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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간 동안 즉문즉설을 한 후 11시가 넘어서 생방송을 마쳤습니다. 방송실을 나온 스님은 다시 정토사회문화회관으로 이동했습니다.
오후 1시부터는 평화재단 연구 세미나에 참석했습니다. 이번 달 세미나 주제는 ‘북한 엘리트의 특징과 생활’입니다. 북한 고위 관리를 지낸 분을 초청하여 북한 지도부의 선발 과정에 대해 설명을 들었습니다. 스님을 비롯하여 평화재단 연구위원들도 많이 참석하여 북한에 대해 더욱 깊이 이해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3시간 동안 발제하고 토론하는 시간을 가진 후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오후 4시부터는 평화재단 기획위원들과 평화재단 20주년 기념식을 비롯하여 평화재단의 사업 방향에 대해 두 시간 동안 논의를 했습니다.
해가 저물고 저녁 7시 30분부터는 서울 정토회관 방송실에서 저녁반 회원들을 위한 수행법회 생방송을 했습니다. 저녁에도 세 명이 사전에 질문을 신청하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수행을 하면 할수록 과거의 상처가 떠올라 괴롭다며 어떤 관점을 갖고 수행을 해야 하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수행을 하면 할수록 과거의 상처가 떠오릅니다
“지난 천일결사 입재식에서 수행담을 듣는데, 그동안 잊고 있던 저의 어린 시절이 갑자기 떠올랐습니다. 그 후로 새벽 정진을 할 때마다 과거의 상처들이 계속 떠올라서 괴로운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집니다. 물론 기도를 마치면,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것에 감사한 마음이 들 때가 더 많기는 합니다. 과거의 기억과 상처가 떠오를 때 그것을 직면해서 해결하는 게 맞는 것 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지금껏 잊고 있던 기억을 굳이 소환해서 스스로 괴로움을 만들고 있지는 않은지 의문이 듭니다. 제가 어떤 태도를 가져야 수행적 관점에서 바람직한 것일까요?”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일부러 떠올려서 괴로워할 필요는 없습니다. 질문자는 정진할 때마다 저절로 과거의 기억이 떠오른다고 했기 때문에 떠오르는 생각을 하는 게 좋은지, 안 하는 게 좋은지 묻는 질문은 맞지 않습니다. 생각이란 안 하고 싶다고 안 할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질문자는 과거의 기억을 묻어두고 살아온 겁니다. 다른 생각을 하며 살다 보니까 미처 그 생각이 안 났을 뿐입니다. 다른 사람의 수행담을 듣고 자극을 받아서 기도할 때 생각이 일어난 것인데, 묻어둔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드러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덮어둔 기억을 일부러 드러내서 고민할 필요는 없습니다. 덮인 건 그냥 덮인 채 두되, 저절로 벗겨져서 밖으로 나온 생각을 억지로 다시 덮으려고 애를 쓸 필요도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드러나는 생각을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질문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과거를 생각하면 자신도 모르게 아픈 기억이 떠올라 분노와 슬픔이 생긴다면, 과거의 일이 상처로 남았다는 말입니다. 즉 트라우마(trauma)가 생긴 겁니다. 트라우마는 덧나는 현상이 있습니다. 기억을 떠올리기만 해도 슬픔과 분노가 생기고, 비슷한 사건이 일어날 때 부정적인 감정이 증폭됩니다. 이렇게 덧나는 현상이 삶을 왜곡시키기 때문에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사는 데 많은 장애가 됩니다. 그래서 치유가 필요한 것입니다. 상처로 남았다면 치유해야 합니다. 상처가 심해서 스스로 치유할 수 없다면, 정신의학과에 가서 의사의 진료와 처방을 받으면 됩니다.
만약 스스로 치유할 수 있는 정도라면, 과거의 기억을 자신이 직면하는 게 좋습니다. 어릴 때 엄마가 욕을 하고 큰소리치고 때렸다면, 엄마의 목소리만 들어도 그 기억이 떠오를 정도로 상처가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어른이 되어 질문자가 엄마의 나이가 되었으니 다시 그때를 한번 되돌아보세요. 엄마가 질문자를 괴롭힐 작정으로 그랬을까요? 엄마 자신도 자기 성질에 못 이겨서 악을 쓴 것일 뿐입니다. 질문자에게 상처를 주려고 그런 게 아니고, 괴롭히려고 그런 것도 아니고, 단지 엄마 자신의 삶이 힘들어서 악을 쓰고 성질을 낸 것입니다.
물론 엄마가 자식에게 나쁜 영향을 주지 않으면 좋겠지만, 엄마의 수준이 그만큼인 것을 어떻게 하겠어요? 엄마에게 약간의 문제점이 있다고 해도, 밥 먹이고 옷 입히고 빨래 해서 질문자를 이만큼 키워줬습니다. 만약에 질문자가 아이를 낳아 키운다면, 질문자도 성질이 나서 자신도 모르게 아이에게 고함 지르는 행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가끔 그렇게 할지라도 아이를 미워하는 마음보다 사랑하는 마음이 훨씬 크지 않겠어요?
어른이 되어 경험한 것을 바탕으로 ‘엄마가 나를 미워한 게 아니라 엄마도 힘들어서 그랬구나’ 하고 엄마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어렸을 때는 상처를 받았지만, 어른이 되어서 다시 돌아보니 별일 아니구나’ 하고 자기 치유를 해나가야 합니다. 기억을 떠올려도 더 이상 분노나 미움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치유가 된 것입니다. 그러나 기억 자체를 하지 않는 것으로 문제가 없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치유된 게 아니라 단지 덮어놓은 것에 불과합니다. 기억이 안 나서 상처가 안 일어나는 것은 언제라도 기억이 떠오르면 상처가 드러나게 됩니다.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도 감정이 일어나지 않는다면 치유가 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수행은 과거 상처를 잊고 사는 게 아닙니다. 상처를 치유해서 상처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 바로 수행입니다. 스스로 치유할 수 없을 만큼 상처가 크다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서 치료해야 합니다. 상처가 그리 크지 않다면 스스로 치유할 수가 있는데 그것을 우리는 수행이라고 합니다. 부모로부터 상처를 받았다면, 오히려 부모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때론 절도 하기 싫을 만큼 미움이 커지기도 하지만 ‘저를 낳고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꾸준히 기도하다 보면 ‘부모님이 정말 나를 사랑하셨구나’, ‘나를 키우느라 고생하셨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떠오르며 눈물이 쏟아지는 날이 오게 됩니다. 그렇게 치유가 되어 가는 겁니다. 수행은 상처를 치유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입니다.”
“스님께서 과거의 상처를 덮어놓은 것이라고 하셨을 때 깨달았습니다. 정진을 통해 그동안 덮어두었던 상처와 직면하면서 치유를 해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명상하다 보면 그동안 생각지도 않았던 과거의 기억이 떠오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고, 있던 일이 떠오르는 것일 뿐입니다. 안 떠오르면 안 떠오르는 대로 괜찮고, 떠오르면 떠오르는 대로 치유하면 되는 일입니다. 통증이 있으면 안 좋은 느낌이 들지만, 통증이 있어야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만약에 무릎의 연골이 찢어져도 통증이 없으면 모르니까 치료를 할 수 없습니다. 통증이 있기 때문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병원에 가게 됩니다. 그래서 통증은 좋은 거예요. 통증이 없으면 엉덩이에 욕창이 생겨 살이 썩어도 알 수가 없습니다. 통증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좋은 것입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대화를 마치고 나서 스님이 닫는 말씀을 했습니다.
“저는 내일부터 스위스를 시작으로 독일, 튀르키예, 시리아, 인도, 부탄, 태국을 거쳐서 다시 호주, 뉴질랜드, 동티모르 그리고 캐나다, 미국까지 한 달간의 해외 일정을 떠납니다. 강연도 하고, 인도적 지원도 하면서 다닐 예정인데 강행군이 될 것 같습니다. 비행기를 타고 이동 중이거나 인터넷 연결이 어려운 곳에 있을 때는 한두 번 정도 생방송 법회를 못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럴 때는 다른 법사님이 법회를 하시거나 또는 지난 영상으로 법회를 대체하게 될 수도 있으니 미리 양해를 구합니다.”
생방송을 마치고 나니 밤 9시가 넘었습니다.
내일은 평화재단에서 북한 전문가들과 조찬 모임을 한 후 점심에는 평화재단을 찾아온 손님들과 대화를 나누고, 저녁에는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타고 스위스 취리히로 이동합니다. 내일부터 스님은 한 달 동안 해외 10개국을 방문하며 즉문즉설 강연과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