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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세계적인 도시 장안(長安)
중국 산시성(陕西省)의 성도이다. 중국의 천년고도이자 현재 북서부 개발의 중점 개발도시이다.
현재 명칭은 시안(서안)이나, 옛 이름인 장안(長安)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인구는 2020년 기준 1,295만 명으로, 최근 급격한 개발로 인구가 매우 빠르게 늘어나고 있는 도시이다. 10년 만에 약 300만 명이 증가했다. 중국 중남부에서 인구증가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이다.
춘추전국시대를 종결한 통일국가 진나라의 수도가 현재 서안의 북쪽에 위치한 함양(咸阳, 셴양)이다. 현재 시안의 공항 이름이 이곳의 명칭을 따서 시안 셴양 국제공항이다. 진나라 멸망 후 한나라는 함양 남쪽으로 웨이허강 건너 새로운 수도를 건설, '장안'으로 명명했다. 이후 한나라와 함께 발전하였다. 송나라(북송) 시대 이전까지 장안은 낙양(洛陽, 뤄양)과 함께 역대 왕조의 수도를 번갈아 맡으며 중국의 양대 도시로 번창했었다.
이후 송나라가 개봉으로 수도를 정하면서 다소 쇠퇴하였다. 후당 때 서안부(西安府)로 개칭되었고 이후 현재까지 시안(서안)이라는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워낙 유명한 도시였기에 서울이나 수도(首都)를 가리키는 대명사인 ‘장안’도 이 장안에서 따왔다. 이 표현은 조선 후기까지도 쓰였다. ‘장안의 화제가 되다’라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는 설이 있다. 이 도시의 이름에서 ‘오래 되고 큰 도시의 성 안’, ‘수도’라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위도 34도로 목포시나 거제시와 위도가 비슷하다. 그러나 내륙이라서 해안가에 접한 이들 두 도시보다는 연교차가 큰 편이다.
시안은 남북이 모두 산으로 둘러싸인 지형이다.
연평균 강수량은 560mm정도로 건조한 편이며 연평균기온 14.1℃이며 1월 평균기온 0.3℃, 7월 평균기온 27℃이다. 역대 최저기온 -21℃이며 역대 최고기온 섭씨 42℃이다. 대체로 대구와 비슷하다.
내륙에 위치하여 일교차가 큰 전형적인 대륙성 기후를 보이며 대충 한국의 남부 내륙지방인 대구광역시 일대와 기후가 비슷하고 경상북도 내륙보다는 조금 더 따뜻하다. 물론 한국 어느 지역보다 내륙으로 훨씬 더 깊게 들어가 있어 직접 기후 비교는 애매하지만 굳이 따진다면 산으로 둘러싸여 있는 점에서는 경북 내륙인 안동, 영주, 예천, 영양 일대와 비슷하지만 이쪽보다는 조금 더 따뜻한 편이다.
사실상 같은 도시라고 볼 수 있다. 물론 역사적으로 장안은 어디까지나 현에 불과했고, 시안 및 시안의 전신들은 대부분 시간 동안 장안현보다 위에단계 행정단위이며, 시안의 위에도 더 위에단계의 행정단위가 존재했다. 다만 이는 현재의 서울, 로마등 역사가 오래된 도시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으로, 조선의 한양도 지금의 서울 내부의 몇몇 구이고, 고대 로마의 로마시도 현대 로마시의 일부 구역일 뿐이다. 그러나 이 도시들을 과거의 도시와 같은 도시로 보고, 확대 과정을 도시의 발전으로 보는 시각이 강한점을 보면 시안을 장안과 동일시 하는 시선은 오히려 자연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고대 장안은 현대에 와서는 시안시에 소속된 장안구로 남아있다. 주로 서안, 장안과 동치되는 함양은 시안의 근처 도시이다.
진나라 시절에는 내사라는 관원을 설치하여 경기(京畿) 일대를 다스렸고, 전한 경제 2년에 좌내사/우내사로 갈랐다. 장안은 진나라 시절에 장안향이었다가 한나라가 수도를 세우면서 장안현이 된다.
전한 무제 태초 원년에는 우내사를 경조윤으로 개명하였고, 장안현을 포함한 10개의 현을 다스렸으며 치소를 장안현에 설치하였다. 군(郡)의 태수에 해당되는 직책이었고 경조윤이 다스리는 지역을 경조라고 하였으나 정식으로 군을 설치하진 않았다. 경조윤은 좌풍익, 우부풍과 함께 사례교위(지방의 주자사, 주목에 해당)에 소속되었다.
위나라 시절에는 경조군을 설치하고 경조윤도 경조태수로 변경하였다. 조비, 조예 시절에 황자를 경조왕, 진왕으로 책봉하면서 경조국, 진국이었던 시절도 있었다. 장안은 조위 정권 시절 촉한을 방어하는 요충지였다.
오호십육국 및 남북조시대에는 다시 경조군으로 돌아갔으나 다스리는 관원은 태수가 아닌 경조윤으로 돌아갔다.
이후에도 경조부, 옹주, 안서총관부, 봉원로 등으로 명칭을 변경하다가 명나라 시절부터 서안부를 설치하였고 이 명칭이 오늘날까지 유지된다.
중화민국 시절에는 성이 직접 현을 관리하도록 행정체제를 개편하면서 서안부는 철거되고 원래 장안현의 도시 부분에 시안시를 설치, 그리고 장안현의 치소는 원 장안현의 다른 곳으로 옮겨서 시안시와 장안현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그러다가 중화인민공화국 정권이 들어서면서 다시 옛날 체제로 복귀, 시안시는 다시 장안현을 포함한 주변의 현들을 통할하게 된다. 그러다가 시안시가 개발, 확장되면서 원래의 장안현은 시안시로 병합되어 장안구로 남게 된다.
중국의 여러 도시 중에서도 특히 유서 깊은 곳이다. 역사에 등장한 때가 전설적인 주나라 시기로 역사가 3000년을 넘는 굉장히 오랜 도시다.
한나라가 장안을 수도로 삼으며 발전이 시작됐지만 그전부터 이 일대는 중국의 중심이었다. 서주의 수도인 호경, 진나라의 수도인 함양 모두 이 일대에 위치한 도시였으니 기원전 1122년부터 기원후 907년까지 2140년간 번영해온 셈이다. 이후 장안은 낙양과 함께 중국의 양대 수도로 번창했다.
장안은 낙양(洛陽, 뤄양)에 견주어 서도(西都), 서경(西京) 또는 상도(上都)라고도 불리기도 했으며, 낙양과 함께 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장안과 낙양이 고대 중국의 수도였던 것은, 당시 황허와 그 지류 유역이 중국에서 가장 농업생산력이 풍부했었고, 따라서 인구가 가장 많은 지역이었기 때문. 장안은 관중이라 불렸고 중원이란 낙양 인근만을 한정하여 부를 때 쓰는 말이었다.
중국 고사에는 관중을 얻는 자 천하를 얻는다(得關中者得天下)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중국 고대사에 있어서 그야말로 핵심적인 지역이었으며, 이른바 13개 왕조의 수도였다. 사실 확실한 것은 서주/진/전한/신/전조/전진/후진/서위/북주/수/당의 11개 왕조이며, 후한과 서진은 후술하듯 수년간의 임시 수도였다.
진나라 진시황과 전한 유방, 당나라 이연은 이 장안이 포함된 관중 일대를 기반으로 천하를 얻었고, 오호십육국시대의 전진(前秦)과 후일 수나라의 전신이 되는 남북조시대의 북주(北周) 역시 이 지역을 기반으로 하여 화북을 통일한 바가 있다. 사실상 고대 중국을 통일했던 6개 국가 중 4개의 국가가 그 시작이 관중 지방이었으니 고대 중국에 있어서 장안의 중요성을 실감할 수 있다.
일단 지형의 조건이 상당히 특이하다. 도시와 평원을 둘러싼 진령산맥이 원형의 성벽처럼 만들어져 있으며, 서쪽에는 황하, 북쪽에는 위수와 경수가 흐른다. 특히나 장안을 둘러싸고 보호받는 경지면적이 의외로 넓어 관중평야는 낙양의 5배 넓이로써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고 불린 옥토의 땅이었다. 사천 이는 만일 국가급 전쟁에서 포위당했을 때 식량을 자체적으로 대량조달하기 쉬우므로 오래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서쪽 방면의 산악지대, 황토고원은 장안의 북쪽을 든든하게 막아주는 대규모의 자연장벽이라서 통로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않은 상태다. 덕분에 주변지역에서 장안으로 오려면 황하를 타고 위수로 진입하든지, 아니면 동쪽 산악지대에 있는 함곡관 같은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관중 평야가 동서로 넓기에 남북 형태로 보면 정말 도시가 산에 끼인 듯한 모습을 보인다. 동쪽으로 가면 또 산과 황하가 관중으로 들어오는 입구를 막는다.
여기서 동으로 진격하면 위수와 황하가 서에서 동으로 흐르기 때문에 낙양일대까지 사실상 프리패스나 다름없지만, 동에서 서로 공격하면 함곡관이나 동관 걸어 잠그고 틀어박히면 된다. 장안을 얻으면 관중만 먹는 게 아니라 사실상 낙양까지 영향력이 미쳐 구 한나라 경기 일대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동쪽은 함곡관으로, 여기서 중원과 관중이 구별된다. 한마디로 말해서 방어하기 편리한 곳치고는 교통사정도 좋다는 이야기다. 또, 인접한 양주는 강족을 비롯한 서북방 이민족의 영토와 가깝고 이민족과의 교역이나 거래가 가능하며, 기병을 양성하기 좋은 땅이었다.
여기까지 보면 알겠지만, 장안이라는 개념도 역사적으로 일정하지 않았다. 특히 한나라 시절의 장안과 당나라 시절의 장안은 이름만 같았지 지리적으로나 기원으로나 아예 다른 곳이었다. 또 당나라 시절에는 장안성과 장안현이 좀 다른 개념이었다. 장안성 안에 만년현(이후 함녕현으로 개명)과 장안현이 갈라져 있어서 한 성곽 내에 두 도시가 공존하게 된 것. 이러한 상황은 1914년 함녕현이 철거될 때까지 지속된다.
주나라(서주)의 도읍지 호경도 인근에 위치했는데, 종주(宗周)로 불리며 성주(成周)라 불린 낙읍이 동방 경영의 중심지로 기능하는 동안, 주나라의 본거지로 기능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의 수도인 함양(기원전 350년∼206년)이 인근에 있었다. 그 당시만 하더라도 장안은 함양 외곽의 일개 향리였다. 그러나 결국 함양은 항우에게 의해 완벽하게 파괴되었다. 장안은 한나라(전한) 고조 유방 때 처음 도읍했던 낙양에서 천도하면서 사실상 새로 세워진 도시다. 파괴된 함양의 위수 남쪽에 아직 궁궐 등의 시설들이 남아 있었고, 여기에 기초하여 새로 도시를 지은 게 장안이었다.
한나라 때의 장안은 지금 시안의 북서쪽 시가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었으며, 비단길의 시작점이었다. 장안의 정치경제적, 그리고 전략적 이점들이 전한의 수도가 되게 한 원인이었다.
한고조는 처음엔 낙양을 수도로 삼고자 했다. 이때 누경으로부터 관중은 수비에 용이하고 과거 낙양을 수도로 삼았던 주나라와 한나라는 여러 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지적받았다. 한나라는 전쟁을 하며 덕을 쌓지 못했고 따라서 유사시 관중에 들어가 천하를 제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관중은 가히 천하의 덜미를 거머쥐고 뒤통수를 후려갈길 수 있는 형국의 요지로서 장량 또한 누경의 의견에 지지를 보내며, 관중은 ‘금성천리(金城千里, 천리 땅에 걸친 견고한 성)’나 다름없으며 ‘천부지국(天府之國, 하늘 곳간의 나라)’이라 표현했다. 한고조는 즉각 장안으로 수도를 옮기고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제일 처음 지어진 건축물인 장락궁(長樂宮)이었는데, 원래 진나라 때의 건물이었던 흥락궁(興樂宮)을 토대로 개축한 것이었다. 서쪽으로는 상국 소하(蕭何)의 강력한 주장에 힘입어 미앙궁(未央宮)이 건설되었다. 한 고조 시절 장안은 주로 이 두 궁궐로 이뤄졌고, 아직 성벽이 완전히 세워지지 못한 상태였다. 혜제 시절에 성벽을 완공함으로써, 장안이 도시의 모습을 갖추는 데 크게 기여했다. 혜제 이후 즉위한 한문제와 한경제 시절에는 근검절약을 강조한 두 황제의 치세에 걸맞게 마땅한 토목공사는 없었다.
한무제가 즉위하자 장락궁 북쪽에 명광궁(明光宮)을 더했고, 미앙궁 북쪽으론 북궁(北宮)과 계원(桂原)을 추가했다. 무제는 상림원(上林苑)을 지었는데, 그 둘레는 약 300리에 달했다. 무제는 이 모든 궁궐 단지들을 장안 내외에 걸쳐 지었지만, 서쪽 교외에 위치한 건장궁(建章宮)이 가장 거대한 위용을 자랑했다. 한무제 시대 장안은 제국의 수도로서 가장 번영했다. 당시 장안성의 대부분은 장락궁과 미앙궁 등의 궁궐과 관청들이 차지하고 있어, 황제와 고급 관료들을 위해 설계된 도시라고 할 수 있었다. 이 당시 장안성의 모양은 북쪽이 북두칠성, 남쪽이 남두육성의 모양을 하고 있어 두성(斗城)이라 불렸다. 경제 활동은 주로 도시 북서쪽의 서시와 동시에서 행해졌는데, 두 시장은 위수에 가깝게 위치했다.
왕망이 찬탈하여 전한이 멸망하고, 잠시 신나라의 수도로 상안(常安)으로 개칭되었으나, 적미군에 의해 폐허가 되었다. 그러나 당시 장안은 적미군의 폐허를 완전히 제대로 복구하지 않은 상태였다. 후한을 일으킨 광무제는 장안에서 낙양으로 천도했다. 후한 시대에 장안은 경조윤(京兆尹)으로 불리었으며 좌풍익(左馮翊), 우부풍(右扶風)과 함께 묶여져 삼보(三輔)라고 칭해졌다.
후한 말기 헌제 때 동탁은 낙양을 불태우고 일단 우격다짐으로 대충 수도로 복구해 다시 장안으로 옮겼다. 이곳은 비교적 서량과 가까웠으며 이 때문에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이 결성되자 자신의 근거지인 서량과 최대한 가까운 곳으로 천도해서 병력과 물자를 쉽게 조달하려 했다. 동탁은 반동탁연합군에게 밀릴 경우 강족과 저족 등 서량에 사는 이민족들의 힘을 빌리려 했던 것. 동탁이 여포에게 암살되자 이각, 곽사가 난을 일으켰고, 이 삼보의 난으로 장안은 다시 잿더미가 되었다.
다시 헌제는 이를 떠나 조조에 몸을 의탁, 조조는 허도를 수도로 삼았다. 다만 장안은 곧 도시로 복구되어 조위 서방의 중요 도시로 남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마초가 장안을 함락했다는 일화도 있으나 연의의 각색으로 실제 역사에서는 장안 근처를 휘젓기는 했으나 장안성을 점령했다는 기록은 없다.
삼국시대에는 촉한 북벌의 목표가 된 데 대비되어 조위에서는 대촉 방어 요충지 및 전진 기지로서 중요시되었다. 제갈량의 북벌의 주요 전장이 되었던 가정, 오장원 등이 장안 서쪽 근교에 해당한다. 서진 때 영가의 난으로 또다시 초토화가 되었다가 호한 정권의 유요가 거점으로 삼고, 이후 근준의 난으로 독립하면서 군주가 된 전조 정권의 수도이기도 하였다. 후조가 중원과 화북을 통일하면서 흡수되었다가 후조말 혼란기에 저족의 포홍(蒲弘)이 독립하면서 이 일대에 전진을 건국한다. 이후 전진은 손자인 부견 대에서 화북을 통일하며 강대해지지만 비수대전으로 몰락한 이후 강족의 요장(姚長)이 부견을 패사시키고 건국한 후진의 수도가 되었다. 다시 손자인 요홍 대에서 동진이 후진을 멸망시켜 일시 남조의 영역으로 들어갔지만 제위 찬탈에 급했던 유유의 병크로 혁련발발의 북하에 빼앗겼다. 정작 혁련발발은 기존 수도인 통만이 북위와 가깝고 방어가 튼튼하다고 하여 장안으로 천도하지 않았다. 이후 북위를 거쳐 동서로 분열된 서위 및 북주, 수나라, 당나라 때 꾸준히 수도로 기능하여 낙양과 함께 북송대 이전까지 중국의 중심 도시였다.
수나라 문제 때 한나라의 장안성 토질이 염화되어 거주에 부적절해지자 현재 시가지가 있는 위치에 장안을 재건했는데, 이때는 수문제가 즉위 전 받았던 작위인 대흥군공에서 이름을 따와 대흥(大興)이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수양제가 낙양을 재건하여 동도로 칭한 후 천도해 배도(陪都)가 되기도 했다.
장안의 두 번째 전성기는 당나라 때의 도읍지였을 때다. 당의 창업주 당고조는 618년 대흥을 수도로 정하면서 이름을 장안으로 개칭했다. 장안성은 외성의 길이가 동서 9.7㎞, 남북 8.6㎞에 달했으며 동서남북의 성벽에 각각 3개씩 총 12개의 성문이 있었다. 내부는 110개의 방(坊)으로 구획되어 엄격한 통금이 실시되었고, 황성의 정문인 주작문 앞으로 곧게 뻗은 폭 150m의 주작대로를 경계로 동서 지역인 장안현과 만년현으로 나뉘어졌다. 장안현과 만년현에는 각각 동시(東市)와 서시(西市)라는 상업 전용구역이 설치되었는데, 특히 서시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자 종점 역할을 해 세계 각국의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장안성 남동쪽에는 당현종 때 준설해 생긴 곡강지(曲江池)가 인근의 부용원(芙溶園)과 더불어 명승지로 유명했다. 장안성 내에는 당나라 황실의 정궁인 태극궁(太極宮)과 당현종이 친왕이었을 때 살았던 저택을 궁궐로 증축한 흥경궁(興慶宮)이 있었다. 이외에도 지금은 폐허로 남았지만 정전이 중국 역사상 최대 크기의 건축이라는 함원전을 가진 대명궁이 장안성 외성 북쪽에 맞닿아 당고종 때 건축되었다. 최전성기에는 장안의 인구가 100만 명에 달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인데, 당시 전 세계에서 이 규모와 맞먹었다고 여겨지는 도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과 아바스 왕조의 수도인 바그다드뿐이었다.
당나라 장안의 도시계획을 도입하는 것은 7∼8세기 동아시아의 트렌드였으며, 발해의 상경용천부와 일본의 헤이조쿄 및 헤이안쿄, 신라의 금성은 다 장안을 모방해 서로 쌍둥이처럼 도시 외양이 비슷했다. 신라의 금성은 발해나 일본과 달리 원래 존재하던 도시를 개조한 셈이라 장안성의 구조를 똑같지는 않지만 부분적으로 도입하였다. 그리고 후대 동아시아 국가들도 풍수지리의 반영 등으로 인해 조금씩 변형되긴 했지만 기본적인 도성 구조에서 당의 영향이 계속 남게 된다.
전례 없는 번영을 구가하던 장안은 황소의 난을 겪으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904년 주전충이 당소종을 협박해 낙양으로 천도하면서 장안의 궁전과 관청 건물을 철거해 자재를 이송하고 황실과 백성을 강제로 이주시켜 주전충은 낙양에서 후량을 건국하였고, 장안은 대안부(大安府)로 개칭하였으며 당의 후신을 칭한 후당을 포함해서 이후의 5대 왕조는 낙양과 개봉을 도읍으로 삼았다. 이때 이후로 장안은 낙양과 함께 이후 두 번 다시는 옛 영광을 회복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