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 잊지 말아야 할 그때 그 사람들
임시정부 초대 국무원과 임시의정원을 꾸린 독립운동가들
▲ 상하이 임시의정원 제6회 기념촬영(1919.9.17)
이른바 ‘가 정부’ 수립을 논의해 온 일군의 망명 독립운동가들이 이국 상하이 프랑스 조계지에서 ‘대한민국’을 국호로 민주 공화제 정부를 수립한 것은 1919년 4월 11일이다. 1910년 8월 29일 강제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이 사라진 지 3,147일 만에 ‘대한민국’은 삼천만 동포의 새로운 희망으로 태어난 것이었다.
이날 구성된 임시정부 각료는 모두 7명이다. 국무총리제를 택해 국무총리에 이승만, 내무총장 안창호, 외무총장 김규식, 법무총장 이시영, 재무총장 최재형, 군무총장 이동휘, 교통총장 문창범이 임시정부를 이끌어 갈 소임을 맡은 것이다.
독립신문 주필로 독립협회에서 활동했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한 죄로 복역한 뒤 미국으로 건너가 프린스턴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외교독립론자로 독립 후 초대 대통령이 되는 이승만(1875~1965, 1949 대한민국장)이나, 도산 안창호(1878~1938, 1962 대한민국장) 선생이야 모르는 이가 따로 없겠다. 그러나 나머지 각료들은 이름은 귀에 익은 듯하지만 그리 알려진 이가 아니다. (관련 글: ‘민족의 선각자’ 도산 안창호 서거, [오늘] 상해 임시정부와 4·13 총선거)
외무총장 우사 김규식(1881~1950)은 김구와 함께 좌우합작과 남북협상을 주도하며 통일 자주 국가를 지향했고 중도 노선을 추구한 정치가였다. 남북협상의 실패로 꿈을 접어야 했지만, 그는 남북 모두에서 존경받은 민족지도자였다. 1989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관련 글: 남북 모두가 존경한 독립운동가)
법무총장 이시영(1868~1953)은 이른바 ‘우당 이회영의 6형제’ 가운데 다섯째다. 막대한 가산은 물론 목숨마저 조국의 독립에 바쳐 그의 일가는 모두 10명이 독립 유공 서훈을 받아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완성한 집안이다. 1949년 건국공로훈장 대한민국장. (관련 글: 재산, 목숨 모두 걸고 항일투쟁 나선 이시영 선생, 광복 73년, 허은·이은숙 여사도 마침내 서훈받다)
재무총장 최재형(1860~1920)은 일제 강점기 연해주에서 독립군에게 군자금을 지원하고 러시아에 망명한 한인 의병을 규합해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다. 아홉 살 때 부모를 따라 러시아로 이주해 귀화한 이래 경제력과 정치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한인사회를 이끌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에서 초대 재무총장에 선임됐으나 이를 사양하고 노령을 근거로 계속 활약했다. 그는 이듬해 4월 일제가 시베리아로 쳐들어오자 한인 의병을 모아 시가전을 벌이던 중 잡혀 살해되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군무총장 이동휘(1873~1935)는 육군 참령(대한제국 때의 군계급) 출신으로 신민회 간부와 뒤에 임정 국무총리를 지낸 독립운동가다. 1915년경 러시아로 망명해 조직한 한인사회당을 1921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했다. 그는 반일 민족 독립운동의 숙원을 이루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소련 정부와 제휴한 ‘민족주의적 혁명가’였다. 1995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교통총장 문창범(1870~1934)은 일찍이 러시아로 망명해 1910년 이후 이상설·유인석 등과 항일 구국 운동을 전개하고 대한국민의회 의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임시정부에서는 재로한인사회의 대표로 교통총장에 추대됐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같은 해 5월 3일 동생 문창락에게 노령과 만주에서 활동하는 독립 운동자를 동원해 항일 무력전을 감행하도록 하고, 노령에 군관학교를 창설했다. 1990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정부 수립에 이어 입법기관도 출범시켰다. 조소앙의 제안대로 기구의 명칭은 ‘임시의정원’. 무기명 투표로 초대 임시의정원 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는 손정도, 서기에는 이광수와 백남칠이 각각 뽑혔다.
석오 이동녕(1869~1940)은 일제 강점기 신흥무관학교 소장을 지낸 독립운동가다. 1918년 조소앙·조완구·김좌진 등 민족 대표와 함께 「대한독립선언」(「무오독립선언」)에 참여했고, 임정 수립 이후 초대와 11대 의정원 의정을 지냈다. 뒤에 임정의 주석을 두 차례나 지냈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부의장 손정도(1872~1931)는 감리교 목사로 임시의정원 부의장과 의장을 지냈다. 1920년 의용단을 조직, 임시정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1922년에는 김구·여운형 등과 함께 한국노병회를 결성했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 추서.
이광수(1892~1950)는 익히 아는 소설가, 춘원이다. 임시의정원 서기가 됐을 때 그는 27살이었다. 그러나 그는 1938년부터 전향해 친일부역에 앞장섰다. 백남칠(1892~1959)은 임시의정원 서기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가 대학을 졸업하고 임정 구미위원부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1992년 건국훈장 애족장.
▲ 1945년 해방 뒤 환국을 앞둔 임시정부 요인들의 기념촬영(1945.11.3.)
▲ 임시정부의 이동
임시정부 하면 떠오르는 인물은 백범 김구(1876~1949)다. 그러나 임시정부가 수립됐을 때 그는 국무위원이 아닌 초대 경무국장이었다. 그는 내무총장(1923), 국무총리 대리(1924)를 거쳐 1926년 12월 국무령(國務領)에 취임함으로써 임시정부에서 처음으로 수반이 된다. [아래 표 참조]
이후 백범은 4대 국무령(1930~1933), 7·8·9대(1940~1947) 주석을 지냈지만 독립 조국에는 개인 자격으로 돌아와야 했다. 미국이 임시정부의 대표성을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상하이에 있던 시기는 1932년 5월까지 약 13년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의 훙커우 의거 이후 일제의 압박이 가중되면서 임정과 요인들은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 루저우, 치장을 거쳐 1940년에 충칭으로 옮겨 다녀야 했다. 숱한 이합집산, 생사를 오가는 시련의 시기를 거쳐 요인들은 충칭에서 해방을 맞았다.
임시정부라는 이름만 세웠을 뿐, 그를 뒷받침하는 경제적 사회적 기반을 갖추지 못한 망명정부를 지키면서 요인들은 20세기를 19세기의 방식으로 살아야 했다. 적어도 이국에서의 독립운동을 말할 때 ‘풍찬노숙’(바람 속에서 식사를 하고 이슬을 맞으면서 잔다)은 단순한 비유가 아니라 그들의 실제 삶이었다.
그리고 그들 간난의 삶이 지키고 가꾼 민주공화 정부가 1948년 독립 조국의 정부수립으로 이어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그것은 ‘1948년 건국’을 강변하는 보수 세력이 우러러 마지않는 이승만마저 공언한 우리 모두의 역사였다.
자료제공 : 직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