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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년 6월에 작품 하나가 전파를 탔다.
그 작품이 발표되자마자 온 지구에 난리가 났다.
들끓기 시작했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이하, 케데헌) 때문이었다.
'반응이 뜨겁다'는 표현 정도로는 '케데헌'의 이 폭발적 마력과 중독현상을 설명하거나 규정짓지 못할 정도였다.
아예 온 세상이 '케데헌' 한 방으로 완전히 점령당했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듯싶었다.
특히 어린아이들, 청소년들, 2030 세대가 그랬다.
일부 중, 장년층까지 그야말로 열광의 도가니에 빠져 허우적 대기 바빴다.
치명적인 매력이었고 하늘을 찌르는 열광이었다.
나는 문화 평론가도 아니고 인문학의 석학도 아니었다.
그러나 '케데헌'을 몇 차례 정주행했던 사람으로서 나의 느낌과 감동을 짧게나마 기술해 보려고 펜을 들었다.
이 작품을 연출했던 '매기 강' 감독은 서울 명동에서 태어났다.
5살 때 부모님을 따라 '캐나다'로 갔다.
학업을 마친 뒤에는 '드림웍스'나 '워너브라더스' 같은 메이저 영화사에서 '애니메이션' 분야를 담당했다.
초보자로 투신해 오로지 한 길을 걸었다.
그 분야에서 20년 이상을 꾸준하게 헌신하며 자신만의 실력을 쌓았고 안목도 길렀다.
뛰어난 '스토리텔러'이자 애니메이션 계의 '마스터'로 성장한 그녀는 자신의 몸과 영혼에 흐르는 '한국의 문화', '한국의 정서', '한국인의 피'를 새로운 작품으로 표현해 보고 싶었다.
그런 열망을 갖고 있었다.
그 소망은 강렬했고 뜨거웠다.
그녀는 그 꿈을 소중하게 키워왔으며 한 순간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다 7년 전에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이제는 내 손으로 내 작품을 만들어 보자."
생각을 구체화했고 세심하게 기획했다.
정성스럽게 스토리를 짰고 각본도 직접 썼다.
그러면서 애니의 밑그림을 한 장씩 한 장씩 그려 나갔다.
한국의 문화와 풍습 그리고 정확한 배경과 현장성 부각을 위해 몇 차례 모국에 출장을 왔고, 세밀하게 조사하며 답사했다.
큰 얼개는 한국의 아이돌, 저승사자, 전통문화, 혼문과 악귀로 인한 방어, 공방, 갈등, 두려움 그리고 사랑과 믿음으로 이를 극복하여 찬란하고 뜨거운 케이팝으로 멋지게 승화시켜 나가는 내용이었다.
그런 시놉시스였다.
다소 생경한 시도였지만 그녀는 한국의 문화적 진수를 애니에 녹여 넣고 싶었다.
일찍이 세계 주류문화에 존재하지 않았던, 그래서 낯설기만 했던 접근이었다.
그동안 전 세계 애니메이션 분야에선 서구와 일본의 문화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케데헌' 이전엔 한국적 요소를 애니에 접목하려는 시도도, 집중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완벽한 마이너였다.
그러나 '매기 강'은 그런 비주류의 프리즘으로 메이저 시장을 겨냥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과감한 도전이었다.
우리의 문화와 풍속으로 대범한 접목을 시도했다.
결과는 핵폭발이었다.
지구인들이 과거에 잘 알지 못했던 한국적 요소와 스토리로 전인미답의 초대박을 터트렸다.
완벽한 평정이었다.
외국인들에겐 낯설었던 문화와 전통을 디테일하게 적용했고, 중독성 강한 음악과 댄스를 창작 애니에 가미했으며 그 안에서 '루미'와 '진우'의 갈등과 사랑을 한국적 정서에 맞게 맛깔스럽게 녹여냈다.
과거의 무속신앙, 전통의상, 저승사자의 캐릭터들이 작금의 신세대 문화의 총아인 '케이팝'과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또한 전 세계 디지털 메카인 '서울'이 영화의 중심 무대가 되면서 현장성과 리얼리티가 시종일관 살아서 꿈틀거렸다.
모든 요소들이 조화롭게 믹싱 되었고 리드미컬하게 흘렀다.
참으로 절묘한 '융합'이었다.
애니 무비의 중간중간에 등장했던 다양한 한국적 소재도 압권이었다.
전통복식, 무속신앙, 굿, 노리개, 일월오봉도, 사인검, 곡도, 신칼, 호작도, 더피, 악귀퇴치, 대중목욕탕과 양머리, 북촌 한옥마을, 남산과 서울타워, 서울 성곽길, 한의원, 잠실 종합운동장, 김밥, 라면, 각종 과자, 루미 미라 조이의 완벽한 K 메이크업 등이 영화 상영 내내 보석처럼 반짝거렸다.
독일의 건축가 '루트비히'는 '신은 디테일에 있다'고 자주 일갈했다.
'케데헌'을 보면서 나도 그 말에 격하게 공감했다.
인간은 완벽한 존재가 아니었다.
완벽한 존재일 수도 없었다.
신도 때로는 실수를 범할 수 있는데 인간이야 두 말해 무엇하겠는가.
누구나 다 숨기고 싶은 흠결이 있었다.
'루미'도 끝까지 감추려 했던 '악귀의 문양'을 갖고 있었고, '진우'도 가족에 대한 배신의 괴로움이 내면의 두려움으로 커지면서 그의 영혼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있었다.
서로는 괴로웠고 가슴에 큰 구멍이 뚫린 듯 많이 아파했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그 굴레 안에서 웅크린 채 가식으로 위장할 수는 없었다.
그럴수록 더 깊은 수렁에 빠져들 뿐이었다.
극복해야만 했다.
두려움과 불안을 이겨내고 내면의 원기와 힘을 끌어내야 했다.
그리하여 건강한 영혼으로 거듭나야만 했다.
'루미'에겐 '진우'가 있었고, '진우' 곁엔 '루미'가 있었다.
동병상련의 아픔을 알았을 때 서로의 상처를 따뜻하게 보듬었다.
외롭지 않았다.
상대를 향한 신뢰와 배려 그리고 사랑의 힘으로 세상에 더 담대하게 맞설 수 있었다.
서로에게 단단한 버팀목이 되어 주었고 상대의 상처 입은 영혼을 부드럽게 감싸주며 이끌어 주었다.
아름다운 위로였고 푸근한 격려였다.
그 힘으로 다시 설 수 있었고 세상의 모든 관객들에게 강한 울림과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할 수 있었다.
감독이 전하고자 했던 메시지도 바로 이것이었다.
'매기 강'에게 '케데헌'은 한국인으로서 자신의 뿌리를 확인케 해 주었던 축복의 헌사였다.
그동안 조금씩 응축되었던 애니 연출가로서의 예술적 혼과 한국 전통문화의 접목, 이을 통해 7년의 산고 끝에 어렵게 태어나 '허리케인'처럼 세상을 강타해 버린 케이팝 OST의 폭발적 붐업으로 세상이 온통 들썩거리고 있다.
한국인으로서 정말로 자랑스럽고 대견했다.
또한 필설로 표현하지 못할 만큼 전율이 일었다.
내 가슴이 먹먹할 정도였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케데헌' 덕분에 외국인들의 한국행이 러시를 이루고 있다.
여행업계에 따르면 2025년도에 입국자 수가 2천만 명에 육박할 것이라고 것이라고 했다.
엄청난 숫자였다.
특히 '국립중앙박물관'(이하, 국중박)엔 '케데헌 굿즈'를 사기 위해 '오픈런' 사태까지 벌어진다고 하니 놀랍기 그지없다.
꼭 기념품이 아니더라도 한국의 문화와 역사를 알고 싶어 '국중박'을 찾는 이들이 현저하게 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예술작품 하나가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거대했고 때로는 우리의 상상력을 넘어설 때가 많았다.
기왕지사 박물관 얘기가 나왔으니 세계의 메이저 박물관들을 잠깐 열거하고 넘어가 보자.
한 해 관람객수 기준으로 보자면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이 885만 명으로 1위, '바티칸 박물관'이 670만 명으로 2위, 그 뒤로 영국 '대영 박물관',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영국 '데이트 모던 박물관'에 이어 한국의 '국중박'이 420만 명으로 6위를 차지했다.
아시아에서는 단연코 넘버원이었다.
엄청났다.
또한 놀라운 숫자였다.
자랑스런 대한민국의 '국중박'이었다.
요즘 언론에서 '국중박' 뉴스가 자주 나왔다.
한국인뿐만 아니라 세계인들이 '국중박'으로 몰려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도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9월 3일, 업무를 오전으로 몰아 집중적으로 마무리한 뒤에 서둘러 '국중박'으로 달려갔다.
'국중박'은 2005년 10월에 '경복궁'(현 국립고궁박물관)에서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용산시대'를 맞은 지 올해로 딱 20주년이 되었다.
용산 이전 직후에 한번 방문했었고 그 이전엔 1989년도에 '국중박'이 '중앙청' 건물에 있을 때 참관했었다.
그런데 그 '중앙청 건물'이 일제시대의 수탈과 핍박의 상징이라고 하여 '김영삼 대통령'이 민족정기 수립 차원에서 해체를 결정했다.
그래서 '국중박'을 다시 '경복궁'으로 이전한 뒤 그 건물을 완전히 해체하고 말았다(1995년).
아무튼 나도 오랜만에 '국중박'을 다시 찾았다.
평일 오후임에도 관람객들이 많았다.
한국인들 못지않게 외국인들도 다수였다.
한국문화와 역사에 대한 그들의 뜨거운 관심이 내게도 전달되는 듯했다.
열기가 후끈했다.
'국중박'은 7 개관 39실로 이루어져 있으며 우리나라 고유의 유물이 많아 2007년에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으로 등재된 곳이었다.
'문화재 순혈주의'로 인해 해외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프랑스, 영국, 미국, 일본 등 메이저 박물관엔 사실 '약탈'로 반입된 문화재들이 산적해 있었다.
그러나 한국은 타국을 침략한 적도 없었고 타국의 문화재를 강탈한 적도 없었다.
순수한 우리의 문화재만으로도 박물관이 차고 넘쳤다.
세계 메이저 박물관 중 자국 문화재로만 전시하는 곳은 한국이 유일했다.
또 하나의 특징은 입장료가 무료라는 것이었다.
'국중박'을 제외하고 지구상 어떤 박물관도 무료인 곳은 없었다.
타국은 대개 4-6만 원 정도의 입장료를 부과하고 있었다.
이렇듯 한국의 '국중박'은 여러모로 독특하고 유니크한 최상의 '배움터'였다.
그리고 과거와 현재를 아우르며 적극적인 소통으로 이어주는 훌륭한 '공감터'였다.
많은 공간을 순차적으로 돌았다.
그러면서 내 나름대로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각 전시공간과 그 안의 다양한 문화재들, 그리고 내가 받았던 감동과 새로운 깨달음은 차후에 다른 제목으로 기술할 기회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오늘의 주제는 '케데헌'과 '한국문화'다.
'국중박'이 이 글의 주된 소재가 아니므로 내가 특별히 감명받았던 '사유의 방'을 잠깐 언급하면서 글을 맺을까 한다.
3층부터 1층까지 곳곳을 세심하게 살폈다.
다 좋았다.
그렇지만 '사유의 방'(A Room of Quiet Contemplation)은 더욱 깊은 울림과 긴 여운을 주었다.
그 넓은 공간에 국보 '반가사유상' 두 점만이 오롯이 전시되어 있었다.
"아아...."
보자마자 감탄이 쏟아졌다.
'텅 빈 충만'이었다.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느낌은 바로 그것이었다.
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신선했고 놀라웠다.
과거엔 보지 못했던 매우 특별한 공간이었다.
입구 벽면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두루 헤아리며 깊은 생각에 잠기는 시간'
(Time to lose yourself deep in wandering thought)
비교적 넓은 공간 안에 문화재는 딱 두 점뿐이었다.
단출했다.
은은한 조명과 천장의 은하수를 보는 순간 내 심장이 떨리기 시작했다.
최고의 예술품엔 수식어가 필요 없었다.
부연은 사족이었다.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초반 사이에 신라의 경주와 영주 지역에서 제작되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걸작이었다.
이 위대한 문화재 앞에 서자 침묵 속의 긴 사유가 이어졌다.
대한민국 최고의 보물 앞에서 모두가 숙을 죽이고 있었다.
나도 움직일 수 없었다.
깊은 감동과 울림에 감탄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나뿐만 아니라 그 방을 찾아온 모든 이들이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우측 다리를 좌측 무릎 위에 올려둔(반가) 채 옅은 미소를 머금고 깊은 생각에 잠겨(사유) 있는 '금동불'이었다.
세상 사람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역작인 '모나리자'의 엷은 미소를 보면서 열광했다.
사람이 구현해 낼 수 있는 '최상의 미소'라고 했다.
그러나 그건 미술작품이었다.
붓으로 그리는 미술보다 금속을 녹여 붓는 '주조방식'은 열 배, 백 배 더 어렵고 힘든 작업이었다.
그것도 지금으로부터 1400여 년 전의 작품인데 말이다.
각각 82센티, 90센티의 키에 엷고 온화한 미소를 어떻게 표현해 낼 수 있었을까?
그것도 붓으로 그리는 게 아니라 뜨거운 쇳물을 부어서 만드는 '밀랍법' 주조방식인데 이런 미소가 어떻게 가능했을까?
옅은 미소, 살짝 고개를 숙인 모습, 깊은 명상에 잠긴 불상, 완벽한 대칭과 비율, 기포 하나 발생하지 않았던 최첨단 기술은 삼국시대의 깊은 불심과 궁극을 지향했던 우리 선조들의 기술력과 예술적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 지를 소리 없이 웅변해 주고 있었다.
단연코 세계 최상, 최고 반열의 '금동불'이었다.
그 어떤 보물과도 비교를 불허하는 위대한 걸작이었다.
가슴이 떨리고 웅장해 질 수밖에 없는 '사유의 방'이었다.
그런데 나도 이제야 가서 보고 느꼈다.
후회가 밀려들었다.
혹시라도 이 글을 읽는 분들 중에 '사유의 방'을 경험해 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시간을 내서 가보시길 권한다.
걸작은 괜히 걸작이 아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우리 국민들과 수많은 외국인들을 막론하고, 모두가 깊은 감동을 받고 찬미를 하기 때문에 걸작이었다.
그 앞에 서면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경배를 드리지 않을 수 없었다.
찬양과 기도, 사유와 울림이 마르지 않았기에 '금동반가사유상'이 극상의 명품이 되었다.
그 역사적, 예술적, 문화적, 내재적 가치를 잘 알고 그에 합당한 보존과 존대를 부여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그것만이 민족적 자긍심과 최고의 국보 문화재를 길이길이 후대에 전하는 최선의 방책이 아닌가 싶다.
'케데헌' 열풍으로 전 세계 사람들이 한국으로 몰려들고 있다.
'케데헌 굿즈'나 '한국의 기념품'을 찾는 이들도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었다.
'K 컬처'의 '원류'를 찾아 '국중박'을 찾는 이들이 훨씬 더 많았다.
반만 년 동안 빛을 발했던 우리의 역사와 문화를 체험하며 알고 싶어 하는 외국인들이 정말로 많았다.
그들은 열심히 메모했고 사진으로 담았다.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는 모두 잘 사는 나라들이지만 역사가 매우 일천하고 빈약한 국가들이었다.
그들의 눈에 비친 반만 년 대한민국의 역사와 출중한 문화예술은 경외의 대상이었고 감탄의 원류였다.
또한 그들에게 '국중박'은 보고 느끼고 체험하는 '배움터'였고 살아 있는 한국 역사와 문화의 '보고'였다.
나의 오해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곳에서 그렇게 느꼈다.
외국인들의 눈빛은 매우 진지했고 몸짓은 경건했다.
한국의 '국중박'이 언제 이렇게 찬미와 성찰, 흠모와 배움의 성지가 되었는지 '격세지감'이 들었다.
그저 뿌듯했고 감사할 따름이었다.
바람이 불고 있었다.
거센 바람이었다.
그 바람을 타고 K 웨이브가 넘실거렸다.
그 웨이브를 따라 K 컬처, K 팝, K 푸드, K 뷰티, K 무비, K 패션 등 다양한 분야의 K 매력들이 꽃을 피웠고 향기를 발하고 있었다.
초기의 매력은 이제 마력으로 변했다.
어느 누구도 거스를 수 없었고 어느새 세상을 뒤덮고 있었다.
21세기 초반에 우리가 겪고 있는 놀라운 변화였다.
또한 세계 문화사적 혁신과 이변의 단면이었다.
대한민국의 여권파워도 세계 1-2위를 다툰지 오래였다.
해외에 나가보면 종종 살감할 수 있었다.
이런 때일수록 긴 안목과 겸손한 몸짓으로 더 성실하게 정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수준 높은 기획과 착상, 차원이 다른 준비와 실행력,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놀라운 상상력과 R&D로 줄기차게 세상을
선도해 나가는 멋진 대한민국이 되어 주기를 바라 마지않는다.
다시 한번 '매기 강' 감독에게 진심 어린 '감사'와 '오마주'를 보낸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그랬다.
준비된 한 사람이 '광야에 길'을 냈고 '사막에 강'을 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원더풀 코리아'다.
모두에게 감사의 박수를 보내는 주말 아침이다.
사랑하는 모든 분들 멋진 주말 보내시길 바란다.
사랑과 감사를 전하며.
브라보.
살며 사랑하며 배우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