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중 땅 두 마지기
2015. 10. 27. 조순희
처녀 시절 서울 삼각지에서 달러를 환전하여 미8군부대 PX물건을 사서 남대문 시장에 내다 파는 장사를 했다. 그러던 중 5.16 군사 혁명이 일어났고 밀수품판매가 엄금되어 도중에 접고 고향으로 내려왔다. 시골에 오니 혼기가 차서인지 중신이 봇물 터지듯 들어온다. 호롱불 켜놓고 맞선을 보았다. 공무원, 상업 좋은 혼처 다 마다하고 가난에 배곯았던 어린 시절이 생각나 밭 5천평에 답 한 섬지기로 부잣집이라는 중신애비 말을 믿고 한 농촌으로 귀를 기울였다. 가난에 한이 맺혀 부잣집 소리 듣는 것이 소원이었다. 삭막한 도시생활도 경험하였으니 등 따뜻하고 배부르고 자연과 함께 풍요로운 시골부잣집 생활도 괜찮을 듯싶어 아버지를 설득시키고 결혼하였다.
시골을 선택했지만 자연을 품고 하늘만 빼 꼼이 보이는 삼간벽지 촌인지는 몰랐다. 초가집으로 쓰러질 듯 흙집으로 밤이오니 전기불도 아닌 호롱불이다. 억장이 무너졌다. 아침에 일어나 세수하러 수돗물을 찾으니 눈에 보이지를 않는다. 두리번거리니 시누이가 세숫물을 떠다 주는 게 아닌가? 친정에 삼일 근친 갔다가 와 부엌에 들어가니 나뭇간 옆에 물지게가 세워져있다. 수도가 없는 모양이다. 전기 불, 수도를 사용하던 내가 물동이 물지게를 지게 되었으니 부잣집에 눈이 멀어 내 발등을 찍은 격이었다. 약은 것처럼 나대던 나는 헛 똑똑이가 따로 없듯이 시궁창에 빠져 든 신세다.
재산은 속지 않았을까? 남편한테 넌지시 물었다. “논 한 섬지기 밥 5천평은 다 당신 겁니까?” 하니 “그것도 모르고 결혼 했습니까? 밭이 두 필지로 아버지와 동생 명의로 있지 나는 땅 한 평도 없다.”고 하는 게 아닌가? 날벼락 맞는 소리로 생시인가 꿈인가 믿기지를 않았다. 온 몸이 벌벌 떨리며 정신을 잃고 주저앉았다. 눈물보다는 독이 품어진다. 중신애비한테 감쪽같이 속았다. 억울하지만 되돌릴 수 없으니 뛰어봤자 벼룩이었다. 내 인생은 그렇게 하향으로 접어들어 낚싯줄에 걸린 고기처럼 되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농촌 부자는 일부자라고 공무원을 떠밀던 아버지 말씀이 생각나 마음에 상처가 깊었다. 5.16군사혁명만 없었더라면 이렇게 되지는 않았을 것을. 고작 부잣집 찾다가 천벌을 받는 망신 꼴이었다. 죽은 목숨보다 나을 게 없었다. 빈손에 알몸이니 늘 생계걱정에, 노심초사하면서 산전수전 다 겪으며 죽기 살기로 정신만 차리면 살 수 있다는 원동력으로 가족을 지키며 살아왔다.
운일까? 1980년 7월 19일 지역에 상상도 못할 큰 장마가 져 천지개벽이 되었다. 산사태가 나고 집, 전답이 흔적 없이 다 떠내려갔다. 수재민들이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생겼지만 그 와중에 나에게는 빈 그릇에 물이 고이듯 논둑이 무너져 자갈논이 된 종중 땅 두 마지기를 얻게 되었다. 하늘에서 준 소중한 선물로 받아들였다. 산전 뙈기라도 밭을 일구어 메주콩이라도 심어 먹으려 해도 땅이 없는 처지였다. 땅을 부치던 사람이 일거리 많아 못 부친다는 소문이 들린다. 종중 유사를 찾아갖다. 일거리 많다고 내 놓은 땅이라 쉽게 얻을 수 있었다.
벼슬이라도 한 것처럼 시아버님과 남편한테 자랑을 하니 굶어도 일거리 많아 못 부친다고 첫 마디에 내치는 것이 아닌가? 가진 것도 없는 형편에 감사하게 생각을 못하시고 샌님 노릇만 하려고 하는 남편과 아버님이 한없이 미웠다. 아버님 말씀을 듣고 뒤돌아서 생각을 해보니 일리가 있는 말씀이다. 논도 크지도 않고 다랑이 논으로, 두 마지기다. 논도랑도 무너져있고 자갈이 많이 들어있으니 누가 봐도 엄두를 못 낼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우리 형편에 어찌 찬밥 더운밥을 가리랴. 돌 주워내고 가래로 논둑 만들면, 내 땅같이 농사지어 보리밥 수저가 간혹 쌀밥 수저로 바뀔 수도 있는데 고생을 모르는 말씀들이다.
목마른 사람이 우물 판다고 자식들하고 먹고 살 생각에 욕심을 부렸다. 시작하면 따라들 오시겠지 하고 싸리나무 삼태기를 가지고 논으로 향했다. 무거운 돌을 굴리면서 자갈을 주워내도 와 보지도 않는다. 아이들만 아니면 그 자리에서 도망가고 싶었지만 마음뿐이었다. 끼닛거리가 없어도 며느리 수완으로 밥상을 드렸더니 자연히 생기는 밥상으로 아시는 것 같다. 몸살 난 핑계로 밥상이 없도록 하였다. 걱정이 되셨는지 아버님이 몸살약이라며 봉지를 내미신다. 이를 계기로 약 처방 받은 것처럼 아버님이 논 만들기에 동참하셨다. 가래로 논둑 만드는 일을 해보시니 힘드신지 ‘누구 등골 빼려고 이렇게 힘들게 하느냐.’고 옆에 일하던 사람들이 깜짝 놀라도록 매섭게 야단을 치신다. 하루도 아니고 진 태 나도록 힘든 일을 하셨으니 화가 잔뜩 나셨다. 며느리로서 화를 풀어 드리는 것이 도리 같기에 품사서 일한 심 치고 이자 돈 얻어 담배와 막걸리를 사다 참참이 드리고, 5일장에 가시기에 용돈을 드렸더니 맘이 풀어지셨는지 언놈아 부르시더니 껌 한통을 사다주시는 게 아닌가?
두 부자분이 착하고 심성은 곱지만 생활력이 없고 무능력 하다. 그렇게 시작이 되어 논을 만들어 농사를 짓게 되었다. 어느 날 해거름에 사촌형제 세 분이 들어와 마루에 턱 걸터앉는다. 구하기 어려운 땅을 주셨으니 얼마나 고마우랴. 인삼 캐간 밭에서 이삭을 주서다 술을 담아놓았다. 군침이 돌도록 노랗게 우러나 술 향기가 물씬 풍긴다. 인삼 향기에 사촌형제들은 아주 좋아한다. 얼굴이 빨개지도록 먹고 취하더니 드릴 말씀이 있어서 왔다며 토해 놓는다. 종중 땅을 먼저 부치던 사촌동생한테 돌려주어야 하기 때문에 미안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고 한다. 내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논 만들어 겨우 2년 부쳤는데 떼느냐고 울며불며 악살을 떨며 대드니, 억울하면 돈 벌어 먹으라고 하면서 일어서 나간다. 억울하고 분통이 터져 아무도 없는 뒤뜰에 앉아 초상난 집처럼 엉엉 소리쳐 울었다. 남편이 다가와 내 탓이라며 미안하다고 눈물을 닦아주고는 끌어안고 남편마저 운다. 울음소리를 듣고 옆집 질부가 찾아왔다. 사촌 이름을 대며 다시 돌려준다고 땅을 떼였다고 하니, 논 만들어놓으니까 떼느냐고 한 5년이라도 붙이게 하지 다 같은 집안 혈육끼리 경우가 아니라며 한소리를 한다. “땅 떼였다고 솥에 개 드려놓겠어요? 아이들 학교 갔다 올 시간이 되었으니 진정하라.”며 먹던 술상까지 치워주고 간다.
나의 분노는 살을 깎고 피를 말리는 아픔이었다. 그래도 굴하지 않고 성실하게 살았더니 천지간으로 도움을 받았는지 1남 5녀 자식을 낳고 남부럽지 않게 지금의 생활을 살게 되었다. 억울하면 돈 벌어 먹으라던 분은 생을 마감하고 두 분 조카님들은 생존해 나의 삶을 지켜보고 있다. 땅 없는 서러움에 가슴을 쳤지만 울면 웃는 날이 있듯이 고향에 땅 1.000평이 묻고 있다. 보상이 아닐까? 세월이 흘러도 잊지 못 할 만큼 강열 한 추억으로 기억되리라.
첫댓글 어려운 시절을 잘 감내 하시면서 성실하게 살아오신 흔적이 엿보이는 글입니다.
오늘 행복하게 웃으실 수 있으니 귀감이 됩니다. 감상 잘했습니다. 선생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