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세요. 오늘은 ‘죄의 흔적을 쫓아서’(Der Schuld auf der Spur)를 주제로 스위스에서 2박 3일 동안 진행되는 심리학 심포지엄의 1일째 날입니다.
어제 저녁 6시에 인천공항을 출발한 스님은 중간 경유지인 아부다비에서 4시간을 보낸 후 새벽 2시 45분에 아부다비 공항을 출발하여 현지 시각으로 아침 7시 20분에 스위스 취리히 공항에 도착했습니다. 한국에서 스위스까지 이동하는 데에 18시간이나 걸렸습니다.
짐을 찾고 나오자 정토회 회원인 임혜지, 권버미, 곽연옥 님이 공항에 마중을 나와 있었습니다. 스님은 따뜻한 미소로 회원들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차를 타고 곧바로 공항에서 심포지엄이 열리는 바드라가츠(Bad RagARTz)로 이동했습니다. 창밖으로 스위스의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습니다. 취리히를 벗어나자 푸른 산과 맑은 호수, 그리고 고요한 마을들이 이어졌습니다. 저절로 감탄이 나오는 풍경이었습니다.
약 1시간 30분을 달려 9시 40분에 심포지엄이 열리는 행사장에 도착했습니다. 스님은 짐도 풀지 않고 심포지엄에 참석했습니다.
이 심포지엄은 스위스 바드 라가츠에서 열리는 학술 행사로, '죄'라는 주제를 문화, 역사, 경제, 법률 등 다양한 맥락에서 탐구하는 자리입니다. 작년에 스님이 독일 뮌헨을 방문했을 때 심리학자인 아네테 피셔(Annette Fischer) 님이 스님이 강연하는 곳까지 찾아와 이 심포지엄에 초대하고 싶다고 간곡하게 요청했습니다.
23일부터 25일까지 열리는 이번 행사는 국제 조각 전시회인 트리엔날레 바드라가츠(Triennale Bad RagARTz)와 연계하여 개최되었습니다. 트리엔날레 바드라가츠는 3년마다 열리는 국제 조각 전시회로, 바드라가츠 전역이 거대한 야외 갤러리로 변하는 독특한 행사입니다. 전 세계의 예술가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조각 작품을 전시하며, 도시의 공원, 거리, 광장 등 곳곳에 설치된 조각들이 방문객들에게 예술적 영감을 제공하는 것으로 유명합니다. 특히 이번 심포지엄은 트리엔날레의 주제와 맞물려 '죄'와 '책임'이라는 주제를 예술과 학문적으로 동시에 탐구하는 자리로 마련되었습니다.
심포지엄 장소에 도착하자 심리학자 아네테 피셔(Annette Fischer) 님이 개막 기조 강연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다른 청중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청중석에서 조금 떨어진 뒷자리에 앉아 임혜지 님의 통역을 통해 강연 내용을 경청했습니다.
이어서 발렌다르 신학대학 전 학장 마르쿠스 슐츠 님은 신학적, 교리적 관점에서 죄와 구원에 대해 강연했습니다. 청중들은 ‘자살이 죄가 되는가?’, ‘정말로 하나님을 믿는가?’, ‘15년 동안 교회 내 아동학대에 반대하는 활동을 했는데, 당신은 가톨릭 교회에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가’ 등 다양한 질문을 하며 활발한 토론을 이어나갔습니다. 스님은 강연 내용도 경청했지만 청중들이 어떤 질문을 하는지에 특히 관심을 기울였습니다.
이어서 바젤 대학교 명예교수이자 사회학자인 율리 메더(Ueli Mäder) 님의 강연이 진행되었습니다. 율리 메더 교수는 ‘죄 지은 사람은 없고, 사회가 잘못인가?’라는 주제를 통해 사회적 관점에서 죄의 개념을 이야기했습니다.
율리 메더 교수는 죄책감이 개인의 내면에서 형성된 후, 사회적 구조 속에서 객관화된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 사례를 통해 죄가 어떻게 드러나고 숨겨지는지를 분석했습니다.
“죄라는 것은 특정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와 그 사회에서의 인간 심리가 얽혀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죄책감이라는 개념은 종종 사회적 불평등과 억압을 은폐하고 정당화하는 데 사용됩니다. 그러므로 죄에 대한 인식은 사회 구조와 문화적 맥락 속에서 다르게 형성될 수 있습니다.”
그는 또한 사회 구조와 심리의 변증법적 이해가 어떻게 죄의 수용과 해방에 기여할 수 있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율리 메더 교수가 강조하는 죄와 사회적 불평등의 연관성은 참석자들에게 큰 인상을 남겼습니다.
발표와 토론이 점점 무르익어 가는 가운데 스님은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하기 위해 숙소로 향했습니다.
숙소에 방송 장비를 설치한 후 한국 시간으로 저녁 7시 30분, 현지 시간으로 낮 12시 30분에 금요 즉문즉설 생방송을 시작했습니다. 4천 여 명이 생방송에 접속한 가운데 스님이 인사말을 했습니다.
“저는 오늘 아침에 이곳 바드 라가츠에 도착했습니다. 바드 라가츠는 스위스의 휴양도시인데, 리히텐슈타인 가까이에 있습니다.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심리학 심포지엄에 참석하기 위해서입니다. ‘죄, 죄의식, 죄책감’ 등을 주제로 3일간 심포지엄이 열립니다. 저는 마지막 날에 참가자들과 즉문즉설 형식으로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 오늘은 참가자들의 발표와 토론, 질문 내용들을 경청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사전에 질문을 신청한 분들이 스님에게 질문을 했습니다. 네 명이 손들기 버튼을 누르고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첫 번째 질문자는 출산 중 아이를 잃게 되어 다시 아이를 갖기 위해 입양을 준비 중인데 남편과 가족이 반대한다며 어떡하면 좋을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이어서 두 번째 질문자는 아기가 계속 생겨서 남편과 정관수술에 대해 상의하는 중에 갑자기 셋째 아기가 생겨버렸다며 낙태를 해도 될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남편의 정관수술을 계획 중에 셋째 아이가 생겨버렸습니다
“저는 현재 셋째 아이를 가진 초기 임산부입니다. 첫째 아이는 네 살이고, 둘째 아이는 두 살입니다. 저는 이 두 아이만으로도 만족스럽습니다. 그래서 남편과 정관수술을 상의하고 있었는데, 셋째가 생겼습니다. 임신 소식에 사실 기쁨보다 당황스러웠습니다. 셋째를 차마 해칠 수 없어서 낳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임신하고 제가 몸이 너무 힘들어서 자꾸 부정적인 생각이 듭니다. 첫째와 둘째를 가졌을 때는 입덧약을 먹지 않았는데, 이번에는 너무 심해서 약을 먹었더니 너무 졸리고 무기력해집니다. 손가락 하나도 움직이기 귀찮을 때 아이들까지 말을 안 들으면 너무 짜증이 납니다. 현재는 임신 7주 차입니다. ‘언제 8개월을 더 품고 있고, 언제 또 다 키우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우울해집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지금 상황을 현명하게 이겨낼 수 있을까요? 그럴 수 없다면 낙태를 하는 것에 대해 스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혜안을 구합니다.”
한 명은 아이를 원하는데 갖기가 어렵고, 한 명은 아이를 원하지 않는데 생겼고, 두 명의 질문이 서로 상반되자 스님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앞에 질문자 얘기 들으셨죠? 그분은 아이를 원하는데 안 되고, 질문자는 원치 않는데 생겼습니다. 질문자가 아이를 낳아서 앞에 질문자에게 보내주면 어떨까요? 그러면 질문자도 좋고, 앞에 질문자도 좋겠죠. 앞에 질문자는 1억 원을 주고라도 아이를 갖고 싶다고 하잖아요. 그렇게 하라는 뜻이 아니라 사람의 심리에 대해 말씀드리는 겁니다. 내가 싫다면 생긴 아이도 지우고 싶어 하고, 내가 원하면 다른 곳에서 돈을 주고라도 사 오려는 것이 바로 인간의 욕망이라는 겁니다. 욕망에 사로잡히기 때문에 자기 인생이 고달파지기도 하고, 또 타인을 해치기도 하는 겁니다.
현재 낙태에 관한 우리 사회의 쟁점은 ‘태아의 생명권이 더 중요한가? 아니면 산모의 선택권이 더 중요한가?’입니다. 이 두 가지가 현재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태아의 입장과 산모의 입장이 되어서 문제를 풀어가야 하는데, 제삼자들이 서로 자기주장을 하고 있습니다. 제삼자가 나서서 낙태를 반대하거나 범죄로 규정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당사자들이 물어보면 조언하거나 견해를 말할 수는 있겠지만 그걸 주장하면 안 된다는 겁니다. 우리 사회의 한쪽에서는 여성의 권리와 자기 선택권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낙태에 찬성합니다. 다른 한쪽에서는 보수 종교인들을 중심으로 태아의 생명은 신께서 주신 것이라며 반대합니다. 이런 양극단 속에서 임신 몇 주차까지는 낙태를 가능하게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있습니다. 나라마다 다르지만 짧게는 임신 12주 차에서 길게는 24주 차까지 낙태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는 임신 14주까지는 산모의 의사에 따라 낙태를 할 수 있습니다. 권장하지는 않지만, 법적 책임을 묻지 않습니다. 임신 14주 이후에는 불법이 됩니다. 왜냐하면 그때부터 태아가 이목구비를 갖추어서 독립된 생명이 되기 시작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임신 14주 차 이후에 낙태를 하려면 산모의 생명과 건강에 위험이 있을 때만 가능합니다.
질문자는 현재 법적으로 낙태가 가능하긴 하지만, 단순히 아이가 이미 둘이라서 낙태를 하겠다는 건 부도덕한 일에 해당됩니다. 입덧이 너무 힘들다는 것도 낙태 사유가 되지는 못합니다. 만약 병원에서 태아 때문에 산모가 위험하다고 판단한다면 그때는 하셔도 됩니다. 그렇지만 임신 초기에 입덧이 좀 심하게 나타나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직 법정 기한이 남았으니 한 달 정도 더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산모의 건강에 별로 문제가 없으면 낳아서 키우는 게 가장 좋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자기 자식을 낳아서 키우는 일이 되지만, 국가적으로 보면 저출산 시기에 애국하는 일이 됩니다. 낙태를 하면 심리적으로 죄책감도 오래갑니다. 정부의 정책도 육아 비용의 대부분을 정부가 지원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데, 이런 면에서도 아이를 낳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만약 낙태를 하겠다면, 혼자 결정하지 말고 의사의 진단을 받은 후 가족들과 상의해서 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야 죄책감을 줄일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나중에 가족 간에 갈등도 생깁니다.
첫째, 산모의 건강에 특별히 문제가 없다면 낳아서 키우는 게 좋습니다. 둘째, 산모의 건강에 문제가 된다면 낙태를 선택할 수는 있지만, 다른 치료를 겸해서 건강에 문제가 없어지면 가능한 낳는 것이 좋습니다. 생기지 않는 아이를 일부러 가지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지만, 반대로 생긴 아이를 일부러 없애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저는 자연의 섭리에 따르는 게 좋다고 생각합니다.”
“네. 그런데 산모가 부정적인 생각을 계속하면 태아에게 좋지 않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이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산모가 부정적인 생각을 한다고 그 생각이 태아에게 전달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거나 화를 내면 몸에 긴장이 됩니다. 실제로 누군가를 죽여야만 죄가 아니고, ‘저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다’ 이렇게 생각만 해도 인간의 무의식 세계에서는 굉장한 심리적인 긴장이 일어납니다. 태아는 지금 내 몸의 일부이기 때문에 자궁이 긴장을 하게 되면 아기의 육체적 건강이 잘못될 위험이 있습니다. 산모가 우울증이 있든, 부정적인 생각을 하든, 부부갈등이 많아 남편을 미워하든, 어쨌든 심리가 편안하지 않고 자꾸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아기의 육체적 건강에 좋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낙태를 시키겠다’ 하는 생각이 태아에게 전달이 되어 아이가 나중에 부모를 원망한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부모가 부정적인 생각을 하게 되면 신체가 긴장하게 되고, 그 긴장이 태아의 여러 가지 신체 기능에 장애를 줄 수 있으니까 부정적인 생각을 안 하는 것이 좋다는 뜻입니다.
입덧이 심하고 몸이 자꾸 아프면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으면 됩니다. ’ 낙태를 해버리면 괜찮지 않을까’, ‘원하지 않는데 괜히 애가 생겼네’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아프면 그냥 아픈 대로 건강을 체크하고, 치료를 해나가면 좋겠어요.
그러나 태아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을 만큼 산모의 건강이 안 좋다면 낙태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때는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어차피 선택을 해야 한다면 아직은 미성숙한 아기보다는 성숙된 사람의 생명을 우선할 수밖에 없는 겁니다. 이럴 때 ‘아기를 죽이고 엄마가 살았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안 됩니다. 둘 다 죽을 수밖에 없을 때는 하나라도 사는 게 낫잖아요. 엄마가 죽으면 아기는 살 수 있다고 하면 옛날에는 엄마가 죽고 아기를 살리는 쪽으로 많이 선택을 했습니다. 그만큼 아기의 생명을 소중하게 여겼으니까요. 그러나 오늘날에는 산모의 생명을 태아보다 조금 더 우선시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니 부정적인 생각을 굳이 할 필요가 없어요. 그래도 부정적인 생각이 자꾸 든다면 그로 인해 큰 죄의식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힘드니까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아이들에게 화내고 짜증 내는 것은 아이들의 심리에 굉장히 악영향을 미칩니다. 그래서 지금 본인의 육체적 건강이 안 좋다면 빨리 약을 먹든지 치유를 해서 두 아이에게 피해가 돌아가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남편이나 어른에게 짜증을 내면 기분이 나쁜 정도이지 그게 트라우마나 상처는 되지 않아요. 그러나 어린아이들에게 짜증을 내면 그것은 아이들에게 다 상처가 됩니다. 그러니 부모로서 조금 더 유의를 하면 좋겠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네, 스님 말씀대로 태교 열심히 하면서 좋은 생각을 많이 하고, 건강한 몸을 지켜나가면서 행복한 가정을 이루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9살 아들이 ADHD가 있습니다. 원하는 게 안되면 소리를 지르거나 물건을 던지고 발길질도 합니다. 아들을 돌보는 게 너무 힘듭니다.
배우자에게 잘 맞출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대화를 마치고 나니 오후 1시 40분이 넘었습니다. 스님은 숙소 내 식당으로 가서 정토회 회원들과 함께 야외에서 점심 식사를 했습니다.
새벽에 기내식을 먹은 이후로 식사를 하지 못해 무척 배가 고팠습니다.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며 식사를 하고 2시 30분이 되어 다시 심포지엄에 참석했습니다.
오후 세션에도 ‘죄’를 주제로 다양한 강연이 열렸습니다. 먼저 ‘죄책감과 그 문화적 영향’이라는 주제로 후남 젤만(Nam Jelman) 님의 강연이 이어졌습니다.
후남 젤만 님은 한국 교민인데, 철학, 독일사, 미술사를 공부하고 헤겔의 역사철학으로 철학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95년 스위스로 이주하여 한국과 동아시아에 초점을 맞춘 저널리스트로 활동하며 한국 문화에 관한 다수의 에세이를 쓰고 강의를 해온 분입니다. 스님이 이번 심포지엄에 참석할 수 있게 가교 역할을 해주었습니다.
후남 젤만 님은 죄책감이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라, 사회와 문화의 영향 아래 형성된 복잡한 현상임을 강조했습니다. 특히 죄책감이 인간의 일상생활에서 어떻게 발생하고 그에 따라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게 되는지를 설명했습니다.
죄책감과 그 문화적 영향
“죄책감은 사람들이 사회적 규범과 개인적 신념 사이에서 갈등을 겪을 때 주로 나타납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 이상의 복잡한 문화적 현상입니다. 죄책감이 성립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 조건이 필요합니다. 첫째,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결정하는 규범적 질서입니다. 이러한 규범적 질서는 사회화 과정에서 개인에게 내면화되어야 하며, 이를 통해 사람들은 사회적 기대에 부합하는 행동을 하게 됩니다. 둘째, 인간의 행동이 규범적 질서와 어떻게 연결되는가입니다. 사람들은 규범적 질서를 기준으로 자신의 행동을 반성하고, 이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게 됩니다.
죄책감은 역사적, 문화적 맥락에서 다르게 나타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어떤 문화에서는 특정 행동이 죄로 여겨지지만,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죄책감'이라는 개념은 시간이 지나면서 발전하고 다양한 형태를 취하며 변화해 왔습니다. 구체적인 죄책감의 형태는 각 사회의 계층, 도덕적 규범, 법적 제재 시스템에 따라 다릅니다. 죄책감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이 아니며, 그 자체로 문화적 현상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의 생각, 행동, 삶의 방식에 깊은 영향을 미칩니다. 이러한 문화적 영향력은 죄책감을 다르게 이해하고 처리하는 방식을 만들어 냅니다.”
그녀는 한국과 같이 전혀 다른 종교적, 철학적 전통을 가진 사회의 사례를 들어 죄책감의 문화적 영향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유교적 전통과 불교적 가치가 혼합되어 죄책감이 독특한 형태로 발현됩니다. 한국 사회에서는 죄책감이 종종 가족과 공동체에 대한 책임감과 연결됩니다. 각 사회는 죄책감에 대해 고유한 접근 방식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방식은 사람들의 일상 생활과 가치 체계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습니다.”
죄책감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복잡하고 다층적인지를 생각할 수 있었습니다.
이어서 안드레아 타오르미나(Andrea Taormina) 님이 ‘도덕적 죄와 법적 죄’를 주제로 강연했습니다. 안드레아 타오르미나는 도덕적 죄와 법적 죄의 차이점을 심도 있게 비교하며, 특히 형사 소송에서 유죄가 어떻게 결정되는지, 그리고 이러한 결정이 가해자와 피해자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했습니다. 그는 도덕적 죄가 개인의 윤리적 신념과 가치 체계에 근거하는 반면, 법적 죄는 사회가 정한 법률에 따라 규정된다는 점을 강조했습니다.
"법적 죄는 구체적인 법적 기준에 의해 판단되며, 이러한 기준은 시대와 사회적 맥락에 따라 변화할 수 있습니다. 반면, 도덕적 죄는 개인의 양심과 사회적 도덕 관습에 의해 정의됩니다."
또한 형사 소송 과정에서 유죄 판결이 내려지는 기준과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법적, 도덕적 딜레마를 설명하며 “법과 도덕의 경계는 항상 명확하지 않습니다. 법적 결정이 항상 도덕적 결정을 따르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라고 강조했습니다. 그의 발표를 통해 법과 도덕의 복잡한 관계를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1일째 발표와 토론을 마친 후 스님은 심포지엄 참가자들과 함께 걸어서 저녁 식사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저녁 식사 장소는 도르프바드(Dorfbad)입니다.
도르프바드(Dorfbad)는 바드라가츠에 위치한 역사적인 온천목욕탕 건물로, 현재는 박물관과 전시회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공간입니다. 과거 온천으로 사용되던 이곳은 현재 예술 전시와 문화 행사를 위한 장소로 활용되고 있습니다.
스님과 참가자들은 아늑한 분위기 속에서 자유롭게 서서 또는 앉아서 대화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했습니다.
저녁 식사 중 사회자가 스님에게 자신의 딸이 직접 짠 모자를 선물했습니다.
"이렇게 정성스럽게 만들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모자가 정말 따뜻해 보입니다.“
스님은 감사의 마음을 전한 후 선물한 사람의 요청에 따라 모자를 쓰고 사진도 함께 찍어주었습니다.
잠시 후 한 청년이 스님에게 다가와 질문을 했습니다.
“일요일에 스님의 즉문즉설 강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일이 있어서 스님 강연에 참석을 못하는데 지금 질문을 좀 해도 되겠습니까?”
스님은 흔쾌히 대화에 응했습니다.
“불교에서는 죄에 대해 어떻게 설명하거나 가르치고 있습니까?”
“죄라 할 것이 본래 없습니다.”
"죄에만 국한된 것입니까? 아니면 모든 것은 다 허상이라고 보는 것입니까?“
"우리가 옷을 입을 때 입는 방식이 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입잖아요. 그것처럼 죄라는 것도 본래 정해진 것은 없습니다. 죄는 그때그때 사람들이 정한 규칙에 따라 달라집니다. 죄라는 객관적인 실체는 없고, 죄를 인식하는 우리들의 의식이 있을 뿐입니다."
"예를 들어, 바지에 주머니가 있는 것처럼 죄에도 어떤 기능이나 필요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까? 인간 사회에는 죄가 꼭 필요하지 않나요?“
"죄라는 것은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생기는 의식일 뿐입니다. 어떤 원죄나 죄의 실체는 없습니다. 그러나 죄라는 개념은 어떤 질서를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수도 있고, 반대로 사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부정적 기능을 할 수도 있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청년은 스님의 답변에 깊은 공감을 표하며 더 많은 질문을 이어갔습니다.
"스님의 일상 생활이 궁금합니다. 스님은 어떤 수행을 하시는지, 하루를 어떻게 보내시는지 알고 싶습니다."
"수행하는 방법은 종파마다 다릅니다. 어떤 곳은 명상을 주로 하고, 어떤 곳은 염불을 주로 하고, 어떤 곳은 일상 생활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저는 안거를 할 때 얼마 동안 집중적으로 명상을 하지만, 나머지 시기에는 아침과 저녁에만 명상을 하고, 주로 강연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일상적인 생활을 합니다."
"스위스의 수도원들은 점점 비어가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입니다. 한국의 절도 비슷한 상황입니까?"
"과거에는 수행을 하기 위해 출가를 하거나 특정한 형식을 취해야 했지만, 지금은 누구나 명상을 하고 싶으면 할 수 있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젊은이들이 굳이 수도원이나 절에 들어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렇군요. 아주 흥미롭습니다."
"옛날에는 수도사나 수녀가 되어야 혼자 살게 되었지만, 요즘은 수도사나 수녀가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이 혼자 살고 있습니다. 공동체 문화도 변화하고 있죠. 지금은 더 많은 사람들이 개인적인 자유를 원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침체는 개인주의의 영향이 큰 것인가요?"
“네, 그런 부분도 있고, 가족 구조의 변화도 영향을 미칩니다.”
“잘 들었습니다. 스님의 답변이 많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스님과 참석자들은 대화를 통해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깊이 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녁 식사 후, 스님과 참가자들은 다시 행사장으로 걸어서 돌아왔습니다. 돌아오는 길에 바드라가츠 곳곳에 전시된 트리엔날레 조각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도시 전체가 거대한 야외 갤러리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유명 조각가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조각 작품을 선보였으며, 곳곳에 설치된 작품들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예술적 영감도 함께 선사했습니다. 예술과 학문이 융합된 행사라는 점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스위스의 아름다운 산을 배경으로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숙소에 도착한 스님은 그제서야 짐을 풀고 내일 이어질 심포지엄의 내용을 살펴본 후 원고 교정을 보았습니다. 원고 교정을 마치고 스님은 9시가 다 되어 잠시 눈을 붙였습니다. 한국과의 시차로 인해 새벽 2시부터 정토회 합동회의에 입재법문을 해야 했습니다.
내일은 오전 9시 30분까지 입재 법문과 정리 말씀을 하고, 9시 40분부터 심포지엄 2일째 일정에 참석합니다. ‘관계로서의 죄’, ‘죄와 수치심’, ‘금융 카지노 경제의 부채와 도박’, ‘성적 상황에서의 죄책감’ 등 다양한 주제 발표와 토론을 듣고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눌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