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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태생을 시골 나무꾼의 여식으로 태어나 평생을 나와 같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나와 같은 신분의 사내의 여인으로, 내 부모와 형제의 비석이 그러했듯이 여름날의 홍수에
또는 겨울의 매서운 바람에 깨지고 쓸리어 결국에는 그 아래 묻힌자가 누구인지 알지도 못하게 되어
결국에는 그들이 살아생전 그러했듯, 그들의 걸음걸음마다 뽀얀 먼지가 일어 그들을 세상의 눈에서
가리게 했듯, 나 역시도 그렇게 지워져야만 하는 운명이었다.
혹자는 이제는 나, 서시라는 인물을 재해에 휩쓸려 묻혔다 다시 재해에 의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옛 보물에 비하기도 했다.
나는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질 수도 있었다.
그 보물이 오랜시간동안 그러했듯이, 남들이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니는 동안 조용히 그 아래에서
시간이 보물을 이 세상과 동화시키기를 기다리며 잠들어 있을수도 있었다.
그러나 잠들어 있던 보물을 다시 깨운것은 그것을 땅 아래 깊은곳에 묻은 세상 그 자신이었다.
나를 그 보물에 비유한 자는 그것에 대해서 기가막히게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그 보물을 다시 나오게 한 이 세상이 누구인지는 몰랐다, 다만 의미심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을 뿐, 마치 다 알고있다고 말하듯.
[경국지색(傾國之色) ~ 서시(西施). 열일곱번째 이야기]
나는 아직도 그 날을 기억한다.
내 어머니의 손을 잡고 들어섰던 낯익은 그곳의 모습을.
내가 세상을 기억속에 담기 시작할 때부터 각인된 익숙한 장소였는데 불구하고
그 날 그곳은 무척이나 낯선 장소였다.
마치 처음 와본 곳인 마냥, 내가 이젠 눈을 감고도 이곳을 돌아다닐 수 있다고 생각했던 익숙한
구조, 공기에 감도는 냄새, 격자무늬의 창살 사이로 들어와 붉은 바닥에 무늬를 그대로 찍어내던 햇살까지도
평소에는 익숙한 것들이 모두 다 마치 거울 속의 이 세상이되 이 세상이 아닌것처럼
다르게 비추어지던 것을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내가 혼자서 걸음을 걸은 이후로는 단 한 번도 그곳을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지나가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손을 잡고 그곳을 지나가는 것은 매우 흔치않은 일이었다.
게다가 그 손, 내 손이 마치 아차, 하는 찰나에 자신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 허공으로 허무히 사라지기라도 할
허상이라도 된다는 듯 꼬옥 움켜쥐고 있던 어머니의 반응도, 늘 내게는 크고 따뜻하게만 느껴지던 그 손이 그 순간만큼은
무척이나 작고 여위고 연약하여 놀랄만큼 싸늘했던 것도 나는 모두 기억하고 있다.
사방은 조용했었다.
들리는 소리라고는 그곳을 지나고 있던 나와 어머니의 발걸음 소리.
그것 또한 평상시와는 다른 일이었다.
집안에서 사람들이 통행이 가장 빈번한 곳이었는데 말이다.
또각또각, 사락사락-
검은 나무굽을 댄 어머니의 새신과 평상시에는 새해나 추석에도 좀처럼 보기 힘든
가장 좋은 명주옷의 자락이 스치며 만드는 소리.
격자무늬의 햇살과 창가에 매달린 초록색 유리조각이 반사한 초록색 빛, 기둥과 바닥의
붉은 빛, 어머니의 푸른 명주옷, 검은 신발. 모두가 익숙하면서도 낯선 것들이었다.
고개를 들어서 어머니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내 눈에는 어쩐지 나무 인형같은 빛에 걸어가며 오로지 앞만 보고있는 딱딱한 눈과
굳은 선을 그리며 닫힌 입매만이 보일 뿐이었다.
엄마에게 무언가 말을 걸까, 생각하기도 해보다 올려다 보이는 엄마의 얼굴이 마치
가면을 쓴것처럼 딱딱해 보이는 것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고개를 숙여 오늘을 위해 특별히 신게 된, 태어나서 처음 신어본 이
아름다운 비단신이 내 발이 움직이는 것에 맞추어 다양한 빛을 반사해내는 것을 유심히 지켜보았다.
그 길은 내 어린 시절과 친밀한 곳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베냇저고리에 쌓인 어린 아기 시절부터 내 스스로 그곳을 달려나갈 때까지
그 곳을 단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오갔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 길을 깜짝상잣길이라고 불렀었다.
왜냐하면 나는 그 길의 끝에 무엇이 나올지 몰랐기 때문에, 마치 속안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깜짝상자처럼, 늘 그 복도의 끝을 지나 집안으로 들어가면 늘 나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복도에 관한 나의 추억은 늘 설레고 즐거운 것이었다.
내가 세상에 걸음을 딛을 때도, 처음으로 저 따뜻한 태양과 보들보들한 바람을 기억할 때부터
내가 내 입술위에 따듯히 내려앉던 다른 이의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을 마음속에 기억하고
그 입맞춤이 주는 환희에 눈을 감았던 순간까지 이 복도를 지나 그곳에 도달했었다.
어렸을 적에 그곳에 내게 단순한 유희거리 전의 즐거움을 극대화시키는 곳이었다면
자라서는 그곳은 내게 그 어느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마치 이 복도의 외향이 그러하듯
고급스럽고 화려한 붉은빛의 미래를 약속해주는 안전한 미래로의 통로였다.
내가 나를 위해 할 일은 그저 조신히 옷을 차려입고 내가 시험삼아 마을 사내들을 상대로 하여
터득한, 남자들이 가장 좋아하는 나의 미소를 지으며 그 집의 여주인에 걸맞게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 끝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그에게로 가면 되는것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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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오룬은 무표정으로 자신 앞에 있는 거의 사람키의 두배 만한 거대한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쳐다보았다.
시녀들은 이제 막 마지막으로 보석으로 치장한 그의 화려한 신발을 매만지고 있는 중이었다.
가슴 가운데를 꽉 졸라매어 가슴이 봉긋하게 위로 솟도록 한 복장에 반투명한 연분홍색과 연두색 저고리를 입은
시녀들의 틀어올린 윤기나는 검은 머리에 달린 진주와 홍옥 장식들이 반짝거리며 부서지는 빛을 반사한다.
한참을 무릎을 꿇고 샤오룬의 바짓단을 매만져주던 얼굴이 동글동글하며 눈꼬리가 위로 여우처럼 올라간
시녀가 붉게 연지를 바른 입꼬리를 올리며 꾀꼬리 같은 목소리에 간드러지는 말투로 묻는다.
"발이 불편하지는 않으신지요,
바짓단은 충분히 조여졌는가요, 작은 주인님"
샤오룬은 그 시녀를 내려보다 무의식적으로 시선이 교태가 잔뜩 서린 그 얼굴에서 비정상적일 정도로
위로 모아올린 가슴으로 옮겨갔고 샤오룬은 당황하며 시선을 돌렸다.
"이제 그만 된듯 싶다."
시녀는 웃음을 참으려는듯 입술 한 쪽을 깨물고는 허리를 숙인채 다른 시녀들과 함께
뒷걸음질 쳐 물러갔다.
시녀들의 모습이 채 사라지기도 전에, 붐- 하고 방안 전체에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웃음소리가
방 한가운데를 가로지른 다른 곳에서 들려왔다.
"걸작이다, 걸작이야!
으하하하하"
샤오룬은 눈살을 찌푸리며 소리가 들려오는 곳을 돌아보았다.
곰처럼 우람한 몸집과 키에 약간 그을린 피부, 칠흙처럼 새까맣고 억센 머리칼에
그의 머리색과 마찬가지로 동공이 보이지 않게 새까만 눈동자를 담은 조금은 교활해 보이기도 하는
찢어진 눈매, 굳세보이는 단단한 턱을 가진 샤오룬의 사촌,
"강연,"
샤오룬은 포기했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자신의 앞으로 다가와
남자들만의 반가움을 표시하는 방법인 주먹 박치기를 청하는 사촌의 뼈대 굵은 거대한 주먹을
무시하고 치렁치렁한 예복의 자락을 밟지 않게 조심하기 위해 느린 걸음으로
무시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싱글벙글한 얼굴의 사촌을 지나쳐 방안 한 구석의 의자에 가서 앉았다.
긴 예복자락 때문에 느릿한 걸음으로 자신을 지나쳐 걸어가는 사촌의 등을 바라보며
강연은 웃음을 억눌렀다.
"그 옷 잘 어울리는걸?"
중간에 발이 걸려 넘어지거나 옷자락을 찢어먹는 일 없이 무사히 의자에 도달한
샤오룬은 작은 의자에 조심스레 앉아 뭐가 좋은지 실실 쪼개고 있는 그의 사촌을 노려보았다.
"나이 또래가 같은 사촌들 중에서 누가 먼저 그 예복을 입게 될까 궁금했었는데,
네가 먼저 입을줄은 몰랐다. 자식, 제일 키도 작고 어리버리하던게 어느새 커서"
"아, 그래. 나도 의외였지.
난 우리 중 가장 맏형이신 무열 형님보다도 네가 먼저 이 예복을 입을줄 알았는데
설마 내가 널 제칠줄이야,"
샤오룬은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샤오룬과 같은 열 다섯살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겉 외양은 스무살은 족히 되어보이는
강연의 성숙한 외모를 비꼬는 의도가 다분한 말이었다.
하지만 강연은 이맛살 하나 찌푸리는 일 없이 오히려 갑자기 진지한 어투로 말을 받는다.
"그러게, 나도 집안 어른들이 날 먼저 약혼 시키지 않고 네게 먼저 그 옷을
입게 한 것에 대해 조금 충격을 받았었지. 역시 이것도 가문을 이을 차기당주의 특권인가?"
강연은 입꼬리를 사악하게 비틀며 웃었다.
"......."
샤오룬은 대답없이 광택이 나는 검은색 비단위에 은실과 금실로 수를 놓은 부채를
만지작거렸다.
"이제 대답해봐,"
강연의 큰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졌다.
샤오룬 단 한사람에게만 들릴 정도로 낮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왠 개소리 같지도 않은 정혼이야?
그것도 지난 십 년간 단 한번도 본 적이 없던 황씨 집안의 예인과,"
샤오룬은 강연의 새까만 눈을 쳐다보았다.
"얘기 들었을거 아니야"
샤오룬의 눈은 껌벅거림 없이 강연을 물끄럼히 쳐다보았다.
강연은 그 우람한 덩치와 근육에 어울리지 않는 날렵하고 우아한 몸짓으로 샤오룬의 앞에 걸어와
앉았다. 아까의 짖궂은 웃음기는 이제 그의 얼굴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새카만 눈동자는 눈앞의 자신의 사촌에 대한 진심어린 염려와 걱정만을 담고 있었다.
"모두 말해봐,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거야?"
"........"
"어디서부터 시작할 지 모르겠다면 내가 무엇을 알고 싶은지 귀띔을 주지,
정확히 삼 주 전에 내가 훈련에서 돌아왔을때 내 할아버님께서 네 조부이신 큰 할아버님께
서찰을 받았지. 거기에는 바로 충렬현 황 대감의 영애인 예인, 우리들의 소꿉 친구이기도 한 예인과
너의 혼인을 대신 나서 추진시키라는 당주로서의 명이 적혀져 있었지.
그리고 이건 영감탱이들끼리 떠들던 걸 내가 엿들은 건데,
그곳에서 네가 들였다는 첩실은 또 뭐야? 혼인도 하지 않은놈이 무슨 첩실이야?
게다가 갑작스러운 이 웃기지도 않는 정혼은 무엇이고,"
샤오룬은 피곤하다는 듯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 너 이 정혼, 네가 정말 예인을 사랑해서 이렇게
개소리 같지도 않게 서두르고 있는거야?
아니면, 네가 들였다는 그 첩실 때문인거야?"
"....륜이야,"
"뭐?"
샤오룬은 여전히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채 중얼거렸다.
"륜이라고,
.........첩실이라고 부르지 마."
멍하니 있던 강연은 우람한 몸집과 달리 머리 회전이 빨랐다.
그는 곧 큭큭거리며 온몸을 흔들어가며 웃어대기 시작했다.
"아하하, 우와, 이거 걸작이네,
야, 너 정말 그 첩한테, 아니.. 그 륜이라는 소저한테 빠진거냐?
그래서 지금 이 정혼도 서두르는 거고? 이야... 죽이는데,
야, 말해봐. 이쁘냐? 어?"
잠시나마 진지함을 띄었던 강연의 얼굴에 다시 사악하기 짝이 없는 짖궂은 표정이 돌아왔다.
강연은 샤오룬이 탁자에 내려놓은 그의 부채로 샤오룬의 옆구리를 콕콕 찔러가며 채근하기 시작했다.
"말해 보라니까, 얼마나 이쁘냐고!
몸매는? 야, 너같은 쑥맥을 꼬실 정도면 얼마나 죽이는 미녀냐 도대체!
이 자식, 아까 시녀들 보고도 쫄은 쑥맥이 또 이런 구르는 재주가 있을 줄이야!
야, 빨리 말해봐라, 형님 애간장 녹는다!!!"
샤오룬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며 동시에 번개같이 강연의 뒷통수를 강타했다.
"전혀 웃기지 않아, 그러니까 그만 웃어.
진짜로 웃기지 않아.."
인상을 찌푸리며 아픈 뒷통수를 문지르던 강연이 샤오룬의 얼굴을 째려보았으나
샤오룬의 얼굴에 어린 고통 어린 표정에 강연의 표정은 다시 진지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인거야?"
샤오룬은 길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강연, 넌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해본 적이 있냐?"
강연은 뜻밖의 질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딱 한 사람만 골라야 하는거야? 그러면.. 어디보자, 미향이, 화향이,
렌화, 옥월...이 중에서.."
샤오룬은 또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뼈대가 학자 집안이라 그런가, 진씨 집안은 성격들이 대개 소심하거나 조용하거나 혹은
수줍을만치 남앞에 나서기를 싫어해 좀처럼 목소리를 높여서 말하는 사람들이 없었다. 그런데 강연,
객관적으로만 꼽아보자면 가문의 특징인 명석한 두뇌와 냉철한 이성과 상황판단능력 그리고 현대에서 유일한
무인인 그의 대조부 진 대인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무술 실력과 타고난 무인 골격 등, 분명 껍데기는 진씨 집안이
맞는데 강연은 도저히 이 집안 사람이 아닌듯한, 아니 저런 가족 구성원을 가진 집안이 있기나 싶을까 만큼
특이한 존재였다.
좋게 말하면 특이한거지, 정확하게 말하자면 괴짜였다.
색(色)을 즐기지 않고 금욕하고 자제하며 말을 많이하기보다는 말을 아끼는 것이
미덕이라고 가르치는 진씨 집안의 사상에 정반대로 강연은, 호색한이었다.
이제 겨우 샤오룬이랑 동갑인 열 다섯인데 강연은 이미 수도 내의 기방이란 기방은 안 가본곳이
없었고, 스스로도 회계의 야색계의 황태자라 칭할만큼 자신이 여색을 밝히는 것을 거리낌없이
드러냈으며 부끄러움도 느끼지 않았다.
물론, 그의 실제 나이를 모르는 사람들은 한창 나이니 그럴수 있겠지, 또 짖궂은 태도와 저속한 농담에도
특이하게도 전혀 사람을 기분 나쁘게 하지 않는 그의 교묘한 처세술에 그것 참, 참으로 유쾌한 젊은 친구로구만, 하고 웃겠지만.
딱히 미인 집안은 아니더라도 대체적으로 진씨 일가들이 선량하고 반듯하게 생겨 사람들에게
호감을 사는데에 비해 강연의 외모는, 일단 액면가부터가 범상치 않았다.
몸에 비해 우락부락은 아니었으나 늘 짖궂은 미소를 띄고 있는 얼굴은 어딘가 교활해 보이는- 샤오룬은 차마 사촌으로서
그렇게까지는 말하지는 않겠지만- 어쩄든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그의 몸. 도저히 열 다섯살의 신체라고 볼 수 없는 그의 근육은 사람들에게 늘 두 가지 반응을 불렀으니,
경외감 혹은 공포,
대개는 후자의 경우를 더 많이 느끼었지만 말이다.
"강연, 나 진짜 장난하는거 아니야."
"그러니까 돌리지 말고 말해보라고,
큰할아버님이 왜 갑자기 너를 황씨 집안과 정혼을 시키신거야,
아직 정식으로 혼례도 올리지 않은 놈이 첩실 이야기는 또 뭐고,"
샤오룬은 무척이나 귀찮다는 듯한 눈으로 강연을 쳐다보았다.
"너부터 돌리지 말고 말해,
다 알고 있으면서 재미삼아 이러고 있는거잖아,
네 식대로 말하자면 개소리 같지도 않은 걱정질은 집어치워"
강연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이럴 계획은 아니었는데, 사실 대강 사건의 전말을 들었던 강연은
그것을 자신을 비롯한 다른 귀족 자제들이 그러하듯 단순한 색놀음이라 생각했었고,
평소 사촌들 가운데서도 가장 쑥맥이기로 으뜸이었던 샤오룬이 여자에 눈이 멀어
가문의 차기 당주라는 자신의 위치도 망각하고 태재 범려에게 정면으로 맞섰다는 사실에
그는 이 일을 샤오룬의 진심에 집중하여 생각하기 보다는 샤오룬이 무척이나 재미있는
놀음을 하고 있다고 생각해 일부러 지금껏 말을 돌리며 그의 말을 유도하려 했던 것이었다.
물론 샤오룬은 강연의 장단에 넘어가주지 않았지만,
"태재한테 정면으로 덤볐다며,
어떤 여자애 때문에"
".........."
"그 소식, 다들 쉬쉬하고 있지만 벌써 종친들 사이에선 비밀아닌 비밀이야,
다른 종친들은 널보고 미친놈이라고 하더군.
그 여자애, 공녀로 바쳐질 애였다며? 공녀로 바쳐져야 했을 여자 아이를 빼돌려 첩실로
삼았다고 종친들 사이에서 한바탕 말이 많았어. 귀족들간의 통혼이 서로의 이익을 위해서
핏줄을 사고파는 거래와 다름없다고 경멸해 마지 않으시던 큰할아버님이 자신의 손자인 너를
현 최고의 권력가인 황씨 집안과 이렇게, 일말의 예고도 없이 정혼시키시려는 것을 보고 종친들
사이에서는 더더욱 소란이 일었었지.
도대체 그 첩실이라는 계집이 누구냐고,
"아직 황씨 일족들은 이 사건의 전말을 모르고 있어.
그러니 이렇게 순순히 네 청혼을 받아들인 거겠지만 말이야,
첩실 하나를 들이기 위해서 염두에 두지도 않았던 천하의 황씨 집안의 외동딸을
갑작스럽게 아내로 받아들이기로 결심한, 어떻게 보면 참으로 교활하기도 하고 어리석기도
한 결정. 과연, 네가 차기 당주로서 자질이 있느냐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두들 의견이 분분해.
"황씨 집안과의 혼인은 큰할아버님의 결정인거지?"
샤오룬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거 아니야?
황씨 일족은 주나라의 왕족 일가라고, 함부로 건들일 상대가 못돼.
자신들이 고작 네 사랑놀음의 가리개였다는 사실을 알면 그순간 그건 가문과 가문의
싸움이 아니라 나라간의 싸움이 될거라고,
그리고, 지금은 모두들 쉬쉬하고 있으니 모르겠지만 나중에 네가 정식으로 예인과 혼인하게
되었을 때, 그 소저를 데리고 와야 할것 아니야? 그때가 되면 어떻게 설명할건데?"
강연의 말투는 어느새 힐난조로 바뀌어 있었다.
누구보다도 가문의 간섭이니 신분의 구속을 싫어하는 강연이었지만, 가족들에 대한 애정과 책임감만은
끔찍했던 강연은 지금 어쩌면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 샤오룬을 포함한 모두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결정을 힐책하고 있었다.
"난 그 아이를 지켜주기 위해 최선의 선택을 하고 있는것 뿐이야,"
"네 머리는 장식이냐?
이게 어떻게 최선의 선택이야?"
강연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했다.
첩실을 들이기 위한 고육지책의 이 혼인은 황씨 일가에서 이를 알게 된다면 잠자코 넘어가지
않을 몹시나 위험요소가 큰 결정이었다.
가문과 샤오룬이 지키고 싶어하는 그 소저에게도,
"네가 수도에서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어서 뭘 모르나 본데, 황대인, 그 영감탱이
성격은 정말 장난이 아니거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자기 사위가 첩실을 먼저, 아니 먼저고 나중에고
자기 딸 이외에 다른 여자를 들이는 꼴은 눈뜨고 못볼 성정이라고!
황대인 성격이면 네 첩실을 독살하고도 남는다고! 그런데 이게 네가 그 소저를 위한 일이라고?"
"륜이를 지키기 위해선 힘이 필요하니까!!!"
처음으로 샤오룬의 목소리가 쏘아붙이듯 날카로워졌다.
"어차피 륜이를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선 정실을 먼저 들였어야 했어.
그래, 나중일을 생각하면 차라리 별볼일 없는 가문과 혼인하는 것이 훨씬 나았을지도 몰라,
그래야지 나중에 륜이가 내 정실이 되어도 큰 말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니까-"
"잠깐,"
강연이 손을 들어 샤오룬의 말을 저지했다.
그의 얼굴은 아까와 비교할 수 없는 심각한 빛이 서려있었다.
그리고 그 표정의 끝에는 미세하게 떨리는 분노가 서려있었다.
"방금 뭐라고 한거야?
나중에... 그 륜이라는 소저가, 뭐?
하.... 내가 잘못 들은거지?"
샤오룬은 말없이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사촌의 얼굴을 노려보았다.
"난 륜이를 내 정실로 들일거야."
샤오룬의 입에서 이 말이 나오자 마자 강연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미친 새끼!!!!
너 완전히 미쳤구나?! 하!!!!!
다른 종친들이 네가 정식 혼례도 전에 첩실을 먼저 들이는 것에 대해
미친놈이라고 했지만 난 차라리 네가 멋진놈이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네 성격을
잘 아니까, 넌 결코 사람에 대해서 가볍게 생각하지 않는 제정신이 박힌 놈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무언가 이유가 있겠지, 네가 정말로 그 소저를 사랑해서 이러는 거겠지,
황씨 집안과의 혼약도 네가 첩실을 일찍 들임으로서 가문에 명예에 수치를 안긴 죄를 속죄하려고
책임감에 일부러 자처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어! 그런데 뭐?!!!
고작, 고작 그 소저를 네 정실로 올리기 위해서, 그럴만한 힘을 얻기 위해서 예인과 혼약하는 거라고?
네 꿍꿍이로 인해 가문이, 가족들이 입을 피해따위는, 한 번도 생각하지 않은 거야?
그게 네가 차기 당주로서 할 말인거야?!!!!"
"아무도 다치지 않을거야,"
샤오룬은 마치 고해성사라도 하는 신관처럼 엄숙한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럴수록 강연의 얼굴은 점점 더 붉어졌으니,
"예인은, 앞으로, 하! 그래, 네 말마따나 잠시나마 네 가리개가 되어줄 불쌍한
예인은 어쩔건데, 십년 동안 네가 회계를 떠나있던 동안 한 달에 한 번씩 꼭 네게
안부 편지를 쓰고 네가 이곳으로 돌아올 때마다 일부러 본가에 찾아와 네 얼굴을 보고 가려던!
네가 자신과 청혼했다는 말에 뛸듯이 기뻐하며 눈물까지 흘렸다는 예인은 어쩔건데!!"
말을 하며 강연은 점점 열이 뻗치는 모습이었다.
울그락 푸르락한 그의 얼굴과 비단옷 아래 꿈틀거리는 그의 근육은 금방이라도 샤오룬의
얼굴을 가격할 기세였다. 하지만 샤오룬은 얼굴 표정하나 변하지 않았다.
"내가 너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군. 완전히!!!
난 네가 정말로 좋은 놈이라고 생각했다. 늘 네 자신보다 타인을 배려하고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바라는, 병신같을 만큼 착하고 좋은놈이라고 생각했어.
지난 십 년동안 네가 예인의 마음을 모른척 한것은 네가 그 아이에게 상처를 주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외면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하! 넌 사실 그 마음을 깡그리 무시한 채 오히려 이용하려 하는구나!
그래서 예인을 선택한 거지?
십년간 해바라기처럼 너만 바라보던 그 바보같은 계집애는 네 말이면 무엇이든지 들어줄 것을 알고
있으니까, 설사 네가 그 소저에게 예인의 자리를 내주라 하더라도 네 말이라면 군말없이 물러날 테니까,
어떻게 그렇게 잔인하게 굴수 있는거야! 너, 너 정말 이런 형편없는 놈이었던 거야?!
고작 천한 평민 계집 하나에 눈이 멀어서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하다니-"
그것은 순간이었다. 샤오룬의 손에 의해 탁자위의 아름다운 옥빛 자기가 바닥으로 날아가
커다란 소리를 내며 산산조각이 난것은.
"함부로 지껄이지마,"
샤오룬의 목소리는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강연은 흠칫했다.
단 한 번도 샤오룬이 저런 검은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이성을 잃은것인가, 생각하였지만 샤오룬은 숨소리 하나 거칠어지지 않았다.
문득 강연은 자신이 알고있던 샤오룬이 정말로 샤오룬의 진짜 모습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내가 너무 오랫동안 본가를 떠나 있어 모두들 망각한 모양이더군,"
겉모습은 지금도 늘 강연이 알고있던 그 차분하고 온화해 보이는 샤오룬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 들어앉은건 샤오룬이면서도 전혀 다른 샤오룬인듯 했다.
"누가 이 집안의 다음 당주인지 말이야,
"지금부터 아무도 이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도록 해.
또한, 다시 한 번 그 누구도 내 일에 대해서 가르치거나 혹은!"
샤오룬은 걍연을 차갑게 노려보았다.
"자신의 짧은 식견을 잣대로 판단하려 들지 않을 것이야."
구름 뒤에 가라졌던 해가 다시 나타났다.
열어놓은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는 샤오룬과 강연을 비추었다.
몸의 반은 햇살속에, 반은 방 안의 그늘속에 있던 샤오룬의 빛에 빛춘 얼굴은 강연이
늘 알고 있던 그 온화하고 유순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반대쪽의, 그늘속의 얼굴은 강연이 무척이나 잘 알고있는 낯익은 얼굴이면서
동시에, 마치 거울 속의 반댓편을 들여다 보듯이
진실이되 진실이 아닌, 낯선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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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급 사랑하고 있는 나의 남정네들...
샤오룬의 모델로 이리저리 생각해본 후보들이에욤!
사실 이 중에서 샤오룬의 모델이 된 특정인물이 있지만 전 작가라고 해서 굳이 캐릭터에
한 가지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지 않더라구요,
작가는 상상의 모티브만 제공할 뿐이고 상상은 독자의 몫으로 남겨야 할테니까요ㅎㅎ
굳이 제 사심을 드러내자면 전 닉쿤이 단연 좋아욤! 잇힝~
사실 다 좋아하는데 닉쿤에게 유독 정이 가더라구요, 한국말에 익숙치 않아서 그런지 몰라도
되게 매너도 좋은것 같고 머리도 좋고 성격이 온화한듯 하면서도 딱부러지는게
전 그런사람 좋아하거든요. 외유내강이라고 하죠?ㅎㅎ 사실 닉쿤을 염두에 둔건 아니었는데
샤오룬의 성격모델은 그런 타입의 사람이에요.
이번 화에 샤오룬이 어두운 면모를 드러냈는데
그걸 가지고 샤오룬이 악하네 선하네, 를 가름하지 않아주셨으면 해요.
사람은 선하고 악하고를 굳이 따질수는 없는거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한없이 착한 사람은 없는 법이니까요, 착한 사람도 욕망이 있는 법이고 사람의 본능은 욕망을
채워야만 하는 것이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어떤 짓이든 할 수 있는게 또 사람이라고 전 생각하거든요
자, 자 어쨌든~~
저 다섯 남정네들 중 여러분의 샤오룬은 누구인가요?
업쪽 원하시는 분들은 앞머리에 # 찍어주세욤~
첫댓글 # 그냥 정일우했어요!!ㅋㅋㅋ 아아.....엄청기다려서 본소설
ㅎㅎ 감사합니다, 요즘 집에 컴이 정줄을 놓아서-_-;; 인터넷 접속이 쉽지 않아요
♥
#오래 기다렸어요!!!!! 샤오룬 의외네요..ㅋㅋ 담편 너무너무 궁금합니다~ㅠㅠ
감사합니다~ 언능 담편을 올려야 하지만 정줄 놓은 컴은... 인력으로 어찌할 수가 없네요-_-;;;
어머..ㅠ.ㅠ...........................................샤오룬...멋있어..ㅋ
ㅎㅎ 오랜만이어요~ㅎㅎ 댓글 감사합니다~
범과 닉쿤사이에서 갈등했으나 역시 쿤이가 ㅋㅋ 샤오룬 멋있어요!!
ㅎㅎ 닉쿤 앓이가 저 하나만은 아니었군요! 아흥~ 닉쿤 넘흐 좋아요>ㅁ<
# 김범과 유승호 사이에 많은 고민을 했으나 ㅠㅠ 사극에 출연하는 유승호가 급 생각이 나서 한표~ ㅎㅎ
ㅎㅎ 유승호.. 넘 바람직하게 자라줘서 고마울 따름이에요~ 집으로 출연하던 때가 엊그저께 같은데 벌써 그렇게 훈훈하게 자라서 이 눈호ㅏ들의 마음을 후벼파다니 아흥~ㅠㅠ
서시가 뭔가요?
서시의 이름 뜻 말씀하시는 건가요, 아니면 서시가 누군지 아예 모르시는 건지..-_-; 서시의 서는 서쪽 서구요, 시는 베풀 시라고 하네요, 정확한 뜻은 모르겠지만 원래 서시의 본명인 서이광(제가 예전에 언급했었는데 사실 성이 원래 서가 아니라 이 베풀 시랍니다, 그런데 제가 그냥 발음이 거시기 하니까 서로 바꾼거에요^^) 아무래도 그래서 서시라고 한게 아닐까 싶네요. 서쪽에서 온 시(施)성을 지닌 여인.
둘 다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