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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사도행전 26장 19-32절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 내가 왕께 담대히 말하노니 이 일에 하나라도 아시지 못함이 없는 줄 믿나이다 이 일은 한쪽 구석에서 행한 것이 아니니이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 아그립바가 바울에게 이르되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 바울이 이르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뿐만 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생략)” 설교 한눈에 보기 1. 순종이 능력이다 바울의 위대함은 계시를 본 것이 아니라, 계시를 순종한 데 있다. 바울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복음을 전하기 위해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했다. 2.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바울의 복음 전파에 베스도 총독을 흥분하고 아그립바 왕은 압도당했다.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인생이다. 3. 거룩한 광인 바울은 예수에 미친 사람이었다. 우리도 예수님에 미친, 거룩한 광인들이 되자. ● ● ● 핵심 메시지복음을 전하며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최고의 삶을 살자. ● ● ● 청중의 적용 포인트‘나는 예수에 미친 삶을 살고 있는가?’ 카멜레온 이라는 동물이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 자신의 주변 환경에 맞춰 자신의 껍질 색깔을 그때그때 바꾸는 동물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카멜레온처럼 삽니다. 신념이 있어도 살아남기 위해서 언제든지 그 신념을 타협하고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죽어도 양보할 수 없는 신념’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이 요즘 세상에 과연 몇이나 될까요? 사도 바울은 2명의 로마 총독, 벨릭스와 베스도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고, 유대인의 왕 아그립바 앞에서 말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모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력자들이었고, 특히 죄수로 있는 자기 형편에서 자기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이런 사람들 앞에서 조금도 하나님이 자신에게 주신 메시지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자신의 과거 행적과 주님을 만난 경험을 있는 그대로 이야기 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오늘본문에서는 더욱 담대하게 결론을 내리고 있습니다. 1. 순종이 능력이다 19절에서 바울은 “하늘에서 보이신 것을 내가 거스르지 아니하고”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거스르지 않았다’는 말은 순종했다는 말입니다. 하늘에서 보이신 것이란, 자신이 거듭날 때 주님께서 자기에게 직접 나타나셔서 주신 사명입니다. “이스라엘과 이방인들에게서 내가 너를 구원하여 그들에게 보내어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죄 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하게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하더이다” (행 26:17-18) 바울은 주님 주신 이 말씀을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고 매일매일, 그 뒤 10여 년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 사명은 바울의 인생의 가장 절대적 목표가 되어버렸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예루살렘과 유대 온 땅과 이방인에게까지 회개하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전하므로…” 어디서 많이 들은 말 같지 않습니까?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사마리아와 유대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행 1:8) 바로 주님이 승천하시기 직전 제자들에게 남겨주신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같은 말씀을 받았습니다. 주님의 승천을 목격한 오백 명 가까운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씀을 그대로 삶에 실천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그것도 하루 이틀도 아니고, 남은 생애 전부를 바쳐 받은 말씀대로 우직하게 순종하며 사는 바울 같은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바울은 삼층천의 계시도 본 사람입니다. 그러나 바울의 위대함은 계시를 본 것이 아니라, 계시를 순종한 데 있습니다. 환상을 구하지 말고 순종의 사람이 되십시오. 오늘날 ‘하나님의 음성을 들었다, 환상을 보았다’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들은 말씀을 일단 성경말씀에 비추어 확인해야 하고, 그 다음엔 평생 받는 말씀을 순종하며 사는 게 중요합니다. 영적 체험보다 중요한 것은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순종의 삶은 쉽지 않습니다. 많은 고난을 겪어내야 합니다. 대가를 치르는 것입니다. 21절에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나를 잡아 죽이고자 하였으나”라고 말합니다. 짧은 이 한 마디에 바울이 그동안 겪은 수많은 시련들이 다 함축되어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게 얻어맞고 감옥에 갇히고 죽음의 위협도 여러 번 당했습니다.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런 고난을 계속 겪은 것입니다. 우리가 고난을 겪어도 복음 때문에, 예수님 때문에 고난을 겪는다면 그 고난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우리가 겪는 고난의 대부분이 자기 잘못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못된 성격 때문에, 우리의 욕심 때문에 치르는 고난이 대부분입니다. 자기 잘못 때문에 고통 받으면서, 하나님이 고난을 주셨다고 말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이 겪는 고난은 오직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오직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이었습니다. 그래서 그 고난은 하나님이 영광 받으시는 아름다운 고난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고난 속에서 바울은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을 체험했습니다. 22절에서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보통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았다고 하면, 병에 걸렸다가 고침을 받았다든지, 물질적인 축복을 받았다든지, 어쨌든 하나님 은혜로 내가 뭔가를 받았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받아’는 그 목적이 다릅니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오늘날 여기서 높고 낮은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증언하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도움으로 내가 잘된 게 아니고, 하나님의 도움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자신이 잘 되게 하길 원하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이 잘 되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 도와주세요”라고 기도할 때 대게 “내 병 좀 낫게 해 주세요, 내 사업 좀 잘 되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지, “하나님 도와 주셔서 하나님 선포하고, 하나님 영광 돌리게 해 주세요”라고 하는 사람 별로 없지 않습니까? 신앙도 다 자기 중심적이다. 나를 위해서 하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은 다릅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오직 하나님을 전파하는 일에 매진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지난 10여 년 동안 여러 곳에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내가 어떤 사람에게 복음을 전한 것은 내가 잘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서 도와주셨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위치와 환경을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회에서 제 설교를 듣고 계신 2천명 성도들 가운데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 많이 배운 분과 그렇지 못한 분, 사회적 지위가 높은 분과 그렇지 못한 분, 정치적으로 보수와 진보 성향을 가진 분들이 다 섞여 앉아 있습니다. 이렇게 다양한 색깔의 사람들에게 매주 이렇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저는 매주 설교하는 이 시간이 얼마나 감사하고 흥분되는지 모릅니다. 바울은 그 기세등등한 권력자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앞에서도, 자신의 간증을 담대하게 전했습니다. 전혀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있습니다. 자신의 간증을 마무리하면서 번개처럼 복음의 진수를 정리해서 선포합니다. 23절 읽어 보면 참 바울을 보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상황에 따라서 어떤 때는 몇 시간씩 길게 복음을 설교하지만, 이럴 때는 단 한 마디로 십자가 죽음과 부활과 선교의 사명을 요약해서 선포해 버립니다. 자신에게 이야기할 시간이 얼마나 주어질지 몰랐기 때문에, 일단 비수처럼 복음의 에센스를 압축해서 말해 버린 것입니다. 이 짧은 말씀이 어떤 생명의 씨앗이 되어 듣고 있는 누구의 가슴에 열매 맺을지 모르는 일이었습니다. 이렇게 때로는 길게, 때로는 짧게 언제 어디서든 복음의 에센스를 토해 낼 수 있는 것은 바울이 그만큼 말씀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말씀 충만한 사람은 자판기 커피처럼, 꾹 누르기만 해도 말씀이 튀어 나옵니다. 예수가 튀어나오고, 복음이 튀어 나옵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렇게 되기를 바랍니다. 2. 모든 사람이 다 나와 같이 되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어둠의 권세에 사로잡힌 사람은 이 복음에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24절에 보니까, 바울의 말을 듣던 베스도 총독이 크게 소리를 질렀다고 합니다.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베스도는 이미 사전 조사를 통해서 바울이 바리새파들 중에서 최고의 학자로 존경받는 가말리엘의 수제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유창하게 헬라어를 구사하는 엘리트 로마 시민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습니다. 또, 거침없이 자신의 주장을 논리적으로 연설하는 바울의 모습을 통해서 바울의 학문이 보통이 아님도 짐작했습니다. ‘많은 학문’을 쌓은 사람인 것을 알았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다가 예수님의 환상을 보며 거듭난 사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 스토리는 베스도 자신의 인간적 지성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는 차원이었습니다. 기가 질려버린 그는 ‘넌 미쳤다’고 선포해 버린 것입니다. 복음은 상식을 뛰어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지식으로는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결코 복음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베스도 총독은 원래 높은 사람들이 항상 그렇듯이 자기감정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런 사람이 평정심을 잃고 ‘네가 미쳤구나’하고 크게 고함치면서, 격렬하게 반응했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원래 할 말이 없는 사람이 괜히 버럭 화를 내며 소리 지르는 법입니다. 그건 그가 영적으로 흔들리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화를 내는 것은 그 말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이 아니면, 영적인 진리가 아니면 그렇게 흥분할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진리이기 때문에, 움찔한 것입니다. 영적인 파워가 있는 메시지이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흔들린 것입니다. 어둠의 권세에게 눌려있는 그의 영혼이 날카롭게 반응한 것입니다. 이제 바울은 베스도를 포기하고 아그립바 왕을 상대로 말을 합니다. “왕께서는 이 일을 아시기로”(행 26:26). 로마 사람 베스도와는 달리 유대인의 왕인 당신은 우리 지역 사정과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지 않냐? 당신은 나사렛 예수가 누구신지, 그의 삶과 설교가 어떤 것이었는지 잘 알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그의 십자가 부활 사건에 대해서도 다 알고 있으면서 어찌 복음을 영접하기로 결단하지 못하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사실을 이야기하는 것보다 더 설득력 있는 것은 없습니다. 진실 속에는 힘이 있고, 능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인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사건에 1%의 거짓도 없는 사실임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는 아직도 예수님 살아계실 때 있었던 사람들이 대부분 아직도 살아있던 때입니다. 지난 십여 년간 베드로와 요한, 야고보를 비롯한 수많은 사도들과 예루살렘 초대 교회 사람들이 예수님의 십자가 부활 이야기를 선포해 왔습니다. 복음은 몰래 ‘한쪽 구석에서’ 비밀리에 나눈 괴담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알도록, 당당하게 거리 한복판에서 선포되어온 메시지입니다. ‘시험해 보라. 검증해 보라. 확인해 보라. 한 점 거짓이 없고, 부끄러움이 없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이런 당당함과 떳떳함이 있어야 합니다. 27절에서 바울은 아주 결심하고 아그립바를 압박합니다.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십니까?” 이 말은 구약성경을 믿으시냐는 말입니다. 유대인의 왕이라 하면서 유대인들 전부가 믿고 있는 구약성경을 안 믿는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건 정치적 자살행위입니다. 바울은 바로 그 점을 노리고 “선지자를 믿느냐”고 물은 뒤에 대답할 기회도 안 주고 “당연히 믿으시겠지요 유대인의 왕이시니까요”라고 말한 것이다. 구약성경을 믿는다면 구약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해서 수없이 많이 예언하고 있는 것을 왜 믿지 않느냐고 다시 한 번 몰아갈 셈입니다. 아그립바는 성령의 능력으로 충만하여 담대히 간증하며 복음을 전하는 바울에게 완전히 압도되어 있었습니다. 그는 바울의 말을 반격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아그립바는 거짓의 사람인데, 바울은 진리의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떳떳한데 아그립바는 떳떳하지 못한 구석이 많습니다. 정치적으로 거짓말과 말 바꾸기를 밥 먹듯이 했고, 자기 누이동생과 동거하고 있는 까닭에 도덕적으로도 떳떳하지 못했습니다. 어둠의 사람은 빛의 사람을 만나면 왠지 주눅이 들고, 그에게 끌려가게 됩니다. 아그립바는 세상적 권력과 재산은 바울보다 훨씬 많은 사람이었지만, 영적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바울의 거침없는 말씀 선포에 홀린 듯이 끌려갔습니다. 그러다가 아그립바는 번뜩 정신을 차렸습니다. 그가 정신 차렸기에 망정이지 자칫했으면 그냥 예수 믿을 뻔 했습니다.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행 26:28)는 말은 “네가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 정도의 노력을 가지고 감히 나를 설득해서 개종시키려고 드느냐”는 말입니다. 이 말은 자기가 거의 그리스도인이 될 뻔 했다는 말입니다. 사실 아그립바는 거의 예수 믿기 일보 직전까지 와 있었습니다. 지켜보는 사람들만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왕이라는 그의 신분이, 그의 권력과 재산이, 사람들 앞에서의 체면이, 그로 하여금 쉽게 예수님을 영접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아그립바는 “바울이 선지자를 믿으시냐”고 했을 때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었습니다. 유대인들을 다스리는 왕으로서 그들이 믿는 구약성경을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믿는다고 하면 바울의 논리에 그대로 말려들어, “그러면 선지자들이 예언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시냐”는 질문에 대답해야만 했습니다. 그러니까 큰소리로 동문서답하듯이,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말을 돌려 버린 것입니다. 아그립바는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너무 깊이 생각했습니다. 체면이 너무 중요했고, 사람들의 시선이 너무 중요했습니다. 그러다보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을 자신의 구주로 영접할 유일한 기회를 놓쳐 버리고 만 것입니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지 모릅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너무나 많은 세상적 힘과 조건들을 갖추었기 때문에 마음이 가난하지 못했습니다. 정말 말 그대로 ‘가진 게 웬수입니다.’ 그가 가진 것들이 오히려 복음을 영접하는 기회를 닫아 버렸습니다. 이렇게 자신의 성공 때문에, 자신의 지위나 재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체면 때문에 예수를 못 믿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아그립바는 분명 흔들리고 있었는데, 결단하지 못했습니다. 포기할 것들이 너무 많았기 때문입니다. 만약 그가 돈도 없고, 권력도 없었다면, 차라리 몸과 마음이 아프고 가난했더라면 이 순간 그는 의외로 빨리 결단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늘나라 들어가는 것이 마치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보다 어렵다”(마 19:24)고 하셨는지 모른다. 바울은 참으로 대단한 사람입니다. 29절에서, 그는 자신이 이렇게 로마의 죄수로 결박된 것 외에는 이 말을 듣는 모든 사람이 “다 자기와 같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지금 그 자리에 있는 사람 중에 세상적으로 바울보다 못한 사람이 누가 있습니까? 다 바울보다 돈도 많고, 명예도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오히려 그들이 자신을 부러워해야 한다는 것처럼 말합니다. 무엇이 바울을 이토록 자신만만하게 했을까요? 바울에게는 그들이 없는 복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없는데, 돈과 명예가 무슨 소용입니까? 그러니까, 열 일 제쳐놓고 먼저 예수를 믿고 구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하늘의 복을 누리고 하나님의 일을 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게 ‘바울과 같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은 하나님 안에 있는 자기의 인생이 세상 최고의 삶이라는 자신감이 있었습니다. 참 대단한 자신감입니다. 자기 자식한테 “너 나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다면 대단한 부모입니다. 대부분의 부모는 그렇지 못합니다. 죽을 때 꼭 “너는 애비처럼 살지 말라. 네 애비의 못 다한 한을 풀어다오.” 이런 유언 남기고 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큰 돈은 못 물려줘도 “나처럼 살아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길은 예수님 믿고, 그 분과 동행하는 인생입니다. 말씀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세상적인 큰 성공은 못했다 할지라도 하나님 믿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삶을 사는 것이 최고의 인생인 것입니다. 저는 저와 여러분이 우리의 자녀들에게 그런 믿음의 인생의 모범을 보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위 사람들에게 그런 모범과 도전을 던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저처럼 예수 믿으십시오. 그래서 하늘의 기쁨을 누리고 사십시오. 다른 욕심 갖지 말고 이웃에게 예수님을 전하며 사십시오. 이것이 행복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30절에 보니까 “너희도 다 나처럼 되기를 원하노라”는 바울의 이 당당한 선포에 모든 사람이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이제 재판이 끝난 것입니다. 아그립바 왕과 베스도 총독은 너무나 당당한 바울 앞에서 두 손 두 발 다 들었습니다. 히브리서 말씀처럼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할 자”입니다. 논리와 명분, 확신과 능력에서 그들은 결코 바울을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물리적인 힘을 가졌다는 것을 제외하면 그들은 바울 앞에서 무기력했습니다. 아니 바울의 하나님 앞에서 무기력했습니다. “물러가 서로 말하되 이 사람은 사형이나 결박을 당할 만한 행위가 없다 하더라” (삼상 26:31) 두 권력자들은 모두 바울의 진실과 믿음에 압도당했습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바울에게 세상의 법으로 죄를 줄 수는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바울이 가이사에게 호소하지만 않았어도 풀려 날 수 있었을 텐데…”라고 바울을 위해 안타까워해 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의 인간적인 생각이었습니다. 바울에게는 석방되는 것이 목적이 아니었습니다. 로마로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 또, 유대인 자객들이 득실거리는 이 상황에서 석방되는 것이 오히려 더 큰 위험이 될 수도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을 세상의 권력자들은 미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세상이 우리에게 말하는 ‘일이 잘 되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인생이 잘 되는 것’은 이렇게 차이가 큽니다. 세상적으로 잘 되는 것이 실은 나중에 우리에게 더 큰 화가 될 수 있습니다. 반대로 바울처럼 세상적으로는 투옥생활이 연장되는 것 같고 힘들어지는 상황 같지만, 실은 위험으로부터 보호받고 하나님의 사명을 이루는 길이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3. 거룩한 광인 저는 베스도가 복음을 전하는 바울보고 “네가 미쳤다”고 한 말이 반은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바울은 정신이상자는 아니었지만, 예수에 미친 사람인 것만은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미쳤다’고 말할 때는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뭐에 ‘미쳤다’는 말은 정신병이 들었다는 말이 아니라, 자기가 옳다고 믿는 일에 몰입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신의 생명을 거는 것을 말합니다. 가슴에 있는 불을 아무도 끌 수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여자에 미치는 사람, 골프에 미치는 사람, 낚시에 미친 사람 등 어떤 한 가지에 몰입하면 자신의 시간과 돈과 마음을 온통 거기에 줘 버립니다. 뭐에 미치면 모든 것을 그것 중심으로 해석합니다. 골프에 미친 사람은 막대기만 보면 잡고 퍼팅 연습을 한다고 합니다. 어떤 분야에든지 거기서 최고가 된 사람들은 거기에 미치지 않고는 안 됩니다. 러시아의 천재 피아니스트 예프게니 키신(Evgeny Igorevich Kissin)은 밥 먹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하루 온종일 피아노를 친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렇게 잘 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의 인생 전체를 바칠 정도로 미치게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심각합니다. 일제시대 많은 독립투사들이 독립운동에 미쳤습니다. 잃어버린 나라를 되찾는 데 모든 것을 바쳤습니다. 이렇게, 미치기 위해서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작고한 코카콜라의 전 회장은 “자기 몸속에 흐르는 것은 피가 아니라 코카콜라”라고 했습니다. 전 세계인들이 물 다음으로 많이 마시는 음료를 코카콜라로 하는 것이 자기 꿈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콜라에 미친 사람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쁜 쪽으로 미쳐선 안 된다는 것입니다. 술, 마약, 도박 이런 데 미치면 완전히 인생을 망칩니다. 히틀러나 레닌처럼, 피의 혁명으로 자신들만의 제국을 건설하는 그런 꿈에 미치면, 수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칩니다. 잘 미쳐야 합니다. 무엇에 미치느냐가 중요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에게 미친 사람입니다. “우리가 만일 미쳤어도 하나님을 위한 것이요 정신이 온전하여도 너희를 위한 것이니” (고후 5:13) 예수님에게 미쳤기 때문에 그 예수님이 주신 지상명령, 모든 열방과 백성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그 명령을 한시라도 순종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만 만나면 복음을 전했습니다. 유대인, 헬라인, 로마인 가리지 않았고, 유럽과 아시아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가난한 사람 부한 사람 가리지 않았고, 회당에서나 이교도들의 신전에서나 집에서나 길거리에서나 장소를 가리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생명이 걸린 재판정에서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자들 앞에서도 바울의 관심은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정말 아무도 못 말리는 열정 아닙니까? 바울 자신도 자기 안에 있는 복음의 불길, 예수 사랑의 불길을 끌 수가 없었습니다.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렘 20:9)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말씀 들었을 때 그 말씀을 가슴에 담고 가만히 앉아 있지 못했습니다. 말씀 전하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모욕과 핍박을 견디기가 너무 힘들어서, 입에 테이프를 붙이고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다짐도 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가슴에 불이 붙어 있기에 말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이것이 미친 사람의 증세입니다. 가슴에 불이 있다면, 일을 저지르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큰 희생이 따른다 해도 그만두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울이 그랬습니다. 그래서 베스도 총독이 탄식처럼 한 말이 사실이다. “네가 미쳤구나”(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네가 예수에 미쳤구나. 복음 전파에 미쳤구나”). 저는 한국 교회가 낳은 많은 영적 거인들을 만나 뵈었는데, 바울처럼 예수에 미치고, 복음 전파에 미친 사람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돌아가신 C.C.C 총재 김준곤 목사님을 꼽고 싶습니다. 젊었을 때 6.25 전쟁을 겪으며 아내를 공산당의 손에 잃고, 자신도 죽을 뻔한 위기를 겪었던 그는 평생을 예수님밖에 몰랐습니다. 그의 글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골수 공산당은 피 속까지 빨갱이라고 들었는데, 나는 내 무의식과 꿈속에까지 예수의식화가 된 골수 예수장이이고 싶다…내 많은 꿈속에 예수가 있고, 40일을 금식기도할 때도 밥 먹는 꿈보다 예수 꿈을 더 많이 꾸었다. 나의 언어의 대부분이 예수를 설교했고, 내가 쓴 수천 통의 편지와, 길가며 쓰고 밥 먹다 쓰고 자다 일어나 쓰는 글들도 예수이며, 내 딸들을 위해 써 놓은 한 줄 유서도 예수님을 사랑하라는 것이며 내 묘비명도 예수일 것이다…내게 흠도 티도 없는 최후의 순수하고 진실한 것이 있다면 목숨이 열두 번 다 한 후에라도 더욱 사랑하고만 싶은 예수님뿐이다.” 그렇게 예수님밖에 몰랐던 김 목사님은 모든 것이 암울하고 힘들던 1960-70년대, 데모와 최루탄으로 얼룩졌던 한국 대학 캠퍼스의 젊은이들을 복음으로 깨워 일으켰습니다. 여의도 광장에서 매일 50만이 넘는 성도들이 민족 복음화를 위해 철야기도로 울부짖던 EXPLO 74를 주최하면서, 그 분은 한국의 크리스천들에게 민족 복음화와 예수 한국의 비전을 불붙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 민족이 복음화되면 나라의 색깔이 변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우리 기도가 이루어져 이 나라 모든 것이 송두리째 복음화 되는 날. 예수 한국의 두메 마을, 우물가의 여인들과 김매는 농부들의 입에서도 샘물이 터지듯 찬송이 절로 터지고, 각급 학교 교실마다 누구의 강요도 없이 성서가 최우선 필수과목으로 배워지고, 술집들이 모조리 성서교실이 되고, 예수 안 믿는 것이 옛날 쌍놈이 된 것 만큼이나 부끄러워 혼인길도 막히는 민족. 이 땅에 태어나는 어린이마다 어머니의 모태에서부터 기도와 신앙의 핏줄에서 자라며, 국무회의나 국회가 국정의 대소사를 논할 때 의례히 주의 뜻이 앞서고 경건된 기도로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예수의 나라 동방의 성민 코리아. 세계의 시장에서 예수 한국이 만든 나사못 하나, 단추 하나까지도 예수 한국의 신앙과 양심과 정성이 보증수표처럼 의례히 믿어지는 민족. 신명기 28장의 그 놀라운 축복이 우리에게 해당이 안 된다고 누가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이 새로워진 예수 한국의 모습이 세계의 눈에 신기하고 기적 같이만 보일 때, 그들의 교과서는 한국의 현실 부흥은 예수의 터 위에 세운 건물 같고, 신앙의 밭에서 자라난 무성한 나무와 같다고 증언할 것이다. 지상에 일찍이 완전한 기독교 국가란 존재한 일이 없었다. 그렇지만 지상의 종말이 오기 전에 한 민족 쯤은, 한 민족쯤은 단 한번만이라도, 단 한 민족쯤은 송두리째 그들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 바쳐지고 쓰여질 수 있다면 우리야말로 그 기적의 도전 앞에 서 있다. 민족의 가슴에 피 묻은 그리스도를 심어 이 땅에 푸르고 푸른 그리스도의 계절이 오게 하자.” 1980년도, <세계복음화 대성회> 준비를 위한 설명회에서 김 목사님이 선포하신 설교문을 지금도 읽으면 가슴이 쿵쾅쿵쾅 뜁니다. 예수에 완전히 미친 사람, 복음 전파에 완전히 미친 사람, 성령에 완전히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엄청난 비전을 품을 수 있단 말입니까? 한국 교회는 지금 사람이 줄어서 문제가 아니라, 이런 비전이 없어서 문제입니다. 비전이 없는 민족은 망한다고 했습니다. 교회 다니는 사람은 많은데, 바울처럼, 김준곤 목사님처럼 예수에 미친 사람, 복음에 미친 사람은 적습니다. 베스도나 아그립바 같은 세상의 권력자들도 혀를 차며 그들의 열정과 영적인 권위를 어찌하지 못하는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것이 슬픈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일생에 단 한 번 믿는 예수. 정말 한 번 제대로, 화끈하게, 믿어 봅시다. 무엇인가를 위해 우리의 남은 생애를 바쳐야 한다면 한 번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를 위해 바쳐봅시다. 누군가를 목숨처럼 사랑해야 한다면 예수님을 그렇게 사랑해 봅시다. 아침에 일어나서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예수님이며, 밥 먹을 때, 운전할 때, 일할 때 하루종일 노상 생각하는 것이 예수님이며, 밤에 잠자기 전에 마지막 부르는 이름이 예수님이며, 꿈속에서도 무의식 속에서도 가장 많이 생각나는 것이 예수님이 되도록 그렇게 예수님에게 푹 빠져봅시다. 다른 어떤 야심보다 예수님이 주신 그 꿈. 민족을 복음화하고, 세계를 복음화 하는 그 비전을 우리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아봅시다. 그것을 위해 나의 직업, 나의 재능, 나의 시간, 나의 돈이 어떻게 쓰일 수 있을지 날마다 고민해 봅시다. 그것을 위해 시간을 내서 말씀과 기도의 훈련을 받아 봅시다. 교회는 예수에 미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예수에 미쳤기 때문에 남은 생을 예수의 꿈에 헌신한 사람들이 모인 곳입니다. 미치지 않고는 헌신할 수 없고, 헌신하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저의 꿈은 큰 교회를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한 명이라도 예수에 미친 사람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예수님으로 꽉 찬 바울 같은 사람들을 만들어서 세상 속으로, 열방 속으로, 미래 속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 예수님에 미친, 거룩한 광인들이 되어 봅시다. 한홍 목사 미국 버클리 대학(B.A.) 졸업 웨스트민스터 신학대학원(M.Div.) 졸업 풀러 신학대학원 교회사 박사(Ph.D.) 한동대 겸임교수 횃불 트리니티 리더십센터 원장 조선일보 <한홍의 리더십 강좌> 칼럼 연재 두란노바이블칼리지 학장 온누리교회 양재성전 수석목사 현 새로운교회 담임목사 |
사명과 성도의 삶 / 마 28:18-20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18-20절)
“왜 기독교인들은 가만히 자기들끼리만 믿지 다른 나라, 다른 종교 사람들에게 가서 기독교를 믿으라고 강요합니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향해 이렇게 비판하곤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마치 물보고 흘러가지 말라는 말과 같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역동적인 분이십니다. 창세기 3장 8절에도 여호와 하나님이 에덴동산에 ‘거니시는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히브리어로 ‘왔다 갔다 하셨다’는 뜻).
예수님도 역동적인 분이십니다. 하루에 서너 동네를 돌아다니시고, 수많은 병자들을 고치시며, 설교하고 사역하셨습니다. 얼마나 역동적인 분이면 제자들의 배가 뭍 가까이 오는 것을 못 기다리시고 물 위로 걸어오셨겠습니까? 그것도 폭풍이 일고 있는데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하늘나라로 가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마지막 명령이 “가서 제자를 삼으라”는 것입니다. 아직 준비도 많이 안 되어 있고 두려움과 혼란에 빠져 있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기독교는 움직이는 종교입니다. 오순절 다락방에 성령이 임할 때,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었다고 했습니다.
우연의 일치인지는 몰라도, 영어로 ‘하나님’을 ‘God’이라고 하는데, 이 단어의 처음 두 철자는 ‘Go’(가라)입니다. 그런데 ‘Satan’의 처음 세 글자는 ‘Sat’(앉았다, 앉다의 과거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일 분도 낭비하지 않고 부지런히 살면서 주님의 일을 하기 원하시는데, 사탄은 자꾸 우리로 하여금 주님의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을 뒤로 미루게 합니다. 우리를 게으르게 하고, 자기 쾌락을 추구하게 만들며, 현실에 안주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진해야 합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은 엄청나게 크고 중대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명은 절대 미룰 수 없고 선택의 여지가 없는, 교회가 존재하는 의미와도 같은 사명입니다. 그 사명이 없었다면, 저는 하나님이 왜 우리가 예수님을 믿자마자 천국에 데려가지 않으셨는지 이해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 있는 것은 하나님이 살려두시기 때문이고, 하나님이 살려두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삶의 길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삶의 밀도와 질이 중요합니다.
오늘 설교문은 한홍 목사님의 자료를 이용해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1. 사명이란?
오늘 설교 본문은 ‘위대한 지상 명령’ ‘지상 최대의 명령’ 등으로 일컬어집니다. 영어로는 The Great commission 또는 The Great Command라고 합니다. 가장 큰 명령, 위대한 위임이라는 뜻으로 명령이라는 뜻도 있지만 위임한다는 의미가 큽니다. 우리에게 가장 위대한 사명을 ‘맡긴다’는 뜻이지요.
또한 이 명령은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마지막 당부하신 명령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최후 당부 또는 유언(遺言)이라고도 말합니다. 그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실 때 감람산에 모인 제자들과 성도들에게 마지막 당부하신 말씀도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아버지 하나님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행 1:8)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도 예수님의 최후 당부요 유언과 같은 말씀입니다.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태복음 28장 18-20절)
영어로 사명을 ‘미션’(mission)이라고 하는데, ‘선교’도 같은 단어인 ‘미션’을 씁니다. 선교란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특정한 사명을 주셔서 세상 곳곳으로 보내시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세상 속으로 보내셨다는 것을 교회의 사도성(apostolicity)이라고 합니다. 하나님은 움직이는 분이며, 복음은 본질적으로 움직이고 흘러가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크리스천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가만히 있으면 그것은 교회의 본질을 역류하는 것입니다. 크리스천 스스로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기독교 교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선교에 관한 것입니다.
교회의 절대 다수는 목사가 아닌 성도입니다. 성도들은 교회보다 세상 속에서 훨씬 많은 시간을 보냅니다. 세상의 영향을 더 많이 받을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세상 속에서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는 항상 쉽게 풀 수 없는 숙제로 남아왔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의 빛’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세상이 어둡다는 것입니다. 낮에는 불을 켤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빛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세상이 어두운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이 화려하고 괜찮아 보이지만, 사실은 추악한 죄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 세상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빛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그 하나님의 빛을 세상에 전달하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2. 구체적으로 어떻게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할까요?
1) 다리 놓는 사람들 vs 요새를 쌓는 사람들
2세기 기독교는 세상으로부터 무서운 오해와 지탄을 받고 있었고, 인육을 먹는다거나 도덕적으로 무분별하다는 등 각종 악성 루머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민심이 사나워질 때마다 로마정부는 기독교에 대한 핍박의 강도를 높였기 때문에 크리스천들은 지하로 숨어야 했습니다. 이때 기독교 신앙을 변호하는 변증가(apologetic)들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당시 핍박받고 공격받던 교회의 최전방에 서서 신앙에 대한 오해와 공격에 맞서 싸웠습니다.
변증가들은 크게 두 부류로 나뉘는데, 첫 번째 부류는 ‘다리 놓는 사람들’(bridge-builders)로서 ‘시대 문화와 대화하는 그리스도’(Christ in Dialogue with Culture)를 주장했습니다. 그들은 교회가 기독교 신앙과 세상 철학과의 공통점을 찾아내서 양쪽이 서로 대화하고 화목할 수 있는 다리를 놓아야 한다고 믿고 당시 세상 철학을 주도하던 헬라 철학과 기독교 신앙을 접목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들과 정반대의 입장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니, 이들은 ‘시대문화에 대립하는 그리스도’(Christ against Culture)를 가르치는 교회를 세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요새를 쌓는 사람들’(Fortress Builders)이었습니다. 그들은 진정한 교회는 세상의 문화와 철학을 처음부터 결연히 거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헬라와 로마의 문화를 포용한다는 것은 믿음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빛과 어두움, 옳고 그름의 흑백논리로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크리스천은 세상과 단호히 단절되어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크리스천은 군대를 가서도 안 되고, 정부에서 일해도 안 되며, 핍박을 피해 도망가서도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 앞에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당당히 밝히고 핍박당하며 순교하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세상 철학과 기독교와의 접촉점을 찾으려고 하는 사람들의 시도를 비난했습니다.
“도대체 아테네(철학자들의 도시)가 예루살렘(하나님의 도시)과 무슨 상관이 있는가? 학교가 교회와 무슨 상관이 있는가?”카르타고의 교부 터툴리안의 이 말은 요새를 쌓는 사람들이 가졌던 세속 철학을 향한 깊은 혐오를 보여줍니다. 그는 당시의 수많은 이단들이 세속 철학과 기독교 교리의 접촉점을 찾으려고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단호하게 세상과 교회의 단절을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양극단 모두 폐해가 있었습니다. 다리 놓는 사람들은 그 시대 문화와 학문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지만, 요새를 쌓는 사람들은 시대 문화와 학문을 경계했습니다. 이들이 양극단으로 치달으면서, 다리 놓는 사람들은 세속주의로 타락했고, 초대 교회 사상 가장 무서운 이단인 영지주의(靈智主義)와 아리우스주의를 탄생시키게 됩니다. 그러나 요새를 쌓는 사람들은 세상과 교회를 완전히 단절시킨 극단적인 보수주의와 폐쇄주의로 인해 점점 새신자들을 잃고, 내부적으로는 교회가 서로 대립하고 분열되는 아픔을 겪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양극단이 아닌 균형을 잡기 원하십니다. 세상 속에 들어가지만 세상에 의해 타락하지 않는 빛이 되라고 하셨습니다.
2) 교회 밖은 다 선교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고 한 마태복음 28장 말씀 때문에, 보통 크리스천들은 ‘선교’를 해외로 나가는 것으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꼭 해외로 나가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 웨슬리는 ‘온 세상이 다 나의 교구’(The world is my parish)라고 했습니다. 선교는 우리가 교회 밖으로 나가는 순간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화와 언어가 아닌 세상적 문화와 언어가 있는 영역과 분야로 들어가는 순간 우리는 선교지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직장에 출근하거나 동네 반상회와 학교 동창회, 그리고 지역 자전거 동호회에 나갈 때, 선교는 이미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이 속한 장소에서 하나님의 나라의 빛을 흘려보내는 통로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전도단의 창설자 로렌 커닝햄 목사는 1975년, 하나님으로부터 열방의 제자화를 위한 7대 영역에 대한 비전을 받았습니다. 신비하게도 이때 그는 콜로라도 스프링스의 한 호텔방에 있었는데, 마침 그 시각에 같은 지역에 와 있던 국제대학생선교회 창설자 빌 브라이트 박사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만나자마자 빌 브라이트 박사가 말했습니다. “로렌, 하나님이 이 시대 열방의 제자화를 위해 7대 영역에 대한 비전을 주셨소.” 그는 흥분된 목소리로 말하며 작은 노트를 보여주었습니다. 7대 영역은 “가족, 종교, 교육, 문화, 미디어, 경제, 정부”였습니다. 순간 로렌 커닝햄 목사의 눈에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습니다. 바로 하나님이 자신에게 보여주신 비전과 똑같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그 시대의 걸출한 두 크리스천 지도자들에게 동일한 비전을 주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 두 선교단체는 이 사명을 이루기 위해 적극적으로 협력해왔습니다.
복음은 교회 안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 7대 영역 속으로 들어가야만 합니다(요즘은 ‘과학’까지 더해서 8대 영역이 되었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열방의 제자화가 이루어집니다. 단순히 어느 지역에 교회를 몇 개 세웠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8대 영역 안에 하나님의 영향력이 얼마나 들어가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역할이 절대적입니다. 크리스천이 8대 영역을 복음으로 정복해야 하는 것입니다.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이 각 영역에 흘러넘쳐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들은 보이는 교회에만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교회는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하나님은 이 백성들에게 가만히 앉아 있지 말고 세상 속으로 행군하여 들어가라고 하십니다. 크리스천은 교회와 직장, 가정, 공공장소로 이동할 때마다 다른 옷을 입습니다. 교회에서는 집사이지만 회사로 가면 과장이라는 옷을 입고, 가정으로 가면 아버지라는 옷을 입으며, 동네에 가면 반상회 반장이라는 옷을 입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신은 동일한 기독교적 가치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래서 로렌 커닝햄 목사의 말처럼 ‘크리스천은 교회뿐 아니라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주권이 그곳에 임하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신자들을 교회 안에만 묶어둬서는 안 됩니다. 물론 어느 정도 수준에 이를 때까지 강한 영적 훈련을 시키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직장생활을 할 때 타격을 받지 않도록 짧고 밀도 있는 훈련 프로그램을 운영해야 합니다. 그리고 훈련이 끝나면 성도들을 세상이라는 영적 전쟁터로 돌려보내고 뒤에서 지원해줘야 합니다.
사탄의 전략은 크리스천들로 하여금 교회 내에서만 머물게 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뚫고 나아가야 합니다. 사역을 교회 안에만 한정시킴으로써 다른 8대 영역을 잃어버려서는 안 됩니다. 목회자들은 주일에 봉사하는 것만 보고 교인들이 좋은 크리스천이라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평일에 직장과 가정에서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합니다. 교회 임직자를 임명할 때 그것을 필수 평가 기준에 넣어야 합니다. 진짜 영적 실력은 그때 보이기 때문입니다. 토미 테니의 말처럼, ‘부흥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교회의 벽을 뚫고 나가서 세상에서 폭발하는 것’입니다.
과학과 경제, 교육, 문화 등 모든 분야에 있어 영적으로 무장된 리더들을 세상 속으로 쏟아놓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이 땅을 경영하기를 원하십니다. 복음에는 세상을 바꿀 능력이 있습니다. 개인과 교회를 뛰어넘어, 도시와 마을까지 변화시켜야 진짜 부흥입니다. 예수의 정신이 이 사회 모든 분야에 스며들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을 8대 영역의 선교사로 보낼 준비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지난 15년간 교회의 나눔 사역을 교회 밖에서 시도했습니다. 아동복지 시설 열방지역아동센터와 NGO 열방공동체를 통해서 클라이언트, 봉사자, 후원자 등 많은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또한 이러한 사역을 해외선교에 접목하기 위해서 참빛선교회를 운영해왔습니다.
지역 교회와는 다른 언어와 가치관, 문화가 있는 곳에서의 기독교인의 처신은 정말 지혜롭게 해야 합니다. 이런 사역에서는 종교적인 언어를 제한하면서도 하나님의 가치관을 담아야 합니다. 지루하지 않게, 재미있으면서도 깊이 있는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설교와 또 다른 신경을 쓰고 준비해야 합니다. 당장 그들이 예수님을 믿지는 않아도, 사역 속에 담긴 성경적 가치관이 전달됨으로써, 그들이 생각하고 행동하는 데 거룩한 영향을 전하기 위해 시도했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가서 제자 삼으라”는 거대한 비전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같은 전쟁을 해도 육군과 해군의 사명이 다르고, 육군 안에서도 보병과 포병의 사명이 다르듯이, 우리도 각각 주어진 은사와 열정에 따라 지상 명령을 실천하는 데 있어서 맡은 역할이 다릅니다. 그러므로 각 사람은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이 지상 명령을 수행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비전을 수립하고 헌신해야 합니다.
유명한 미국의 과일 주스 회사인 웰치(Welch)의 창업자 웰치 회장은 젊은 시절 선교사로 헌신했는데 몸이 너무 약해서 파송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선교를 하고 싶어서, 비즈니스를 시작했고 거기서 나오는 수익금으로 선교 사업을 지원했습니다.
국가대표 출신의 유명한 태권도 사범이었던 한 선교사님은 아프리카나 중남미 지역에서 순회 태권도 전도사역을 합니다. 동양무술에 대한 신비감을 갖고 있는 지역주민들에게 폭발적인 영향력이 있다고 합니다.
이렇게 모든 제자들은 자신들의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이 주신 지상명령을 어떤 형태로든 실천할 수 있는 비전을 세우고 거기에 헌신할 수 있습니다. 선교란 허황된 돈키호테의 꿈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 속에서 구체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애쓰는 사람이 깊이 고민하고 기도해서 확신한 구체적인 비전입니다.
3. 직장은 거룩한 사명의 현장
하나님은 크리스천을 삶의 현장으로부터 불러내어 믿는 사람들끼리만 안전하게 거하는 요새로 부르시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집회에서만 하나님을 경험하고, 세상 직장에서는 참고 지내라고 하지도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전략은 내가 현재 처한 위치에 머물면서, 그 상황 가운데로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빛을 세상 속으로 가지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전 7:24)
하나님은 교회에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삶의 모든 영역에 함께 계십니다. 그분의 임재는 우리의 가정과 직장과 사회와 온 지구상에 이루어질 것입니다. 교회는 그동안 가정, 교육, 예술, 문화, 스포츠, 정치, 경제, 군대 등 세상 모든 분야를 도외시했던 것을 반성해야 합니다. 우리는 치열한 전투를 치르지 않은 채 원수 사탄의 손에 이 세상의 영역들을 너무 많이 넘겨줬습니다. 교회가 교회 안에만 웅크리고 있었던 것이 가장 치명적인 작전 실수였습니다. <반지의 제왕>에서 프로도가 악의 본부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절대 반지’를 파괴시켰을 때, 비로소 모든 전쟁이 끝났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가서 어둠의 실체를 드러내고 몰아내야 합니다.
우리가 아는 성경의 영웅들은 대부분 제사장(오늘날의 목회자)이 아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목장주이자 사업가였고, 요셉은 경제 감각이 탁월한 행정 관료였으며, 느헤미야는 건설 감각이 탁월한 고위공무원이었고, 여호수아는 장군이었습니다. 다윗은 목동이자 장군이었고 왕이었습니다. 모두가 세상 직장에서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오늘날 기독교는 일터에서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일하는 사람들을 좀 더 부각시켜 성도들로 하여금 그렇게 살고 싶게 만들어줘야 합니다.
현대 교회는 교회 안에서 모이는 여러 가지 훈련 프로그램들과 모임을 강조합니다. 그래야 역동적인 교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교회는 신자들을 강하게 훈련시켜서 그리스도의 군대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나 훈련만 시키고 실전에 병사들을 투입시키지 않는 군대가 있습니까? 신구약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신앙인의 사명을 다룰 때 교회 내부 모임만을 강조한 게 아니라 오히려 가정과 직장, 일반 사회 안에서의 구체적인 믿음의 실천을 더 자세히 표현했습니다.
신실한 크리스천들이 직장에서 일하는 것은 세속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교회 울타리 안에서 사역하는 것만 거룩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직장에서 일할 때 전력을 다해서 일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최대한 빨리 은퇴하고 ‘진짜 하나님의 일’을 하고 싶다는 신자들도 많습니다.
또한 크리스천들이 세상 직장을 단순히 생계유지와 교회 헌금을 위해서 돈을 벌어오는 곳으로만 생각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크리스천들이 본의 아니게 세상 일터에서는 가장 요령을 피우는 사람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직장에서 적당히 일합니다. 가능한 한 늦게 출근하고, 최대한 빨리 퇴근하며, 적게 일하면서도 많은 돈을 벌려고 합니다. 이것은 결코 하나님 원하시는 바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이 건강한 노동의 대가로 세상에서 가져온 재물을 가지고 하나님의 일을 해나가십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성막을 지을 때 하나님은 그들이 애굽에서 가져온 재물들을 다 가져오게 해서 사용했습니다. 부요한 것이 세상적이라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가 부자였습니다. 재물을 버는 능력 또한 하나님이 허락하신 재능입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신 8:18)
재물을 많이 버는 것은 축복이라기보다는 하나님이 주신 재능입니다(축복이었다면 모든 크리스천들이 다 부자가 되게 하셨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소수의 크리스천들에게 재물을 모으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역사에 사용하십니다. 이사야서 60장에도 열방의 자녀들이 재물들을 가지고 여호와의 전으로 와서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 때에 네가 보고 기쁜 빛을 내며 네 마음이 놀라고 또 화창하리니 이는 바다의 부가 네게로 돌아오며 이방 나라들의 재물이 네게로 옴이라”(사 60:5)
선교사를 꿈꾸었던 시카고의 게리 건터라는 신실한 크리스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선교사가 아니라 사업가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는 시카고 무역 연구소라는 회사를 시작했는데, 폭발적으로 성공하면서 엄청난 돈을 벌었고 수백만 불의 선교헌금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그러나 전과 같은 소박한 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엄청난 돈을 벌도록 능력을 주시고 부르셨으니, 저는 가능한 한 단순하게 살고 남은 모든 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누가 그를 향해서 성직자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세상의 재물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우리의 땀을 흘려야 합니다. 오래전 어느 집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교회 건축도 해야 하고, 가난한 이웃들을 돕는 구제 사역도 해야 하는데, 저도 가난하고 교회도 형편이 어려우니 안타까워요. 그래서 꾸준히 복권을 사고 있어요. 시간이 되면 라스베이거스에 가서 슬롯머신도 당겨보고요.” 실제 있었던 일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법이겠습니까?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엡 4:28)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얻은 것으로 하나님의 일을 하려는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서 가져오는 재물이 땀 흘려 일한 노동의 대가이기를 원하십니다.
1) 하나님의 가치를 창출하는 곳
직장은 단순히 교회 사역을 하기 위해서 돈을 벌어오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에 몸담고 있는 일터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창출하기를 원하십니다.
2012년 현역 은퇴를 선언한 역도 선수 장미란은 단순한 올림픽 금메달리스트가 아니었습니다. 그녀는 주변의 코치, 스태프, 후배, 동료들을 지극 정성으로 세워주고 격려했습니다(수영선수 박태환도 힘들 때마다 장미란 선수의 격려가 큰 힘이 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그녀는 결과에 상관없이 늘 최선을 다했고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런던 올림픽 때도 최선을 다했지만 바벨을 들어 올리지 못하자 눈물을 흘리며 바벨을 놓고 물러났습니다. 자신의 실력이 한계에 왔음을 인정하는 그 담담한 모습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 선수가 크리스천이라고 하니, 얼마나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지 모릅니다. 단순히 운동실력이 뛰어난 선수는 많지만, 그렇게 스포츠 정신이 살아 있는 고결한 품격의 사람은 드뭅니다. 자신보다 남을 먼저 생각하고 격려하며 매 순간 성실하게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이런 모습이 하나님의 가치를 창출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재능과 열정으로 하나님의 가치를 직장에서 창출하는 것이 세상의 빛이 되는 것이요, 그것이 바로 성직입니다.
많은 분들이 애창하는 산울림 김창완 가수의 ‘청춘’이란 노래가 있습니다.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달밝은 밤이면 창가에 흐르는 내 젊은 연가가 구슬퍼
가고없는 날들을 잡으려 잡으려 빈손짓에 슬퍼지면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
이 곡은 너무 슬퍼서 금지곡이 되었다고 하네요. 멜로디가 단조형태로 이어지는 곡의 노래 글은 오늘 말씀의 정서와는 많은 차이가 있습니다. 제가 트로트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정동원 군이 부르는 이 노래가 좋아서 몇 번 들었더니 저도 모르게 입에서 이 노래가 나오는 겁니다. 사실 제 나이와 이 노래는 전혀 어울리지 않거든요. “우리가 무엇에 이끌리어 사는가?”가 중요합니다. 우리의 인생은 “차라리 보내야지 돌아서야지 그렇게 세월은 가는거야”가 아니지요. 2021년 분명한 자신의 좌표를 발견해야 할 것입니다. 내가 선 자리에서 하나님의 가치를 창출하는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2)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는 곳
당신이 신입사원인데 만약 사장님이나 직속 상사 그리고 몇몇 직장 선배나 동료들이 크리스천인 것을 알았다면, 주의하십시오. 회사는 교회가 아닙니다. 또한 당신을 그냥 먹여 살리려는 자선단체도 아닙니다. 당신은 어떤 전문 분야에서 역할을 감당해달라는 기대를 받고, 월급을 받으면서 그 자리에 있습니다. 그러면 맡은 일을 탁월하게 잘해야 합니다.
식당 안에 성경 말씀이 있는 액자를 걸어놓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것은 음식을 맛있게 하고 친절한 서비스를 하는 것입니다. 공장에서 일한다면 당신에게 의뢰한 제품을 정성을 다해 최상의 수준으로 만들어 놓는 것이 당신이 40일 금식기도를 하고, 교회 찬양대 봉사를 하는 것 이상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회사 근무 시간에 컴퓨터로 슬쩍슬쩍 드라마를 보거나 게임을 하면 안 됩니다. 또 상사와 동료들, 부하 직원들을 겸손과 사랑으로 섬겨야 합니다.
많은 크리스천이 자신이 술과 담배를 하지 않고,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회사 상사들에게 물어보면 직장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주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일을 못하고, 태도와 관계가 안 좋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이 크리스천이라고 하면 직장 동료들에게 하나님에 대한 이미지가 좋을 수 없고, 전도의 문이 닫혀버리고 맙니다. 직장에서 일의 탁월함과 지혜로운 인간관계로 인정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거룩한 영향력을 발휘할 길이 열립니다.
세상 일터에서 일하는 크리스천이 꼭 붙들어야 할 말씀은 골로새서 3장 23절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정말 다양한 사람을 만납니다. 좋은 상관들도 있지만, 부하의 공로를 가로채는 사람, 종 부리듯이 일을 시키는 사람, 형편없는 도덕성을 가진 사람, 일보다는 아부와 정치에 더 밝은 사람 등 나쁜 상사들과 선배들도 많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을 보스로 삼으면 지속적으로 직장생활을 열심히 할 동기를 부여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세상 직장에서 일할 때 주님을 보스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을 보스로 삼고 일하게 되면, 당신이 존경할 수 없는 상사도 더는 당신을 괴롭게 하지 못합니다. 그 사람이 당신의 진정한 보스가 아니며, 그의 칭찬과 인정을 받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당신에게 일을 지시하지만, 당신은 하나님의 평가를 구하며 신실하게 일해야 합니다. 모든 세상 조직에는 욕심과 정치와 음모가 난무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보스로 삼은 사람들은 그 진흙탕 싸움 위로 솟아오르는 영적인 초연함이 있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을 내 마음의 보스로 삼을 때, 남들이 하기 싫어하는 일, 천하고 냄새나는 일까지도 기쁜 마음으로 담담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자세를 갖게 됩니다. 어느 집사님은 학교 선생님입니다. 요즘 중학교 아이들이 너무 드세어서 선생님들이 담임교사를 맡지 않으려고 하는데, 그 집사님은 항상 자원해서 말썽꾸러기가 많은 반 담임을 맡아서 지극 정성으로 아이들을 돌보십니다. 누구보다 일찍 출근하시고 늦게 퇴근합니다. 학습 성적이 부진한 아이들을 위해 늦게까지 개인지도도 해줍니다. 그렇게 한다고 월급을 더 주는 것도 아닌데 말입니다. 이분은 목회자보다 더 거룩한 성직자입니다.
이 집사님에게 보스는 눈에 보이는 교장이 아니라 하나님이셨습니다. 우리가 이런 마음으로 일하면 우리는 지구상에서 최고의 일꾼이 될 수 있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최선을 다한다면 일은 곧 예배가 됩니다. 하나님이 그 자리에 당신과 함께, 당신을 통하여 임재하실 것이고, 그분의 영광과 축복이 당신의 일터로 흐를 것입니다.
3) 하나님의 기업과 직장 만들기
많은 신자들이 사업을 시작하면서 하나님의 기업을 만들겠다는 꿈을 꿉니다. 마태복음 5장 16절에 보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불신자들이)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라고 했습니다. 기독교 기업을 만든다는 것이 어떤 뜻일까요? 많은 상사들이 순진한 마음으로 예수 믿는 사람을 고용합니다.
한 기독교 실업인이 사업 초기에 교회에서 알던 성도들을 직원으로 고용했습니다. 개인적으로 알던 사이이다 보니, 직장에서 그들이 게으름을 피우고 작업에서 실수를 해도 징계하거나 해고시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근무 태도가 나쁘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을 방치하는 것은 경영자로서 직무유기입니다. 곧 회사 분위기는 엉망이 되었고 매출도 형편없어졌습니다. 기도하며 고민하던 그는 어느 순간 분연히 일어서서 문제 직원들을 대면하여 징계하고 근신시켰습니다. 그리고 어떤 이들을 단호히 해고시키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들을 사랑과 존경으로 대했지만 단호한 조치는 취해야 했습니다.
기업에서는 직원들에게 명확한 보상과 인정을 해줘야 할 때, 영적인 기준이 아니라 반드시 객관적인 공로를 기준으로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크리스천 사장과 관계가 좋은 사람에게만 혜택이 돌아갈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직장 분위기가 망가지고, 직원들이 열심히 일하고자 하는 동기가 사라집니다. 직원들은 보상과 인정을 받기 위해 신앙이 있는 척, 영적 겉치레만 신경 쓰게 될 것입니다. 근무 시간에 지난 주일 예배 동영상을 인터넷으로 보는 동료를 보고도 같은 교회를 다닌다는 이유로 질책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경영이 제대로 이루어지겠습니까? 그래서 크리스천만으로 회사 직원들을 채우면 안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회사 내에 크리스천이 너무 없으면 영적으로 건강한 분위기를 만드는 데 필요한 힘이 부족해집니다. 크리스천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고 세상 사람과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이 되라는 주님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직장을 만들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하며 어느 정도의 신실한 크리스천 직원들을 보내달라고 주님께 기도하십시오. 그러나 이들에게 믿음 이상으로 직장생활에 필요한 전문성과 근무 태도가 있는지를 철저히 확인하십시오.
이런 경험이 있는 실업인은 숱한 시행착오 끝에 불신자와 신자 직원 비율을 7 대 3 정도로 하는 것이 좋다고 권합니다. 전에는 믿음 좋은 사람이면 다 용납되던 분위기가 불신자 직원들이 들어오면서부터는 객관적인 실력, 전문성과 성실함으로 평가받는 분위기로 변했습니다. 직장은 마땅히 그래야 합니다. 직원은 회사가 성공하도록 전문성을 가지고 기여해야 한다는 분위기를 불신자 직원들이 불어넣어준 것입니다.
크리스천도 불신자들이 섞인 환경에서 일하면 영적 긴장감을 유지하게 됩니다. 사실 크리스천은 불신자들과 섞여 있을 때 더 발전합니다. 크리스천들끼리만 있으면 마음이 더 편협해지고, 신앙 문제로 서로 갈등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불신자들과 섞여 있으면 믿는 사람들끼리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불신자들 앞에서 잘하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다는 거룩한 긴장감이 생겨서 좋습니다.
또 한 가지, 크리스천 상사들을 모시고 있는 이들은 한층 더 조심하고 성실한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직장은 냉정하게 일의 결과로 서로를 판단하는 곳입니다. 만약 당신의 상사가 크리스천일 경우, 그리고 회사에 크리스천이 많을 경우 몇 배로 더 신경 써서 일해야 합니다.
“믿는 상전이 있는 자들은 그 상전을 형제라고 가볍게 여기지 말고 더 잘 섬기게 하라 이는 유익을 받는 자들이 믿는 자요 사랑을 받는 자임이라 너는 이것들을 가르치고 권하라”(딤전 6:2)
새벽기도를 갔다 온다고 회사에 지각하고, 근무 시간에 성경을 읽는다고 하면서 일 실수를 많이 하며, 저녁에 부흥회 간다고 마무리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칼퇴근을 한다면 무슨 덕이 되겠습니까? 성경은 근무시간이 아닌 개인적인 시간에 읽고, 새벽기도를 간다면 회사 출근 시간에 절대 늦지 않아야 하며, 부흥회 때문에 일찍 퇴근해야 한다면 그만큼 일찍 출근해서 동료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이 성경일독과 금식기도 이상으로 중요한 하나님의 일입니다.
4)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
어느 분야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세상에서 사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목회하면서 수많은 직종에서 일하는 수많은 성도들의 애환을 들어서 그 아픔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상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우리 안에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세상 속에서의 크리스천의 책임에 대해서 자주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씀이 마태복음 6장 25절과 26절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을 잘못 해석하면 신자는 돈이나 옷이나 먹는 문제를 무시하고 살아도 된다는 것처럼 들립니다. 사업이나 공부를 대충 하고 “나는 교회 가서 성경 읽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세상일을 다 책임져주실 거야”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 말씀에 담긴 주님의 의도를 제대로 해석한 게 아닙니다.
부산 수영로교회 이규현 목사님이 계십니다. 그 분이 이 말씀을 새로운 각도로 해석하는 설교를 듣고 의미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님은 “공중의 나는 새를 보라 내가 다 기른다. 들의 백합화를 봐라. 내가 다 입히고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새를 보라고 하실 때는 그냥 보라는 게 아니라 좀 묵상해보자는 뜻입니다. 새는 가만히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기르신다고 해서 입만 벌리고 있으면 먹이가 날아들어 오지 않습니다. 새는 먹이를 먹기 위해서 쉬지 않고 날갯짓을 합니다. 성실하고 부지런하며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먹이를 구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염려하지 말라고 했다고 해서, 팔짱 끼고 빈둥빈둥 놀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도 자동적으로 먹고살 것이 생긴다는 말이 아닙니다.
세상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어떤 때는 두 눈을 부릅뜨고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만 자신이 살아가야 할 현장에서 땀 흘리며 치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공짜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공중의 나는 새는 일찍 일어나서 날아야만 지천에 깔려 있는 먹이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것을 위해서 주님이 날카로운 눈과 튼튼한 날개와 부리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도 세상을 살면서 기도 가운데 주님이 주신 능력을 가지고, 자신이 감당해야 할 몫을 치열하게 감당해야 합니다.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면서 열심히 노력해야 합니다.
참새보다 더 작은 상모솔새란 새가 있습니다. 몸길이가 약 10센티미터로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새입니다. 이런 작은 몸집으로 영하 30도를 넘나드는 북극의 겨울 숲에 삽니다. 이 새를 연구한 독일의 한 조류학자의 말에 따르면 이 새는 찬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깃털을 외투로 만들기 시작한다고 합니다. 먼저 둥지를 보강해서 습기를 제거하고 무리를 지어서 함께 밤을 지냄으로써, 온기를 나누어 겨울의 추위를 이겨냅니다(운명 공동체 전략입니다). 북극 시베리아는 어디를 보아도 먹을 것이 보이지 않는 순백의 세계입니다. 그런데 이 새는 지칠 줄 모르고 쉴 새 없이 먹이를 찾아다닙니다. 1분에 평균 45회를 날갯짓하며 이동한다고 합니다. 한 마디로 정신없이 계속 바쁘게 움직이면서 체온을 유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다니면서 겨울나무 껍질 사이에 숨어 겨울을 보내는 나방의 유충을 찾아내어 먹습니다. 쉴 새 없이 찾아다닌 결과 먹잇감을 찾아낸 것입니다.
살아남기 위한 마법은 없습니다. 체온을 유지하기 위해 계속 날게 되고, 부지런히 날다 보니 새로운 먹잇감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모솔새를 만드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아무것도 없는 것 같은 추운 북극의 겨울 숲에서도 상모솔새가 자기만의 방법으로 살 수 있도록 해주신 것입니다.
철새들은 어떻습니까? 어떤 첨단 GPS보다 더 정확하고 유연하며 뛰어난 내비게이션이 머릿속에 들어 있어서 몇 천 킬로미터나 되는 장거리를 길도 안 잃고 매년 날아갑니다. 또 지혜가 있어서, 알프스 같은 높은 산이나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대양을 넘어갈 때는 많은 영양가를 보충해서 날아갑니다. 제일 앞에 날아가는 리더 기러기가 지칠까 봐 서로 리더의 자리를 교대해서 날아가는 스마트한 팀워크도 갖췄습니다. 하나님이 이 작은 생명체 하나에도 심어놓으신 생명력, 파워, 지혜, 에너지는 상상을 초월합니다.
크리스천이 거짓과 술수와 온갖 악이 가득 찬 세상에 들어가서 먹을 것을 찾아내는 것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힘들어서 도망쳐 오는 도피처는 아닙니다. 교회는 최전방 전투기지입니다. 주님의 군대인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에서 영적으로 재충전된 뒤, 다시 세상 속으로 치고 들어가면 하나님이 승리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어려워도 하나님이 우리에게 세상을 이길 힘을 주셨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진정한 병사의 진가는 오직 전쟁터에서 드러나듯이, 진짜 믿음의 진가는 교회가 아닌 세상 한가운데서 드러나야 합니다. 교회가 상황을 탓하고 부모를 탓하는 패배주의자들의 모임 터로 전락해서는 안 됩니다.
어떤 환경에서도 살아낼 수 있는 힘을 하나님이 작은 새에게도 주셨는데,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 인간에게 안 주셨겠습니까? 특히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생명력은 예수의 생명력, 부활의 생명력입니다. 어떤 절망도 이겨내는 내적 능력을 주셨습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그러므로 세상에 들어가서 적극적으로 부딪쳐야 합니다. 장사가 안 된다고 “나 선교나 갈까? 이것저것 다 잘 안 되는데 목사나 될까?” 하면 안 됩니다. 선교와 목회는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이 여러 문들을 닫으심으로써 목회의 길로 인도하시는 경우도 간혹 있습니다. 그러나 신학교가 패배주의자들의 맹목적인 도피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이 입술을 깨물고 좀 더 힘을 낼 필요가 있습니다. 치열한 현장 속에 뛰어들어 신앙의 꽃을 피워야 합니다. 힘들어도 직장에서 잘 버텨내시기 바랍니다. 사업을 제대로 운영하십시오. 그리스도인들이 운영하는 좋은 사업, 좋은 식당, 좋은 학교들이 많이 나와야 합니다.
불교는 속세를 떠나라고 합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세상 속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세상이 어둡기 때문에 더더욱 들어가라고 합니다. 우리가 내버려두면 세상은 엉망이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망가진 세상의 대안을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는 내가 있는 직업 환경 속에서 어렵지만 능력을 드러내고 뚫고 들어가야 합니다.
4. 삶의 현장에서의 자세
많은 크리스천이 자신의 삶의 현장에서 주된 책임은 말씀을 전파하는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정도 사실이지만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마태복음 28장의 ‘제자 삼으라’는 명령은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라기보다 사도들과 교회 전체에 주신 것입니다. 우리가 말씀을 전하기 전에 중요한 것은 먼저 성령의 능력으로 상대방의 마음을 여는 것입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 2:4,5)
여기서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라는 말은 직장에서 일할 때 주님이 보스라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누가 봐도 혀를 내두를 정도로 탁월하고 성실하게 일을 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로 지혜롭게 사람들을 섬겨야 합니다. 일을 잘하고 관계를 잘 맺으면, 불신자 회사 동료들이 호기심과 함께 존경심을 갖게 됩니다. 그때 그들에게 믿음에 대한 긍정적인 호기심이 생깁니다. 신우회를 만들고 싶다면 먼저 실력과 인품으로 직장에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때 우리가 겸손하면서도 확신을 가지고 자연스럽게 주님을 증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벧전 3:15)
여기서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말을 주목하십시오. 서울역에 가면 승합차에서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고, 몇 사람이 서서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크게 외치면서 행인들에게 전도하고 있었습니다. 승합차 전체에는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이라고 쓴 종이들이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이것을 보면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담대히 전하는 것은 좋지만 ‘이 귀한 복음을, 이 귀한 예수님을 좀 더 품위 있게 전할 수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물론 그런 방법으로도 구원받을 사람이 있겠지만, 그로 인해 기독교를 무례하게 여기며 오히려 교회와 담을 쌓아버릴 사람이 더 많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20년간 미국 풀러신학대학원 총장으로 재직한 저명한 신학자 리처드 마우 박사는 크리스천이라면 ‘신앙적 신념과 시민 교양’(Conviction and Civility)을 겸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복음의 진리에 확실히 거하면서도, 이 사회의 상식에 벗어나지 않는 교양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크리스천들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교양과 예의가 있는 사람은 종종 강한 신앙적인 신념이 없고, 반면에 강한 신앙적인 신념을 가진 사람은 예의가 없다는 것입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행인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로 찬송가를 크게 틀어놓고 전도하는 사람은 신앙은 있는데 시민 교양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반대로 복음을 전해야 할 자리에서마저 입을 닫고 있는 사람은 교양은 있지만 복음적 신념이 결여된 사람입니다.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에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 안 모든 사람에게 비치느니라”(마 5:15)
우리가 복음을 부끄러워하거나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권력자 앞이라고 해서, 많은 사람들 앞이라고 해서, 자신이 크리스천임을 부끄러워해서는 안 됩니다. 무례하지 않으나 조용하고 겸손하게, 그러면서 확실하게 자신의 정체성을 밝히는 용기가 있어야 합니다. 교양과 신념, 이 두 가지를 결합해서 최적의 교집합을 만드는 것이 세상 속에서 복음을 전해야 하는 크리스천의 임무입니다.
일찍이 빌리 그레이엄 목사님은 이렇게 예언하셨습니다. “내가 믿는 바, 차세대의 새롭고도 위대한 하나님의 부흥 역사는 일터의 성도들을 통하여 일어날 것이다.” 저 또한 전적으로 이 말에 동의합니다. 진정한 부흥은 단순히 교인 숫자가 많아져서 교회가 커지는 것이 아닙니다. 진짜 부흥은 영향력입니다. 하나님의 진리로 인격과 비전이 새로워진 크리스천이 세상 속으로 들어가서 자신이 체험한 하나님을 삶으로 풀어놓을 때, 어둠의 세력이 뒷걸음질치고 하나님의 임재가 세상 곳곳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이것이 진짜 부흥입니다. 세상 속으로 담대히 들어가는 크리스천이 되십시오.
<묵상과 나눔>
1. 크리스천의 사명은 무엇입니까?
2. 어떻게 우리가 세상의 빛이 될 수 있습니까?
3. 우리에게 일터는 어떤 곳입니까?
[출처] 기독교 교리 11 사명과 성도의 삶 / 마 28:18-20|작성자 열방지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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