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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경: [막1:3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시몬의 장모를 고쳐 주심]
나아가사 그 손을 잡아 일으키시니 - 예수께서 병을 치유하실 때 취하시는 특징적인 행동으로서(41절;5:41) 환자에 대한 예수의 적극적인 사랑을 잘 나타내 주고 있다. 한편 누가는 이 장면을 '열병을 꾸짖으신대'라고 기록하고 있는데(눅 4:39), 이는 의사 출신인 누가가 그 열병의 원인을 사단의 활동으로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눅 13:16)
열병이 떠나고...수종드니라 - '떠나고'에 해당하는 '아페켄'(*)은 부정 과거형으로서 이는 베드로 장모의 열병이 즉각적으로 단번에 나은 사실을 가리키고, '수종드니라'에 해당하는 '디에코네이'(*)는 미완료 과거형으로서 계속하여 수종드는 현재적 상태를 의미한다. 이와같은 확실한 구원의 확증을 받은 자에게는 주님을 위하여 충성하고자 하는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성 경: [막1:3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저물어 해 질 때에 - 유대인들은 안식일의 계명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토요일 오후, 곧 안식일이 끝나는 시각을 기다렸다가 병자들을 운반해 와 예수께 고침받기를 원하였다. 유대인의 안식일은 금요일 해질 때부터 토요일 해질 때까지였으며, 이 시간내에서는 일체의 노동 행위가 금지되어 있었다(렘 17:21). 특히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들로 하여금 안식일의 정신은 배격(排擊)한 채 그 율법의 조목만을 지키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리하여 백성들은 영적으로 육적으로 병든 삶을 그대로 유지한 채 살수 밖에 없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종교 지도자들에게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신은 버렸도다"(마 23:23)라고 신랄하게 비판하셨다.
모든 병자...데려오니 - 폭발적인 소문이 온 갈릴리에 퍼져나가자 '모든(각양) 많은 병자들과 귀신들인 자들이 예수께 나아왔다. 특별히 본문의 '데려오니'(*, 에페론)는 미완료 시제로서 병자들을 계속 연이어서 데려왔음을 보여 준다. 한편 마가는 누가의 경유처럼 각 환자들의 질병을 구체적으로 묘사하지 않고 다만 '모든'(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예수께서 그 어떤 질병도, 또 아무리 많은 환자라도 다 고치실 수 있는 능력이 있으심을 은연중 강조하고 있다.
성 경: [막1:3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온 동네가...모였더라 - 마태와 누가는 병자들의 큰 무리에 대해서만 기록하고 있지만(마 8:16;눅 4:40), 마가는 온 동네, 즉 가버나움 지역의 무리들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이때의 시간은 대충 안식일이 끝나는 일몰 직후(日沒直後)라고 보아야 한다. 그날 아침 회당에서 귀신들린 자를 이적으로 고치신 사실이 소문으로 신속히 퍼져 군중들은 환자들을 많이 데리고 예수 계신 곳으로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에 33절은 특별히 생동감을 더해 주며, 이 동사의 시제가 계속적으로 사람들의 수효(數爻)가 늘어가고 있음을 일러 준다. 한편 본문의 '문 앞'이란 베드로의 집 문 앞을 가리키며 바로 이 문을 통과한 자들, 곧 문을 통과하여 예수를 만난 자들은 하나같이 회복과 생명의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다.
성 경: [막1:3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많은 병자를 고치심]
각색 병든 많은 사람 - 이는 예수께 나아온 병자들의 양상을 보여 주는 말로써 그 병증이 매우 다양했음을 알려주며, 더불어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께 나아왔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예수께서 베푸신 이적을 대별(大別)하면 귀신 축출, 질병 치유, 죽은 자를 살림, 피조계(被造界)를 당신의 의지로 다스림 등이 있으나 특히 마가가 관심을 가진 부분은 바로 귀신 축출이었다.
귀신이 자기를 알므로 -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위시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으나 영적 감지력(感知力)이 뛰어난 귀신들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다(눅 4:41). 사실 귀신들은지적인 존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마 1:24), 자신의 운명(마 8:29) 그리고 구원의 계획(약 2:19) 등을 알았으며, 그들 나름대로 잘 발달된 지적 체제를 가지고 있었다(딤전 4:1-3). 이 사실은 이미 24절에서도 잠깐 밝힌 바 있다.
허락지 아니하시니라 -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에게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한다. 실로 귀신들도 지.정.의를 가진 인격적 존재이다. 그런 관점에서 마가는 예수께서 '귀신들린 사람'에게 침묵을 명하신 것이 아니고 '귀신'에게 말을 못하게 했음을 강조하고 있다. 만일 예수께서 귀신의 말을 허용 혹은 묵과하셨다면 상황은 어떠했겠는가? 아마도 그들은 24절에서와 같이 당신은 '하나님의 거룩한 자'라고 서슴없이 외쳐대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귀신들이 자신의 신적인 존재에 대해 인지(認知)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으나 그 사실을 사람들에게 공포하는 것을 금지시키셨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사악한 존재에 의해 그 신분이 밝혀지기전에 먼저 말씀과 행동으로 자신이 어떤 모습의 메시야인가를, 즉 당시 사람들이 갖고 있던 메시야 개념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메시야이심을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오직 구원받은 자기의 백성들의 입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온 천하에 전파되기를 원하셨다(16:15;행 1:8).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께서는 아직 당신의 존재를 공개하실 때가 이르지 않았기 때문에 더욱 침묵을 요구하셨던 것이다.
성 경: [막1:3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새벽 오히려 미명에 - 예수께서는 안식일의 교훈과 치유 사역으로 몸이 퍽 고단하셨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베드로의 집에 머무시다가 '아직 날이 채 새기도 전에'(눅4:42) 일어나셔서 한적한 곳으로 기도하러 가셨다.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이엔뉘카 리안'(*)을 흠정역에서는 '날이 밝기 이전'(agreat while before day)이라 하였고, NIV역에서는 '아직 어두울 때'(while it wasstill dark)로 번역하고 있다. 이때는 아마도 오늘날의 새벽 3-4시경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일어나 나가 한적한 곳으로 - 예수께서는 베드로의 집에서 나가셨을 뿐 아니라 그 성읍에서도 나가셔서 갈릴리 가버나움 교외의 광야 지대로 추정되는 '한적한 곳'으로 발길을 옮기셨던 것이다. 본서에는 이곳 외에도 두 번 정도 더 같은 상황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때마다 예수는 당신의 사역 중 매우 중대한 일을 눈 앞에 두었음을 볼 수있다. 지금 예수는 갈릴리 전역에 선교 여행을 떠나기 전으로서 그 어떤 준비보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내밀한 교제를 통한 영적 준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이 한적한 곳에, 이른 시간에 홀로 나아오셨던 것이다.
기도하시더니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프로슈케토'(*)는 미완료 시제로서 예수께서 기도의 끈을 늦추지 않고 지속적이고도 열심히 기도하셨음을암시적으로 나타내는 말이다. 실로 예수께서는 자신이 맡은 인류 구속 사역, 그중에서도 지금 당장 완수해야만 하는 갈릴리 사역을 성공리에 마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감당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요구하셨을 것이다. 한편 예수께서는 이처럼 자신의 기도의 모본(模本)을 통해서 기도가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보여주셨다. 그는 세례 받으실 때(눅 3:21), 열 두 제자를 택하시기 전에(눅 6:12), 오병 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와그 일 후에(6:41,46), 제자들에게 중요한 질문을 하시고자 할 때에(눅 9:18), 변화산에 계실 때에(눅 9: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도 오라"고 하신 사랑의 초청 직전에(마 11:25-30), 베드로가 자기를 세 번 부인하기 전 그를 위하여서(눅22:32), 성만찬 예식을 제정하시던 날 밤에(요 17장), 겟세마네 동산에서(14:32, 35,36, 39), 십자가 위에서(눅 23:34), 그리고 그의 부활 후(눅 24:30)에 기도하셨다. 위의 기도의 경우들은 예수의 기도 생활이 얼마나 진지했으며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었다. 실로 기도는 그분이 지니신 능력의 원천이요 또한 영적 양식이었던 것이다.
성 경: [막1:36]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뒤를 따라가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카테디옥산'(*)은 단순히 추종(追從)하는 것이 아닌 간절한 열망을 가지고 샅샅이 뒤지고 성가실 정도로 찾고 또 찾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시몬을 비롯한 제자들의 예수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증거해 주는 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또한 그들의 영적 무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즉 그들은 예수를 이해하지 못하고 또한 예수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하는 교제의 시간을 가져야 할 필요성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한편 여기서 마가가 '제자들'(*, 마데타이)이란 말를 쓰지 않고 '시몬과 및 그와 함께있는 자들'이라 묘사한 것은 아마도 그들이 제자들처럼 행동치 못하고 단지 무지한 인간적 수준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성 경: [막1:37]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모든 사람이 주를 찾나이다 - 여기에서 '모든 사람'은 베드로의 집 앞에 모여있었던 무리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예수께서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을 고친 것을 보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으며 그래서 '한적한 곳'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를 찾아 뵙기를 원하였다. 이들은 아직 예수를 구주로 깨닫지 못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단지 예수의 외적인 능력, 곧 병 고치는 능력에 혹(惑)하여 열광적으로 예수를 찾기에 급급하였던 것이다. 한편 이 말을 했던 제자들은 예수께서 모든 사람들이 당신을 찾고 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기뻐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실로 그들은 아직 온전한 메시야관을확립하지 못한 채 정치적이고 인기에 영합(迎合)하는 그릇된 메시야관(8:27-9:1)에 집착했음이 분명하다.
성 경: [막1:38]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다른 가까운 마을들로 가자 - 이제부터 주님께서는 갈릴리 지방의 각 동리와 마을들로 다니시며 본격적인 선교 사역을 수행하시고자 결단하신다. 여기서 주님은 일반 사람들과 같이 단순히 이적이나 일으켜 군중들에게 인기나 얻고 세상적인 부귀 영화나 누리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셨음을 보여주셨다(마 4:6-10). 그의 목적은, 비록 이세상에서는 머리 들곳조차 없을지언정(마 8:20;눅 9:58) 고난의 길을 택하시고 그 고난을 통하여 영원한 천국 복음을 전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한편 여기서 '마을들'(*, 코모폴레이스)이란 명확하지는 않지만 아마도 규모를 갖춘 마을을 가리키는 말일 것이다. 유대사가 요세푸스(Josephus)의 증언에 따르면 그 당시 갈릴리 상류 지역에는 수천명을 군락(郡落)으로 하는 약 200여개의 마을들이 형성되어 있었다고 전한다. 예수는 이 200여개의 마을을 다 돌아다니시고자 하셨다기 보다 가버나움 근방의 여러 마을들을 돌으시며 전도하고자 하셨던 것 같다.
전도하리니 내가 이를 위하여 왔노라 -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은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고 제자들을 훈련시키고 고난을 통해 인류를 구원하기 위함이었지 단지 기적이나 베풀어 인기를 누리기 위해서 오시지는 않았다. 물론 병고침과 귀신 축출은 중요한 일이지만(39절) 그것들은 예수께서 이 땅에 오신 근본 목적을 뒷받침하는 것이어야 했다. 실로 마가가 그의 복음을 기록한 목적이 예수를 기적 베푸는 자로서만 지나치게 강조하는 이단적 기독론을 공격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면 분명히 본문의 말씀은 매우 적절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본문의 '왔노라'(*, 엑세르돈)는 말은 '...에서 나아왔다'는 뜻으로서 베드로의 집에서 기도하러 광야로 나아왔다는 뜻으로 해석되기도 하고(Mayer),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서 나아왔다는 의미로 해석되기도 한다(Bengel). 그런데 누가복음의 평행구(눅 4:43)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이 땅에 거룩한 뜻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 아버지의 품을 떠나 세상에 왔노라고 해석하는 것이 더욱 적합할 것이다.
성 경: [막1:39]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갈릴리 전역의 전도 여행]
온 갈릴리에 다니시며 - 이는 예수의 제 1차 갈릴리 전도 여행을 요약한 말이다. 사실 마가의 '온 갈릴리'라는 표현은 과장이라기보다 매우 방대한 지역을 활보(闊步)하였음을 강조하는 말로서, 예수의 전도 여행이 매우 활발하게 전개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여러 회당 - 그 역사의 시작이 포로 시대로 믿어지는 이 회당은(21절 주석 참조) 성전이 파괴되고 유대 백성들이 고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기에 그곳에서 신앙 생활을 하는데는 매우 긴요(緊要)한 역할을 했을 것이다. 예루살렘 탈무드(The Jerusalem Talmud)의 한 구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멸망 때(A.D.70)에 팔레스틴에는 480여개의 회당이 산재(散在)해 있었다고 한다. 예수의 초창기 사역도 이 회당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눅 4:16-30,주제 강해 '유대교의 회당과 초대교회'참조). 한편 예수께서 '여러 회당'에서 설교하신 것이 무엇을 의미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사실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현재 남아있는 회당들의 옛 터를 보면 모두 예루살렘을 향하고 있다. 갈릴리 지방의 회당들은 남쪽을, 예루살렘 남쪽의 회당들은 북쪽을, 예루살렘 서편의 회당들은 동편을 각각 향하고 있다. 우리 주님에게 있어서 이 사실은 그가 어느 회당에 들어가시든지 간에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시는 동안에는 항상 자신이 장차 십자가에 못박히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계셨을 것이다. 주님은 늘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를 염두에 두시고 사역을 감당하셨던 것이다(빌 2:8).
성 경: [막1:40]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먼저 본문 이하부분(40-45절)과 바로 앞 부분의 기사는 접속사 '카이'(*, '그리고')로 연결되었으며, 또 뒤따라 나오는 기사(2:1-3:6) 역시 '카이'로 연결되고 있다. 따라서 40-45절 부분은 1:21-39과 2:1-3:6을 연결시켜 주는 역할을 하는데, 이는 마가복음에서 이 부분이 하나로 간주될 수 있는 단위임이 틀림없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본문은 갈릴리 전도 여행 도중에 발생한 것임이 분명하다.
문둥병자 - 문둥병(혹은 나병)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의 결과를 상징하는 질병으로서, 그 환자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생활을 박탈당한 채 그들의 공동체 밖으로 소외되었다. 한편 성경에서의 문둥병이라는 말은 문둥병(leprocy)을 비롯한 광범위한 유형의 심한 피부병을 지칭하는 병명으로 쓰였다. 이는 흔히 의학 용어로 한센씨 병(Hansen disease)이라 일컬어지는 나병에만 국한되는 용어가 아니라 피부와 모발의 이상 등에도 사용되던 피부 질환까지도 포함한 말이다. 그런데 어떤 종류의 피부병이든간에 그것이 일단 문둥병으로 단정지어지면 그 사람은 이후부터 매우 고통스러운 생활을 해야만 한다. 율법에는 "문둥 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를 풀며 윗입술을 가리우고 외치기를 부정하다 부정하다 할 것이요 병 있는 날 동안은 늘 부정할 것이라 그가 부정한즉 혼자 살되 진밖에서 살지니라"(레 13:45, 46)고 규정하여 육체적 고통과 함께 대사회적 고통까지 함께 받아야만 했던 무서운 질병이다.
예수께 와서 꿇어 엎드리어 - 율법에 의하면 사회 활동이나 대인 접촉이 금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한 문둥병자는 율법의 고리를 깨치고 예수께 나아왔다. 실로 이것이야말로 생명의 주께 나아오는 자의 담대한 모습이다. 그런데 그는 예수께 나아가 그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겸손과 예의를 갖추고 ('끓어 엎드리어') 예수께 경배했다. 이에 대해 누가는 '엎드려'(눅 5:12)라고 했으며, 마태는 '절하고'(마 8:2)라고 각각 묘사했으나 그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것이다. 진정 그는 절박한 심정으로 마치 자신의 전부를 예수께 드리기라도 하듯이 겸손한 몸가짐으로 경의(敬意)를 표했던 것이다(시10:17;약 4:6).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문둥병자는 예수께서는 자기를 능히 고칠 수 있다고 확신했다. 다만 그가 걱정하는 바는 예수께서 과연 자기의 치유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이다. 실로 그 문둥병자의 예수께 대한 신앙 지식(전지 전능하신 분으로서 무엇이든 원하시기만 한다면 모든 것이 가능하시다는 사실)을 가히 초월적이리만큼 놀라왔다. 주께 모두 맡기는 것이야말로 간구자의 참된 자세일 것이다. 한편 그 문둥병자는 예수께 '고침'을 바라기보다 '깨꿋케됨'을 바랐는데, 이는 하나님의 거룩한 선민으로 자부하고 있던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이 문둥병은 의학상의 문제이기 이전에 의식법상의 문제였기 때문이었을 것이다(레 13:1-3).
성 경: [막1:41]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민망히 여기사(*, 스플랑크니조마이;filled with compassion,NIV) - 그 문둥병자가 깨끗하게 될 수밖에 없었던 근본 동인(動因)이 묘사되고 있다. 이 말의 본래의 의미는 '간절히 열망하다'를 뜻한다. 이것은 예수의 문둥병자를 향하신 긍휼과 사랑과 동정심을 동시에 나타내는 말이다. 이는 곧 그가 받는 모든 고통을 목격하고 더불어 그 고통에 동참할 뿐 아니라 그 고통을 치유해 주고자 하시는 마음이 간절하다는 의미를 내포한 말일 것이다(히 4:15). 한편 본문의 '민망히 여기사'라는 독법(讀法)을 일부 사본들에서는 '분하게 여기사'라는 의미의 '오르기스데이스'(*)로 읽기도 한다. 이러한 변용에 대해 혹자(W. W. Wessel)는 주께서 분을 내신다는 말을 쓰는 것에 당혹감을 느낀 서기관에 의해 '오르기스데이스' 독법 대신에 '스플랑크니조마이'라는 독법을 취했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만일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하게 된다해도 그 더러운 병이 마귀의 것이라는 사실이 예수로하여금 분하게 여기도록 만들었다는 설명으로 이에 대한 답변을 삼을수 있다. 즉 예수의 분냄은 병자나 그가 앓고 있는 병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그를 파멸로 이끈 사단에게 겨냥한 것이었다. 이렇게 본다면 예수와 사단은 또 한번의 충돌을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마가의 복음서가 관심을 기울이는 한 가지 사안이다. 그러나 비록 '오르기스데이스' 독법을 취한다하더라도 그 병자에 대한 예수의 뜨거운 연민의 정은 참으로 감동적인 것이었다.
손을 내밀어 - 예수께서는 부정한 문둥병자에게 손을 내밀어 그의 몸을 만지셨는데, 이는 모세법에 근거해 볼 때 부정을 자초(自招)하는 일이었다(레 13:45, 46). 사실 유대인들은 문둥병 환자가 집 안에 들어서는 경우 그 집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부정함을 입는 것으로 간주(看做)할 만큼 의식법에 철저했었다. 그러므로 예수의 이 행위는 초월한 사랑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진정 예수는 인류 구속의 메시지를 단지 입으로서만이 아니라 행동으로도 보이시고, 인간들에게 내재해 있는 두려움과 그릇된 관념을 실현해 보이셨다. 실로 그분의 사랑의 손길은 의식법의 부정이 지닌 힘보다 더 강하고 탁월한 것이었다. 한편 복음서의 많은 구절들에서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친히 그 손을 대시며 병을 고쳐주셨던 사실이 나타나 있다(마 8:3,15;9:29;17:7;20:34;눅 5:13;7:14;22:51 등). 그리고 때로는 병자들이 예수 그리스도께 손을 대기도 하였다(3:10;5:27-31;6:56). 이처럼 어느 편에서 손을 대었든지간에 모두 병이 낳았다. 즉 분명히 그와 같은 신체적인 접촉으로 인하여 치료의 능력이 구주에게서 나와서 그 능력을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전하여졌던 것이다(5:30;눅 8:46). 그러나 이것은 결코 어떤 마술이 아니었다. 또한 그 치료의 능력은 결코 주님의 손가락이나 옷자락에서 나온 것이 아니었다. 그 능력은 참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참 인간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능하신 의지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시는 무한한 사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었다. 주님께서 예나 지금이나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신'(히 4:15) 그 손으로 병자를 만지실 때 치료의 능력은 발하여지는 것이다. 본문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는바와 같이 예수께서는 '민망히 여기사' 그 손을 내밀어 문둥병자에게 대셨다. 이 불쌍한 병자의 간절한 소원과 믿음은 즉시 그를 간절한 마음으로 돕고자 하시는 구주로부터 응답을 받았다. 이처럼 신속한 응답은 주님의 의지와 능력과 사랑이 하나로 뭉쳐진 결과로 이뤄진것이었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 믿음으로 간청하는 자에게 향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응답이었다(원하시면 - 원하노니,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 깨끗함을 받으라.) 사실 예수께서는 이처럼 너무도 적절한 응답을 베푸셨을 뿐 아니라 그 문둥병자에게 '더 큰 믿음과 온전한 영혼'까지 덧붙여 응답해 주신 것이다.
성 경: [막1:42]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곧...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 - 문둥병 증세가 약간의 차도(差度)가 생긴 것도, 일시적인 회복도 아닌 영원히 그 환자의 몸에서 떨어져 나가 버린 이적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 한편 복음서의 각 평행구 중에 마 8:3은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눅5:13은 '문둥병이 곧 떠나가니라'라고 말하고 있으나 여기서는 '곧 문둥병이...떠나가고 깨끗하여진지라'라고 두 가지 면을 다 말하고 있다. 예수께서 행하신 치료는 즉각적이며 완전한 것이었다. 베드로의 장모는 앓던 열병이 완전히 회복되는데 다음날까지 기다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마 8:14, 15). 중풍병자는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침상를 들고 걸어 나갔다(눅 5:24, 25). 한편 손 마른 사람도 그 자리에서 즉시 회복되었다(3:1-5).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의지(41절)와 그 목적 하신 바의 성취(42절)는 절대적으로 일치한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전능성과 권위를 말해주는 것이다. 한편 본 이적은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의식법을 범하신 사건이었으나 내면적으로는 '생명의 성령의 승리'였던 것이다(롬 8:2).
성 경: [막1:43]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엄히 경계하사 - 이 말에 해당하는 헬라어 '엠브리마오마이'(*)는 원래 '말처럼 코를 푸르릉거리다', '콧소리를 씩씩내며 분노를 터뜨리다'로서 매우 격분한 상태를 나타내 준다. 따라서 예수께서 경계하셨다는 말씀 속에는 성냄과분개(憤慨)의 요소가 함께 내포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예수께서는 왜 이처럼 분노하셨을까? 그 이유는 예수께서 당부하신 말씀(44절)을 그 사람이 불순종하리라는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 결과로서 예수는 '다시는 드러나게 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오직 바깥 한적한 곳에' 계시게 되었던 것이다(45절). 진정 예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그들의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이적 행하는 자'로 알려지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곧 보내시며(*, 유뒤스 엑세발렌) - 이를 문자적으로 해석하면 '지체없이 억지로 쫓아 보내시며'가 된다(12절). 이는 앞의 '엄히 경계하사'라는 말과 조화를 이루어 예수의 격렬한 감정을 분명히 노출시키고 있다.
성 경: [막1:44]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삼가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 예수께서는 간곡한 어조로 본 치유 이적을 타인에게 발설하지 않기를 그 문둥병자에게 당부하셨다(3:12;마 12:16;16:20;27:9;눅8:56).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사람들에게 '신통력있는 자', '기적을 베푸는 자'라는 명성을 얻게 되기를 원치 않으셨기 때문이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은 자신들을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해줄 정치적 메시야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었던 터인지라 여차하면 능력 많으신 예수께 몰려와 그러한 능력으로 세상 권력을 장악해 줄 것을 요구할 것이 뻔한 일이었다. 따라서 예수께서 그 문둥병자로 인해 명성을 얻게 되면 오히려 그것이 당신의 사역의 본질적인 목적(복음 전파와 인류 구원)을 방해하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 분명하다. 더욱이 그 문둥병자는 제사장앞에서 깨끗함의 선언을 얻기 전까지는 대사회적으로 어떤 활동도 할 수 없고 또 자신의 몸이 공식적으로 완쾌되었음을 확정짓지도 못할 것이다.
네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 문둥병자에서 고침받은 이 사람이 먼저 해야 할 일은 깨끗케 된 것을 보임으로 정결 의식을 행하고 그 깨끗케 됨을 제사장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받아야 했다(레 14:1-20). 그런데 여기 정결 판정을 내리는 제사장은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제사장 그룹에서 가장 우두머리격의 제사장이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이처럼 형식적이나마 정결 선포 권한을 제사장이 가졌다고 인정하신 것은 지금껏 진행되었던 율법 제사의 유효성을 인정하신 것이 된다. 그와 더불어 그 제사장으로 하여금 그 문둥병이 율법의 교훈에 따라 치유된 것이 아니라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의 사랑과 능력에 찬 역사(役事)로 이뤄진 것임을 분명히 인식시키기 위한 것이 되기도 한다.
모세의 명한 것을 드려 - 문둥병을 치료받은 자에게 요구되는 모세의 명령(레 13,14장)은 (1)제사장에게 판정을 받고(레 13:16,17), (2)산 새 두마리(two clean livingbirds)와 백향목과 홍색실과 우슬초를 드리고(레 14:4), (3)8일후 재차 흠없는 어린 수양 둘과 암양 하나를 드리는 것(레 14:10)으로 이뤄진다. 이처럼 예수는 모세의 명한 것, 즉 율법을 무시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예수의 이러한 조언을 완수하고서야 비로소 문둥병자였던 그 사람은 법적으로 회복되어 자유인이 되고 성전 예배 등이 가능한 종교적 사면을 받게 될 것이다. 이로써 예수는 율법과 선지자를 폐하려 오신 것이 아니고 완전케 하실려고 오신 것임이 명백하에 입증되었다(마 5:17).
저희에게 증거하라 - 모세의 명령한 것을 드리는 것은 결국 '증거를 위한' 것이었다. 즉 제사장과 사람들에게 병고친 사실에 대한 확실한 증거로 그 명한 것을 행해야했던 것이다. 실로 당시 백성들에게 이스라엘 종교의 책임자인 제사장의 치유 판결보다 더욱 확정적인 판정은 없었다.
성 경: [막1:45]
주제1: [종의 출현]
주제2: [문둥병자를 고치심]
그러나 그 사람이...전파하여 - 예수께서 아주 엄격하게 명령하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람'은 인간의 본성대로 행동하고 말았다. 사실 인간적 측면에서 그가 지금껏 억압받고 있던 문둥병으로부터 해방된 그 기쁨을 억제하고 끝내 숨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는 솟구치는 생명에의 환희에 도취되어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의 조목조목을 '많이'('크게'란 뜻), 더욱 열정적으로 사방에 퍼뜨리고 말았다. 결국 이는 예수의 복음 사역에 크나큰 장해(障害) 요인이 되고 말았다. 실로 복음의 참 일꾼이되기 위해서는 열정적인 감정만으로는 불가능하다. 거기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뜻에 대한 전적인 순종과 절제, 인내의 덕 및 하나님의 뜻을 분별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다시는...동네에 들어가지 못하시고 - 여기서 문둥병자가 병고침을 받은 이후의 실수가 나타난다. 그는 예수의 침묵에의 요청에 아랑곳하지 않고 신비한 체험에 집착한 나머지 예수의 사역에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말았다. 즉 그는 예수로 인한 자신의 치유 사실을 가는 곳곳마다 소개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극도로 흥분하게 되었다. 그로 인해 예수께서는 공공연히 마을에 들어가셔서 사역의 주된 목표인 '말씀 전파'를 못하게 되셨던 것이다. 즉 이제 사람들은 오진 신비한 이적에 온 정신이 빼앗김으로써 예수의 전하는 메시지에는 귀기울일 수 없게 되었다. 따라서 예수께서는 사람들의 그릇된 메시야관을 고치시기 위하여 동네에 들어가지 아니하시고 바깥 한적한 곳에 머무신 것이다. 여기서 '바깥 한적한 곳'이란 인적이 드문 동네 바깥이나 광야 지역 같은 곳을 말한다. 이렇게 하여 예수께서는 한동안 흥분한 그들로 하여금 냉정을 기하게 하셨으며, 수일 후에 가버나움 동리로 들어가셔서 말씀을 전파하신다(2:1). 한편 바로 그런 이유에서 본문의 '다시는...들어가지 못하시고'라는 말이 지닌 의미에 의구심이 생길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의구심을 해결하자면 원문이 의미하는 바를 새롭게 해석할 필요가 있다. 즉 '다시는...못하다'(*, 메케티)란 그 이후 영원히 못하다는 뜻이기 보다 오히려 '더 이상 계속해서 못하다'(no longer), 즉 복음 전파 사역을 지속적으로 계속하지 못하고 잠시나마 중단할 수밖에 없었음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적절할 것이다. 하지만 예수께서 이처럼 침묵, 은신하시고 계신 때에도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는 예수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기대가 점차 넓혀지며 커져만 가고 있었다.
사방에서...나아오더라 - 여기서 '나아오더라'(*, 에르콘토)는 미완료 시제로서 갈릴리 원근 각지에서 사람들이 끊임없이 물밀듯이 몰려들고 있음을 암시해 준다. 실로 생명은 강한 흡입력이 있어서 뭇 심령들을 끊임없이 움직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