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처음 제정된 발롱도르는 세계 최고의 축구 선수에게 수여하는 종합적인 상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유럽 대륙에만 한정되어 있었다. 당시에는 아무도 남미 리그와 그곳에서 뛰는 선수들을 판단하기는커녕 관찰할 수 없었다.
유럽은 경제적 위상으로 축구계를 지배하고 있었고 1950년대 초에는 이미 아르헨티나 (레알 마드리드의 디 스테파노), 우루과이 (로마의 기지아, 밀란의 스키아피노), 브라질 (피오렌티나의 줄리뉴) 스타들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오랫동안 발롱도르는 유럽 대표에게 수여했다. 1995년이 돼서야 국적과 관계없이 유럽 클럽에서 뛰는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기 시작했고 2007년부터는 전 세계 최고의 선수에게 수여하면서 발롱도르가 전 세계적인 차원으로 확대되었다. 그러나 유럽은 이제 모든 기술이 응축된 땅이 되었기에 확대는 거의 쓸모가 없게 되었다.
거의 40년 동안 남미 최고의 재능을 가진 선수들은 가장 권위 있는 개인전 우승 트로피를 한 번도 만져보지 못한 채 눈앞에서 지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우리가 임의로 해결하려고 시도하는 것은 바로 이런 좌절감이다.
1958년 발롱도르 레이몽 코파 펠레
1959년 발롱도르 디 스테파노 펠레
1960년 수아레스 펠레
1961년 시보리 펠레
1963년 야신 펠레
1964년 데니스 로 펠레
1970년 게르트 뮐러 펠레
펠레는 1958년 월드컵에 혜성처럼 나타났다. 사실 펠레는 첫 두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1라운드 마지막 경기인 소련전에 출전했다. 17살인 에드송 아란치스 두 나시멘투는 아직 펠레가 아니었다.
펠레는 8강 웨일즈전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3경기에서 6골을 터뜨리며 놀라운 재능의 폭발을 상징하는 돌풍을 일으켰다. 스웨덴 월드컵 최우수 선수로 선정된 지지는 1958년 발롱도르를 완벽하게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곧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하기 위해 떠날 예정인 지지는 이미 29번째 생일을 앞두고 있었고 그의 재능은 미래의 왕보다 더 집단적이고 덜 화려했다. 펠레는 신선함, 광기, 본능, 천재성을 모두 갖추고 있었다.
무엇보다 펠레는 광란의 질주 끝에 멋진 골을 넣었고 마술사 모자에서 나온 듯한 백 트릭이나 묘기를 보여주는 드리블로 골을 넣었다. 1958년 펠레는 소속팀 산투스에서 80골을 넣었다. 어떤 이들은 산투스의 실력이 스페인이나 이탈리아 클럽만큼 뛰어나지 않다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대답은 펠레의 산투스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당시 월드컵은 단순한 대회 그 이상이었다. 스페인의 디 스테파노가 1958년 월드컵 예선전에서 탈락했고 1962년에는 부상으로 기권하기 전까지 단 한 번도 출전한 적이 없었던 월드컵은 그 자체로 거대한 쇼케이스였다.
반면 펠레는 월드컵의 사나이였다. 펠레는 4번의 월드컵에 출전해 3번 우승했고, 그중 2번 (1958년과 70년)은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특히 1959년 100골, 1961년 110골 등, 마치 경매 입찰을 방불케 할 정도로 많은 골을 기록했다. 펠레는 이 기간에 자기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했고 명성을 쌓고 국제적인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전국 선수권 대회와 상파울루주 선수권 대회에서 여러 차례 우승한 펠레는 1962년과 1963년 벤피카와 밀란을 상대로 코파 리베르타도레스와 인터콘티넨털 컵에서 우승했다.
1963년 가힌샤와 자이르지뉴의 보타보구와의 리베르타도레스 준결승을 본 사람들은 아직도 눈물을 흘리며 그 경기를 회상한다. 펠레는 1차전에서 동점을 기록한 이후 2차전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뛰어난 경기를 펼쳤다. 대회 최다 득점자인 펠레는 보카 주니어스를 상대로 우승을 이끌었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계속할 수 있고 심지어 60년대 10년 동안 펠레에게 발롱도르를 줄 수도 있다. 1965년 소속팀에서 97골을 넣으며 리베르타도레스에서 득점왕을 차지한 펠레의 생산성을 줄어들지 않았지만 60년대 중반부터 영향력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모든 국적의 수비수들에게 밀리고 유럽에서는 수익성 높은 친선전에 점점 더 자주 노출되고 남미 무대에서는 존재감이 줄어들었다. 1966년 월드컵에서 포르투갈과 헝가리에 완패하고 브라질과 함께 몰락했다. 그리고 1970년 잿더미에서 다시 일어섰다.
1970년 월드컵은 TV를 통해 최초로 컬러로 중계된 월드컵으로 당시 월드컵을 본 사람들은 여전히 눈부신 사건으로 남아 있다. 펠레는 29살이었다. 그는 이미 자신의 마지막 월드컵이 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브라질이 역대 최고의 팀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펠레의 골보다 오래 남는 것은 그의 제스처와 개인 퍼포먼스였다. 빅토르를 향한 악마 같은 50m 슛, 마주르키에비치를 당황하게 한 페인트, 잉글랜드를 상대로 눈부신 헤더와 뱅크스의 반사신경, 결승전에서 브라질의 네 번째 골을 넣은 카를루스 아우베르트에게 날린 블라인드 패스까지... 수많은 실패가 있었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여기서 제스처는 모든 것보다 우선이다. 그것은 후대에 남을 가치가 있다. 펠레는 마지막 월드컵 우승을 앞두고 있었다. 1970년 발롱도르를 수상할 것이다. 그의 7번째이자 마지막 수상이다.
1962년 마소푸스트 가린샤
당대의 거장을 배출한 대표 대회인 월드컵에 우선순위를 두고 가린샤를 발롱도르 명단에서 제외할 수 없다. 펠레는 칠레 월드컵 두 번째 경기에서 부상을 입었다. 그는 토너먼트에서 다시는 볼 수 없었다. 가린샤는 단 두 경기와 다른 은하계에서 온 몇 번의 드리블만으로 절대적인 군주가 되었다.
'구부러진 다리를 가진 천사'는 이미 1958년 월드컵에서 영국 언론이 '스탠리 매튜스, 톰 피니, 뱀의 매력이 섞인 선수'라고 묘사했을 정도로 재능의 척도를 보여줬다.
웨일스 수비수 멜 홉킨스는 "펠레보다 더 강하다."라고 말했다. 브라질 국민들 마음속에서도 인기가 더 높았다. 8강부터는 개최국 칠레전처럼 적대적이었던 관중들을 열광하게 했다. 8강에서 혼자서 잉글랜드를 탈락시킨 이후 현지 신문이 물었다. "가린샤는 어느 행성에서 온 선수인가?"
가린샤는 결승전에서는 주인공이 아니었다. 4강에서 퇴장당한 가힌샤는 브라질 축협이 개입한 후에야 출전 정지가 해제되었다. 하지만 그는 고열에 시달리며 결승전에 출전했다. 브라질은 우승을 차지했고 가린샤는 최다 득점자이자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다. 그리고 연말에 발롱도르도!
1978년 키건 켐페스
발롱도르의 공식 역사에서 월드컵은 궤적과 운명이 교차한다. 1978년 당시 24살의 나이였던 켐페스는 결코 무명 선수가 아니었다. 스페인 발렌시아에서 뛰고 있던 그는 리그에서 많은 골 (1977/78 시즌 39골)을 넣으며 2년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각광을 받을 운명이었다.
정치적 상황과 독재 정권의 공포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켐페스는 아르헨티나에 안도감과 영감을 불어넣었다. 1라운드에서 득점에 실패한 켐페스는 마지막 4경기에서 6골을 넣으며 대회 득점왕에 올랐다.
월드컵 최우수 선수, 남미 올해의 선수로 선정된 켐페스는 그해에 아무것도 우승하지 못했고 예선에서 폴란드에 패해 월드컵에 참가도 못 한 케빈 키건을 제치고 발롱도르를 받았을 것이다.
1986년 벨라노프 마라도나
1990년 마테우스 마라도나
펠레와 마라도나는 비교할 수 없는 존재기에 절대 비교할 수 없다. 어떤 사람들은 발롱도르 수상 횟수를 보고 펠레 (7회)와 마라도나 (2회)의 불균형에 불쾌감도 느끼지만,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마라도나는 펠레와 달리 유럽에서 뛰어서 유럽 최고의 선수들을 상대로 자신을 시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 (대략 1980년대)의 경쟁은 20년 전보다 훨씬 더 치열했다.
펠레는 데니스 로, 마소푸스트, 야신, 시보리와 같은 선수들을 목록에서 지웠지만, 마라도나는 루메니게, 플라티니, 굴리트, 반 바스텐과 같은 선수들과 경쟁하는데 특히 이들은 모두 이탈리아 같은 리그에서 동시에 뛰어서 상황이 완전히 같지 않았다.
마라도나의 자질, 기술, 비전, 패스, 드리블, 그리고 손의 손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우리는 그의 영향력에 더 관심이 있다. 마라도나는 바르셀로나에서 우승하지 못했지만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 나폴리에 영감을 불어넣었다.
마라도나는 세리에A가 세계 최고의 리그였던 1987년과 1990년에 두 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오늘날의 유로파리그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대회인 UEFA컵을 우승했다. 마라도나가 자신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한 것은 바로 이 시기인 80년대 후반이었다.
나폴리는 마라도나를 최고의 자리에 올려놓았지만, 그에게 영원한 명성을 안겨준 것은 아르헨티나였다. 1986년 월드컵 설명을 생략하겠다.
1990년 월드컵에서는 논쟁이 더욱 뜨거워졌다. 발목 부상으로 경기에 나서지 못했고 득점에 실패하고 경기에 미치는 영향도 적었으며 8강전에는 PK를 실축했다.
하지만 살바토레 스킬라치가 대회 최우수 선수와 득점왕으로 선정된 이 형편없는 월드컵에서 정말 돋보인 선수는 누구였을까? 역사상 가장 충격적인 월드컵 결승전 중 하나에서 고통받는 팀을 이끌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한 마라도나보다 아우라, 카리스마, 개성을 가진 선수는 누가 있을까?
마테우스 발롱도르? 물론 그는 세계 챔피언이지만 16강 이후 단 1골 (PK)을 넣었고 서독을 절대 무시할 수 없었다.
마라도나는 리그에서 마테우스보다 더 많은 골을 넣었다. 무엇보다 마테우스의 인테르는 정상에서 멀리 떨어진 반면 유럽 2연패를 달성한 밀란을 상대로 리그 우승을 차지하며 1년 내내 빛을 발했다. 이것도 논쟁의 여지가 있을까? 마라도나가 두 번째 발롱도르이자 마지막으로 수상!
1994년 스토이치코프 호마리우
1995년 12월 26일자 프랑스 풋볼 사설에서 편집장 제라르 에르노는 발롱도르 규칙을 개편한 이유를 설명한다. 첫째, 유럽 클럽에서 뛰는 선수의 수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많아졌다. 둘째, 이들 선수 대부분은 같은 클럽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셋째, 유럽은 은퇴하는 곳이 아닌 배우고 성취하는 곳이다.
조지 웨아는 전 세계로 확대한 새로운 규정의 첫 수혜자다. 그리고 호마리우는 너무 엄격해서 쓸모없게 된 규정의 궁극적인 희생자다.
1994년은 호마리우의 해다. 월드컵, 바르셀로나에서 리그 우승, 월드컵 최우수 선수, 라 리가 득점왕 (33경기 30골), 피파 올해의 선수 타이틀은 물론, 레퀴프에서 수여하는 챔피언 오브 챔피언스 트로피까지 수많은 영예를 안았다.
호마리우를 상대로 이기기는 어렵다. 사실 호마리우는 발롱도르를 수상한 적이 없는, 사실상 가장 확실한 발롱도르 수상자다. 1994년? 호마리우는 모든 것을 해냈다.
엘 클라시코 5대0 승리 경기에서 3골 1도움, 챔피언스리그에서 맨유 상대로 4대0 완파까지, 세비야전에서 디에고 시메오네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해 5경기 출장 정지를 받은 것도 잊을 수 없다.
관리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난 재능과 변덕스러운 기질을 지닌 호마리우는 지금 받은 발롱도르보다 훨씬 더 많은 상을 받아야 했을 폭발적인 페노메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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