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회 생일 1997, 4, 29(음력
70회 생일 2007, 4, 29(음력)
80회 생일 2016, 4, 29(음력
‘5일
만나’(Manna
for five days) (685)
두 지붕(한,
러)밑에서 한 사역(러시아, 북한)하는
이산가족의 선교……. (18)
2007년 9월 11일 추방령을 받고 14년 간 사역하던 러시아선교지를 아내 홍영구선교사에게
맡기고 어두움이 짙어가는 밤에 모스크바 세레메취 공항을 떠나 인천행
KAL기에 몸을 실었다.
Ⅰ.
한국의 이산가족의 역할
한국에 돌아왔으나
집 한 칸 없는 선교사가 거처할 곳이 없어 인천대은교회 전명구목사의 배려로8층 게스트 룸에서 임시 거처를 삼고,
주 러시아한국영사관의 역할로 나가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도
공언으로, 2-3개월
후에 재 입국하도록 하겠다며 티켓을 끊어줘서 한 가닥 희망을 안고 곧 선교지로 들어갈 준비를 하였다.
떄 맞춰서 국가에서
국문표기법에 따라 ‘유’를 ‘류’로, ‘이’를 ‘리’로 표기해도 된다는 규정에 따라서 서울가정법원에 신청하여
‘2008호
파8316’ 가족관계등록부정 정
2008년
10월
1일 판사 이윤승 로 성을 허가 받았다.
이어서 새로운
주민등록을 갱신하고 여권신청을 하여 신 여권을 가지고 여행사를 통해 러시아대사관에 비자 신청을 하고 기다렸다.
될 수 있겠다던 여행사에서 피일 차일 미루다가 끝내는
켄슬당해서 5년 추방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모스크바에서 만난
이민복선교사에게 세례를 베풀고 신학교 강의도 참여하다가 2005년에
귀국하여 한국에 정착하여 대북풍선 보내는 사역을 하는 그를 도와서 암흑 속에서 살아가는 북한동포들에게 진실을 알리는 풍선사역을
도우며, 그간 현지선교는
전화로 홍 사모에게 전하면서도 생활비를 보내지 못하는 형편이라 안타깝기만 했다.
Ⅱ.
러시아 이산 가족의 역할
다행한 것은
인천대은교회 전명구목사가 사역을 인계 받고 임○영 선교사부부를 후임자로 물색하여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임지에 파송하려고 3개월간의 현지적응 기간을
주었다.
현지에 들어가
총회에서 교단 사무국장 직을 맡고 전권을 행사하려는데 문제가 발생하여 홍 선교사와 임 선교사 관계로 이런 메일을
보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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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
선교사님이 사무국 책임을 전권을 인계해야 되지만 나(홍)는 아직 임 선교사에게
열쇠(전권)를 넘겨 줄 수 없네!
왜냐하면 한국에서 후원 하나 없이, 류
선교사님도 도움이 하나도 없어 지금껏 건물 임대료를 받아서 현지 사역 자들에게 성의 표현도 하고 건물 세금도 내면서 겨우 생활
하는데, 당장 전권을 맡기면 나는 당장 먹고 살 길이
막막하네~
그래서 류 선교사님께 연락하여 한 달에
100만원씩을 보내 준다면 당장 열쇠를 넘기겠지만 그렇게 안 되면 어렵네~”
전혀 외부에서 아무 후원 없이, 임대료를
가지고 교단 일도 하시고 사모님 생활도 하시기에 지금 당장 재정을 인수 인계하는 것은 사모님의 개인생활비까지도 끊어지게 되는 것이라는
뜻이었습니다. 저도 이 부분을 류 감독님이 사모님과 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됩니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2010년 8월
9일
숄코바에서
임○영 선교사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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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메일을 받은 내
마음은 억장이 무너지고 당장이라도 달려가 사태수습을 하고 싶은 마음은 간절하나 선교비도 끊기고 재 입국하지도 못하는 처지라 기도하며 하나님의
선처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다.
Ⅲ.
견우 직녀의 일시 상봉
우리나라의 409년 축조된 평양 덕흥리 고구려
고분벽화에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앞에는 견우, 뒤에는 직녀가 그려져 있다.
원래 직녀는 하느님[天帝]의 손녀로
길쌈을 잘하고 부지런했으므로, 하느님이 매우 사랑하여 은하수 건너편의 하고(河鼓)라는
목동(견우)과 혼인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 부부는 신혼의 즐거움에 빠져 매우 게을러졌으므로 하느님은 크게 노하여 그들을 은하수를 가운데 두고 다시
떨어져 살게 하고, 한
해에 한 번 칠월 칠석날만 같이 지내도록 했다. 은하수 때문에 칠월 칠석날도 서로 만나지 못하자,
보다 못한 지상의 까막까치들이 하늘로 올라가 머리를 이어 다리를 놓아
주었다. 그 다리를
‘까막까치가 놓은 다리’ 즉 ‘오작교(烏鵲橋)’라
하며, 칠석이 지나면
까막까치가 다리를 놓느라고 머리가 모두 벗겨져 돌아온다고 한다.
한국에 귀국하여
외교부에서 한. 러 외교관계가 잘 풀려 선교지 귀임을 노심초사 기다리다
지쳐2년이
흘렸다. 2009년 4월 21일에 제29회 서울연회에서 ‘정년 은퇴식’이 있었다. 생각다 못해 통행 의 자유로운 러시아에 사역하는 아내를 불러 칠월 칠석도
아닌데 부부가 휠체어를 타고 인천공항에서 상봉하여
3개월간 함께 지내다가 귀임하여 또 다시 2년을 고독한 홀로의 사역을 해야만
했다.
Ⅳ.
4년 만에 이산가족 완전 상봉
홍영구선교사의 5년 비자가 만료되어 갱신을
신청했더니 남편도 없는 러시아에 왜 연장하여 있으려느냐?
며 불허하여
4년간의 이산가족생활을 청산하고 모든 선교지의 사역과 재산을 평소
후원 하던 인천대은교회 전명구감독에게 위임하고
2011년
7월 11일 모스크바를 출발하여 인천공항에 나가서 휘체어에 몸을 싣고 나오는 아내를 맞아 기쁘게
재회했다.
러시아로
파송받고 14년간 성령의 감동을 따라서 순종하여 이루신 사역을 본
‘새인천지방’ 김 О
근 감리사가 ① 러시아 파송 10년에도 노어를 못하는 것이 기적이고, ②
노어도 못하는 유선교사가 이렇게 많은 사역을 한 것이
기적이다. 말을 남기고
갔듯이 우리부부는 성령의 감동이 임하면 몸 사리지 않고,
조건과 여건 따지지 않고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최선을 다해서 후회 없이
사역하고 18년 만에
사탄의 강권적인 공격으로 사역지를 철수하고 말았다.
인간적으로 보면
처량하고, 신앙적으로 보면 대견했다. 그래서 공적인 입장에서 러시아감리회 감독의 이름으로
승리하고 돌아오는 홍영구선교사에게 아래와 같은 감사패를 주어 노고를 치하했다.
감 사 장
이
름: 홍영구 선교사
생년월일: 1945년 2월 27일
위
선교사님은 2007년 9월 11일부터 2011년 7월 11일까지 기독교 러시아 감리회 교단운영을 위하여
부자유스런 몸으로 만 난을 무릅쓰고 감독을 대신하여 러시아선교의 어려운 사역을 잘 감당하고 돌아왔기에 그 고마운 마음을 담아
드립니다.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네게 생명의 면류관을 네게 주리라.”(계2:
10)
2011년 7월 12일
기독교러시아감리회 감독
류지열선교사 |
Ⅴ.
7년 만에 금족령이 풀려 다시 모스크바를 다녀온 러시아 류지열선교사
한국의 국력이
인정받아 한, 러 무비자 협정이 체결되고 밤낮
그리던 18년 사역지를
돌아 볼 마음을 억제하지 못하여 외교통상부에 건의하여 재 입국을 요청해 정부 대 정부의 협의로 해결됐다는 연락을 받고
2014년 5월 11일 공항 휄체어 서비스를 받고 ‘기독교러시아감리회’ 제 13차 총회를 겸하여
무사히 10일간의
다녀오면서 사도바울의 동족사랑의 간절함을 체험했다.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롬9:
3)
전년 6월에 러시아감리회 총회를 맞아 전명구감독
일행이 단기선교 팀을 이끌고 RMC 목회자 세미나를 하고 총회를 하며 선교열의를 다졌는데,
2016년은
2001년에 필자가 사경에 헤맬 때 살려주셔서
히스기아왕은 15년의
수한을 연장 받았으나 필자는 16년째 되는 해이며 불초교제가
80을 맞는 해가 되므로 모스크바선교지 에서 60년 생일, 70년 생일을 마치면서 추방당해 아쉬움과 현지목회자들의 끊임 없는 협력에 감사 표시로 2016, 6월 8일 인천대은교회 성도 13명을 이끌고 6월 10일 목회자 세미나를 마치고
다음 11에는 비행기와
기차를 타고 달려온 총회 원들을 맞아 제15회 총회를 은혜롭게 마치고 미리 준비해간 기념품과 푸짐한 음식을 정성스럽게 준비해서 80회 생일을 대접하고 러시아 선교18년의 여한을 풀고 기쁘게
귀국했다.
오! 주여
감사합니다.
2016, 7,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