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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감옥
현구의 병에 따른 감정유치 명령이 드디어 법원으로부터 떨어진 모양이었다. 나는 아내의 말에서 아우의 병이 전문의의 지속적인 관찰이 요구될 만큼 나빠졌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현구는 일심공판에서 징역 1년 6개월이 선고되어 고법에 항소 계류중에 있었다. 그러나 감정유치 명령 결정이 너무 늦은 감이 있어 나는 법원의 그 조치를 선의로만 해석할 수 없었다. 십 년 전 아우는 간염을 앓은 적이 있었다. 79년 그해, 1년 8개월의 형을 살고 형집행 정지로 석방된 직후였다. 눈의 흰자위에 노리끼리한 황달 증세가 나타났으나 숙영이 집에서 쉬며 가까운 개인병원의 통원치료로 쉽게 회복되었다. 아우의 허우대가 건장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허약 체질도 아니었기에 그 뒤 그는 별탈 없이 바쁘게 그의 삶을 살아왔던 셈이다. 그런데 이번 사건으로 구속된 뒤, 경찰에서 검찰로 넘어 가고부터 그는 그 알량한 그곳 식사조차 제대로 소화를 못해 늘 속이 쓰리고 기운이 없어 앉아 있기조차 힘들다고 면회자에게 호소를 했던 터였다. 첫 장마절기에 들어 날마다 비가 뿌리던 7월 초순 어느 날, 내가 대구로 내려가서 면회를 통해 아우의 얼굴을 보자, 그를 못 본 지 불과 한 달 사이에 보기가 딱할 정도로 여위었고 혈색 또한 좋지 않았다. 얼굴색이 검누렇게 찌든 데다 광대뼈가 도드라져, 다시 단식이라도 시작한 듯 영양실조증이 완연하였다. 다섯 해 전 아우가 안동교도소에 수감되어 있을 때, 교도소 당국의 양심범 가혹행위에 항의하여 일주일 동안 물만 먹고 단식을 한다기에 내가 그를 면회갔을 때가 꼭 그랬었다. 그러나 그때는 얼굴색이 창백했다는 점이 달랐다. 일거리도 없을 이 장마비에 주민들이 뭘 먹고 지낼까, 그 걱정을 하다 보면 잠들지도 않았는데 마치 꿈이나 꾸듯, 내가 석방이 되어 산동네로 막 뛰어올라가고 있잖아요. 그 말을 하며 아우는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수줍은 미소를 머금었다. 그의 표정 중에 한 특징이라고 말해야 할 그런 미소를 지을 때, 입가의 메마른 살갗이 겹주름까지 져서 서른아홉살의 한창나이인 그가 마치 늙은이 같아 보였다. 아무래도 위장이나 간장에 문제가 있다며 진찰을 받았느냐고 내가 묻자, 아우는 소화제를 타 먹고 있다며, 별로 달리 아픈 데는 없으니 곧 낫겠지요 하고 힘담 없게 대답했다. 나는 아우의 담당변호사 주영준을 만나 현구가 병이 있으니 병원 감정유치(鑑定留置)를 청구하여 종합병원에서 진찰과 치료를 받게 해달라는 부탁을 하고는 상경했었다. 그러나 내가 소련으로 떠날 때까지 그 허가는 떨어지지 않았었다.
공항을 떠나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아내는, 그저께 당일치기로 대구에 다녀왔다며, 현구의 종합검진이 진행중이더라고 말했다. 그런데 의사 말로는 병이 위가 아니라 간 쪽이며, 자기가 보기에도 그 상태가 아주 좋지 않더라는 것이다.
"복수(腹水)로 차 있는 물부터 뽑았는데, 체중이 한꺼번에 육킬로나 빠졌대요. 차마 마주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여위었어요. 검사를 받느라고 미음조차 먹지를 못하니……간병하시는 어머님이 몸져누우실까 걱정입디다. 그렇다고 애들 때문에 내가 내려가 있을 수도 없잖아요. 아무리 바쁘더라도 당신이 속히 한 번 다녀와야겠어요" 하며 손수건으로 눈을 훔치던 아내가 문득 생각했는지, "지난번 것하고 이번 힘써준 사례비로 변호사 비용 일백만원은 대구 아가씨가 냈어요"하고 말했다.
차창 밖으로 팔월 중순의 불볕 더위가 끓고 있었다. 가로수 잎이 후줄근히 늘어졌고 멀리로 보이는 아파트 단지는 증발하는 증기로 무너져내릴 듯 흐물거렸다. 그 흐물거리는 뒤쪽, 현구의 여윈 모습이 물아래 가라앉은 가랑잎이듯 얼비쳐 보였다. 아우와 나는 여덟 살의 나이 차이로 사실 속 깊은 대화는 나누어보지 못한채, 여지껏 떨어져 살아온 세월이 더 길었다. 그와 함께 생활하기는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였다. 그가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서울에서 대학을 다녔고, 그가 고등학교에 다닐 때 나는 입대 했으며, 그가 대구에서 대학에 다닐 때 나는 이미 사회인이 되어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튿날 아침, 아파트 주차장에 보름째 덮개를 쓰고 있는 자가용을 그대로 두고 나는 좌석버스 편으로 출근하였다. 자리를 비운 동안 판매실적 장부부터 점검하니, 모두 산과 바다를 찾아 빠져나갔을 지난 두 주일 동안 따분한 읽을거리가 잘 팔릴 리 없었다. 가을 출간을 목표로 진행중이던 신간 세 권의 편집 진행 현황도 살폈다. 그리고 모스크바에서 가져온, 초판이 현지 시중에 나온 지 불과 달포밖에 되지 않은 아나톨리 리바코프의 소설 《1935년과 그 이후》첫째권의 원서 번역을 서둘러 착수해야 했기에 《아르바뜨 아이들》을 번역했던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났다. 《1935년과 그 이후》는,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힘입어 소련에서 출간되자마자 곧 서방세계 여러 나라 말로 번역되어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한 리바코프 만년의 대작 《아르바뜨 아이들》의 제 2 부 첫권에 해당되는 소설이었다. 3백여 쪽 분량의 원서를 두 달 안으로 번역을 마쳐 달라는 나의 부탁에, 교수는 더위를 핑계로 난색을 표명하였다. 조급한 마음 같아서는 우리보다 한 발 앞서 이미 시관되고 있을는지도 모를 일어판을 구해 서너 토막으로 나누어 여럿에게 중역을 의뢰했으면 싶었으나 나의 출판 기본방침이 그러하지 아니했기에 제 1 부 역자와 밀고 당기는 설득전을 벌일 수밖에 없었다. 그의 꼼꼼한 번역은 믿을 만했던 것이다. 인원 아홉 명을 거느린 내가 경영하는 소규모 단행본 출판사는 그동안 팔십여 종의 책을 출판하였으나 작년 이후로는 내세울 만한 상품이 없어 현상유지가 빠듯했던 게 사실이었다. 그 점에는 영업부장의 은근한 투정도 있었듯 시류에 영합하는 청소년 취향의 감상적인 읽을거리를 출판에서 배제한 내 출판 방침에도 원인이 있었다. 그런데 리바코프의 《아르바뜨 아이들》세 권이 근래 도하 신문 외신란과 특집란을 거의 덮다시피하는 소련의 민주화 개혁정치 소개기사에 힘입어 사 개월 만에 총 9만여 권의 판매 실적을 올리고 있으므로 운영자금에 큰 도움을 받고 있었다. 마침 소련에서 국제 도서박람회가 개최되었기에 나로서는 첫 외국여행에 선뜻 따라나서게 된 것도 「소련작가동맹」산하 「소련저작권협회」와의 사무 협의와 리바코프의 면담에 주목적이 있었다. 한편, 문화의 해빙기를 맞아 재평가를 받고 있는 스탈린 치하 강제수용소의 실태를 고발한 샬라모프의 소설 《콜리마 이야기》의 원전을 입수해 오기도 하였다. 그래서 저녁시간에는 다른 러시아어과 교수를 만나 샬라모프의 소설 번역을 교섭하느라 식사와 곁들여 맥주도 마셨다. 아침에 집을 나설 때 이미 아내에게 말해 두었기에, 나는 떠난다는 전화 한 통만 집에다 걸고 밤기차를 탔다.
동대구역에 도착하니 짧은 여름밤이 지나고 역광장이 희뿌옇게 트여오고 있었다. 손가방을 든 나는 빈 택시에 올라 중년의 운전수에게 대학병원으로 가자고 말했다. 이제 대구에도 의과대학이 여러 개 생겨 대학병원이라면 어느 의과대학의 부속병원을 가리키는지 혼동이 되겠지만, 대구에 오래 터를 잡은 사람에게 대학병원은 으레히 시의 중심부 삼덕동에 있는 경북대학교 의과대학 부속 병원으로 알고 있었다.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넓게 터를 잡아 마주보고 있는 의과대학과 부속병원은 대구에서 이제 몇 남지 않은 연조 깊은 서양식 벽돌건물이었다. 동대구역에서 대학병원까지는 기본요금 거리였다.
택시에서 내리자, 미명 속에 의과대학과 부속병원 사이의 좁장한 한길이 유난히 한적하였다. 불현 듯 중학 시절이 생각났다. 중앙지 조간신문을 배달하던 때, 내 구역이 삼덕동과 동인동 일대였다. 길은 물론 주위의 풍경까지 그때와 조금도 변한 데가 없었으나 그 시절은 널찍한 큰길로 떠올랐다. 나는 사람의 자취가 없는 휑한 이 길로 새벽별을 바라보며 종종걸음을 쳤던 것이다. 의과대학에서 여섯 부, 부속병원에서 일곱 부의 신문을 구독했는데, 양쪽 수위실에 신문 열석 장을 문틈에다 밀어넣고 나면 마치 배달을 절반쯤 마친 듯, 끼고 있는 신문덩이가 가뿐했었다. 그 시절이 55년이던가. 아우가 사변동이이니 다섯 살이었으리라. 어머니가 양키 시장에서 미제 물건을 팔아 삼남매를 키웠고, 다른 피난민들도 그렇게 살았듯 우리 역시 참으로 애옥살이의 한시절이었다.
안이 훤하게 들여다보이는 낮은 벽돌담 안의 양쪽 구내는 예전 그대로 넓은 뜰에 숲이 울창하였다. 한길을 지붕으로 덮다시피한 무성한 버즘나무 가로수는 새벽이슬에 젖어 있었다. 기차를 탈 때의 취기는 가셔졌으나 숙면을 못한 탓인지 골이 패었고 피곤이 온살갗의 긴장기를 이완시켜 발걸음이 희뜩거렸다. 따지고 보면 모스크바와 서울과의 일곱 시간 시차를 극복하기에는 그 날수가 이틀이 채 되지 않기도 하였다.
병원 정문 안쪽 수위실에는 파리한 형광등 불빛 아래 제모를 쓴 수위가 고개방아를 찧으며 졸고 있었다. 그에게 현구가 입원한 병동의 위치를 물으려다 그만두고, 저만큼 육중하게 버티고 있는 일제 때 지은 우중충한 본관 건물을 향해 숲 사이로 난 포장된 길을 걸었다. 새벽의 신선한 공기가 콧속으로 스며들었다. 아우를 만날 생각으로 마음이 무거워, 골치를 무릅쓰고 담배를 피워 물었다. 한쪽 숲속 어디에서인가 깊이 가라앉은 정적을 흐뜨리며 잠을 턴 새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아내가 일러준 현구가 입원한 병동은 다른 병동과 뚝 떨어진,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뒷담장과 붙어 있는 후미진 곳이었다. 마지 못해 그를 감정유치로 옥에서 내주며 유폐된 정신병동에다 처넣어버린 느낌이었다. 단층 벽돌 병동으로 들어서자 컴컴하고 긴 통로가 나를 맞았다. 저 끝쪽 복도 뒷문의 유리창이 각진 안경같이 뽀욤하게 트여 있었다. 아우가 제 집처럼 들랑거린 옥사로 들어선 듯 으스스하였다. 다섯 걸음 정도마다 창을 낸 앞쪽은 숲이 짙은 널짱한 뜰이었고 뒷담장 쪽은 칸칸으로 나누어진 병실이었다. 칠팔십년을 견디어낸 건물이라 회칠한 천정과 벽은 그을음과 먼지에 절은 데다 시멘트 바닥도 여러 차례 땜질을 해서 누더기가 된 형편이었다. 병원 특유의 크레졸 냄새에 눅눅한 곰팡이 썩은 내음이 섞여 있었다. 뿌연 형광등이 이따금 걸려 있는 어둑신한 복도를 걸으며 나는 아우의 병실을 찾았다. 문짝에 바싹 붙어 서서 병실 홋수를 읽어야 했기에 복도를 헤매는 내 발짝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더위 때문인지 어느 병실은 문을 반쯤 열어 놓아, 안에서 통증을 호소하는 환자의 여린 신음이 새어나오기도 하였다. 그 소리가 저 깊은 지하에서 솟아오르는 절망의 하소연 같아, 나의 어두운 마음을 더 무겁게 눌렀다. 복도 벽에 붙여놓은 긴 의자에는 더러 환자의 가족이 아무것도 덮지 않고 새우잠에 들어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 중에 어머니나 동수 엄마가 있나 싶어 나는 잠든 사람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들여다보기도 하였다. 두 사람째 그렇게 눈여겨보다 아우의 병실이 특실이라 했기에 그럴 리가 없다 싶어 살피지를 않았다.
"큰에 오는구나. 어미다."
얼굴을 구별하기 힘든 침침한 회색 공간임에도 어머니는 모성 특유의 감각으로 멀리서 걸어오는 나를 알아보았다. 복도의 의자에 한쪽 무릎을 세워 꼬부장히 앉아 있는 어머니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고 쉰 목소리만 들렸다.
먼 길을 잘 다녀왔느냐는 어머니의 안부말이 있고, 왜 밖에 앉아 계시냐고 내가 물었다. 어머니는 병실 쪽을 힐끗 돌아보며, 꼴보기 싫은 자가 버티고 있어 여기서 잠시 눈을 붙였다고 대답했다. 아우가 주거제한의 감정유치 허가를 받은 미결수이기에 입원실은 간수가 지키고 있음을 알았다.
"윤구야, 어찌 뭔가 잘못 돌아가는 것 같으다. 감정유치 명령이 뭔가는 모르지만, 관할 서에서 높은 양반이 와서 입원비와 치료비는 걱정을 말라더라. 나라에서 다 부담을 한다구. 거기에다 사람을 큰 쇠판에다 십자가처럼 매달아 붙여놓고 빙빙 돌리는 그런 고문 같은 종합검사도 끝난 모양인데, 담당의사는 함구만 하고…… 모두들 간경변증인가 경화증인가 그렇다지만 어쩐지……"
무엇인가 컥 목울대를 치받는지 어머니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렇다면 암이냐고 나 역시 물을 수가 없었다. 나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지금 시간 편안한 잠에 들어 있기 십상인 아우를 위해 특별한 대책도 세워 오지도 않은 형으로서 그를 서둘러 깨울 이유가 없었다.
"너 대학병원에 동기생 의사 있지?" 어머니가 물었다.
"예. 다들 서울로 올라와버렸으나 한 친구가 있어요."
고등학교 졸업반 때 나의 반만 하더라도 경북대학교 의과대학에 진학한 급우가 다섯이나 되었다. 그동안 넷은 서울로 올라와서 종합병원의 과장이 되었고 개인병원을 개업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함근조만은 스무 해째 아직 여기 병원의 입상병리과에 남아 있었다.
"설마 네 부랄친구까지 속이랴. 너가 한 번 그 친구를 만나봐야 겠다. 그런데 만약 그 입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잦아들었다. 어머니는 작은 몸을 더욱 움츠리고, 회한이 사무치는지 흑 울음을 삼켰다. 하얗게 센 앞 머리카락이 희뿌연 빛에 반사되어 잘게 떨렸다.
평안북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회천, 거기서도 오십여 리 산골에 들어앉은 사십여 호의 한재 마을에서 개척교회를 열고 있던 아버지가 종교의 자유를 찾아 직계가족만을 데리고 월남하여 서울에 정착하기는 내가 국민학교에 입학하기 전 해인 47년 가을이었다. 삼 년 뒤에 전쟁이 터지자, 당시 서울 시민 모두가 그랬듯 우리 가족도 피난을 못 갔고, 아버지는 내무서원에 연행당해 버렸다. 구이팔 서울 수복 직전, 아버지가 퇴각하는 인민군에 끌려 북행하자, 어머니는 북진하는 국군은 뒤따라 만삭의 몸으로 어린 두 자식을 달고 아버지의 길을 뒤쫓았다. 그러나 황해도 사리원을 못 미처 아버지와 함께 납치되어 끌려갔던 일행 중에 용케 탈출에 성공하여 서울로 되돌아오던 몇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경기도 연천 어름에서 박 목사를 비롯한 스무여나믄 명이 미군기의 폭격으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려주었다. 그러자 어머니는 발길을 연천으로 되돌렸고, 기어코 아버지의 죽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곳의 피난을 떠나버려 빈 집으로 남은 토방에서 유복자를 낳았으니, 바로 현구였다. 어떻게 목숨이 붙었는지 모른 채 가위눌려 남북으로 동분서주했던 그해 50년, 어머니는 젊디젊은 스물 아홉 살에 청상이 되셧던 것이다. 중공군의 참전으로 국군이 다시 밀리기까지 어머니가 겪어야 했던 수난은 훗날 당신 말로, 필설로서 어찌 다 기록할 수가 있냐고 말했었다. 엄동의 흑한이 몰아치는데 삼남매를 이끌고 물 설고 낯선 대구까지 흘러내려왔으니, 당시 국민학교 삼학년이던 내 기억에도 추위와 굶주림과, 끝없는 보행과, 발가락이 떨어져나갈 듯 아프던 그 쓰라림만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 있다. 어떤 경우에는 여자가 남자보다 강기 있다는 말처럼 불평 없이 옹골지게 따라붙던 어린 숙영이의 다부진 모습 또한 눈에 선하다.
피붙이라고는 남한땅에 남은 세 자식을 오로지 기둥삼아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홀어머의 생애를, 나는 내 나이 마흔일곱이니 이제 넉넉한 마음으로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키운 세 자식 중에 그 하나를 어쩌면 애물로 저 세상에 먼저 보내지 않을까 하는 벼랑에 선 모정을, 나는 넋 놓고 앉아 있는 당신의 주름 많은 어두운 모습에서 읽을 수 있었다. 내가 이렇게 울어서는 안 되는데, 하며 혼잣말을 하던 어머니의 눈에 먼 빛이 그 물기에만 강하게 응집되어 번쩍이고 있음을 볼 수 있었다. 세 자식을 보듬고 타관의 모진 세파를 이겨 올 동안 모질음으로 쌓아 올린 그 강인한 성채도 어느순간 저렇게 머릿돌로부터 흔들리는구나, 하고 나는 생각하였다. 아니, 당신은 한 시절, 육순을 넘긴 연세에도 아랑곳 않고 갇힌 아우를 구해 내겠다며 머리와 어깨에 띠를 두르고 「민가회」모임에도 부지런히 나다니는 열성을 보이기도 했었다. 유복자로 태어난 현구였기에 어머니는, 서로 몸뚱이는 다르지만 저 막내만은 자나깨나 니아비와 함께 내 몸 속에 있다는 버릇말처럼, 감옥이 아닌 바깥세상에서도 당신은 마음에다 현구가 들어앉은 감옥 한 칸을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현구와 내가 스물아홉 나이 차이라, 작년에 남들이 말하는 그 험한 아홉수를 서로가 그런대로 넘긴다 싶더니……" 어머니가 맞은편 창 밖을 바라보며 중언부언했다.
어머니가 셈하는 아홉수는 전래의 우리식 나이 계산법이었다. 얼마나 속울음을 지우셨는지 꺽 쉰 가라앉은 그 목소리에서, 열렬한 사랑이 쏟는 만큼의 반비례로 되돌아오는 그 허탈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할 말을 잃고 어머니의 시선을 붸았다. 히말라야시타의 넓게 벌린 가지와 넓은 뜰 건너, 뚝 떨어져 있는 앞 병동의 이층 벽돌 건물 사이로, 조각져 보이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새들의 울음이 빛살처럼 뿌려지고 있는 새벽 하늘이 맑게 트여오고 있었다. 이 병동 안에 한 생명의 불꽃이 지금 사그러지고 있을 때도 저 땅 끝에서부터 해는 늘 그렇게 무심히 떠오르고 있었다.
나는 가방을 들고 말없이 일어났다. 병실문에는 「관계자 외 일체 출입금지」라는 큼지막한 팻말이 걸려 있었다. 나는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침대 발치에다 걸어놓은 「절대 안정」이란 또 다른 팻말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현구는 링게르 주사기를 팔에 꽂은 채 눈을 감고 있었다. 병실 중앙에는 탁자를 가운데 두고 비닐로 씌운 철제 응접의자 세 개가 놓여 있었다. 한쪽 벽에 켜져 있는 반 투명의 전등 불빛이 창으로 밀려드는 빛살에 사위어가고 있었다.
팔걸이를 베게삼아 긴 의자에 신을 신고 잠을 자던 제복 입은 젊은이가 잠귀도 밝게 벌떡 일어나 앉으며, 돌연한 침입자를 쏘아 보았다. 양쪽 허리에 수갑과 방망이를 차고 있었다.
"현구 형 됩니다." 나는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가방을 빈 의자에 놓고 나는 침대로 다가갔다. 아우는 팔뚝에 꽂힌 주사바늘에 묶여 있기라도 하둣 갈고리같이 마른 두 손을 홑이불밖에 얌전하게 포개어 얹고, 잠에 들어 있었다. 땀으로 찌든 긴 머리카락 아래 겅성드뭇이 자란 수염 자리가 안스러웠다. 더 이상 깎았다간 뼈를 다칠 듯, 얼굴은 나무로 빚은 모습이었다. 환자복 사이로 보이는 빚장뼈도 집어낼 만큼 돌기져 있었다. 육질이 제거된 그의 흉샹이 나에게는 탈속한 경건함까지 느끼게 하였다. 대구 중앙지 장관동 한 칸 셋방에 살며 현구와 내가 집과 가까운 「제일교회」에 다닐 때, 아우는 초등반 나는 고등반이었다. 부끄럼 잘 타는 현구가 어떻게 기도할 때만은 우리 어머니 우리 어머니 하며 잘도 읊는지 신통하더라는 초등반 교사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릴 적에 그는 나이답잖게 어머니를 끔찍히 섬겼고, 그래서 위로 우리 남매보다 당신의 사랑을 더 도탑게 받았었다. 땅거미가 낄 때쯤 일 마치고 돌아오는 어머니와 함께 저녁밥을 먹겠다며 한 길로 나가 장맞이도 곧잘 하던 그였다. 우리 막내 효자 엄마하고 밥 먹겠다고 여지껏 기다렸다 안 그러나, 하며 어머니는 현구의 손을 잡고 대문을 들어서곤 했었다. 잠에 든 아우의 평화로운 얼굴을 보자 마음이 착한 자는 나이가 들어도 그 얼굴에 소년티의 순진성이 남아 있듯, 어릴 적 그의 모습을 떠올려주었다.
잠에 든 현구를 깨울 수가 없어 나는 빈 의자에 앉았다. 어느사이 어머니가 병실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상고머리에 얼굴이 각진 젊은이가 자기 소개를 했다. 간수 최는 방명록에다 내 이름·주소·전화번호를 기록하고는, 이것저것 여러 말을 물었으나 심심 풀이의 질문이라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병실 문이 소리 없이 열리고 머리수건을 쓴 아낙네가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조심스럽게 들어왔다. 소매를 걷은 군복 윗도리에 왜바지 차림이었다.
"상주댁이구려. 일찍이도 나왔네." 어머니가 반갑게 그네를 맞았다.
"일곱시 반부터 일을 시작하지요." 볕에 까맣게 그을린 상주댁이 죄지은 사람처럼 조그맣게 대답했다.
상주댁은 뒷산 약수터에서 갓 받아온 생수라며 물통을 한 켠에 놓았다. 그네는 잠에 든 현구의 모습을 멀찌감치에서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의자에 앉았다. 권사님, 기도를 하세요 하고 상주댁이 말하고는 두 손을 여며 잡았다. 어머니가 그네와 머리를 마주 대어, 현구를 주님께서 살려달라는 간곡한 기도를 하였다. 상주댁은 십분 정도 병실에 머물다 발소리 죽여 돌아갔다. 그동안 간수 최는 밖으로 나가 세수를 하고 왔다.
"너도 현구 공판 때 상주댁을 봤을걸. 상주댁이 사글세 든 집을 철거반원들이 허물 때 그 사단이 벌어졌으니, 저 여편네가 저렇게 정성으로 마음을 쓰는구나. 세 자식과 거동 불편한 시어머니를 거느리고 살다 보니 신새벽에 공사장에 나가지. 삼층 사층까지 엇성한 철다리를 밟고 모래와 벽돌을 져다 올려." 어머니가 물통을 현구가 누운 침대 밑에다 놓으며 말했다.
현구가 잠에서 깨어나기는 삽십 분쯤 뒤로, 복도에 발짝 소리가 분주하게 들릴 때였다.
"형님, 언제 귀국했어요?"
아우가 말문을 떼곤 나즉나즉 여러 말을 물어왔다. 20세기의 마지막 대결단으로 일컬어지는 소련의 민주화 개혁 추진, 70년 소련을 장악해온 볼셰비키 보수파에 의해 실강이 우려된다고 보도되는 고르바초프의 현지 지지도, 무너져버린 동·서독의 장벽과 동구 여러 나라의 탈이념 조치에 따른 소련인의 반응 따위였다. 탁자 위의 전화기와 성경책 옆에 신문이 여러 장 있어 그가 그런 기사를 읽었을 텐데도 나의 직접 목격담이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니면 진보도 보수도 아닌 회색 중산층 지식인의 반응이 궁금했는지도 몰랐다. 이념을 절애가치로 앞세운 패권주의를 청산하고 소련은 지금 탈사회주의화로 과감한 수정을 하고 있으며 고르바초프의 인기는 대단하더라고 대답하기에는 나 자신도 그 단정이 성급할 수 있었다. 또한, 그런 쪽 문제를 남한의 현실과 결부하여 스무 해 가까이 실천운동으로써 그 해답을 얻겠다고 고군분투해 온 아우에게 주마간산격이었던 내 관찰이 섣부른 판단으로 들릴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주의가 인민의 삶을 좀더 향상시키기 위해 지금껏 굳혀온 교조주의적 체질을 바꾸고 있는 갈등의 현장을 보았다고, 애매모호한 표현으로 몽똥그려 대답했다. 모든 생필품의 부족 현상으로 모스크바는 물론 레닌그라드도 백화점이든 상점이든 장사진을 이루어 줄을 선 구매자의 긴 행렬 따위는 언급하고 싶지가 않았다. 신문에도 이미 보도된 그런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치의 일방통행식 관료주의 체질, 모든 생산 공장의 국영화에 따른 경쟁 없는 사회가 안고 있는 제품의 질적 침체를 비롯한, 노동자의 타성적인 근무 태도를 장황한 설명으로 보충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우는, 절대 수정될 것 같지 않던 마르크스 경제이론도 그렇게 자체점검을 통해 현실에 맞게 개선되는데 어찌 우리나라만이 어느 쪽도 기득권을 빼앗길세라 한 치의 양보 조차 없는지 모르겠다며 힘없이 머리를 저었다. 링게르 속에 진통제가 주입되어 있는지, 간은 자각증상이 없어서 그런지, 아우는 말을 하면서도 고통은 느끼지 않아 보였고, 목소리는 기가 빠졌으나 표정이 밟았다.
" 모스크바 교외에 작가동맹 주택단지가 있더군. 고리키가 레닌에게 부탁하여 일천구백삼십년에 건설한 문학가들의 이상촌이지. 소련펜클럽 회장인 노작가 리바코프가 거기에 살아. 별장식이라 뜰은 넓은데, 낡은 목조 가옥에는 방이 딱 두 개밖에 없어. 하나는 침실이요 하나는 집필실이라, 거실 겸 식당에서 대화를 나누었어. 소련 인민의 가정이 다 그렇겠지만 노대가의 집도 검소함이 한눈에 띄더라. 한국에서도 선생님 소설이 많이 읽힌다고 말하니 기뻐하더군. 일흔일곱의 노익장인데, 그 목소리가 힘이 있고 안광이 빛나. 그러니 만년에도 《아르바뜨 아이들》과 같은 대작을 써낼 수 있겠지. 그는 다른 지식인과 마찬가지로 고르바초프를 열렬히 지지하더군. 고르바초프는 전인민에게 제한 없는 여행의 자유와 말할 권리를 주었고, 예술가들에게도 무한대의 표현의 자유를 주었다면서 말야. 사실 《아르바뜨 아이들》이 스탈린 시대의 일인 독재 공포정치를 고발한 내용이니 그럴 수밖에 없겠지. 그의 말로는, 스탈린 독재치하 스물두 해 동안 지식인을 포함해서 칠천만 명 이나 처형되고 유배되었다더군. 그래도 우리는 살아 남았다, 아랍민족과 몽고로부터 침략당했을 때 이삼백 년의 노예생활을 묵묵히 견디어왔듯, 슬라브 민족은 참고 견디는 데는 어느 민족보다 강하다, 하며 열변을 토했어. 그분이 왜 그런 말을 했냐 하면, 지금 소련에서 벌어지고 있는 페레스트로이카는 결국 슬라브인의 그런 인내심이 수십 년 만에 피워낸 꽃이란 뜻이지."
귀국을 갓 한 탓인지 여외여행담을 늘어놓다 보니 나의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형님이 넣어준 《아르바뜨 아이들》세 권을 읽었죠. 러시아 문학의 스케일는 역시 다릅디다. 그런데 그 책에 실린 리바코프의 약력을 보았더니, 스탈린 시대 대학 재학중 삼 년간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진 적은 있으나 그 뒤부터는 체제순응주의자가 되어 스탈린이 죽기 직전 〈스탈린상〉도 수상했더군요. 그로부터 삼십여년 동안 이렇다 할 작품도 쓰지 않고 자기보호 본능으로서의 침묵을 일관하다가, 표현의 자유 시대가 도래하자 드디어 필을 들어 스탈린을 공격한다! 이게 뭡니까. 만약 그가 칠 년 전쯤 칠십 세로 사망했다면 어찌 되었을까요?"
현구가 리바코프를 신랄하게 공격했다. 내가 그렇게 말한다면 부르조아 지식인의 탁상공론이란 비난께나 받겠으나, 아우로서는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충분하였다.
"그래서 작가는 시대를 타고난다는 말도 있지."
궁색해진 내 답변을 묵살하며, 현구가 화제를 바꾸었다.
"사회주의 이념은 도덕적 정의에 기초를 두잖았습니까. 레닌이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하자 재물의 공정한 분배를 원칙으로 하여 계급평등부터 실현했잖아요. 고프바초프는 정치 경제의 다원주의를도입해 그 탄탄한 기반 위에 인민의 삶의 질을 높여보자고 글라스 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를 실천하고 있는 줄 아는데요?"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한 일천구백십칠년 시점에서는 사회주의 경제이론이 맞아떨어졌으나, 이제는 그 한계에 봉착한 셈이지. 국영 백화점에 그 흔한 전자계산기 없이 아직도 수판으로 셈을 하고 있으니깐."
"거기 사람들의 생활은 어때요?"
"자본주의 관점에서 본다면 대체로 가난해. 백화점에 있는 상품의 질은 우리나라 육십년대 중반쯤 될까. 그러나 사회복지 정책이 잘 되어 있고 기본적인 의식주 걱정은 없는 것 같애. 그 사회의 장점이라면, 너 말처럼 윤리적 도덕적 측면에서 아주 청결하다는 점일 게야. 그쪽 사람들은 정직하고 순박할 수밖에 없지. 당 고위층은 모르지만, 부정부패가 없고 그 사회에서는 거짓말이 안 통하는 세상이니깐."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어요. 소련이 서구 선진국보다 생활수준 면에서는 이삼십 년 뒤떨어졌다 하더라도, 삶의 질에서는 평균화가 이루어져 있잖아요. 설령 더디더라도 그 평균화된 질을 한 단계 높이는 일이 중요하지 우리나라처럼 소수 독점 자본가와 권력자와, 거기에 기생하는 소수 유한계층의 질만 높이면 뭘 합니까. 우리 현실을 보세요. 가진 자는 너무 가져 불로소득으로 호의호식하고 빈민층은 지하실 한칸 셋방에서 일고 여덟 명이 복작대며 살고 있으니, 지옥과 천당이 따로 없지요. 제가 말하는 것은 사회주의를 이 땅에 꼭 실현하자는 강변론이 아닙니다. 사회주의 국가가 정치적으로는 독재요, 문화적으로는 획일적이요, 경제적으로는 낙후성을 면치 못하는 단점을 저도 인정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을 직시할 때, 당장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이 악순환만은 화급하게 시정되어야 한다는 거지요. 우리 사회도 이제 어느 정도 성장의 초입에 들어갔으니 삼백오십만 정도로 추산되는 소외계층인 빈민층에다 따뜻한 눈길을 돌려야 해요. 이 시점에서는 성장이나 수출이 더 급한 게 아니라 분배의 정의부터 제 궤도에 올려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면 사회주의와 자본주의가 만나는 꼭지점이 있을 겝니다……" 현구의 목소리가 헐떡거림으로 변해 갔다.
"애야, 그만하거라. 흥분하면 몸에 좋지 않으니 그만큼 해둬. 네가 하는 그런 말도 이천 년 전의 말씀이신 성경에 이미 다 기록되어 있지 않더냐. 부자가 천국에 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힘들다고 했으니, 주님이 먼저 다 알고 계신다." 듣고만 있던 어머니가 말참견을 했다.
나도 그 문제만은 더 하고 싶은 말이 없었다. 현실 속으로 들어가 몸소 싸우는 자 앞에 나는 방관자밖에 되지 못했던 것이다.
"좋은 세월입니다. 형님의 국외 첫 나들이로 사회주의 종주국부터 다녀오게 되었으니……"현구가 지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현구는 자신의 일로 하여 형인 내가 당한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감옥에 있지 않은 도피 시절에는 나 역시 당국으로부터 늘 감시의 대상이었고, 어디론가 잡혀가 아우의 거처를 대라며 폭행을 당한 적도 두 번 있었다.
현구가 대구에서 대학에 입학하여 서클 활둥으로 처음 나선 일이 「기독교학생연맹」이었다. 이는 아버지가 목사였으므로 우리 삼남매가 유아세례를 받고 어릴적부터 교회에 나가게 된 이력이 먼 인연이라 할 수 있었다. 그는 곧 기독교의 현실 대응 논리를 「민중적 해방신학」쪽에서 그 답을 얻었고, 「억압과 가난」으로부터 민중의 해방을 위해 반정부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내성적이며 착하기만 하던 그가 그렇게 변할 줄은 어머니를 비롯한 주위의 누구도 짐작조차 못했다. 궤변론자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 내성적이기 때문에 그렇게 변할 수 있다는, 뒤집어 생각해 보기에 일리가 있는 변화였다. 아우는 몇차례 수배를 당하고 구류를 산 뒤에, 삼학년에 강제징집당해 입대하였다. 최전방 특수부대에서 냉대를 톡톡히 당한 끝에 만기제대를 하고, 일년 뒤였다. 졸업을 앞둔 76년, 아우는 서슬 푸른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수배되자 도피생활을 하던 중, 이듬해 경산의 건축공사 현장에서 날품을 팔다가 체포되었다. 징역 2년 자격정지 4년을 선고받고 복역을 시작한 지 1년 8개월 만에 그는 형집행정지로 석방되었다. 그 뒤부터 그는 대구의 노동운동판에 뛰어들었다. 졸업은 포기한 채 학력을 낮추어 대구 비산동에 있는 염색공단의 「동영염직」양성공을 출발로, 그는 식구에게 거주지도 알리지 않고 노동자로, 노동야학교사로, 빈민운동가로, 대구의 검단공단·제 3공단·비산동 염색공단·성서공단·월배공단에서 동가식 서가숙하였다. 나 역시 80년 그해 해직기자가 되어 삼 년 뒤 출판사를 시작할 때까지 생계에 타격이 컸으나, 그 당시는 물론 그 뒤에도 현구의 소재를 파악하려는 수사기관의 출입이 나의 서울집가 출판사로 간단없이 이어졌다. 박현구가 있는 곳에는 반드시 쟁의와 파업과 생계대책의 빈민 시위가 뒤따른다는 출입 형사의 말이었다. 그동안 그는 두 차례 옥고를 겪었고, 그가 활동할 수 없을 때만은 우리집에도 수사기관의 출입이 끊어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투옥된 것이 금년 봄 대구 비산동 달동네 재개발지 철거과정에서, 철거반원과 주민 사이에 그가 뛰어든 결과였다. 그는 아내와 함께 그 달동네에서 빈민운동에 헌신하고 있었는데, 철거반원 한 명의 중상과 또 한 명의 경상에 따른 피해자 고발로 구속되었던 것이다. 그를 당국에서는 대구 지방 대표적인 문제적 인물로 파악하고 있었으나, 나에게는 현구의 폭행이 사실로 믿어지지 않았다. 내가 보아온 아우는 외유내강의 한 전형으로, 누구에게나 늘 겸손하였다. 그는 나에게 빈민운동의 마음가짐을 이야기하며 봉사·헌신·사랑을 늘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철거반원의 쇠지레를 빼앗아 들고 그들에게 휘둘렀다는 사실은 증인도 인정했고, 법정에서 아우도 시인했던 터였다.
작년 6월 중순이던가, 자기 체면도 조금은 살려 달라는 숙영이의 두 차례에 걸친 장거리 전화질에 못 이겨, 나는 누이 막내 시동생 결혼식에 참석차 대구로 내려간 적이 있었다. 현구로 하여 김서방까지 자주 경찰서로 불려 다니는 누이로서 시가 쪽에 유일하게 내세울 점이라면, 오빠는 그래도 서울에서 사장 소리를 들으며 모범적 시민으로 살고 있다는 자랑이었다. 어머니와 함께 결혼식에 참석하고, 어머니의 뜻에 좇아 현구가 빈민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달성공원 뒤쪽 비산동 산동네로 나섰다. 오후 두시쯤이었다. 택시를 타자는 나의 말에 어머니는 어림없는 소리라며 한사코 버스를 고집하였다. 나는 조카 동수에게 줄 선물로 양과점에서 큰 케이크 한 통을 샀다. 버스에서 내린 비산동 산동네 입구는 개천을 복개한 한길이었다. 인도는 사람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노점 행상이 전자리를 벌이고 있었다. 싸구려 옷장수를 비롯하여 과일 장수, 풀빵 장수, 장난감 장수, 나물을 파는 아낙네, 플라스틱 가정 용품을 늘어놓은 젊은이 외에도, 온갖 잡동사니를 벌여놓은 장수들의 호객 소리에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토정비결과 손금 그림판을 펼쳐놓은 점쟁이도 있었고, 귀후비개와 이쑤시개를 파는 양다리 없는 불구자, 코흘리개를 옆에 앉혀두고 누운 채 까만 손바닥을 펴고 있는 동냥꾼도 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좋게 말한다면 활달한 생존경쟁의 현장을 보는 셈이고, 그렇지 않은 관점으로는 호구가 무엇인지 살아남기 위한 비탄의 아우성을 듣는 셈이었다. 어머니를 따라 골목길로 들어서서 소개소·약국·여인숙·미장원 간판이 붙은 가게와 상점을 지나자, 빈민촌이 시작되는 언덕길이 나섰다. 뒤에서 밀어주어야 할 리어카나 지게짐 이외 아무 차도 올라갈 수 없게 비탈이 30도는 될 듯하였다. 기왓장과 시멘트 골판을 지붕으로 덮은 집들이 주위로 촘촘하게 들어찼고, 두 사람이 비켜갈 수 있는 좁은 골목길이 옆으로 가지를 치고있었다. 그 골목길에는 쓰레기통은 물론, 작은 단지와 무엇이 들었는지 사과궤짝 같은 살림도구까지 내다 놓은 집도 있었다. 그런 좁은 골목에도 러닝셔츠와 팬츠만 입은 여윈 아이들이 맑은 웃음을 터뜨리며 싸대었고, 그늘에는 노친네들까지 나와 앉아 한담을 나누고 있었다. 거기서부터 나는 빈민들의 생활을 후각으로 먼저 느꼈다. 수채 내음도 섞여 있고, 지린내도 섞여 있고, 털을 태우는 노린내도 섞여 있는 듯한, 그런 모든 냄새가 함께 버무려진 역한 내음이 초 여름의 후텁지근한 공기 속에 은은하게 녹아 있었던 것이다. 초년병 사회부 기자시절 나는 상계동 난민촌이며, 사당동 산동네에도 취재를 다녔더랬는데, 강남의 중산층 아파트에 옮겨 살게 된 지 오륙 년 사이에 까맣게 잊어온, 이제 낯이 선 철저히 소외된 지역 이었다. 길은 차츰 좁아지고 굽이로 휘돌았는데, 비탈이 갑자기 45도는 되게 가파라졌다. 수도관이 이 급한 비탈을 타고 올라가는지, 쓰레기와 변소의 오물은 어떻게 처리하는지, 하수물은 어디를 통해 빠져 내려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큰애야, 여기 사는 사람들의 직업을 따지면 공장 직공, 미장이, 목수는 그래도 반반한 축들이지. 막노동·행상꾼·무직자가 육할이 넘는단다. 나머지는 뭔지 아냐. 다쳤거나 몸이 아파 일을 할 수 없는 병자들이지. 성경에도 보면 그렇지 않더냐. 가난한 마을에 병자와 병신이 많이 살 듯이, 여기도 그렇게 영육의 괴로움으로 신음하는 사람들만이 모여 산단다. 그러나 주님은 언제나 그랬듯, 부자를 보지 않고 불쌍한 이 이웃들을 지켜 보고 계시지.
어머니가 무릎에다 손을 짚고 꼬부장히 한 발 두 발 내딛으며, 헉헉 내쉬는 숨길 사이로 뱉는 말이었다. 어머니는 가압장이 설치된 공동수도장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자며 걸음을 멈추었다. 수돗물을 받으려는 물통이 골목길 가장자리로 오십 미터는 좋게 늘어서 있었고 물통 임자들이 뙤약볕 아래 줄을 서서, 멀끔한 차림의 내 모습보다 손에 들린 큰 케이크 통을 탐하는 눈길로 바라보았다. 나는 눈아래 펼쳐진 빈민촌을 내려다보았다. 부스럼딱지 같은 층층의 지붕들 사이로 발좀한 구석마다 널어놓은 빨래들이 시골 국민학교 운동회의 만국기같이 걸려 있었다. 더운 볕살이 그 위로 자글 자글 끓고 있었다. 어머니가 손수건으로 땀을 닦으며 내게 말했다.
─큰애야, 새벽부터 일터 나가는 사람이 도시락 싸들고 이 골목길을 메워 걸어내려오는 것도 볼 만하지만 해질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 사람들과 밤일 나가는 사람들을 여기에 앉아 보고 있으면, 왜 그렇게 눈물이 나는지……밀가루 한 봉지나 쌀 한 봉지 사들고, 또는 연탄 서너 장 새끼에 꿰어 들고 올라오는 사람들의 그 허기진 퀭한 눈이란 배부른 사람이 이해를 못할 거다. 야근에 나가는 젊은 애들이며, 화장을 짙게 하고 술집에 나가는 처녀애들도 언덕길 허덕대며 올라오는 사람들에게는 다 비켜서서 길을 내어 준단다. 그게 여기 사람들의 인사법이지.
현구 집과 탁아소가 아직도 멀었냐고 내가 묻자, 어머니가 웃으며 대답했다. 하늘나라와 가장 가까운 곳이 이 세상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이 사는 곳이야, 하며 산마루를 올려다보았다. 그 위로 게딱지 같은 집들이 층을 이루어 다닥다닥 이어져 있었다. 어머니와 나는 물지게를 지고 땀을 흘리며 오르는 아낙네들을 비켜가며 다시 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가압장 아래쪽은 한 집 평수가 그래도 십여 평 되어 보였는데, 그 위쪽부터는 대체로 십 평 미만이다 보니 마당이래야 고작 처마 밑에 신발 벗어놓을 터밖에 없었다. 어머니 말로는, 그래도 한 가구에 일곱 자 정도 크기지만, 방이 세 개는 된다고 하였다. 두 개는 주인이 쓰고 하나는 셋방으로 내 놓거나 주인이 한 칸만 쓰고 방 두 개를 다 세로 놓고 있다는 것이다. 현구가 사는 방은 물론 월셋방이었다. 처마밑에 쪽마루가 있고, 쪽마루 한 쪽에 간이찬장과 개수통이 놓여 있었다. 그 옆이 연탄 아궁이로, 부엌이 따로 없었다. 아무도 없음을 알고 있었던지 어머니가 방문을 벌컥 열었다. 컴컴한 방안에는 낡은 서랍장 하나, 가방이 세 개, 서랍장 위에 이불이 얹혀 있었다. 그리고 앉은뱅이 책상이 고작이었다. 그 방에서 그래도 값이 될 만한 물건은 방 구석에 켜켜로 쌓인 책더미였다. 살림살이래야 리어카 하나로 실어내면 족할 분량이었다. 그나마 나머지 발쭘한 공간은 어른 셋이 누우면 꽉 찰 크기였다.
─현구네는 이렇게 산단다. 그애가 자청하여 이렇게 사는데 뭘 도와주랴. 숙영이가 텔리비전이라도 한 대 사줄까 했으나, 현구 말이 그걸 볼 시간조차 없다며 거절했단다. 가진 것이 없을수록 마음이 홀가분하다니, 그애야말로 이 세상 사람이 아니지.
어머니는 방문을 닫고, 동수 보러 빨리 가야겠다며 탁아소로 걸음을 놓았다. 탁아소는 소나무와 잡목이 듬성듬성 박혀 있는 산꼭대기에 있었다. 한때는 넝마주이들이 움집을 엮고 살다가 그들이 떠난 뒤 쓰레기장이 되었는데, 이태 전 쓰레기장을 흙으로 묻고 천막으로 시작했다는 탁아소였다. 블록으로 벽을 쌓고 시멘 골판으로 지붕을 덮은, 그래도 번듯하게 큰 건물이었다.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바깥까지 왁자하게 들렸다. 교실 두 개가 각 열 평씩, 마당이 스무 평은 되었다. 운동장은 물론, 교실도 아이들로 초만원이었다. 보모 셋이 그 아이들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자원봉사 여대생들이 교대로 동수 엄마를 도운다는 말을 들었기에 그녀들이 겠거니 여겨졌다. 아이구, 아주버님까지 오셨네 하며, 교실에서 나온 동수 엄마가 우리를 맞았다. 마당의 흙먼지 자욱한 속에 뛰놀던 아이들이 케이크 통 주위로 몰려들었다. 어머니는 방안을 기웃거리다 동수를 찾아내었다. 제 할머니 품에 안겨드는 동수에게 나는 케이크 통을 넘겼다. 동수 엄마의 말로는, 이 산동네에 살며 「동협제작소」에 나가는 견습공이 성형연마기에 왼손 손가락 두 개가 절단되어 애아버지가 산재보험 관계로 아침 일찍 나갔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혼식에도 참석을 못했다 하였다. 전국민 의료보험화가 되기 전 언제인가, 서울로 올라와 나에게 삼십만 원을 돌려달라던 끝에 현구가 하던 말이 그때 문득 생각났다.
─형님, 가난한 사람들이라고 다 선량하지만은 않습니다. 때로는 그들을 철부지 어린아이나 노망 든 노인아니 정신병자로 생각해야 합니다. 경우에 없는 생떼를 쓰고, 걸핏하면 싸우고, 거짓말도 하고, 심지어 도둑질도 하지요. 살아가는 데 너무 지쳐 마음마저 그렇게 삭막해져버린 겁니다. 그 어리광과 투정과 사나움을 탓하기에 앞서, 그의 괴로운 삶만큼 나도 그와 함께 아파하지 않으면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어머니가 살인한 자식조차 조건 없이 사랑하듯, 그런 마음을 가지지 않고는 하루도 그들을 벗으로 여겨 여기에서 배겨내지를 못하지요. 그러니 처음은 봉사한다는 정신에서 출발하여, 희생의 보람을 깨우치다가, 마지막으로는 사랑의 실천뿐이라는 종된 자로서의 겸손으로, 자존심 따위는 잊어버려야 해요. 안사람한테도 내가 늘 강조하는 말입니다. 조금 다른 이야기지만 며칠 전, 선생님이 무조건 살려달라며 골수암으로 죽어가는 소년을 엎고 달려온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와 함께 이틀 동안 소년을 엎고 병원을 여덟 군데나 뛰었습니다. 한결같게 입원 보증금이 없다고 퇴짜를 놓더군요. 이틀째 저녁 무렵, 소년은 끝내 내 등판에서 숨을 거두었지요. 막막한 분노로 그 엄마와 나는 큰길에 주저앉아 목놓아 울었습니다. 이번에도 그런 처지에 놓인 딱한 가정이 있어서 한 아이를 꼭 살려내야겠기에 형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때의 현구 말을 떠올리며 탁아소 안을 둘러보던 내 눈에 올망 졸망한 아이들의 모습이 멀어지고, 핑글 눈물이 돌았다. 빈민촌의 탁아소, 동수 엄마도 현구만큼 힘든 일을 하고 있음이 한눈에 들어 왔던 것이다. 탁아소 건물 옆에 가건물 한 동이 있기에 열린 창문안을 들여다보니 아녀자들이 스무 명 정도 늘어앉아 한쪽에는 조화(造花)를 만들고 있었고, 한쪽에는 싸구려 목걸이 잇기에 열중하고 있었다. 빈민촌 아녀자가 일용직 막노동이나, 파출부나, 행상으로 나서지 않으면 들어앉은 부업이란 스웨터 뜨기, 봉투 붙이기, 조화 만들기, 목걸이 구슬 꿰기로 가계를 돕고 있었던 것이다.
여덟시 반이 되어서야 동수 엄마가 동수를 탁아소에 두었는지, 음식 싼 보자기를 들고 병실로 들어왔다. 눈 아래 주근깨 많은 깜조록히 탄 얼굴에 생머리는 뒤로 빗어 핀으로 질끈 묶었고, 헐렁한 무명 셔츠 윗도리는 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다. 여름이라 그런지 내가 보았을 때마다 줄기차게 입고 다니던 청바지가 아닌 무릎을 덮은 통치마 차림이었다.
동수 엄마는 제 서방에게, 잘 주무셨느냐, 밤새 어디 불편한 데는 없었느냐고 사근사근 묻고는, 내게 인사삼아 말했다.
"아주버님은 노독도 안 풀리고 회사 일로 바쁘실 텐데 이렇게 와주시니 자꾸 빚만 지는 것 같군요. 고삼 엄마는 일년 동안 피가 마른다던데, 중삼에 고삼이 겹쳤으니 형님 고생이 오죽하겠어요."
동수 엄마는 그동안 서방의 옥바라지와 그네가 꾸려가고 있는 탁아소 일로 그 바쁘기가 다른 여자의 서너 배는 될 터인데, 언제 보아도 표정이 밝았고 몸놀림이 가벼웠다. 악의는 없지만 말을 덜렁덜렁 함부로 하여 어머니의 빈축을 사는 점 또한 그네의 스스럼 없는 성격에 기인하였다.
─탁아소만 해도 그렇지, 온갖 병균과 악취가 진동하는 빈민촌에 그 부모가 어디 애들 간수인들 제대로 하것냐. 밥벌이로 모두 일터에 나가면 그애들을 받아 씻기고, 먹이고, 글 가르치고, 병원에 데려가고……어디 동수 엄마가 그 일뿐이냐. 탁아소를 중심 삼아 빈민촌 부녀운동도 하고 있잖냐. 취업 상담에서부터 사글세 방값 문제까지 저렇게 발벗고 나서서 뛰니 내가 보아도 데레사든가, 그 수녀가 따로 없어. 재라고 어디 몸이 부쇠인가. 저러다 쓰러지면 어떡할는지 모르겠어.
어머니가 계수씨를 두고 작년에 서울에 와서 계실 때 내게 들려준 말이었다.
대구 노원동 제 5 공단에서 현구가 노동야학을 열고 있을 무렵, 계수씨는 시골의 종합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그곳 안경테를 만드는 공장 총무부에 근무하며 야학을 돕다 아우와 사귀게 되었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게 만났음인지 아우와 나이 차이가 아홉 살이나 졌다. 원형섭 목사의 주례로 노곡동 산동네 교회에서 결혼식이 있던 날이 떠올랐다. 결혼식에는 노동야학에 다니던 공원들과 빈민촌 주민이 하객으로 참석했었다. 결혼식날 당사자들의 가슴 두근거리는 기쁨이야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그날 신부의 얼굴에서 잠시도 미소가 떠나지 않던 밝은 표정이 떠올랐다. 어른들의 말로 혼례식날 신부가 웃으면 흉으로 잡힌다 했는데, 그네는 서른살을 훨씬 넘긴 나이 든 신랑을 맞으면서도 기쁨을 감추지 않았던 것이다.
젊은 간수 최가 마흔 중반의 나이 든 간수 홍과 교대를 하고, 곧 전문의와 인턴들이 뭉쳐 다니는 오전회진이 있었다. 잘 깎은 밤처럼 깔끔하게 생긴 현구의 담당의로 마흔 중반의 민 박사는 환자의 상태를 잠시 관찰하더니, 인턴에게 저희들이 쓰는 의학 전문용어를 몇 마디 주고받은 뒤, 곧 병실을 떠났다. 내가 뒤쫓아나가 민박사에게 현구의 종합검진 결과를 물었다. 민 박사는 상냥하게, 결과를 종합하여 분석중이라고만 대답했다. 동수 엄마가, 집에서 마련해 온 묽은 녹두죽을 환자에게 간식으로 먹여도 되느냐고 물었다. 민 박사는, 필요한 영야제는 물론 병원측 식단도 그렇게 짜여 있으니 무엇이든 사식은 안 된다며, 심지어 일정량의 보리차 이외 주스류도 먹여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우르르 옆 병실로 옮겨갔다. 잠시 뒤, 간호원팀이 회진을 돌 때도 담당 간호원은 민 박사의 주의를 다시 환기시켰다.
"어머니, 아침밥 잡수셔야지요. 저와 잠시 나갔다 오시죠."
내가 권했으나 어머니는 아침밥 한 끼니를 금식하는 지가 오래 되었다며 거절하였다. 병원 밖으로 나가더라도 아침 식사를 할 수 있는 음식점을 찾아야 했기에 나 역시 한 끼를 건너뛰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고등학교 동기생 함근조를 만나기 위해 임상병리실로 떠났다. 그곳은 본관과 가까운 다른 병동이었다.
"야, 박윤구 아닌가. 전화도 없이 아침부터 자네가 불쑥 웬일이야. 지방 병원에 처박혔다구 사람 아주 무시하기니. 그래, 출판사 일은 어때? 책 잘 팔려?"
근조가 나를 반갑게 맞았다. 그를 만난 지도 이 년이 넘은 것 같았다. 우리는 본관 건물에 달린 구내 휴게실로 옮겨 앉아, 그는 생강차를 나는 우유를 마시며, 동기생들의 근황을 두고 한동안 잡담을 나누었다. 티 케이로 알려진 지방의 명문고 출신이라 동기생들 중에는 정계와 재계에서 출세한 자가 많았다. 해직기자 생활을 거친 뒤 나는 대체로 재경 동기회에도 잘 나가지 않았던 터라 그들과 교우가 없었으나, 근조는 서울에 있는 출세한 동기생의 근황을 나보다 더 잘 꿰뚫고 있었다. 해직기자도 복직을 하거나 창간된 신문사에 흡수되던데 너는 조그만 출판사에 매달려 도대체 뭘 꼼지락거리고 있냐며 근조가 농말을 했다. 지난번 역시 현구의 일로 내려와 대구의 동기생 몇을 만났을 때도 그가 비슷한 말을 했던 기억이 났다. 해직기자도 곧잘 정당 쪽에 붙거나 투사가 되더라만 너는 출신이 티 케이라 투사는 글렀고 전공이 사회학이니 여당 쪽은 어떠냐고 내게 물었던 것이다. 너가 뜻만 있다면 그쪽에서 붙여줄 친구들이 많지 않느냐고 말하기도 했었다. 삶의 길이 그런 공명심의 충족에만 있지 않다고 근조에게 대답하기에는 내가 세상 물정을 너무 모르는 맹한 사람으로 취급당하기 알맞아, 나는 멋적게 웃기만 했었다.
내가 해직기자의 추레한 모양새로 그 협의회의 모임에 나다니며 농성으로 더러 외박도 할 무렵, 어머니는 아예 대구 생활을 작파하고 서울의 나의 집에서만 기거하였다. 저렇게 남다른 길을 걷는 현구를 보더라도, 피난 내려와 너희들만 믿고 살아온 이 어미를 보더라도 장자인 너만은 제발 험한 길 스스로 찾아나서지 말라는 당신의 간곡한 호소를 이틀이 멀다하며 듣고 살았다.
─내 살아 생전 통일될 그날 이 어미 등에 업고 봄철이면 진달래 지천으로 피는 고향 산천을 꼭 구경시켜주겠다고 너 대학에 들어갈 때 굳은 약속 하지 않았느냐. 어미한테는 너가 돈 많이 버는 일도, 남처럼 높은 사람 되어 낮은 사람 시기 사는 것도 원치 않는다. 너가 그저 부부 금슬 좋게 오손도손 다숩게 살며 자식 건사 잘하고 건강만 하다면야 그 이상 소원이 없다고 나는 늘 하나님께 기도한단다.
어머니는 그런 말도 했었다. 어머니가 철야기도에 금식까지 단행하며, 장자인 내가 제발 가정적인 안정을 찾게 되기를 기원드릴 때, 나는 사실 다른 어머니와 구별해야 직성이 풀리는 그 모성애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도 적잖게 겪었고, 주량이 약한 나로서 소주도 꽤나 마셨다. 제 5 공화국이 들어선 직후던가, 현구가 대구지방 노동운동 실태와 현장 사례라는 제목의 원고 묶음을 들고 나를 찾아와 출판 문제를 상의했을 때, 내가 거절한 것도 아우가 부탁한 책을 형의 출판사에서 낸다는 계면쩍은 점보다, 아우가 관계하며 원고의 편자로 되어 있는 대구지방 민주노조의 그 활동이 당시의 시국과 견줄 때 다분히 문제시될 수 있다는 기우 탓이 더 강하게 작용했었다. 그 원고는 대구지역 경제 변천 과정, 산업구조, 제조업 현황, 노동계급 실태에 절반을 할애하고, 나머지는 열악한 노동현장에서 일하는 저임금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생존권 투쟁의 기록이었다. 당국의 방해로 대부분 노동조합이 결성되지 못한 상태에서, 친목회 단위로 사용자측을 상대하여 노동자들이 공동투쟁에 임한 일지(日誌)식 사례가 공장 단위별로 분류되어 있었다. 신문사 통폐합에 따른 관제 언론화의 획책에 맞서서 내가 솔선하여 그 투쟁에 나섰다기보다, 나는 내 양심의 뜻에 좇아 해직기자의 길로 나섰던 셈이다. 그런 나의 전력으로 보아도 비록 내 출판사가 진보적인 사회과학서를 십여 종 출판하기는 했으나, 역시 그런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을 내는 출판사라야 동류항으로서의 성격이 부각되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나로서는 현구에게 출판사를 천거할 입장이 아니었다. 나는 당시의 경색된 시국 전반을 들먹이며 아우에게 출판을 보류하라고 강력하게 권고했었다. 그러자 아우는 어느 쪽으로도 자기의 마음을 보이지 않고, 바쁜 형님 시간만 빼앗았다며 예의 그 수줍어하는 미소를 보이고는 원고를 찾아갔었다. 그 원고는 석 달 만에 책이 되어 나왔고, 보란 듯이 나에게도 한권이 우송되었다. 역시 나의 예상대로 그 책은 당국으로부 터 압수의 수난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아우는 물론, 출판사 대표와 편집 책임자가 보름 동안 구류를 살고 나왔던 것이다.
"윤구야, 너 이진서 소식 들었냐? 건설업 하는 똥똥한 친구 말야. 진서가 죽었어. 과로로 인한 심장마비야." 근조가 말했다.
이진서는 고등학교 삼학년 때 급우였다. 나 역시 그가 그렇게 쉬 죽으리라고는 생각 밖이었다. 문들 60년 그해 2월 28일이 떠올랐다. 당국이 고교생들의 민주당 선거강연회에 참석을 우려하여 학교측에다 일요일 등교를 종용하였다. 그 발상법조차 우스꽝스러운, 영화 관람이 미끼였다. 그러자 우리들은 일요 등교에 항의하여 고등학교로서는 전국 처음으로 가두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오후 1시 5분, 삼학년이 주동이 되어 수백 명이 교문을 빠져나와 어깨를 겯고 반월당 큰길로 내달았다. 학생들의 인권을 옹호하라! 민주주의를 소생시켜라! 우리는 학원에 개입하는 정치 권력에 반대한다! 우리는 비굴하지 않다! 여러 종류의 구호가 외쳐졌다. 대학 입시에 매달렸던 나는 그 시위를 촉발시킨 주동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나 역시 장기집권을 음모하는 이승만 정권의 비민주적인 작태에 의분만은 느끼고 있었다. 개체에서 공동체의 운명으로 결속되자 모두 힘이 솟았다. 우리는 계속 산발적인 구호롤 외치며 중앙통을 거쳐 도청 광장을 향해 질주하였다. 그때 나와 어깨겯었던 친구가 진서였다. 물론 근조도 동참을 했었다. 진서를 마지막 본지가 벌써 삼 년이 넘을 듯하였다. 그는 집장사답게 사십대를 들어서자 몸이 났고, 말끝마다 바빠서 미치겠다는 푸념을 했었다. 집에서는 식구들로부터 하숙생으로 내몰릴 만큼, 낮이면 현장에 붙어 살고 밤이면 그 스트레스를 푸느라 술판 앞에 앉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고 뛰니 주택경기가 좋은 시절이라 그가 짓는 다세대 연립주택은 잘 팔렸다.
─세 끼 밥 먹기는 마찬가진데 돈 몇 푼 더 벌겠다고 내가 꼭 이렇게 미친 놈 널뛰듯 허둥대야 하냐? 난 정말 속물이 다 되어 버렸어. 윤구, 우린 그 시절이 좋았잖아. 도청 앞까지 진출했을 때 말야. 그때 대구경찰서로 무더기 연행당해 꽤나 얻어터졌지. 그런데 지금은 뭐냐. 난 집장사가 되고, 넌 그래도 식자 소리 듣는 출판쟁이가 됐으니 나보다야 낫다. 사일구 혁명도 우리가 그렇게 도화선에 불을 붙여놓았는데, 길 닦는 놈은 따로 있고 세단 타고 지나가는 놈들 따로 있으니,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야. 자, 마셔. 먹는 게 남는 거 아냐.
진서가 맥주잔을 들며 떠들던 불콰한 모습이 떠올랐다. 나 역시 사일구 세대의 한 일원으로 대학 일학년 그해, 학우들과 함께 경무대 앞까지 진출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사일구의 순수한 의미는 그 뒤 계속된 군사정권에 의해 퇴색되었다. 이 땅에 참다운 민주주의의 소생을 바라며 소박한 정의감만으로 뛰쳐나갔다. 총탄에 쓰러진 185명의 영령은 수유리에 밀폐되고 말았다. 그 「미완의 혁명」을 열심히 들먹이는 우리 세대의 일부는 혁명의 주역으로 자처하며 오히러 정권에 유착되어 영달에 급급했고, 사일구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도 계속 생겨났다. 그러나 사일구가 순수하고 정직한 젊은이들의 의분만으로 사령탑의 전략 전술 없이 시작되었고 끝났기에, 참여자의 대부분은 본래의 자기 직분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사일구의 정신을 계승하려는 그 어떤 노력에도 몸 바치지 않은 채 결혼하여 가정에 안주해버림으로써 봉급쟁이 기자로 평범하게 살아간 나날이었다. 후진국의 종속적 정치 형태를 탓하며 나까지 혁명을 팔아먹기에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져, 나는 여지껏 한 번도 어느 자리에서나 사일구 세대로 자처한 적이 없었다.
사십대의 사망률이 세계 일 위라는 말 끝에 근조는 한국인의 지나친 성취 욕구, 물신숭배의 이기심, 거기에 따른 맹렬한 저돌성과 조급증을 통박하였다.
"한창 일할 나이인 사십대에 쓰러진다고 생각해 봐. 자식이 뭔지, 이제부터 시집 장가 보낼 때까지 돈이 다발로 들어가는 나이아냐. 일할 나이만 믿고 천방지축 뛰다가 진서도 그렇게 쓰러진 게야. 옛날에는 삼시 세 끼만 먹어도 족했는데, 먹고 살 만하게 되니 모두들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잘사는 놈들은 제 배 터지는 줄 모르고 돈과 땅을 혈안이 되어 긁어모으기만 하지, 또 반대쪽에 섰는 학생놈들과 노동자들 보라구. 그렇게 폭력을 앞세워 죽자 살자 나선다구 제 배 부른 자들이 나누어 먹자며 백기 들고 나서겠어. 이 정경유착의 방만한 시대에 말야. 혼란만 오구, 경제나 망치는 게지. 노동자가 파업투쟁해서 임금 쬐금 올려놓으면 정부가 그 노동 파업에 신경을 쓰는 사이 물가가 더 뛰어 덜미를 잡는 것, 그들이 그걸 왜 몰라. 지엔피 일만 달라까지만 좀 참으면 안 되나……"
논리가 서지 않은 근조의 주절거림은 끝없이 이어졌다. 그는 다시 진서의 죽음으로 말머리를 돌리더니, 고삼에 다니는 딸애가 서울의 음악대학을 목표로 피아노를 치는데 일주일에 두 번씩 비행기로 왕복하며 서울의 모 유명한 교수 밑에 두 신간씩 개인교수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 수업료가 자그만치 월 큰 것 한 장, 밑 빠진 독에 물붓기라고 오늘의 교육제도까지 마구잡이로 헐뜯었다. 상류층 속물로 주저앉아 버린 근조를 두고 사일구 세대라면 그의 말은 꼴 사나운 작태가 아닐 수 없었다. 다만 그가 남들처럼 티 케이를 앞세워 욕망의 덩어리 서울바닥에 끼어 붙지 않고 고향에 남아 있다는 점만은 신통하였다. 어쩌면 그 끼어들지 못함의 화풀이를 그렇게 입으로 찧고 있는지도 몰랐다. 들은 만큼 들어주었구나 싶어 내가 말을 꺼내었다.
"너도 알고 있지. 내 동생 말야. 현구가 여기에 입원을 했어."
근조는, 그 문제 많은 동생? 하며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언젠가 지방신문에서 법정에 선 현구를 사진으로 보았다고 그가 말했다. 아마 비산동 재개발지역의 철거민들이 몰려와 법정 소란을 벌였던 아우의 일심공판을 두고 하는 말 같았다.
"구속중인 줄 아는데, 어디가 안 좋아?"
나는 현구의 병력을 설명했다. 종합검진이 끝난 모양인데 지금의 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앞으로 병원측에서는 어떤 조치가 있을는지에 대해 알아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그렇게 해보마고 대답했다.
"점심이나 같이 하지. 내가 입원실로 찾아가마."
나는 그의 말을, 그때까지 그 결과를 알아오겠다는 뜻으로 받아 들였다.
현구의 병동으로 돌아오니 입원실 앞 복도에 다섯 명의 아낙네가 의자에 앉거나 쪼그리고 앉아 동수 엄마와 무슨 이야기인가 나누고 있었다. 모두 그 표정이 어두웠다.
"친구분 만나셨어요?"동수 엄마가 내게 물었다.
"점심시간에 이쪽에 오기로 했어요. 그때 무슨 소식이든 알아오겠지요."
"아주버님, 그럼 그 시간에 제가 여기로 전화를 하겠어요. 만약 외출을 하신담 어머님께 귀띔을 해 주세요."
동수 엄마가 내게 말하고는 입원실로 들어갔다 나오더니, 하루입이 바쁜 판에 일터는 어찌하고 이렇게 몰려오면 어떡하냐며 아낙네들과 함께 바삐 병동을 떠났다. 복도를 걸으며 아우의 병실을 돌아보던 머릿수건을 쓴 한 아낙네가, 선생님이 어서 회복되시고 풀려 나오셔야 될 텐데 하며 거친 손등으로 눈꼬리를 훔쳤다. 아낙네들은 동수 엄마가 운영하는 빈민촌 탁아소의 어머니들임에 틀림없었다. 하나같게 까맣게 그을린 얼굴이 주름살이 고랑으로 패여 있었다. 상주댁처럼 왜바지 차림에다 흙가루를 뒤발한 남자용 작업복까지 입고 있어, 공사판 일용직에 나섰음이 한눈에 짚여졌다.
내가 복도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우며 찐득하게 괴는 목덜미의 땀을 손수건으로 훔치고 있을 때, 숙영이가 저만큼에서 양산을 접으며 걸어왔다. 누이는 초급대학 재학 새절 그런대로 반반한 외모와 활달한 성정 덕인지 약학대학에 다니던 시골 출신의 김서방과 연애을 하더니, 졸업 뒤 곧 결혼을 했었다. 지금은 세 아이를 두었고, 시 외곽 아파트 단지에서 약국을 열고 있었다. 일년으로 쳐서 어머니가 서울의 내 집에서 두세 달을 보낸다면 대구에서는 주로 숙영이네 살림집에 기거하며, 현구네가 사는 비산동 산동네로 그 노구를 이끌고 마치 등산이나 하듯 반찬거리를 싸들고 도다녔다. 어머니는 내 집으로 올라와 보름쯤 계신면, 아파트 생활이 닭장 같고 감옥 같다며 푸념을 하기가 일쑤였다. 그럴 때쯤이면 어김없이 누이로부터, 서울에 웬만큼 계셨으니 어머니를 보내달라는 장거리 전화가 걸려왔다. 김서방이 약국으로 나가 대신 점포를 지킬때가 잦다 보니, 학교에서 돌아오는 외손들 밥을 챙겨 먹이랴, 잡다한 집안 살림을 맡아줄 노친네가 필요하기도 하였다. 한편, 장사로 서른 해 가까이 시장바닥에서 보낸 바지런한 「이북녀자」인 어머니로서는, 비록 타관이긴 하지만 오래 정이 들었던 대구요, 아직도 교동시장(예전의 양키시장)에는 벗들도 있었고, 늘 위태로와 보이는 막내의 생활이 마음에 걸려 서둘러 서울을 떠났다. 홀어미는 죽 쑤어먹을 처지라도 되면 맏이 집에 살아야 한다던데 내가 이 무슨 주책인고 하면서도, 출근길 내가 자가용 편에 고속터미널까지 모셔다 드릴 때는, 그 자그마한 몸집에 발걸음이 가벼웠다. 그러나 현구가 다시 구속된 뒤로는 아주 대구에 주질러 앉아버리고 마셨다. 아우의 옥바라지가 어머니의 큰 몫이었던 것이다.
"오빠, 김서방이 여기에 아는 의사가 있어 알아봤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고만 말하지 구체적인 답은 회피한대." 숙영이가 들고 있던 양산의 날개를 모두어 똑딱단추로 채우고는 말했다. 밝은 성격처럼 그 목소리에는 그늘이 없었다.
"이제 와서야 감정유치를 허가해 줄 정도니 그렇다고 봐야지. 시국사범으로 몰아붙이면 사람 목숨 하나야 짐승쯤으로 아는 세상 아니냐."
"오빠도 알지, 간 질환 말야. 일단 경화로 넘어가면 양의로서는 이료제가 없다잖아. 잘 먹고 푹 쉬고……그래도 위와 신장의 기능이 자꾸 떨어져 소화도 안 되구 소변이 시원치 않구……"
간장약은 잘 팔면서도 약사의 아내가 아는 지식이나 내가 알고 있는 상식에는 별차이가 없었다. 내가 말이 없자 숙영이가, 엄마 안에 계시지 하며 입원실로 걸음을 돌렸다. 나는 누이를 불러세웠다.
"지난번에 고마웠어."
나는 지갑에서 접은 봉투 하나를 꺼내었다.
"뭔데?"
"너가 대납한 현구 변호사 비용 말이야."
"뭘 그런 걸 다 돌려주고 그래. 우리가 어디 남이야."
숙영이가 정색을 하며 내 손을 밀쳤다. 순간적으로, 우리는 정말 남다른 동기간이구나 하는 정감이 가슴 뿌듯이 채워왔다.
현구의 보석이 결정되었을 때, 나는 소련에 나가 있었다. 내가 집에다 들여놓은 월 구십만원으로 가계를 꾸려가는 아내로서는 일백만 원을 자기 통장에서 현찰로 선뜻 찾아낼 여축금이 없었다. 출판사 경리 최양에게 어떻게 돈을 변통하려고 회사에 전화질을 하는 사이, 대구에서 누이가 일백만 원을 내어놓은 모양이었다. 그러며 올케에게 전화로, 출판사가 다들 어렵다는데 오빠가 귀국 하더라도 그 돈 걱정은 말라는 단서까지 달았었다. 그러나 그 문제의 해결이야말로 누이 몫이 아니었으므로 나는 대구로 내려오며 당좌수표 한 장을 가져왔던 것이다.
숙영이는 한사코 봉투를 받지 않겠다고 우겼다. 자기야말로 여지껏 시가와 친정을 따로 저울질해 본 적이 없으며, 시집을 가서도 그만한 돈몫은 해낸다고 말했다. 잠시의 실랑이 끝에, 나는 누이가 팔에 걸고 있는 마로 짠 손가방에다 봉투를 쑤셔넣고 병실로 돌아섰다.
정오를 조금 넘겨 위생복을 벗어버린 함근조가 왔다. 그는 내가 궁금하게 여기는 문제에는 언급을 않고, 모처럼 만났는데 괜찮은 데로 안내를 하겠다며 나를 이끌었다. 어머니는 동수 엄마가 가져온 밥과 빨리 먹지 않으면 쉬어버릴 녹두죽이 있었으므로 병실에서 숙영이와 함께 식사를 하겠다고 했기에, 나는 근조를 따라 나섰다. 건물 안에 있을 때는 눅눅하던 더위가, 볕살 아래로 나서자 금세 살갗의 땀구멍마다 물기를 자아내었다. 해는 머리맡에서 작열하고 있었다. 말복을 넘겼는데도 알아줄 만한 대구의 불볕더위였다.
"너 개 먹지?"
근조가 자가용에 나를 태우고 시동을 걸며 물었다. 내가 좋다고 대답하자, 그는 경산으로 빠지는 외곽도로로 차를 몰았다. 대구도 변두리로 계속 고층 아파트가 늘어나고 있었다. 한낮의 더위 탓도 있겠지만 이제 시내고 시 외곽이고 구별이 없는 서울에 비한다면 교통 소통이 원활하였다. 근조는 여름 한 철만의 보양이 아니라 중년 나이에 왜 개고기가 좋은지에 대해서 그 자랑을 늘어놓았다. 자기들이 안 먹는다고 우리를 야만인으로 취급하는 서양인의 얄팍한 선민의식을 성토하며, 각 민족의 고유한 음식 관습과 그 식성 이야말로 존중되어야 마땅한 기본적인 향유권이라고 주장하였다. 병원에도 사십대가 중심이 되어 「멍멍회」가 조직되어 있는데 그 먹자판은 대성황을 이루며, 자신이 그 회의 간사를 맏고 있다고 말했다.
대구와 경산의 접경지대 야산의 숲속에는 보신탕·염소탕을 전문으로 하는 대형식당이 많았다. 자가용이 넓은 주차장에 들어찼고, 옥내옥외 가릴 것 없이 넥타이를 풀어제친 우리 나이 또래의 식도락패가 땀을 흘리며 열심히 젓가락질을 하고 있었다. 갈대발을 지붕으로 얹은 평상 한 귀에 자리를 잡자, 근조는 주인과 잘아는 사이인지 「목살」세 근을 전골로 주문했다.
"내과 쪽에서 뭐라 그래?" 전골냄비에서 야채와 고기가 푹 익을 동안 내가 물었다.
"글쎄 말야, 경화가 심하다면서도 모두 쉬쉬 하대. 그게 단순한 폭행사건이 아닌 데다 재판에 계류중이라……" 근조가 꼬리를 빼다 말을 이었다. "내가 후배 한 놈을 잡고 다잡았지. 간경화라면 뻔한 병 아냐. 그렇다면 재수감은 불가하고 장기 요양조치가 필요 하잖냐고 말야. 그러자 후배 녀석이, 가족의 승낙이 있어야겠지만 수술을 권유하는 쪽으로 의견을 모으는 것 같다고 하대."
"그렇다면?" 나는 숨을 죽였다.
"켄서로 봐야지. 종양의 크기가 벌써 사 센티나 된다나 어쩌나……"
현구가 간암이라니. 발달한 현대 의학도 간암의 완치에까지는 이르지 못했고, 간암 진단을 받은 환자가 일년 이상 수명을 연장하는 경우가 흔치 않음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병원으로부터 퇴원에 따른 가정 요양을 권고받았고, 그럴 경우 서너 달이 마지막 고비였다. 아니면 수술 도중, 또는 수술 직후에 합병증으로 사망하기가 예사였다. 내 나이 또래의 사망 소식을 전화로 접할 때, 교통사고가 아니면 간 질환이 많았다. 나는 상갓집에서, 간염의 시작에서부터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여러 차례 이야기 들은 적이 있었다. 그 임상강의를 새겨듣다 보면, 한국인에게 사십대 후반에 주로 발생하는 간 질환이야말로 아닌 밤중에 불시로 달려드는 흉악범의 비수와도 같았다. 간은 자각증상이 없으므로 아무런 동통도 수반하지 않은 채 잠복하다가, 어느날 느닷없이 「급성 간경화」라는 계고장으로 날아들었다. 죽음을 전혀 예비하지 않고 열심히 사회활동을 하는 자에게 날아드는 사형 집행 예고장과 다를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내게 간 질환이야말로, 반드시 내가 죽고 너도 죽이겠다는 맹독성이 간을 비밀한 터삼아 자생력을 기르다가, 결정적인 시한에 당도하면 스스로 폭발해 버림으로써, 터밭은 물론 주위의 생생한 장기까지 일시에 파괴시켜 몸뚱이 전체를 휴지(休止)화하는 소수의 정예 결사대로 느껴졌다.
"만약에 수술을 한다면?"
내 질문에, 찬 물수건으로 땀을 닦던 근조가 무심히 대답했다.
"가능성도 많지. 물론 조기 발견일수록 성공률이 높지만, 내가 알기로 수술 후 삼사 년 버틴 사람도 있고 아주 정상인으로 더 산 사람도 있으니깐. 간은 그 무게가 일점 사 킬로나 되는 가장 큰 장기 아냐. 그러나 자생력이 강하고, 간이 삼분의 일만 기능을 해줘도 정상인과 다름 없이 활동할 수 있으니깐."
"그렇다면 현구도 수술을 받아야 할까?"
"메스를 대지 않는다면 식이요법과 휴식밖에 더 있겠어."
"수술해야 할 만큼 악화되었다는 거냐?" 쓸데없는 질문인 줄 알면서도 나는 어눌한 목소리로 자꾸 물었다. 미끄러운 나무줄기에 한사코 매달려 떨어지지 않으려고 버둥거리는 나를 보듯 하였다. 나는 땀 차인 손바닥만 연방 부비었다.
"네 동생이 재판에 계류중이라 그 점에서 선뜻 단안을 못 내리고 있는 눈치라. 사실 간 질환도 조기발견만 하면 완치가 가능하지만 병원을 찾을 때는 이미 한 발 늦은 뒤거던. 그러므로 꼭 교도소 당국을 탓할 수만도 없지. 어제까지 멀쩡한 사람이, 요즘 과로로 피곤하다며 종합검진이나 한 번 받겠다고 병원에 찾아왔다가 간경변이라는 진단을 덜컥 받게 되는 게 보통이니깐. 그러고 삼사개월, 길면 일이 년 이내 끝장을 보게 되지……"
근조의 말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몸과 마음이 촛농으로 녹아내리듯 기운이 빠졌고 주위의 사물이 내 시야에서 멀어졌다. 충분한 보양만이 장수의 지름길이란 듯 이열치열의 화식(火食)을 즐기는 식도락패의 모습도, 그들의 지껄임도 내 눈과 귀에 닿지 않았다. 사망을 남의 일로 알고 병상에 누워 수줍은 미소를 짓고 있던 현구의 마르고 찌든 선량한 얼굴만이 떠올랐다. 아니, 나는 그의 모습에서 어쩌면 이런 상태가 되기까지 전혀 무관하다고만 볼 수 없는 그의 유년시절 한 토막을 회상할 수 있었다.
우리 네 식구가 50년부터 51년에 걸쳐, 겨울의 눈보라를 가르고 동두천에서 서울을 거쳐 천안 오산으로 정처 없는 남행을 재촉할때, 숙영이와 나조차 영양실조증으로 꼬치꼬치 말라가던 처지인데, 어머니야말로 제대로 입에 들어갈 건더기가 없었다. 누이와 나는 꽁꽁 언 버려진 밭을 헤매며 서리 앉아 얼어붙은 누런 배추잎도 소중히 거두어 삭정이를 지핀 불에 테쳐 허기를 끌 때, 어머니는 밀고 내려오는 중공군의 공세에 쫓겨 다시 피난짐을 싸던 가가호호를 방문하여 아우의 애처로운 모습을 팔아 동냥죽을 구걸 하여야 했었다. 동냥젖이 아니라 죽이었고, 끼니 때에 앞서 만나 좁쌀죽마저 제대로 못 얻어먹일 때는 잦아지는 죽물을 얻어 어린 목숨을 연명시켰다. 생명력이란 모질었다. 어머니가 이십 리를 걷고 삼십 리를 걷다, 등짝에 온기가 느껴지지 않는다며 나에게 포대기를 들쳐보라고 했을 때, 그래도 꺼지지 않는 불씨로 한 생명이 거기에 아슬아슬하게 붙어 있었다. 현구는 그렇게 여린 숨줄을 이어 대구까지 무슨 혹처럼 붙어 달려올 수 있었다. 대구에 도착하여 피난민 수용소에서 겨울을 넘기고 신암동 산비탈에 거적집을 짓자, 어머니는 양키시장으로 싸돌며 양담배와 미제 비누 따위를 팔았다. 나는 피난민 천막학교에 편입했고 누이도 나와 함께 입학 하였다. 나는 방과 후면 탈지분유나 옥수수가루 한 봉지를 얻기위해 코쟁이가 운영하던 구호급식소에서 늘 줄을 서야 했었다. 헛 걸음치는 날도 있었지만 서너 시간 기다려 얻어오는 그 구호물자 한 봉지는 현구에게 요긴한 양식이었다. 아우에게 이상한 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하기는 그의 나이 세 살때였다. 그즈음에는 행상이 아니라 양키시장 골목길 모퉁이에 좌판을 펴놓고 장사를 벌이던 어머니는 일터로 나갈 때 현구를 늘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하루종일 발목을 잡아메어둘 수 없다 보니 물건을 팔 때나 잠시 다른데 눈을 돌리면 현구가 없어지고는 했었다. 아우는 어느 사이 안짱다리 걸음으로 골목길 쓰레기통을 뒤지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신생아기에 굶은 벌충이라도 하듯, 여름철이면 길바닥에 버려진 수박이나 참외 껍질을 닥치는 대로 주워 먹었다. 버린 복숭아씨에 붙은 아교 같은 속살을 뜯어 먹으려다 복숭아씨가 목구멍에 걸려 죽을 뻔했던 적도 있었다. 그러므로 현구의 몸에 나타난 헛배가 부른 증상을 이상하다고까지 말할 수 없을는지 모른다. 올챙이처럼 탱탱하게 부푼 배에 푸른 심줄이 요철처럼 도드라졌다. 어머니는 그제서야 아우를 데리고 위생병원으로 갔다. 산토닝 몇 알을 얻어왔을 뿐 달리 조처는 없었고, 유동식(流動食)으로 식사량을 줄이고 규칙적 식사를 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만 듣고 돌아왔다. 아우는 산토닝을 먹자 엄청난 양의 회충을 설사로 쏟아내었다. 밑을 닦아주니 실지렁이 같은 그 충이 까맣게 묻어 나왔다고 어머니는 말했었다. 그로부터 아우의 배는 차츰 꺼지기 시작하였다. 노랗던 얼굴에도 핏기가 돌았다. 그러나 유아기의 건강이 여든까지 간다는 말을 어느 책에서 읽었듯, 아우는 유아기의 굶주림으로 오장육부가 발육 단계부터 부실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 자명하였다.
낮술이라 무엇하지만 보신탕에는 독주로 입을 헹궈야 한다며, 근조는 오이채를 섞은 소주 한 병을 시켰다. 그는 넥타이를 느직히 풀고 끓는 탕에서 고기를 건져 갖은 양념으로 버무린 접시에다 열심히 찍어먹기 시작하였다.
"간병에는 고단백질의 충분한 공급이 급선무인데, 개고기가 바로 불포화성 고단백 덩어리 아닌가. 그런데 경화로 진행되어 간이 굳기 시작하면 육질은 소화를 못 시키는 게 또한 탈이란 말야." 근조가 말했다. 그는 목뼈 한 토막을 냄비에서 건져내어 젓가락으로 게살을 파먹듯 뼈에 붙은 부드러운 살을 이빨과 혀로 발기어 먹었다.
나는 아침밥을 걸렀는데도 입안이 썼고, 식욕이 동하지 않았다. 아직은 간에 별다른 이상이 없음을 알고 있는 내가 그 간을 더 보호하겠다고 고단백질을 밝히는 식탐이, 지금 간 질환을 앓고 있는 현구에게 죄를 짓는 마음도 들었다. 고기 몇 점을 먹고 국물을 안주로, 나로서는 낮술을 먹지 않는데도 소주를 석 잔이나 마셨다.
현구가 있는 병동으로 돌아오니 병동 현관 앞에는 뙤약볕 아래 대학생인지 공원인지 얼핏 구별이 가지 않는 여덟 명의 젊은이가 이열 종대로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들 중에는 여자도 한 명 끼여 있었다. 한 젊은이의 선창에 따라 다른 젊은이들이 후렴구호를 외쳐대었다. 구호를 외칠 때 불끈 쥔 오른손을 힘차게 앞으로 뻗었다.
"박현구 선생을 살려내라!"
"살려내라, 살려내라!"
"박현구 선생을 당장 석방하라!"
"당장 석방하라, 석방하라!"
"당국은 빈민촌 철거민 대책을 조속히 세워라!"
"조속히 세워라, 세워라!"
주위에 모여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나도 땀을 흘리며 외쳐대는 그 젊은이들을 잠시 구경하였다. 용기 있는 행동이랄까, 당돌한 행동이랄까. 현구의 나이 어린 동지들을 보며 나는 묘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일구 때의 내 모습도 저렇게 용감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복도로 들어서려 하자 전투경찰대원 세 명이 나를 막아섰다. 무전기를 든 상급자가 나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였다. 나는 주민등록증을 보이며 박현구의 형이라고 말했다. 그는 나의 통과를 허락하더니 무전기로 어디론가 연락을 취하였다. 병실 앞에도 두 명의 전투경찰대원이 지키고 있었다.
병실에는 천정에 붙은 프로펠러 같은 선풍기가 소리를 내며 돌아가고 있었다. 하사관생 같던 간수 최에 비하여 사람이 물러 보이는 나이든 간수 홍은 열려 있는 창 밖을 무료하게 내다보다 나를 맞았다. 흰 노타이에 감색 바지 차림의, 머리를 치켜 깎은 뚱뚱한 사내가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아 신문을 보다가 나에게 감사나운 눈길을 던졌다.
"누구시오?" 신문을 보던 사내가 수사관의 말투로 물었다.
"현구 형 됩니다."
내 말에 그는 잠자코 신문에다 다시 눈을 옮겼다.
어머니와 숙영이, 그리고 소매 짧은 여름용 점퍼에 이마가 벗겨진 사내는 현구가 누워 있는 침대 쪽에 몰려 있었다. 마침 이마 벗겨진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기도를 하고 있던 참이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저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저희와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다 하셨으니, 우리 형제의 이 아픔과 눈물을 씻겨주옵소서.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하셨듯, 능멸한 것은 치시고, 썩을 것은 땅 속에 묻으시고, 선하고 힘없는 사람은 새롭게 태어나게 하소서……」
성경책을 두 손에 받쳐 든 어머니가 기도 중간에 간절하게 아멘을 하소하였다.
훤한 정수리에 몇 가닥 머리카락이 푸스스하게 엉킨 낡은 점퍼 차림의 그는 원형섭 목사였다. 현구가 빈민촌 개척교회로 뛰어들게 만든 장본인으로 결혼식 때 주례를 섰던 그는, 지금도 대구 노곡동 산동네에서 교회를 열고 있었다. 아우가 대학교에 다닐 때 나는 공판정 피고석에 아우와 나란히 앉아 있던 당시 원형섭 전도사를 본 것이 그와의 첫 만남이었다. 불온유인물의 소지죄로 잡혀 들어간 기독교학생연맹 소속 대학생 셋과 원 전도사가 그 재판 결과, 2년 집행유예로 곧 석방되었을 때였다. 당시 민완기자 소리를 들으며 시건방도 떨었던 나는 다방에서 원 전노사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지금도 일요일 예배는 아내와 함께 빠지지 않지만, 나는 내가 생각해도 독실한 신자로 자부할 입장은 못된다. 그런데 그즈음에는 지금만큼도 교회에 열성을 보이지 않을 때였다. 원형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고 내가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 종류의 질문은 누가 내게 던졌을 때 그 답변이 가장 궁한, 두려운 질문이기도 하였다. 그러자 원 전도사는 별 어려움 없이 그 대답을 풀어나갔다.
─부활을 믿지 않고 어떻게 목회자의 길을 한평생 걸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장사한 지 사흘만에 살아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자 그분의 주위에 있던 여러 추종자들이 살아나신 예수님을 똑똑해 보았다고 말했지요. 그런데 제자 도마만은,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님의 그 못자국을 직접 손으로 만져보지 않은 이상 나는 그분의 부활을 못 믿겠다고 말했지요. 냉철한 이성과 과학을 앞세우는 오늘날 현대인도 다 도마와 같은 그런 질문을 마음 속에 품고 있을 것입니다. 그러자 예수님이 친히 도마 앞에 나타나, 못자국으로 피 묻은 손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지금 도마 시대에 살고 있지 않으므로 그분의 피 묻은 못자국 흉터는 직접 볼 수가 없지요…….
그런데 원 전도사의 다음 말은 그 비약이 심했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폐부를 강하게 찔렀다.
─저는 예수님의 못 박힌 그 핏자국을 가난한 자의 신음과 그들이 흘리는 눈물과 고름을 통해 지금도 늘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지상의 고통받는 자들 속에서 다시 부활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을 대속하여 내가 십자가에 달려 죽을 때의 모습이 이러하다고, 예수님은 많은 빈자들의 모습으로 지금도 부활하여 도마 앞에 보여주듯이 우리에게, 너희들이 나를 위해 할 일이 무엇이냐고 물으십니다…….
기도를 마치자 눈을 뜬 네 사람이 나를 보았다. 원목사와 나는 인사를 나누었다. 악수를 할 때 상대방의 손을 쥐지 않고 맡기는 그의 버릇은 여전하였다. 원목사는 언제 보아도 그 복장이 노동자나 지게꾼 같았다. 후줄그레한 바지에 역시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있었다.
"민박사가 보호자를 찾기에, 너가 오면 함께 가기로 했다. 그래, 친구가 뭐라 하든?" 어머니가 눈물 괸 겹주름진 눈꺼풀을 슴뻑이며 물었다.
"그 친구도 잘 알지를 못하고……나중에 말씀드리지요."
나는 현구에게 눈을 돌렸다. 복수를 뽑았다는데도 홑이불 아래 그의 배가 마른 몸만큼 꺼져 있지는 않았다. 아우가 나와 눈을 맞추며 미소를 띠었다. 선풍기가 돌아가고 있음에도 병실이 무더운 탓인지 그의 얼굴과 목에는 찐득한 땀이 번질거렸다. 나는 보조탁자에 놓인 젖은 수건으로 그의 이마와 목을 닦아주었다.
"어디 불편한 데는 없고?"
"여기로 오기 전에는 코피가 자주 났으나 그건 그쳤는데, 허리가 계속 걸려요."
"내가 좀 주물러주랴?"
"엄마가 해줬어요."
첫댓글 에효~ 너무 길어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여기까지 왕림해주셔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