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쉬운 노래 고마운 목소리 / 한정숙
-엄마와 오빠생각-
기계적인 간호사들의 움직임만 있을 뿐 병실은 아직 조용하다. 옆 침대 환자를 깨울까 봐 가만가만 문을 열고 나간다. 병실에 이어진 복도는 아무래도 소리가 들리겠지 싶어 더 멀리 걷는다. 입원 병동과 진료 동을 잇는 통로로 나가서 앉을 장소와 몸을 기댈 수 있는 큰 기둥을 찾았다. 호흡을 크게 한 후 달래듯이 목을 만져보고 소리를 찾아본다. 크흠! 목청을 가다듬고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핀 후 조그맣게 소리를 내어 본다.
“학교 종이 땡땡땡, 어서 모이자, 선생님이 우리를 기다리신다.” 음정이나 가락은커녕 소리도 나올 기미가 없다. 잠깐 의기소침하고 서서히 용기를 내본다. 배에 힘도 없거니와 간간이 오가는 사람이 의아하게 생각할까 봐 바닥을 보고 노래를 불러본다. ‘학교종’이 안 되면 ‘짝짜꿍’이라도 되려나? ‘비행기’는 더 쉬웠던가? 초등학교 입학하기 전에 많이 불렀던 노래를 줄줄이 소환하여 줄을 세웠다. 추억 속의 동요가 생면부지인 듯 아는 체를 하지 않는다. 그나마 여러 번 시도를 하니 목소리는 조금씩 새어 나온다.
마흔아홉 살 여름부터 가을까지 병원 생활을 했는데 그 일과 중 한 토막이다. 전신마취 환자는 수술 도중 자가 호흡이 어려워 기도에 삽관을 하고 산소와 마취제를 넣어 인공호흡을 동시에 한다고 한다. 나도 같은 경우였는데 스스로 그렇게 느껴서인지 관을 넣기 위해 절개한 목의 상처가 더디 아물어 많이 불안하였다. 더구나 한동안 목소리가 나오질 않아서 의사선생님을 많이 괴롭혔다. 그러나 우습게도 생사를 오가는 큰 수술을 하고 소리가 서서히 돌아오자 직장이 걱정되었다. 직업은 속일 수가 없는 것이라서 학생들과 교실에서 어찌 생활하나 생각하던 중 음악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소리내기 연습을 시작한 날부터 모두가 잠든 한밤중이나 사방이 고요한 이른 새벽이면 정해둔 장소에 나가 음정의 높낮이가 덜한 동요부터 연습하기 시작했다. 내 열정과는 달리 노래는 소리 내기에 그치지 않았으나 연습하는 노래는 조금씩 수준을 올리고, 감정도 실었다. 음악 시간을 어찌 보내야 하나 하는 우려는 여전했다.
다행히 딸이 큰 수술을 받는지 모르게 친정엄마는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았으나 노래 연습을 할 때마다 어머니는 옆에 계셨다. 특히 ‘오빠생각’을 연습할 때면 숨소리까지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하자 띠동갑 오빠는 대학생이었는데 진도대교가 개통하기 오래전의 일이라 배웅할 때면 버스를 타고 부두까지 함께 가서 손을 흔들며 끝도 없는 이별 인사를 했다. 뿌연 먼지를 마시며 돌아오는 버스에서 말씀이 없으셨던 엄마는 마루에 우리를 앉히고 ‘오빠 생각’을 불러주셨다. 돌이켜 보니 맘껏 뒷바라지 못하는 아들에 대한 미안한 마음을 노래에 담았겠구나 하고 짐작한다. 그러나 엄마의 마음과는 달리 “우리 오빠 말 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이 대목에선 나도 동생도 소리 높여 부르며 나중에 받게 될 선물만을 기대했다. 정작 고학생인 오빠는 동생들의 바람을 저버릴 수 없어서 방학이 되어 내려올 때면 공책 몇 권과 연필이 다였다. 그래도 우리는 늘 소리 지르며 기뻐했다.
내가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며 엄마의 손을 빌릴 때도 자장가 대신 손주들에게 “뜸북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로 시작하는 ‘오빠 생각’을 들려주셨다. 토실하게 자라는 외 손주를 사랑하는 마음에 당신의 자녀들을 키우며 쏟았던 애정까지 더하여 부르셨을 어머니의 목소리는 애틋했다. 그런 엄마가 아가들에게 책을 읽어주시거나 노래를 불러 줄 때면 “어쩌면 성후 할머니는 책 읽을 때나 노래 부를 때 정숙씨랑 목소리가 똑 같대요.” 하며 옆방에 살던 새댁이 부러워했다. 그럴 때 마다 이야기가 많고 감성이 풍부해서 손주들에게 재미난 이야기꾼이 되어주시는 어머니가 자랑스러웠다. 맑은 목소리를 주신 점에 대해서는 특히 고마웠다.
병원에서 연습하던 ‘오빠 생각’은 녹록지 않았다. 첫 음절의 시작은 의욕적으로 시작되나 다음부터는 당장 음정이 떨어지고 떨렸다. 우격다짐으로 끝까지 가 보려면 얼굴에 열이 오르고 숨이 가빠졌다. 노래연습이 안 될 때면 통로의 큰 기둥과 기대어 ‘목소리라도 나오니 그 아니 다행이냐’고 스스로 위로하며 의지를 불태웠다.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이 부담스러우면 핑계 삼아 의자에 주저앉아 마음을 다스렸다. 그래도 더 나아질 것이라며 연습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물색하다가 울화가 치밀 때면 목소리와 관련된 진료실을 찾아가서 하소연하고 따지며 나아질 방법을 의논했다. 그러나 의료진은 “환자분의 생각처럼 음치가 된 건 아닙니다. 시간이 가면 서서히 좋아질 것입니다” 하며 조바심을 경계했다. 나의 입장을 모르고 하는 소리다. 연습해야 할 노래는 ‘오빠 생각’뿐이 아니다. ‘고향의 봄’도 해야 하고 ‘섬집 아이’도 해야 한다. 노래마다 어머니의 냄새가 묻었고, 교실에서도 마음을 다해 아이들과 불렀던 곡이다.
석 달의 병원생활을 마치고 1년을 쉬면서 애를 써봤으나 아무래도 노래는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대신 좋아하는 음악을 듣는 일에 품을 들이고 학생들과 쉽게 익힐 수 있는 악기를 찾았다. 책을 소리 내어 읽는 일에도 시간을 내었다. 학교에 돌아가서 음악수업을 할 때는 노래를 시범 보이지는 못하고 오디오의 덕을 봤다.
노래가 마음처럼 되질 않아 애를 태운 지 벌써 10년하고도 3년이 지났다. 여전히 벽이 된 노래는 곁을 내주지 않는다. 대학 시절 학교 도서관에서 밤늦게 귀가하며 친구들과 소리 맞춰 부르던 전영록의 ‘사랑은 연필로 쓰세요’나 30대 젊은 시절 청바지에 손을 넣고 발을 까닥이며 불러댔던 김건모의 ‘핑계’도 옛이야기가 되었다. 더 어린 시절 성악을 준비하는 친구의 노래 반주를 하며 어깨너머 배운 아름다운 가곡은 또 말하여 무엇하겠는가?
오늘은 종일 비가 내린다. 퇴직 후 시골 본가에서 나무를 기르는 초보 농부 남편은 반가운 손님인 양 반가워한다. 나는 날씨에 걸맞게 옛일을 생각하며 그리운 사람을 부른다. ‘오빠 생각’을 즐겨 부르시던 친정어머니다. 오늘도 노래 ‘오빠 생각’을 편안하게 부르지 못한다. 음정도 불안하거니와 눈앞이 흐려지기 때문이다. 맑은 목소리의 가수가 가만가만 노래하며 내게 말한다. 맘껏 못 부르는 노래는 아쉽지만 맑은 목소리 얼마나 고맙냐고.
첫댓글 큰 수술을 받으신 것 같은데, 음악 수업 걱정하며 연습하시는 선생님의 열정이 대단하시네요. 어머니께 물려 받은 고운 목소리와, 노래를 가르쳐 주시던 어머니를 두신 것도 부러워요. 글을 보며 선생님은 이런 분이구나, 알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몸이 아파서도 아이들 가르칠 걱정하신 선생님은 천상 교육자시네요.
'오빠 생각'은 그 자체로 조금 슬픈데 사연까지 더해지니 부를 때마다 목이 메겠어요.
글이 좋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노래는 사연의 굽이 마다 위로가 되어주는 듯 합니다. 흥얼거리느 것만으로도 좋은 것 같아요. 글 고맙습니다.
글을 쓴 후 출력하여 요모조모 살펴야 하는데 화면에서 훑어보고 고대로 올리니, 다음날 줄줄이 부끄러움 입니다. 울퉁불퉁한 글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더 정진하겠습니다.
잘 부르지 못해도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일이라는 것을 깨닫습니다. 고맙습니다. 오빠 생각, 저도 불러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