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의 흥분이 다음 편에 이어지기는 쉽지가 않은데, 생각이 백제를 취급하는 우리의 정서에 이르면 그 오해와 왜곡의 참담함이 심해서 흥분이 가라앉지 않는다. 전편에 이어 백제 이야기를 해보자.
백제를 이토록 얼토당토 않은 흑막에 꼬이게 만든 것이 다름 아닌 “한사군”이다. 이 문제만 풀면 고대사에서 백제의 지리적 문제는 거의 풀 수가 있는데, 생각을 뒤집지 않는한 문헌과 고고학적 사실을 아무리 밝혀도 이 문제는 해결하기가 어렵다. 여기에는 김부식과 식민사학계와 그 후계자인 이병도계가 아주 큰 공헌을 했으므로, 우리가 학교에서 배워 알고있는 사실이 “틀렸다”또는 “틀렸을 수 있다”를 전제해야만 “상상”이 가능하다.
우선 한사군이다. 한사군의 위치는 사실, 문헌으로 이미 밝혀놓았다. 누가? 중국사학자들이. 어떻게? 그들로서는 한국이나 일본이 “한사군”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만으로도 대 만족이다. 그런데 문헌으로 증빙하기 힘들고 무리수가 많은 “낙랑군-대동강유역”을 들이밀었다가는 한사군 자체가 공격당할 수 있으므로 어딘지는 알지만 나서서 언급은 안한다는 입장이다.
한사군중 가장 문제가 되는 낙랑을 예로 들어 설명해보자.
낙랑군에 대요수(大遼水)가 흐른다는 “요사지리지”의 기록에 비해 우리는 일본사학계가 정설화한 지금의 대동강 유역을 죽어라 외워야한다. 고구려 유역에 살았던 거란족에 비해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고대사 지리를 확실히 모르는 상태였다. 거기다 우리는 이 한나라가 쳐들어온 이 싸움에서 고조선 왕까지 죽었다고 배우며 연도까지 외웠다. BC 108! 고조선 멸망. 고구려의 한사군 회복 AD313, 콘스탄티누스 기독교 공인!
그런데 중국측 기록을 살펴보면 죽었다는 것은 조선 왕뿐만이 아니다. 조선을 멸망시켰다는 이 싸움에서 한무제는 사령관 세 사람을 참수해버린다!
싸움에 이긴 장수가 세력이 커지자 제거한다든가 하는 일은 있어도, 싸움에 이겨서 적국의 왕을 죽이고 제후국을 네 개나 설치한 장군들을 죽여?
사실을 말하자면 한나라는 싸움에서 졌고, 얻은게 없었다. 그래서 장군들을 처형해서라도 민심을 수습해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요동과 황하 동북쪽에 있었다는 조선족 네 나라를 자기네 제후국(태수)으로 봉한다.
조공도 안바치는 나라들을 제후로 봉했다고 선전을 하려니, 거꾸로 전쟁에 이겼다고 써야한다. 여기까지만 해도, 차라리 조선을 쳐서 한사군으로 봉했다는 사기열전은 귀엽기나 하다. 그러나 엄연히 각종 고대지리지에 나오는 한사군의 영역을 한반도 안으로 끌어와서 고구려의 코아래 낙랑이 있었다고 믿게 만드는 일본 제국주의족의 능력을 우리는 정말 칭찬해야할 것이다.
고구려가 함락시킨 낙랑은 낙랑현이 아니라 낙랑국이다. 이 당시 “낙랑”이라는 나라 이름은 매우 흔하며 (낭낭, 낙선, 낙랑), 고조선 시대부터 축제(제사)기능을 수행하던 부족의 이름으로 자주 나온다. 하다못해 낙랑은 이두문자로 “나라”의 음사다. (내가 만약 조선족 제국주의자라면 낙랑군이 지금의 일본열도 “나라”현이라고 우길텐데, 아깝다...)
조금 길어졌지만 이 문제는 상당히 “크리티컬”한 사안이므로 짚고넘어가야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가 멸망시킨 고조선은 도대체 어느 나라인가? 한나라 이전의 진시왕때 이미 “조선”이라는 나라는 없어졌다. 해모수의 반란으로 고조선의 단군은 임금자리를 버리고 떠나버린다.(한단고기-단군세기) 이미 옛조선의 법통을 이어받은 북부여가 들어섰는데, 왠 조선침략?
문제는 이렇다. 조선은 나라를 세개로 분리하여 다스리는데 이것이 바로 삼한, 삼조선이다. 흔히 진한, 마한, 번한(변한)이라고 부르는 것으로 삼기능 체계라고 신채호선생이 밝혔다. 고려의 최영장군이 왜구와의 전쟁에서 이긴 이성계에게 “삼한을 다시 일으켜 세울 그대”라고 칭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나오는 삼한이 옛조선을 뜻하는 것이다.
우리가 알고있는 한강 이남의 삼한은 옛조선의 유민들이 세운 나라일 뿐, 최영이 말한 삼한이 아니다. 바로 그 삼조선 체계가 무너지고 그중 맏이격인 진조선의 단군이 임금위를 버린 것이다. 그러면서 조선의 법통을 북부여가 이어받는다.
마한과 번한은? 마한은 진한의 남쪽이었으므로 당연히 지금의 한반도 유역을 중심으로 존재한다. 그래서 유민들이 세운 진한과 번한보다 한강이남의 삼한에서는 마한이 가장 큰 나라로 나오는 것이다. 번한은 요서지방에 실재로 존재했는데 이 지역이 바로 은나라때부터 중국유민을 흡수하던 옛조선의 강역인 셈이다.
삼조선 체계가 무너지고 진한의 뒤를 이어 북부여가 들어섬으로써 실질적으로 옛조선은 없어졌지만, 번조선은 기씨(기자와 다름)조선에서 위만의 위씨조선으로 명맥을 이어나가다가 한무제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고 만다. 한무제의 침략에 맞서 1년간이나 버텼다는 사실은 국사책에도 있다.(거란족들은 이 번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한 것으로 본다. 그래서 요사를 보면 단군조선 40대 운운하며 위씨조선까지 연결시키고 있다. 그들로서는 당연한 입장이다)
이 위씨조선 땅에 설치한 것이 한사군인데 그 위치는 지금의 요동과 요서지역이다. 지도를 보면 지금의 압록강 위로 다시 한번 이마가 튀어나오고 그 위로 강이 많은 지역, 바로 그곳이다. 어쨌거나 한사군이 실재했던 것은 사실이다. 다만 이것은 조선의 법통을 계속 이어가는 북부여, 졸본부여, 고구려에는 전혀 영향을 미치지 못하는 조선 변방의 사건일 뿐이었고 이것조차 실제로 한나라의 영향력은 미치지 못했던 문헌상의 군현일 뿐이다.
그렇다면 대동강 유역에서 출토되는 낙랑유물은 무엇인가?
구자일씨(역사연구회 시삽. 신경정신과 의사)가 조사한 것을 기초로 설명해보자.
『한사군 영역의 대부분인 낙랑과 대방지역을 백제가 차지했다. 이 땅을 놓고 초기 백제와 고구려가 싸움을 벌인다. 그러다보니 중국측 기록에 고구려왕과 백제왕을 낙랑태수, 낙랑왕, 대방왕으로 봉하는 장면이 숱하게 나온다.
그렇다면 고구려와 백제가 대동강 유역을 놓고 싸움을 벌였다? 그것도 아니다. 백제땅 낙랑과 대방은 요서에 있다. 요동을 고구려가 차지하는 백제 중기에 와서야 백제는 대동강 이남으로 밀리는데 요서 경영은 국사책에도 있다.
그런데 한반도 한 가운데인 대동강이 한사군 낙랑이라는 것은 문헌을 따져서 이치에 맞지 않는다. 따라서 지금의 대동강 영역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백제초기와 중기”의 것이다. 도대체 전라도 땅에는 아무리 살펴봐야 없는 백제왕들의 무덤이 바로 우리가 “낙랑군”의 것으로 알고있는 그것들이다.
무덤이 중국식인 것은 당연하다. 백제는 영토가 중국(요서, 산동, 강남)과 한반도, 일본열도에 모두 있었다. 양식이 그 당시 중국 영토 안에 있던 것과 틀리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다.
오히려 이 점에서는 국사학계가 낙랑이라고 우기는 대동강 유역과 요서의 낙랑, 대방유역, 중국 산동지방과 일본의 동시대 유물을 비교해보면 금방 이해할 수 있다. 백제가 중국에서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선봉장이었던 점을 고려하면 이 해상제국의 양식이 가장 화려하고 중국적이라는 것이 하나도 이상할 것이 없다.
그들은 항상 신라 것을 촌스럽게 여기며 한 수 가르쳐주려고 노력했는데, 고대 설화에 나오는 백제 석공 아사달과 그 연인 아사녀의 이야기도 한 예이다. 한 마디로, 대동강유역에서 나오는 유물양식이 고구려적이지 않고 중국적이라고 해서 “낙랑군”의 것이라는 생각은 정말 사대주의적이다. 그것은 백제의 것이기에 중국풍일 뿐이다. 무령왕릉이 서역(인도)식이라고 충청도가 인도의 군현이었다고 주장할 셈인가?
그렇다면 백제의 위례성, 한성은 어디인가? 이 지역은 산동, 요서, 요동, 한반도를 죽 이어보면 금방 떠올릴 수 있다. 가장 중심적인 지역이 바로 요수(요동과 요서를 가르는)지역인데, 문헌상으로도 여기는 백제의 출발지다. 최초의 위례성은 바로 여기였다. 하지만 비류와 온조의 백제가 온조 백제로 통합되면서 도읍을 지금의 압록강부근으로 정한다.(초기 하남 위례성으로 추정) 그러다가 고구려의 위협에서 벗어날 수 있는 조금 더 안전한 지역으로 옮기는데 이곳이 평안도와 황해도로 추정되는 백제의 위례성과 한성이다.
문헌적, 지리적 증거가 그대로 있지만 지면관계로 이 내용을 모조리 적어놓지는 못한다. 다만 예성강의 상류를 “위라천”으로 부르고 거기에 “부여면”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있다. “위례성강”의 줄어든 말이 “예성강”인 셈이다. 여기에는 기록에 묘사된 각종 터(문,집터,비석)과 강줄기의 모습이 매우 흡사하다. 여기가 중기의 한성일 가능성이 높다.
한수라고 부르던 강도 엄연히 당시 기록에서 한수와 한강이 모두 나오므로 한강이 지금의 한강이라면 한수는 구분해서 써야했는데 못난 후손은 이도 못 구별했다. “한”이라는 말뜻은 크다는 뜻도 있지만 “하나된”다는 뜻도 있다. 큰 강인 한강과 구별하려고 뜻으로 옮긴다면 “대동(大同)”처럼 적당한 단어가 어디있는가?
산동, 요동과 요서를 경영하던 중기백제 시절에 정착한 도읍이 지금의 평양인 백제의 한성이다. 물론 이 한성은 장수왕 이후로 고구려의 땅이 되어버리고 백제의 흔적은 없다. 이곳이 고구려 영역이 되어버리자 백제의 유적은 더욱 보전하기 힘들게 되었다. 몇 번에 걸친 수복 노력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요동을 차지하면서 본국 백제와 요서 백제를 육로로 잇는 고리는 완전히 끊어졌다.
하지만 한수지역에 백제가 도읍했던 것은 사실이므로 백제의 주요 근거지는 충청도 전라도가 아니라 평안도와 황해도라는 이야기다. 그래야 요서를 경영했다는 기록에도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훗날 후기 백제에 와서 이 지역마저 신라에게 내주고 완전히 주저앉았다는 설명은 가능하다. 하지만 이 부분도 백제가 동북보다는 중국대륙의 양자강 유역과 일본에 더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확인하면 백제의 몰락을 확증하는 증거는 아니다. 어쨌거나 이 때부터 백제는 왜국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고구려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초기 백제는 베일 정도가 아니라 암흑에 가려있다. 왕이 몇명이었는지도 정확하지 않다. 김부식이 백제를 완전히 떨거지 취급한 탓도 있지만, 백제는 우습게도 너무 커서 왕도 많았다. 아마 근초고왕부터는 일본도 경영한 모양인데 이렇게 되니까 한반도, 요서, 산동, 중국남동부, 일본을 잇는 거대한 해상제국의 모습이다. 다른 학설로, 이미 학자들 사이에 "합의"하고 있는데, 백제가 단일왕조가 아니었다는 설도 있다. 중국땅의 왕과 일본땅의 왕, 본국의 왕이 중복되면서 문헌적으로 구분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중국 송나라에 왕을 인정(아그레망, 封)해달라고 보낸 외교문서를 보면 12왕이 나온다. 낙랑왕, 왜왕 등등등... 이렇다보니 “구심력”이 약해진다. 위로는 고구려 옆으로는 중국의 제국들, 아래로는 신라와 싸워야하는 해상제국 백제의 고민이라...
그러나 후대 장보고에서 보듯 그들은 이미 베트남과 말레이반도까지를 자기들의 영역으로 삼았다. 이른바 "담로"라는 백제의 강역은 아직도 다무리, 대수(큰물,大水)라는 지명의 흔적으로 중국 해안을 따라 말레이반도까지 살아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백제의 해상근거지인 도읍을 왜소하게 묶어묶어 “낙화암”과 “삼천궁녀”같은 헛소리나 믿고있다.
비단장수를 왕서방이라고 하는데, 이 왕씨는 어디서 왔을까? 보통 한국의 왕씨들은 조선초에 멸족되었던 것으로 알고있다. 그래서 전全씨니 옥玉씨니 하는 성들이 고려태조 왕건의 성씨를 잇는다고 믿는다. 하지만 왕씨는 여餘씨, 해解씨와 더불어 초기 백제귀족의 성씨였다. 구자일씨가 쓴 책에 보면, 동성왕 때의 남제서라는 기록에 “용양장군 낙랑태수 모유, 건무장군 성양태수 왕무, 진무장군 조선태수 장색...” 등의 관직명이 기록이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비단장수 왕서방의 전신은 배(船)타고 말(馬)장사하던 백제사람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말하자면 이 왕서방같이 우리에게 친근하면서도 어쩐지 우리 민족과는 다른 중국적인 냄새를 풍기는 열려있는 나라가 백제였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에 빠진다. 백제는 무엇인가? 고구려의 시조와 같은 핏줄에서 튀어나온, 먼 옛날 단군조선이 설 때 중국땅으로 대거 옮겨간 배달범족(호랑이족)같은 존재들인가? 아닌게 아니라 백제가 양자강 유역을 다스릴 때, 중국 문헌에는 백제를 가리켜 래이(萊夷)라고 부른다. 이들의 흩어짐도 그와 같았으니 백제가 해체되자 중국에 있던 백제땅은 그 이름조차 잃어버린다.
우리의 고민은 그래서 이유있다. 지금의 충청도 전라도 지역을 백제땅이랍시고 그 땅 출신인 대통령후보들을 “백제후보”라고 부르는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는데, 착각하지 마시라! 해체된 백제의 그 거대한 흔적을 보고있노라면 지중해의 “로마”를 떠올릴 수는 있어도 특정지역을 차별하는 꼴사나운 오늘날의 우리가 아무데나 쓰는 비유로는 적당치가 않다. 땅만으로 백제를 떠올린다면 동아시아 해변은 죄다 백제다! 백제 문화를 하나도 잇지 못하고 백제 왕의 무덤조차 중국 군현의 것으로 가르치는 우리에게 백제의 꿈이란, “Hundred Government 백제”란 짊어지기 힘든 짐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