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4일 불효자는 웁니다.
십자고상, 십자가 위에서 희생되신 예수님은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 하느님이라는 완전한 표지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 살아계실 때는 당신이 구세주라고 말해도 믿지 않았다. 돌아가신 뒤에야, 누명을 씌워 살해한 후에야 비로소 그걸 알게 됐다. 그것도 이방인 장교의 고백을 통해서 말이다. “예수님을 마주 보고 서 있던 백인대장이 그분께서 그렇게 숨을 거두시는 것을 보고,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 하고 말하였다.”(마르 15,39)
오늘 듣는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그걸 예고하셨다고 전한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요한 8,28) ‘내가 나임’이란 말은 매우 어색하지만 하느님이 모세에게 직접 가르쳐주신 당신 이름이다. 모세가 불타는 떨기나무에서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이름을 여쭈었을 때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나는 있는 나다.’ 하고 대답하시고, 이어서 말씀하셨다. ‘너는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있는 나’께서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라고 전하게 하셨다.”(탈출 3,14) 그런데 하느님은 모세에게 왜 나타나셨을까? 그 이유를 이렇게 알려주셨다. “나는 이집트에 있는 내 백성이 겪는 고난을 똑똑히 보았고, 작업 감독들 때문에 울부짖는 그들의 소리를 들었다. 정녕 나는 그들의 고통을 알고 있다.”(탈출 3,7) 이스라엘 민족이 노예 생활을 하면서 고통 중에 신음하는 소리를 들으셨기 때문이다.
사람 이름에 뜻이 있는 거처럼 ‘내가 나임’ 또는 ‘있는 나’라는 하느님 이름은 죄의 노예 생활로 신음하는 인류의 고통을 당신이 알고 있다는 뜻이다. 그 노예 생활의 고통은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인류 전체의 그것이기도 하다. 선을 바라면서도 엉뚱한 것을 행하고야 마는 개인적인 괴로움과 지금 전쟁처럼 인류 전체가 겪는 고통이다. “죄가 많아진 그곳에 은총이 충만히 내렸다고”(로마 5,20) 한 바오로 사도 말처럼 죄로 인한 고통은 역설적으로 하느님이 당신을 드러내실 자리이고 시간이다. 지금 중동 지역과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가인 우리나라는 하느님이 ‘있는 나’라고 ‘내가 나임’이라고 나타나실 자리인 거다. 그것은 자신의 죄스러움을 깨달은 이가 바로 이런 자신을 사랑하시고 이런 자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불효자는 웁니다.’라는 오래된 노래가 있다. 땅을 치고 울면서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용서해달라고 빈다는 가사다. 사랑과 자비의 하느님을 공기와 물에 비유하는데, 있는 줄도 고마운 줄도 모르고 살다가 부모님이 없어지면 그제야 그 고마움과 송구함을 깨닫게 된다는 거다. 그 로마군 장교가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 보고서 비로소 그분이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알아보게 된 것도 그런 것일 거다. 예수님을 몰라봤던 이들은 죄 속에서 태어나 죄 속에서 죽을 수밖에 없었다.(요한 8,24) 예수님을 믿는 우리도 역시 죄 속에서 죽을 거다. 하지만 그 장교처럼 십자고상을 바라보며 저분이 하느님이라고, 죄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분이라고, 공기와 물의 고마움을 잊지 않는다고, 주님께 지극히 송구하고 더 지극히 감사한다고 고백하기 때문에 죄 속에서 죽더라도 희망이 있다.
예수님, 매일 매 순간 주님 생각만 하며 살지는 못합니다. 제 부모도 그런 걸 바라지 않았는데 하느님이 그러실 리가 없습니다. 그 대신 하루 한두 번 하늘을 우러러 아버지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다정하게 말씀드리고, 크든 작든 제가 하는 모든 일에 함께해주시기를, 그리고 말 뿐인 고백이기는 하지만 그 일에서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란다고 기도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이 이콘이 있으니까 제가 하느님을 잊어버리는 비극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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