어 선교의 열매를 맺기 어려운 곳이었다. 안내를 자처한 브라질 출신 파올로 선교사를 만나 “왜 사람들이 보이지 않냐”고 물으니 그가 마을 한가운데로 가서 공을 높이 차올렸다. 그러자 여기저기 개미굴 같은 곳에서 아이들이 튀어나오더니 금세 수십명이 모여들었다.
자세히 보니 갈대와 나뭇가지를 엮은 곳에 사람이 살고 있었다. 학교에 다니지 않는 아이들은 집에서 염소를 기르거나 수㎞ 떨어진 곳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것이 일상의 전부였다. 축구를 좋아하지만, 공이 없어서 선교사가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했다. 갈댓잎으로 얼기설기 엮어 햇빛만 가리는 집이 마을의 유일한 초등학교였다. 30~40명이 책걸상도 없이 바닥에 벽돌을 깔고 앉아 모랫바닥에 손가락으로 글씨를 쓰며 공부하고 있었다.
신종원 주세네갈 대사의 주선으로 세네갈 교육부 장관을 만나 본나바에 초등학교를 지을 테니 교사를 파견해 달라고 요청했다. 장관이 흔쾌히 수락하며 필요한 지원을 약속했다. 내친김에 마을 어린이들을 위해 낙후된 보건소를 리모델링하고, 말리리아약 등 필수 의약품을 제공했다. 현재 본나바 마을은 농업 개발을 위한 2단계 사업이 진행 중이며 주변국에 훌륭한 발전 모델로 변모했다. 마을에 자생적으로 조그마한 교회도 생겨났다.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사 43:19)란 말씀이 실현됐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7) 네팔 한 마을선 인사 때 ‘나마스테’ 대신 ‘저이 머시’
규모 7.8 강진 강타 800만 이재민 발생
구호팀 꾸려 고레다라 마을 집중 재건
1%도 안 되던 그리스도인 35%로 늘어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2014년 아프리카 르완다 응호망과 마을에서 아이들에게 양치질 교육을 하고 있다.
아프리카 르완다는 2012년 이래 다섯 차례 방문했다. 외교부 전직 동료들과 선교사님들의 도움으로 상황이 가장 열악한 르와마가나시 응호망과 마을을 소개받았다. 수도 키갈리에서 동쪽으로 차를 몰아 2시간 거리에 있는데 사륜구동 차량으로도 다니기 어려울 만큼 도로 사정은 나빴고, 흙과 풀잎을 섞어 벽돌을 쌓은 집의 흙바닥에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지금은 응호망과 마을에 진료소 모자보건원 보건소 등 3개의 의료시설이 있다. 미취학 아동 교육발달센터(ECD)가 들어섰고 농업 개발을 통한 농장과 양계장이 개설됐다. 급수탑을 지어 수도관을 통해 각 가정에 깨끗한 물을 공급한다. 응호망과 마을 교회의 흙벽돌 건물을 말끔하게 재건축하기도 했다.
더는 출산을 앞둔 산모가 진통을 참으며 오토바이를 타고 산길을 넘어가는 일이 없어졌다. 주민들에겐 보건 위생 교육과 함께 산모를 위한 마마키트 보급 및 의료보험 지원 등을 실시한다. 5세 미만 영유아 사망률이 30% 이상에서 10% 이하로 줄어드는 성과를 거뒀다. 2018년 나와 함께 르완다를 방문했던 미국의 크리스천 칼럼니스트 넬슨 제닝스는 르와마가나시 사례를 현대 교회가 지향해야 할 총체적 선교 모델로 지칭하기도 했다.
세계 곳곳을 찾아가는 일은 늘 위험을 수반한다. 2013년 10월 주네팔 한국대사관의 요청으로 히말라야산맥의 네팔 오지를 방문할 때다. 17년 경력의 베테랑 기사가 운전을 맡았는데 해가 지기 전까지 돌아오는 것을 목표로 비포장도로에서 속력을 높였다. 그러다 오른쪽 바퀴가 바위에 쾅 하고 부딪혔고, 1m가량 튀어 올랐다가 주저앉았다. 펑크가 난 것이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내가 정신을 차리고 보니 운전석 왼쪽이 벼랑에 반쯤 걸친 상태였다. 아래는 천길 낭떠러지였다. 만일 오른쪽이 아닌 왼쪽 바퀴가 고장났다면 영락없이 천길 절벽으로 떨어졌을 것이다. 모골이 송연한 순간이었다.
전화도 안 터지는 오지에서 고장 차량 앞에 주저앉아 막연히 누군가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그제야 히말라야의 눈 덮인 고봉이 눈에 들어왔다. 맑은 하늘과 고요한 숲을 통해 잠시 모든 것을 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풍경을 감상했다. 2시간쯤 지나니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는 마을 주민을 만났고 그가 렌터카 업체에 연락해 새 차를 보내 달라고 요청해 줬다.
2015년 4월 규모 7.8과 7.3의 강진이 3주 간격으로 네팔을 강타했다. 9000여명이 사망하고 800만명이 다치거나 집을 잃는 등 피해를 봤다. 즉시 긴급구호팀을 파견했다. 해발 1300m에 있는 고레다라 마을에서 집중적인 재건 활동을 했다. 네팔에선 보통 ‘당신 마음속의 신께 경배한다’는 뜻의 산스크리트어 ‘나마스테’로 인사하는데, 고레다라 마을에선 ‘저이 머시’라고 한다. ‘저이’는 승리, ‘머시’는 메시아란 뜻이다. ‘예수 승리’란 의미다. 마을 주민의 1%도 안 되던 그리스도인 수가 재건 활동 후 35%까지 늘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8) 태풍으로 초토화된 필리핀 섬마을… ‘더멋진마을’로
강풍·해일로 마을 전체 물에 잠겨 무너져
실의 빠진 주민들 찾아가 마을 재건 독려
태풍 전보다 더 좋은 환경서 살 수 있게 돼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2013년 필리핀 비눙안안섬 긴급구호 현장을 찾아 주민들과 함께 포즈를 취했다.
2013년 필리핀에 역대급 태풍이 몰려왔다. ‘바다제비’란 뜻의 태풍 하이옌이다. 반경 400㎞의 슈퍼 태풍으로 시속 200㎞의 속도로 필리핀 중부 동쪽 레이테섬을 통과해 세부섬 북쪽을 지나 파나이섬 중앙을 강타했다. 6300여명이 사망하고 1000여명이 실종됐다. 이재민은 400만명이 넘었다.
더멋진세상은 청년 자원봉사자들로 긴급 구호팀을 꾸려 현장으로 달려갔다. 우리는 파나이섬 남쪽으로 들어가 식량 텐트 담요 등을 나눠줬다. 사정이 얼마나 열악하던지 현지 필리핀 군인들도 우리에게서 식량을 타갈 정도였다. 그곳에서 현지 선교사님 요청을 받고 100여 가구가 사는 비눙안안섬을 찾아갔다. 강풍과 해일로 마을 전체가 가슴 높이까지 물에 잠기고 주택 전체가 무너진 상태였다.
삶이 강제로 초기화된 그곳에 더멋진마을을 건설하기로 했다. 실의에 빠진 주민들을 찾아가 함께 마을을 재건하자고 독려했다. 파손된 집들을 수리하는 데만 3개월이 걸렸다. 반파됐던 초등학교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교회 건물을 새로 지었다. 마을 주민들은 가족 구성원이 다시 한 지붕 아래 살게 된 것을 가장 기뻐했다.
태양광 패널을 설치해 가난한 어촌 마을의 밤을 환히 밝혔다. 급수탑 상수도 정화조 하수도는 물론 화장실도 20곳까지 지으니 주민들이 태풍 전보다 더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게 됐다. 우리는 그들의 더 멋진 삶을 응원하기 위해 마을의 유일한 생계 수단인 고기잡이배 두 척을 새로 구입해 선물했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섬마을 사람들이 재난의 피해자가 아닌 축복의 청지기로 여기기 시작한 점이다. 자신들이 모든 것을 잃고 절망에 빠져 있을 때, 먼 나라 낯선 이들이 찾아와 마실 물과 식량을 나누고 폐허가 된 마을을 청소하며 “괜찮습니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됩니다”라고 말해 준 것에 깊이 감사했다.
2014년엔 남아시아의 스리랑카를 찾았다. 아내인 윤미기 당시 온누리교회 권사회 회장과 권사회 임원들이 동행했다. 스리랑카는 다수 불교계 싱할라족과 소수 힌두교계 타밀족 사이 오랜 분쟁으로 오늘날까지 무력 충돌이 빈번한 곳이다. 지금까지 10만명 이상 사망자와 100만명 이상의 난민이 발생했다.
스리랑카 아길 지역에 더멋진마을 조성을 위한 5개년 계획을 시작했다. 낡은 우물을 정수 및 보수하고 마을에 급수탑을 세워 수로를 연결하는 데까지 1년이 걸렸다. 엄마가 차밭에서 일하는 동안 아이를 맡길 수 있는 데이케어센터가 지난해 2월 완공됐다. 준공식 날 마을 잔치가 벌어졌다. 주민들은 함박웃음을 지었고, 아이들은 마을 입구부터 춤을 추며 센터로 달려갔다.
고무적인 것은 주민들 스스로 고질적 문제를 찾아 해결책을 모색했다는 점이다. 데이케어센터가 그랬다. 교사 교육과 운영에 관한 계획을 주민들 스스로 세우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들을 찾아서 맡는 등 주도적으로 움직여 준 점이 무엇보다 고마웠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19) 은퇴한 지 8년이 지난 어느날 청와대서 전화가…
다시 한번 주홍콩 총영사 맡아달라 부탁
강제 퇴직의 아쉬움 등에 고민 끝 수용
목사님 만류로 대표직 사임 않고 떠나
김광동 대표가 주홍콩 총영사로 재임하던 2017년 홍콩 총영사관 집무실에서 업무를 보고 있다.
2015년 2월 어느 토요일이었다. 아내가 전화를 받아보라고 건네주면서 “청와대”라고 했다. 받아 보니 중국과의 관계가 점점 중요해지고 있어서 주중국 공사와 주홍콩 총영사를 역임한 내가 다시 한번 국가를 위해 주홍콩 총영사를 맡아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이었다.
생각지 못한 제안이었다. 은퇴한 지 8년이 지났는데 국가가 나를 다시 부르다니. 엉겁결에 “네, 잘 알겠습니다”라고 답했지만, 자녀들은 냉큼 “아빠, 잘 알아보고 하세요. 보이스피싱인지 어떻게 알아요”라고 말했다. 지금은 외교부 제도가 많이 바뀌었지만, 당시에는 최소한 공관장 2~3회를 지내고 64세에 은퇴하는 경우가 많았다. 앞서 나는 58세 나이로 강제 퇴직을 당해 말 못 할 아쉬움이 늘 묵직하게 마음 한편에 자리하고 있었다.
더멋진세상 대표로서 하나님 일을 감당하고 있었던 터라 이 갑작스러운 제의가 더 고민이 됐다. 아내는 “그동안 당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기도해 왔어요”라며 기도 일지를 보여줬다. 마음속 깊이 묻어 둔 섭섭함을 하나님이 아시고 다시 공관장으로 나갈 기회를 주신 것으로 생각했다.
홍콩은 중국 미국 베트남과 더불어 경제·통상 분야에서 4대 주요국이다. 금융 중심지이자 세계정세 관련 정보가 활발히 유통되는 곳이다. 이런 홍콩으로 다시 보내주신다니 새삼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격해 감사 기도를 드렸다.
더멋진세상의 회장이신 이재훈 온누리교회 목사님께 관련된 일을 보고하고, 대표직을 사임하는 게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이 목사님은 이를 만류하며 대표직은 공석으로 둔 채 떠나도 상관없으며, 유능한 스태프들에게 일을 맡기고 중요한 일은 유선으로 처리하면 되지 않겠느냐고 하셨다. 목사님 의견에 따르기로 하고 스태프들과 향후 업무 처리에 관해 의논한 뒤 보고 체계를 상황에 맞게 정비했다. 홍콩 총영사관 복도에는 역대 총영사들의 사진이 걸려 있는데, 나는 2001~2002년 제20대 주홍콩 총영사에 이어 2015~2017년 제26대 총영사로 두 개의 사진이 걸리게 됐다.
같은 기간 더멋진세상의 아시아 사역은 보다 강화됐다. 2016년엔 아시아교육봉사회(VESA)와 협력해 캄보디아 스렁 지역에 보건진료소를 세웠다. 아시아교육봉사회는 1999년부터 캄보디아에 선교사를 파송·후원해 온 이화선교사후원회가 모체가 돼 2004년 창립한 선교기관이다. 구한말 미국의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암울한 조선 땅에 최초의 여성 교육기관인 이화학당을 세운 것에 감사한 이화여대 크리스천 교수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단체다.
최근 민주화 시위가 한창인 미얀마에선 2017년 소수민족인 그두족 마을에 보건소를 건축했다. 태어나서 한 번도 제대로 된 진료를 받아보지 못한 그두족 주민들을 위해 더멋진세상 실행위원인 산부인과 의사 노정숙 선생님 등 의료진이 무료 진료 활동을 벌였다. 그두족 주민들이 하나님과 더 멋진 만남으로 나아가기를 기도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20) 난민 위한 교육센터 개설… 배움의 기회 제공
전쟁 등으로 고향서 쫓겨난 난민들 위해
영어·아랍어·운동치료·태권도 교실 등 열어
이슬람교도 출신 난민 복음 받아들이기도
더멋진세상이 2016년 개설한 레바논 북부 마스티타 지역의 교육센터에서 시리아 난민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다.
전쟁과 기근 등으로 고향에서 쫓겨나 유랑하는 난민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섬김이 가장 절실한 이들이다. 긴급 구호와 난민 지원 활동으로 대표되는 인도적 지원 사업은 더멋진마을 조성 사업 및 어린이 생명 살리기 사업과 더불어 더멋진세상의 3대 핵심 사업이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은 500만명 넘는 난민을 발생시켰다. 전쟁을 피해 고향을 떠난 이들이 인접국 터키 레바논 요르단 이라크 등지에 정착했고, 심지어 북아프리카나 유럽으로까지 이동하고 있다.
2016년 9월 우리는 레바논 북부 마스티타 지역과 비블로스 구역에 거주하는 시리아 난민 가정의 5~9세 아이들을 위한 기초교육 지원 사업으로 아파트를 개조해 교실 4칸의 교육센터를 개설했다. 센터에 다니는 아이들 대부분은 다른 배움의 기회 없이 센터에서 나눠주는 간식이 끼니의 전부인 경우가 많다.
2017년 4월, 요르단 암만 자발후세인 지역에 온누리난민센터를 설립했다. 시리아의 또 다른 인접 국가인 요르단에는 유엔난민기구 통계상 75만명의 난민이 거주하고 있다. 자발후세인 지역은 서울의 남산처럼 암만의 지리적 중심인 암만 성채의 구시가지 주택가다. 시리아 난민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다수인 이라크 난민과 팔레스타인 난민도 이곳에 거주한다.
센터에는 시리아 이라크 난민을 위한 어린이 태권도 교실, 영어 교실, 운동치료 교실, 시리아 문맹 어린이를 위한 아랍어 교실, 시리아 여성을 위한 교실 등이 개설돼 있다. 특히 어린이 태권도 교실의 인기가 높다. 2016년 브라질 올림픽에서 요르단 태권도 국가대표가 사상 첫 올림픽 금메달을 획득해 태권도에 대한 호감도가 매우 높다.
자국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난민이 되면 차별받는 이방인으로서 심각한 트라우마를 겪는다. 난민 신분이라 차별을 받아도 법적으로 보호받기 힘들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2등 시민으로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이므로 다들 유럽 캐나다 호주 등으로의 이민을 꿈꾼다.
그나마 감사한 것은 자국을 탈출한 이슬람교도 출신 난민들이 난생처음으로 복음을 듣게 된다는 점이다. 현지 선교사님에 따르면 이슬람교가 창시된 7세기 이후 이렇게 많은 이슬람교도가 복음을 받아들인 것은 1400여년 만에 처음이라고 한다.
아프리카에선 남수단 난민들이 모여있는 우간다 부드리 마을을 도왔다. 2016년 10월부터 난민 학교를 위한 텐트 교실 20동을 제공하고 2개의 우물을 파고 200개의 교실용 정수기를 설치하며 중장기 계획을 모색하다가 2018년부터 본격적 지원 활동을 했다. 잔혹한 살육을 피해 맨몸으로 빠져나온 사람들을 위해 그해 9월 16개 교실을 갖춘 초등학교를 완공했다. 난민들의 소득향상을 도우려 개설한 재봉 교실에서는 초등학생 1000여명의 교복을 지어 선물하기도 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21) 멕시코 국경 소외된 마을서 중남미 사역 첫발
주민들 최고 걱정은 아이들의 먼 등굣길
안전한 교육 위해 주민·봉사자 힘 합쳐
인건비 한 푼 들이지 않고 초등학교 세워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2015년 세네갈의 본나바 마을에서 아기를 안고 주민들과 인사하고 있다.
2017년 5월 오랜 준비 끝에 또 다른 대륙인 중남미 사역이 시작됐다. 멕시코 북부 국경 지역의 소외된 마을 푸엔테스를 만났다. 멕시코에서 정식 마을로 승인받기 위해서는 학교 마을회관 운동시설을 갖춰야 하는데, 골짜기에 자리한 푸엔테스는 아무것도 없었다. 쓰레기를 뒤져서 생계를 꾸려야 하는 주민들이 모여 살기에 주소지가 없는 마을이었다. 우리는 LA온누리교회 및 현지 건축 전문기관 등과 파트너십을 맺고 푸엔테스 주민들을 돕는 지원 활동을 시작했다.
주민들의 최고 걱정거리는 초등학교가 있는 옆 마을로 매일 40~50분씩 걸어서 등교하는 아이들의 안전 문제였다. 아동을 대상으로 한 납치나 성폭행 사건이 심심치 않게 일어났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이들이 안전하게 교육받도록 초등학교부터 짓기로 했다. 2017년 6월 착공해 이듬해 1월 12개 교실과 2개의 화장실을 갖춘 건물을 완공했다.
인건비가 한 푼도 들지 않았다고 말하면 주위에서 농담 아니냐고 했지만 사실 그대로다. 푸엔테스 마을 주민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했고, LA온누리교회에서 120여명의 자원봉사자가 4차에 걸쳐 국경을 넘어와 일손을 보탰다. 2018년부터는 격년으로 의료봉사를 하고 있다. 비만과 당뇨가 심한 사람들이 많아 탄수화물 위주 식습관을 개선하도록 돕고 산모들을 위한 출산 전후 감염관리법 등을 교육했다. 초음파 검사로 태아의 상태를 처음 확인한 산모가 얼마나 기뻐하던지. 그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봉사자들의 피로가 한순간에 풀렸다.
동유럽에도 아프리카만큼 사는 게 열악한 지역이 있다. 몰도바는 서쪽 루마니아와 동북쪽 우크라이나 사이에 끼어 있다. 2018년 처음 방문한 현지 마을 인상은 1950~60년대 우리나라 농촌과 비슷했다. 전기는 들어오지만 수도 시설은 미비하고, 우물이 한 군데 있긴 하지만 심하게 오염돼 식수로 사용할 수 없는 상태였다. 우리는 사회복지공동모금회와 협조해 2018년부터 2년에 걸쳐 보건소 리모델링과 식수관 조성 사업을 진행했다.
우크라이나는 면적이 한반도의 3.5배나 되고 유럽 전체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다. 인구도 동유럽에서 가장 많고, 과거 구소련에 속한 15개 공화국 가운데 경제적 중요성 면에서 러시아 다음 가는 비중을 차지했다. 하지만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서방과 러시아 사이 정치적 패권 싸움이 계속되고 있다. 특히 1986년 4월 발발한 체르노빌 원전 폭발 사고로 인근 마을의 환경은 극도로 열악한 상황이다.
우리는 우크라이나 올리자리브카 마을과 크로피브냐 마을에서 미용 정비 컴퓨터 등 직업교육 과정을 개설하고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과정 지원을 시작했다. 학교에 컴퓨터를 지원하고 운동장을 정비하고 도서관 장서를 확충했다. 1년의 절반이 겨울인 이곳에서 더 멋진 마을을 가꾸겠다는 열기가 돋아나고 있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22) 팬데믹 속 생존 위기 내몰린 지구촌 빈민 긴급 구호
코로나로 농업·인도적 지원 차질
세계 곳곳 봉쇄 충격에 빠진 빈민에
식량·위생용품 담은 구호키트 전달
더멋진세상 스태프들이 지난해 5월 네팔에서 코로나19 긴급 구호품을 나눠주고 있다.
코로나19는 세상을 멈추게 만들었고 더멋진세상의 사역에도 영향을 미쳤다. 지난해 3월 마다가스카르 이키안자 마을에 세운 초등학교 준공식 참석을 위해 항공편을 예약했지만 주변의 만류로 떠나지 못했다. 만일 예정대로 갔다면 오가는 길에 몇 주간 격리돼야 했을 테니 크게 곤혹스러웠을 것이다.
그 무렵 레바논은 채무상환 유예를 뜻하는 모라토리엄을 선언해 모든 은행 업무가 중지됐다. 또 식량난이 심각한 부르키나파소에서는 통행 제한을 해제하라는 시위와 폭동이 일어났다. 4월엔 코로나19의 북미 대륙 전역 확산으로 미국 정부가 멕시코 국경을 선별적으로 폐쇄했다. 미국 의존도가 높은 멕시코 국경지대 빈민가인 푸엔테스 마을의 경제가 붕괴됐다. 우리는 쌀과 콩, 파스타 소스와 오일 등을 담은 식료품 상자를 긴급 제공했다.
봉쇄정책으로 접근이 아예 불가능해 사역이 일시 중단되기도 했다. 한국국제협력단(KOICA)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세네갈과 르완다의 농업 사업과 인도적 지원 사업 등이 영향을 받았다. 현지에 파견한 스태프를 급히 철수시키고, 우간다에 나가기로 한 스태프는 파견을 잠정 보류하는 등 긴급 조치가 이어졌다.
가난한 마을일수록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일일 노동자가 많다. 코로나19 봉쇄로 감염병이 아니라 굶어 죽을 형편이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일단 마스크를 착용하지 않으면 밖에 나가 일자리를 구할 수 없으므로 형편에 따라 마스크를 만들어 착용할 수 있도록 재봉틀과 면을 공급했다. 생존에 꼭 필요한 식량과 위생용품 등이 담긴 구호키트를 만들어 주민과 현지 군인 및 경찰에 전달했다.
이런 활동이 가능했던 건 위험을 무릅쓰고 자발적으로 현장에 남은 더멋진세상 스태프들 덕분이다. 비대면을 요구하는 시대에 그들은 스스로 접촉점이 돼 현지와 본부를 이어주고 있다. 현지 스태프들이 각자 상황에 따라 신속 대응하고 있지만, 본부 및 관련 기관과의 소통이 매우 중요하므로 대륙별로 화상으로 정기 토의를 하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주는 교훈은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방식을 근본적으로 바꾸지 않으면 생사의 갈림길에 설 수 있다는 것이다. 코로나19는 지금도 퍼지고 있고 치료제와 백신이 온전히 개발되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계속 퍼질 것이다. 삶의 방식을 바꾸는 실천이 필요한 때다.
자기 자신의 변화와 이웃을 향한 선교의 비전을 공고히 하고 싶다면 2015년 유엔 총회에서 채택한 지속가능 발전목표를 실천해 보길 권한다. ‘누구도 소외되지 않도록(Leave no one behind)’이란 슬로건 아래 2016년부터 2030년까지 세계인이 이행할 17개 목표를 나열하고 있다. 이 가운데 빈곤 종식, 기아 종식, 건강과 웰빙, 질적인 교육 기회의 제공 등이 최우선 목표다. 더멋진세상과 같은 NGO들이 앞장서서 싸우고 있는 과제들이다.
***[역경의 열매] 김광동 (23·끝) 더 멋진 세상을 위한 선교 여정 땅끝까지 이어질 것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어주신 큰 은혜
척박한 땅에 나누자는 일념으로 사역
봉사는 하나님께 드리는 내 삶의 예배
김광동 더멋진세상 대표가 2015년 아프리카 코트디부아르의 한 보건소에서 아기를 안고 있다.
더멋진세상은 더 멋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보이지 않는 헌신과 굽힐 줄 모르는 선교 비전에 의해 만들어져 왔다. 지금은 국제기구와 매칭펀드 사업을 펼치는 등 연간 80억원 규모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2019년 이사회 때 더멋진세상의 기관 운영비가 8.5%에 불과하다는 점을 공유하니 모두 놀랐다. 하나님의 기적은 척박한 땅에서만 일어나는 게 아니었다.
더멋진세상 국내외 모든 스태프는 오직 하나님이 우리에게 부어주신 은혜를 척박한 환경의 가난한 이들에게 나눠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달려왔다. 한 푼이라도 절약해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고, 가난으로 무너진 삶을 세우는 데 도움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헌신해온 섬김의 흔적이다.
유럽과 소아시아를 오가며 선교하면서 철저히 자비량으로 활동했던 사도 바울을 생각한다. 그는 텐트 메이커로서 삶을 꾸려갔다. 지금으로 치면 자원봉사자다. 나도 그 정신을 이어받아 무보수 자원봉사자로서 더멋진세상 대표 일을 해오고 있다. 순수한 자원봉사자로서 일하는 것이 하나님께 드리는 내 삶의 예배라고 생각한다.
나는 외교관으로서 38년, 민간 외교를 펼치는 NGO 자원봉사자로서 10년을 살았다. 외교관으로 근무하며 해외를 오갈 때는 넓은 좌석에 앉아 다리를 펴고 다녀 몰랐는데, 무릎을 구부린 채 폭이 좁은 이코노미석에 앉아 있자니 처음에는 정말 고역이었다. 하지만 어느새 불편함을 기꺼이 감수하는 즐거움을 알게 됐다. 불편함을 견디면 그만큼 돌아오는 대가가 있기 때문이다.
20~30여 시간을 견디면 아프리카 어느 마을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선물할 수 있다. 14시간을 견디면 서남아시아 어느 학교에 컴퓨터를 보낼 수 있다. 그들이 얼마나 크게 웃으며 기뻐할 줄을 아는데 잠시의 불편함을 어찌 견디지 못하겠는가. 경험해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기쁨과 감동이다. NGO 활동을 하며 내가 베푼다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내가 받은 것이 훨씬 더 많을 뿐 아니라 영적으로도 회복되고 성숙해졌다는 걸 느낀다.
선교사가 들어가기 힘든 곳에 NGO 모자를 쓰고 달려가 집을 짓고 우물을 파고 학교를 지었다. 그러자 복음의 열매가 맺히고 교회가 세워지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했다. 영적으로 침체되고 무너졌던 마을에서 영적 돌파가 일어나 한 영혼이 구원받고 세례를 받는 일들을 목격했다. 선교를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며 성령님의 놀라운 사역이었다.
코로나19로 현지에서 철수했던 인원들이 다시 현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더멋진세상은 현재 지구촌 24개국 27개 마을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는 이웃들을 돕고 있다. 지진 홍수 태풍 등 긴급 구호 활동을 했거나 이미 프로젝트가 종료된 나라들은 37개국에 이른다. 우리는 땅끝까지 이르러 하나님 나라를 이뤄가는 선교 여정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우리의 이야기는 내일도 계속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