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이역 같은 집을 하나 갖고 싶다 / 강인호
조용한 시골 어느 마을에 간이역 같은 집 하나 갖고 싶다. 미운 사람 고운 사람 모두 쉬어 갈 수 있는 양옆으로 늘어지는 감나무 아래 평상을 두어 잠시 여유를 부리면 누구든 햇살 가득 담은 앞마당에 발 담그고 싱그런 바람에 앞 단추 몇 개는 풀어 젖히고 바짓가랑이 둘둘 말아 올린 세상에서 제일 편한 자세로 앉아있어도 누워있어도 좋다. 가슴 가득 푸른 산이 서늘하고 파란 하늘에선 몽실몽실 구름이 동화를 쓰는 아무런 생각 없이 너도 아이처럼 웃어볼 수 있으리.
야트막한 뒷산엔 오솔길도 여러 개 열어 놓을 것이다. 갓난아이 손톱만 한 들꽃들이 구석구석 지천으로 널리고 바람에 자지러지는 풀잎들 방울방울 떨어지는 햇살에 찰랑찰랑 소리를 내면 아무런 생각 없이 너도 꽃처럼 피어나리.
아 천둥 번개 치는 날도 있겠구나! 그런 날엔 뜨듯한 아랫목에 앉아 김치도 송송 썰고 감자도 부추도 양껏 넣어 부침개를 부치면 비를 핑계 삼아 한나절, 하룻밤 더 묵어갈 수 있어 좀 좋은가? 싸릿대를 엮어서 대문을 만들고 문패를 달아둘 것이다. ‘쉬어 가세요’ ‘또 오세요’ 이런 집에서 살면 늘 기다림으로 설렐 것이고 안녕이란 말도 서럽지 않을 것이다.
-『웃는 그대』, 두엄, 2023.
감상 – 『웃는 그대』는 시와 산문을 함께 엮은 책이다. 그중에 「간이역 같은 집을 하나 갖고 싶다」는 한 편의 시 같은 산문이요, 산문 같은 시다. 책의 저자인 강인호 작가는 암 투병 끝에 주변 정리를 하라는 의사의 말을 듣는다. 상황을 가족과 공유하며 어떻게 남은 생을 의미 있게 보낼 건가 궁리 중에 처제(박구미 시인)의 뜻을 받아들여 흩어진 원고를 모으고 정리하며 마침내 책 출간에 이르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작가는 세상에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그의 책이 가족과 지인과 독자에게 선물로 남았다.
작가의 고향은 함양 백전면 동백리다. 출판을 권했던 처제도 동향인 걸 보면 동네사람끼리 연분을 맺은 거다. 시 작품 중 “오랫동안/ 당신께 스며들어/ 하나로 살아온 나는/ 바람도 비 내림도 함께하여/ 두렵지 않은 날”(「물안개」)이란 시구는 아내에게 보낸 연서로 읽힌다. “유난히 소주를 좋아하고/ 비빔밥을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는 것도/ 모두 아버지를 닮았다”(「소주를 마시며」)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자식으로서 사무침의 표현이고, “당신의 손에/ 봄이 날아들길/ 연둣빛 사랑이 피어나길”(「어머니」) 소망하는 것은 어머니에 대한 미안함과 사랑의 표현이다.
어머니, 아버지, 아내, 벗……. 사랑하는 사람을 품은 고향마을의 산과 들은 작가의 그리움과 추억의 원천으로 작용하고 있다. 이런 이유로 작가의 인생문집인 이 책은 고향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작가가 갖고 싶었다는 ‘간이역 같은 집’의 안팎 분위기도 고향 냄새가 물씬 난다. 감나무 평상에 누워 평화로이 구름 떠가는 것을 지켜보는 풍경은 참으로 그윽하다. 그런데 작가는 이 자족의 공간을 혼자 누릴 생각이 없는 듯하다. 자신의 영역에 ‘너’를 호명함으로써 관계의 확장성을 꾀한다.
작가가 꿈꾸는 공간은 세상을 벽지고 은둔하는 자연인의 오두막이 아니라 간이역이란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한결 개방적인 공간을 지향한다. 기형도 풍의 빈집, 백석 풍의 마가리와 구별되는 강인호의 간이역엔 인연 있는 사람, 삶에 지친 사람들이 다녀간다. 작가는 그 공간에서 ‘나’와 더불어 ‘너’가 아이처럼 웃고 꽃처럼 피어나길 응원한다.
작가가 그리는 집이 “기다림으로 설렐 것”이란 것은 일반적인 생각의 반경에 있다고 하더라도 그 집에서 “안녕이란 말도 서럽지 않을 것”이라고 보탠 것은 다소 낯선 기분이지만 이해가 된다. 어차피 간이역 같은 집도, 나도 당신도 이 세상에 영원히 머무는 공간도 존재도 아니다. 다만, 이 세상에 머무는 동안 ‘너’를 위해 자신이 가진 것을 기꺼이 내어주는 마음 자체가 누군가에게 선물로 남았을 거란 생각은 든다. 그런 인연에게 나직이 안녕을 말하는 것이 따스하게 스미는 느낌이다.
작가가 선물로 남겨놓은 시편 중에 「조팝나무」 한 구절을 읽어본다.
작은 틈도 외로워
모여 피는 조팝나무 꽃처럼
그렇게
나도 네게 닿고 싶었다
(이동훈)
첫댓글 시의 표현이 동화처럼 맑고 순수하고 다채롭습니다
그 속에서 간이역 같은 아늑한 공간이 떠오르고 그립네요
잘 감상했습니다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명절 연휴 잘 보내시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