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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 수단을 이르는 말이다.
堅 : 굳을 견(土/8)
壁 : 벽 벽(土/13)
淸 : 맑을 청(/)
野 : 들 야(里/4)
출전 : 삼국지(三國志) 순욱전(荀彧傳)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어 있는 모든 곡식을 모조리 성내로 걷어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이러한 전법은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의 공격을 영원성(寧遠城)을 사수(死守)함으로써 패퇴시켰던 원숭환(袁崇煥)의 견벽청야 작전은 유명하다.
삼국지(三國志)의 순욱전(筍彧傳)에, 위(魏)의 조조(曹操)가 영주의 복양에 진을 치고 있는 여포(呂布)를 강하게 공격하였으나 여포는 무리한 싸움을 피하고 지구전(持久戰)으로 맞섰다.
이때 서주목사(徐州牧使) 도겸(陶謙)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서주를 빼앗기 위해 군사를 돌리려 하였다. 그러나 명참모 순욱이 이 작전을 말렸다.
순욱이 말했다. “도겸이 죽으면서 서주의 인심이 동요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깔보는 것은 금물입니다. 지금은 보리를 걷어들일 때이므로 서주에서는 주민을 총동원해 보리를 성내로 걷어들이고 성벽을 다져 전쟁 준비에 만전을 기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견벽청야'이므로 우리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을 것이며 만일 이때 여포가 이틈을 노려 공격해 온다면 그때는 끝장입니다.”
견벽청야 전술을 모를 리 없는 순욱이 조조에게 진언하고, 조조는 서주탈환 작전을 취소하고 여포공략에 힘을 쏟아 결국에는 성공을 거둘 수 있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굳게 하고 곡식을 모조리 걷어들인다는 뜻으로, 적의 양식 조달을 차단하는 전술의 하나이다.
불로 태워 까맣게 된 흙이나 땅이 초토(焦土)다. 불에 탄 것처럼 황폐해지고 못쓰게 된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기도 하다.
이 비유가 작전이 되면 초토전술(scorched earth strategy)이라 하여 특정지역을 철저하게 불태워버리는 것이 된다.
일반적으로 방어부대가 패전하여 철수하거나 후퇴할 때 그 지역의 시설과 자원을 이용할 수 없도록 파괴한다.
프랑스 나폴레옹이 러시아를 원정했을 때 이 작전에 당해 유명해졌지만 비슷한 작전의 역사는 오래다.
적의 침입을 받았을 때 맞서 싸우기에는 세력이 달린다. 이럴 때는 하는 수 없이 방어를 튼튼히 하는 수밖에 없다.
성에 들어가 사방 벽 주위에 해자(垓子)를 깊이 파는 등 견고히 하고(堅壁), 들판의 곡식을 모조리 성내로 옮겨 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깨끗이(淸野) 한다.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사용해 온 방어전술의 하나였다고 한다.
성어가 사용된 예를 두 곳에서 알아보자. 먼저 삼국지(三國志)에서 순욱(筍彧)이 조조(曹操)에게 건의한 작전이다.
순욱은 처음 원소(袁紹)의 휘하에 있었으나 조조에게 의탁한 뒤 깊은 신임을 받은 참모였다. 조조가 수시로 한고조(漢高祖)의 전략가 장량(張良)에 빗대 자신의 장자방(張子房)이라 할 정도였다.
조조가 여포(呂布)를 공격할 때 지구전으로 여의치 못하자 서주(徐州)로 군사를 돌리려 했다.
순욱이 나섰다. '지금 그 지역은 보리를 거둘 때이므로 성벽을 다져 우리의 공격은 먹혀들지 않을 것입니다(今東方皆以收麥 必堅壁清野 以待將軍 將軍攻之不拔).' 조조는 서주 공략을 취소하고 여포 공략에 주력하여 결국 성공했다.
다음은 진서(晉書)에 실린 내용이다. 서진(西晉) 말기 흉노(匈奴) 갈족(羯族)의 우두머리 석륵(石勒)은 사나운 군사들을 이끌고 수시로 싸움을 걸어와 피해를 끼쳤다.
석륵은 매번 공격할 때마다 살상을 일삼아 수효가 백만에 달했다. 고심하던 부근의 백성들은 약탈에 대비해 성벽을 단단히 하고 들판을 깨끗이 치워 석륵이 뺏어갈 것이 없도록 했다.
이런 무시무시한 작전이 스포츠에 많이 사용되면서 어감이 부드러워진 면도 있다. 야구나 축구 등 아주 큰 점수 차이로 이겼을 때는 상대편을 초토화시켰다고 한다.
하지만 정치권을 비롯한 주고받고 상생을 해야 하는 사회에서는 현격한 승차가 되레 걸림돌이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견벽청야(堅壁淸野)
성벽을 튼튼히 하고 들판을 깨끗하게 하다. 적의 공격에 대비해 성벽을 튼튼하게 다지고 들판의 곡식을 모조리 거두어 들여 적의 군량 조달을 미리 차단하는 전술을 말한다. 위기에 대비하여 미리 준비하는 것을 비유하는 말이다.
서진(西晉) 말기, 황하 유역에서 활동하던 갈족(갈族)의 지도자 석륵(石勒)은 사나운 군사들을 이끌고 여러 차례 진(晉)나라 군대를 쳐부쉈다. 석륵(石勒)은 매번 공격할 때마다 많은 사람들을 죽여, 그 수효가 거의 백만에 달했다.
언젠가 석륵(石勒)은 군대를 이끌고 수춘(壽春) 일대를 공격하다가 진(晉)나라 군대에게 크게 패하고 돌아온 적이 있었다. 당시 진(晉)나라 군대는 석륵(石勒)이 복병을 매복시켜 놓았을까 두려워 추격을 하지 않고 수춘(壽春)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석륵(石勒)이 다시 군대를 이끌고 나타나자, 부근의 백성들은 석륵(石勒)의 약탈과 만행에 대항하기 위해 성벽(城壁)를 단단히 하고 들판을 깨끗이 치워 석륵(石勒)의 군대가 빼앗아 갈 것이 없도록 하였다(皆堅壁淸野, 采掠無所獲).
석륵(石勒)의 군대는 먹을 것을 구하지 못하고 서로를 잡아 먹다가 군대를 이끌고 스스로 철수하였다.
중국에서 고대로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널리 사용해온 방어전술의 하나이다. 해자(垓子)를 깊이 파고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들어 있는 모든 곡식을 모조리 성내로 걷어들여 공격해 오는 적의 군량미 조달에 타격을 입히는 전법으로, 이러한 전법은 우세한 적에 대한 수단으로 흔히 약자가 사용한다.
청태조(淸太祖) 누르하치의 공격을 영원성(寧遠城)을 사수(死守)함으로써 패퇴시켰던 원숭환(袁崇煥)의 견벽청야 작전은 유명하다.
삼국지(三國志) 제10권 위서(魏書)의 순욱전(筍彧傳)에, 위(魏)나라의 조조(曹操)가 연주(兗州)에 주둔하면서 그 일대에 진을 치고 있는 여포(呂布)를 공격하였으나 여포가 싸움을 피하고 지구전(持久戰)으로 맞서자 조조는 마음이 급해졌다.
이때 서주목사(徐州牧使) 도겸(陶謙)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조조는 계획을 바꾸어 서주를 빼앗기 위해 군사를 돌리려 하였다.
그러자 참모 순욱(筍彧)이 말렸다. “옛날 한고조는 관중(關中)을 지켰고 광무제는 하내(河內)에 거점을 구축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튼튼한 근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아가면 승리하고 물러서서는 굳게 지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지금 장군께서는 연주를 돌아보지 않고 서주를 공격하려고 하는데, 연주에 군사를 많이 남겨 두면 서주를 취하기 어려울 것이고 군사를 조금 남겨 두면 여포가 우리 허점을 파고들 수 있기 때문에 연주를 지키지 못하게 됩니다. 그러면 연주도 못 지키고 서주도 빼앗지 못합니다. 게다가 지금 보리 수확기이기 때문에 모두 수확을 마치고 성벽을 튼튼히 하고 들판을 깨끗하게 정리하여 장군을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장군이 공격해서 빼앗지 못하고 얻는 것도 없으면 열흘도 되지 않아 우리 십만 군사들은 싸우지 않고도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東方皆以收麥, 必堅壁淸野以待將軍.
將軍攻之不拔, 略之無獲, 不出十日, 則十萬之衆未戰而自困耳.
순욱이 말한 건벽청야 전술의 이치를 알게 된 조조는 서주 탈환 작전을 취소하고 여포 공략에 힘을 쏟아 결국 여포를 물리쳤다.
조조와 순욱의 인연은 오랜 기간 상생이었다. 그러나 조조가 위공에 오르면서 상극을 맞았다. 순욱이 조조로부터 토사구팽을 당한 셈이다. 순욱은 203년까지는 수많은 공적으로 만세정후(萬歳亭侯)에 봉해졌다. 그 후에도 봉록이 계속 증가했다.
그러나 조조가 헌제를 폐하고 자신이 직접 왕이 되려는 의사를 비추면서 두 사람의 관계는 틀어지기 시작했다. 한나라를 유지하겠다는 정치적 이상을 가졌던 순욱은 조조의 야망에 맹렬히 반대하였다.
212년 조조의 손권 정벌에 따라 함께 출정하여 시중(侍中), 광록대부(光祿大夫)가 되었다. 그후 조조와의 우려 속에 진중의 병으로 50세에 죽었다. 그의 죽음에는 의혹이 많아 자살한 것으로 보는 기록도 있으며 어떤 식으로라도 그의 죽음의 배경에 조조와의 불화가 있었다는 것은 확인할 수 있다.
후한서에서도 순욱이 자살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조조가 순욱에게 빈 찬합을 보내자 이를 보고 조조의 뜻을 간파한 순욱이 독주를 마시고 자살했다고 한다. 빈 그릇처럼 자신이 더 이상 필요치 않을 정도로 이용 되었다는 뜻이다. 순욱이 죽은 다음해 조조는 위공이 되었다.
견벽청야(堅壁淸野)
고대로부터 널리 사용해 온 방어 전술의 하나로, 성벽의 수비를 견고히 하는 한편, 성 밖 들판에 있는 곡식을 성내로 거두어 들여 공격해 오는 적이 현지에서 군량미를 조달할 수 없도록 만드는 전법이다.
견벽청야라는 개념은 고대로부터 근대까지 군사작전개념으로 곧잘 쓰이고 있다. 말 그대로 견고한 성벽에 의지해, 들을 깨끗이 비우는 전술로써 흔히 고구려와 고려가 수, 당과 거란을 맞아 싸울 때 사용한 청야전술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요새말로 초토화 전술을 일컫는 것으로 1812년 러시아 침공에 나섰던 나폴레옹이 이 초토화 전술에 걸려 무참하게 패퇴한 것은 너무 유명하다. 당시 나폴레옹은 65만명의 대군으로 러시아의 워털루를 공격했는데 마침 혹한이 닥친 데다 러시아군 사령관 쿠트초프의 초토화 전술로 걸려, 무려 38만명의 희생자를 내고 도망치듯 프랑스로 후퇴하고 말았다.
그 후 견벽청야 전술을 6.25때 11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작전명령으로 각 연대에 시달한바 있다. 육군 11사단은 공비토벌 목적으로 창설된 부대였는데 견벽청야 작전으로 보급로를 차단하여 적을 결정적으로 차단하려 했던 것이었다. 당시 미군의 인천상륙작전으로 북상 퇴로가 끊긴 인민군들은 지방교란작전을 전개하고 있던 참이었다.
그런데 견벽청야란 한마디 사자성어가 엉뚱한 방향으로 불꽃이 튀는 바람에 우리 현대사를 피로 물들이는 참혹한 살육 극을 낳고 말았으니...
사단장의 작전명령이 내려지자 일선 지휘관들은 지역주민과 먹거리 등을 모조리 쓸어버리는 실로 뚱딴지같은 짓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것이 저 유명한 거창양민 학살사건인 것이다.
1951년 2월초, 11사단 9연대장 오익경 중령은 거창, 산청 등 지리산 남부에 준동하는 공비 소탕작전을 지휘했다. 그는 각 대대장들에게 사단사령부에서 내려온 견벽청야 작전명령을 시달했는데, 한동석 소령의 3대대는 거창군 신원면 덕산리 청연마을 민가 78세대에 불 지르고 주민 80여명을 마을 앞 논으로 끌어내 무차별 사살해 버린 것이다. 그 참혹한 현장에 김운섭 한 사람만이 어머니 시체 밑에 깔려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았다.
이튿날도 신원면 과정리, 중유리에 병력을 투입해서 민가에 방화하고 타지로 소개시킨다면서 전 주민을 끌고 가다가 노약자 20여명을 도로에서 사살했다. 나머지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 100여명은 탄량골 계곡에 몰아넣고 기관총으로 무차별 사살한 다음 기름을 붓고 불 질러 태워 죽였다.
사건은 거기서 그치지 않아 같은 날 오후, 와룡리 등 주민 1천여명을 신원초등학교에 모았다. 그 중에서 군인, 경찰, 공무원, 청년단원 가족을 제외한 540여명을 산골짜기로 몰아놓고는 기관총을 난사해 사살한 다음 나뭇가지를 덮고 불을 지른 뒤 망을 보라며 세워놓은 주민 열두 명 중에 한명을 빠뜨리고 다 죽인 기막힌 일을 저질렀던 것이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뒤인 1960년 5월, 국회진상조사단이 확인한 사건 희생자는 모두 719명에 이르렀다. 그중 남자가 327명, 여자가 392명이었고 열 살 미만 어린이가 313명이나 되었다.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은 그 참혹한 사건이 일어나고도 3년이 넘도록 유골들을 그대로 방치했다.
그러다 1954년 뒤늦게 세상 어디에도 유례가 없는 묘를 만들고 묘비를 세웠는데 현장에 흩어진 유골을 한데모아 큰 뼈는 남자, 중간 것은 여자, 작은 뼈는 어린이로 간주해서 이른바 남자합동지묘, 여자합동지묘, 어린이합동지묘를 만들었으니,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를 일이다.
묘비의 비명은 노산 이은상이 지었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지난 1951년 천인공노할 사건이 있었다. 6.25동란 때 공산군의 남침으로 겨레가 피를 흘린 것도 민족사에 뼈저린 일이라 하겠거늘 하물며 일부 미련한 국군의 손에 죄 없는 양민들이 집단 살육을 당했음이라...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일이 있은 것이니 차마 무슨 말로 기록을 남기겠는가...’
결코 견벽청야를 하지 못할 것이다
남연(南燕)의 개국조 모용덕(慕容德)은 군사를 이끌고 가 광고(廣固), 동진(東晋)에 속한 청주와 유주 일대의 땅을 점거했다.
400년 모용덕이 광고를 수도로 삼고 황제에 즉위했다. 모용덕은 덕정을 베풀어 백성들에게 휴식을 취하게 했다. 이에 남연은 근 40만 명에 달하는 정병(精兵)과 전마(戰馬) 5만여 필 등을 보유하게 되었다.
모용덕은 동진을 공벌할 생각을 품었으나 나이가 많고 병이 나 도중에 포기했다. 405년 가을 모용덕이 재위 6년 만에 병사(病死)했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21세의 조카 모용초(慕容超)가 뒤를 이었다. 모용초는 소인배들을 중용하고 광고성 내에서 대규모 살육을 자행하며 권위를 세우고자 했다. 그는 수렵을 즐기는 등 정사를 등한히 하고, 종실들을 대거 살육하는 혼군(昏君)의 모습을 보였다.
당시 남연은 재해가 그치지 않았다. 도성 광고에도 지진이 일어나 사람들은 하늘이 노한 것으로 생각해 크게 두려워 했다.
이렇게 형세가 불안정한데도 불구하고 409년 정월 설날, 모용초는 동양전에서 군신들로부터 하례를 받던 중 궁정악대의 연주 수준이 이전보다 크게 떨어지자 다시 동진의 백성을 약탈해 궁정악대를 새롭게 육성할 계획을 세웠다. 대신들이 명을 거두기를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모용초는 곧 숙예를 습격해 동진의 백성들을 약탈한 뒤 2천5백 명의 동남동녀(童男童女)를 선발해 태악부로 보냈다. 얼마 후 황하의 남안, 태산산맥 북쪽에 위치한 제남(濟南)을 다시 침공해 남녀를 약탈했다.
당시 훗날 송(宋)나라 무제(武帝)가 될 동진(東晋)의 유유(劉裕)는 안팎의 여러 문제들로 아직 권위를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동진(東晉) 파서(巴西) 남충(南充) 사람으로 후촉(後蜀)의 건립자 초종(譙縱)은 시종 복종하지 않고, 영남의 노순도 아직 토벌하지 못했다. 이 와중에 남연이 변경을 계속 침공한 것이다.
409년 4월 유유가 남연 정벌의 상주문을 올린 후 대군을 이끌고 건강을 출발했다. 먼저 수로를 이용해 회화를 거쳐 사수(泗水)로 들어갔다.
그해 6월 하비(下邳)에 도착했다. 유유는 함선과 치중을 그곳에 정박시킨 뒤 곧 경무장을 한 채 낭야(산동성 교남)를 향해 급속히 나아갔다.
그는 전진하면서 과거 동진 환온(桓溫)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주요 거점을 확보하면 정병을 주둔시켜 보급로가 끊어지지 않도록 하는 등 섬세한 주의를 기울였다.
유유가 출병했다는 소식을 들은 모용초가 크게 놀라 군신들과 대책을 상의하자 남연 정권의 권력을 한 손에 쥐고 있던 공손오루(公孫五樓)가 건의했다. '저들의 예기가 날카로우니 지금 대적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대현산의 험한 관문을 먼저 점령해 저들의 진입을 막아야 합니다. 이같이 하여 시간이 지나면 저들의 예기가 크게 꺾일 것이고, 후방에서 군량을 조달하기도 쉽지 않을 것입니다. 이때 정예 기병 2천 명을 선발해 남쪽 해변으로 달려가 저들의 양도를 끊은 뒤 연주에 주둔하는 군사에게 명해 산을 우회해 동쪽 깊숙이 들어가 적의 후방을 치도록 합니다. 이게 상책입니다. 각지의 장수에게 명해 잉여분의 식량 창고를 불태운 뒤 성을 굳게 지키는 견벽청야(堅壁淸野)를 행하도록 하는 게 중책입니다. 하책은 적을 대현관으로 들어오게 한 후 정병을 내보내 싸우는 것입니다.'
공손오루가 말하는 상책이 매우 뛰어난 계책임에도 의견이 분분했고 모용초는 결국 하책을 택했다.
마침 유유가 출발 전에 참모들과 함께 논의할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이같이 우려한 바 있다. '저들이 대현관을 봉쇄하거나 견벽청야를 행할 경우 자칫 퇴로까지 막힐 수 있습니다. 이를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유유는 나름대로 계책이 있었다. '나 또한 이를 오랫동안 생각해 왔다. 저들 선비족들은 탐람(貪婪; 몹시 욕심을 부림)한 까닭에 멀리 내다보는 계략이 없다. 저들은 침공할 때 노략에 뜻을 둔 까닭에 철군할 때 곡식을 아꼈다. 이는 우리들이 오래 버티지 못할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저들은 임구에 주둔하면서 도성인 광고를 지킬 게 분명하다. 결코 견벽청야를 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유유의 말처럼 되었다. 유유의 군사가 진격하는 동안 남연의 병사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아무 어려움 없이 대현관을 넘어갔다.
희색을 감추지 못한 유유가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키며 이같이 말했다. '우리 병사들이 이미 험관을 넘어섰으니 모두 필사의 마음을 가졌을 것이다. 게다가 저들의 전야에는 지금 곡식이 한창 익고 있다. 군량을 전혀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틀림없이 이길 것이다.'
청야전술(淸野戰術)
방어군 측에서 자발적으로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버려 적군이 보급의 한계를 느끼고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청야전술은 방어군 측에서 자발적으로 주변에 적군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군수물자와 식량 등을 없애버려 적군이 보급에 한계를 느끼고 지치게 만드는 전술이다.
예컨대 자군의 군수물자 및 식량, 민가의 가옥, 수확할 수 있는 식량,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우물 등 모든 것을 불태우고 훼손시켜 버리는 것이 이에 해당한다.
청야전술은 현대에 비해 보급품의 전달이 훨씬 어려웠던 고대에 주로 사용되던 전법으로 '적이 쳐들어올 것으로 예상되는 지역의 모든 것을 훼손시킨 뒤 성을 지켜 싸우는 방어 전술'인 청야수성(淸野守城), '성에 들어가 지키며 적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기 위해 들판을 비우는 전술'인 견벽청야(堅壁淸野)라고도 불린다.
청야전술이 활용된 역사적인 사건으로는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했던 살수대첩, 조선시대 때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이 있다.
또 세계사적으로는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에서 러시아가,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과 소련 사이에 일어난 전쟁에서 소련이 청야 전술을 활용한 사례가 있다.
▶️ 堅(굳을 견)은 ❶회의문자로 土(토)와 臤(간)의 합자(合字)이다. 臤(간)은 단단하다는 뜻을 가지고 있으므로, 단단한 흙이라는 뜻이다. 전(轉)하여 널리 '단단하다'의 뜻이 있다. ❷회의문자로 堅자는 '굳다'나 '단단하게 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堅자는 土(흙 토)자와 臤(굳을 간)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臤자는 신하가 손을 올리고 있는 모습을 그린 것으로 '어질다'나 '굳다'라는 뜻이 있다. 堅자는 이렇게 '굳다'라는 뜻을 가진 臤자에 土자를 더한 것으로 '땅을 굳게 하다' 즉, '땅을 단단하게 하다'라는 뜻을 표현했다. 그래서 堅(견)은 ①굳다 ②굳어지다 ③굳게 하다 ④단단하게 하다 ⑤굳세다 ⑥강(強)하다 ⑦변(變)하지 아니하다 ⑧갑옷 ⑨갑주(甲胄: 갑옷과 투구) ⑩굳게 ⑪튼튼하게,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굳을 고(固), 굳을 경(硬), 굳을 확(確), 굳을 확(碻), 굳을 공(鞏)이다. 용례로는 굳게 지니는 일을 견지(堅持), 굳세고 단단함을 견고(堅固), 확실하고 틀림이 없음을 견실(堅實), 단단하여 쉽게 부서지지 않음을 견뢰(堅牢), 굳세고 힘이 강함을 견강(堅强), 굳게 약속함을 견약(堅約), 단단하고 날카로움을 견리(堅利), 단단한 돌을 견석(堅石), 굳게 포위함을 견위(堅圍), 절기가 있고 굳셈을 견절(堅決), 굳고 단단한 성을 견성(堅城), 성품이 단단하고 빳빳함을 강견(剛堅), 어떤 단체나 사회에서 중심이 되어 활동하거나 중요한 구실을 하는 사람을 중견(中堅), 견고한 갑옷과 날카로운 병기란 뜻으로 강한 군대를 이르는 말을 견갑이병(堅甲利兵), 방비가 튼튼한 성과 훌륭한 갑옷이란 뜻으로 적과 싸워 이길 만한 만반의 준비를 이르는 말을 견성이갑(堅城利甲), 중국 전국시대의 공손용이 내어 건 일종의 궤변으로 이를테면 단단하고 흰 돌은 눈으로 보아서는 그것이 흰 것을 알 수 있으나 단단한지는 모르며 손으로 만져 보았을 때에는 그것이 단단한 것인 줄 알 수 있을 뿐 빛깔은 흰지 모르므로 단단하고 흰 돌은 동일한 물건이 아니라고 설명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견백동이(堅白同異),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 수단을 이르는 말을 견벽청야(堅壁淸野), 굳기가 쇠나 돌같다는 뜻으로 약속이나 맹세가 금석과 같이 굳고 변함없이 단단함을 이르는 말을 견여금석(堅如金石), 굳게 참고 견디어 마음을 빼앗기지 아니한다는 말을 견인불발(堅忍不拔), 끝까지 굳게 참고 견딘다는 말을 견인지종(堅忍至終), 기초의 튼튼하기가 반석과 같다는 말을 견여반석(堅如盤石), 맑은 절조를 굳게 가지고 있으면 나의 도리를 극진히 하는 것을 이르는 말을 견지아조(堅持雅操), 굳건한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안전한 곳에 들어앉아서 남의 침범으로부터 몸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견벽불출(堅壁不出) 등에 쓰인다.
▶️ 壁(벽 벽)은 ❶형성문자로 뜻을 나타내는 흙 토(土; 흙)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막다의 뜻을 나타내는 글자 辟(벽)으로 이루어졌다. 흙을 쌓아 올려 안과 밖을 구별하여 막다, 전(轉)하여 집의 벽을 가리킨다. ❷회의문자로 壁자는 '벽'이나 '낭떠러지', '성의 외곽'이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壁자는 土(흙 토)자 辟(피할 피)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辟자는 죄수나 하인을 그린 것으로 '피하다'나 '벗어나다'라는 뜻을 갖고 있다. 담벼락은 외부로 하여금 내부를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니 壁자에 쓰인 辟자는 그러한 의미가 담긴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壁자는 흙을 쌓아 외부의 시선을 피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壁자가 항상 흙으로 만들어진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담벼락처럼 큰 낭떠러지도 壁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적벽대전(赤壁大戰)으로 유명한 중국 허베이성의 적벽산(赤壁山)이 바로 그러하다. 그래서 壁(벽)은 (1)바람벽 (2)벽성(壁星) 등의 뜻으로 ①벽, 담 ②진터 ③군루(軍壘) ④나성(羅城: 성의 외곽) ⑤별의 이름 ⑥낭떠러지 ⑦진지를 굳게 지키다, 따위의 뜻이 있다. 용례로는 여러 사람에게 알리는 기사를 적어 벽이나 게시판에 붙이는 종이를 벽보(壁報), 벽에 색칠을 하는 일을 벽채(壁彩), 벽에 바르는 흙을 벽토(壁土), 방안의 벽에다 아궁이를 내고 굴뚝에 벽 속으로 통하게 한 난로를 벽로(壁爐), 벽에 쓰거나 써 붙이는 글을 벽서(壁書), 바람벽을 뚫어 작은 문을 내고 그 안에 물건을 넣게 된 곳을 벽장(壁欌),건물이나 무덤 따위의 벽에 그린 그림을 벽화(壁畫), 벽에 바르는 종이를 벽지(壁紙), 담과 벽을 아울러 이르는 말을 장벽(墻壁), 칸막이로 가리어 막은 벽을 장벽(障壁), 벽과 같이 깎아지른 듯한 물가의 해안 절벽을 안벽(岸壁), 깎아지른 듯이 험하게 솟은 바위를 암벽(巖壁), 성의 담벼락을 성벽(城壁), 외부로부터 쳐들어오는 것을 막는 담벼락을 방벽(防壁), 가파르고 급한 낭떠러지를 절벽(絶壁), 빈한한 집안이라서 아무것도 없고 네 벽만 서 있다는 뜻으로 살림이 심히 구차함을 이르는 말을 가도벽립(家徒壁立), 집안이 네 벽 뿐이라는 뜻으로 집안 형편이 매우 어렵다는 것을 이르는 말을 가도사벽(家徒四壁), 뚫어진 창과 헐린 담벼락이라는 뜻으로 무너져 가는 가난한 집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풍창파벽(風窓破壁), 쇠로 된 성과 철로 만든 벽이라는 뜻으로 방비가 매우 견고한 성 또는 사물이 대단히 견고하여 치기 어려움을 이르는 말을 금성철벽(金城鐵壁), 벽을 향하고 아홉 해라는 뜻으로 한 가지 일에 오랫동안 온 힘을 쏟음을 비유하여 이르는 말을 면벽구년(面壁九年), 선종의 개조 달마 대사가 승산 소림굴에서 벽을 향하여 참선하기를 9년 동안 하여 도를 깨달았다는 옛일을 일컫는 말을 구년면벽(九年面壁),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 수단을 이르는 말을 견벽청야(堅壁淸野), 얼굴을 벽에 대고 도를 닦는 것을 이르는 말을 면벽수도(面壁修道), 벽을 깨고 날아갔다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이 갑자기 출세함을 이르는 말을 파벽비거(破壁飛去), 벽에 가득히 걸거나 붙인 글씨와 그림을 일컫는 말을 만벽서화(滿壁書畫), 벽을 향(向)하고 앉아 마음을 가다듬어 참선 수행하는 일을 일컫는 말을 면벽참선(面壁參禪), 매우 견고함을 일컫는 말을 금산철벽(金山鐵壁), 하얗게 꾸민 벽과 깁으로 바른 창이라는 뜻으로 미인이 거처하는 곳을 이르는 말을 분벽사창(粉壁紗窓), 굳건한 벽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오지 않는다는 뜻으로 안전한 곳에 들어앉아서 남의 침범으로부터 몸을 지킴을 이르는 말을 견벽불출(堅壁不出) 벽면과 천장에 그림이 그려져 있는 무덤을 일컫는 말을 벽화고분(壁畵古墳) 등에 쓰인다.
▶️ 淸(맑을 청)은 ❶형성문자로 清(청)의 본자(本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삼수변(氵=水, 氺; 물)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동시에 푸른 색깔이나 깨끗이 맑아져 있는 일의 뜻을 가진 靑이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맑고 깨끗한 물(水)의 뜻이 합(合)하여 맑다를 뜻한다. 淸(청)은 물이 깨끗이 맑다, 맑은 물, 맑다, 깨끗이 하다, 상쾌하다 따위 여러 가지 뜻으로 쓰인다. ❷회의문자로 淸자는 '맑다', '깨끗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淸자는 水(물 수)자와 靑(푸를 청)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靑자는 우물가에 핀 푸른 초목을 그린 것으로 '푸르다'라는 뜻이 있다. 淸자는 이렇게 '푸르다'라는 뜻을 가진 靑자에 水자를 결합한 것으로 물이 푸를 정도로 맑다는 뜻을 표현하고 있다. 그래서 淸(청)은 ①맑다 ②깨끗하다 ③탐욕(貪慾)이 없다 ④빛이 선명(鮮明)하다 ⑤사념이 없다 ⑥분명(分明)하다 ⑦한가(閑暇)하다 ⑧고요하다(조용하고 잠잠하다) ⑨끝장을 내다 ⑩거스르다 ⑪차갑다 ⑫한랭(寒冷)하다 ⑬맑은 술 ⑭꿀 ⑮뒷간 ⑯청(淸)나라, 따위의 뜻이 있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는 맑을 렬/열(洌), 맑을 담(淡), 맑을 숙(淑), 맑을 호(淏), 물 맑을 식(湜), 물 맑을 영(渶), 맑을 재(渽), 맑을 린/인(潾), 맑을 징(澄), 맑을 철(澈), 맑을 담(澹), 맑을 찬(澯) 맑을 정(瀞) 맑을 류/유(瀏), 물 맑을 형(瀅),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흐릴 탁(濁)이다. 용례로는 날씨가 맑고 밝음을 청명(淸明), 날씨가 맑고 따뜻하다는 청양(靑陽), 맑고 아름다움을 청아(淸雅), 부드럽고 맑게 부는 바람을 청풍(淸風), 청백하여 가난함을 청빈(淸貧), 청렴하고 결백함을 청백(淸白), 맑고 순박함을 청순(淸純), 맑고 깨끗함을 청결(淸潔), 맑고 깨끗함을 청정(淸淨), 맑고 바름을 청정(淸正), 깨끗한 정조를 청조(淸操), 성품이 고결하고 탐욕이 없음을 청렴(淸廉), 깨끗이 소제함을 청소(淸宵), 잘못이나 악인을 없애어 맑게 함을 숙청(肅淸), 성품이나 언행이 맑고 깨끗함을 숙청(淑淸), 날씨나 빛깔 따위가 산뜻하고 맑음을 경청(輕淸), 빛깔이 희고 품질이 썩 좋은 꿀을 백청(白淸), 벌집에서 떠낸 그대로의 꿀을 생청(生淸), 산 속에 있는 나무나 돌 사이에 석벌이 친 꿀을 석청(石淸), 물 같은 것이 몹시 맑고 깨끗함을 징청(澄淸), 매우 맑고 시원함을 여청(餘淸), 황하의 물이 맑아짐이라는 뜻으로 아무리 하려고 해도 실현되지 않음을 비유하는 말을 하청(河淸), 마음이 맑고 깨끗하며 재물 욕심이 없음을 일컫는 말을 청렴결백(淸廉潔白), 청렴결백하고 가난하게 사는 것을 옳은 것으로 여김을 일컫는 말을 청빈낙도(淸貧樂道), 마음을 깨끗이 하고 욕심을 적게 함을 이르는 말을 청심과욕(淸心寡欲), 맑은 것과 탁한 것을 함께 삼킨다는 뜻으로 선악을 가리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임 또는 도량이 큼을 이르는 말을 청탁병탄(淸濁倂呑), 어지럽지 않은 맑고 밝은 세상을 일컫는 말을 청명지세(淸明之世), 결백하고 허례허식이 없는 선비를 일컫는 말을 청소지사(淸素之士), 심경의 열을 풀어 화기를 내림을 일컫는 말을 청심강화(淸心降火), 맑고 평안한 세상을 일컫는 말을 청평세계(淸平世界), 조용하고 여유가 있는 즐거움을 일컫는 말을 청한지환(淸閑之歡),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이라는 뜻으로 결백하고 온건한 성격을 평하여 이르는 말을 청풍명월(淸風明月) 등에 쓰인다.
▶️ 野(들 야, 변두리 여, 농막 서)는 ❶형성문자로 埜(야)는 고자(古字), 墅(야)는 동자(同字)이다. 뜻을 나타내는 마을 리(里; 마을)部와 음(音)을 나타내는 予(여, 야)가 합(合)하여 이루어졌다. 予(여, 야)는 물건과 물건을 강제로 떼어놓는 일이나 침착하여 초조하지 않음을 나타낸다. 里(리)는 사람이 사는 곳, 野(야)는 마을에서 떨어진 곳, 넓고 넓은 곳을 나타낸다. 도시의 언저리를 郊(교)라고 하고 郊(교)의 언저리를 野(야)라 한다. 옛 글자체는 숲(林)과 흙(土)을 합(合)한 것(埜)이며 나무가 난 곳을 나타낸다. ❷회의문자로 野자는 '들판'이나 '교외'라는 뜻을 가진 글자이다. 野자는 里(마을 리)자와 予(나 여)자가 결합한 모습이다. 予자는 실을 감는 '실패'를 그린 것이지만 여기에서는 '여, 야'로의 발음역할만을 하고 있다. 그런데 野자의 갑골문을 보면 土(흙 토)자와 林(수풀 림)자가 결합한 埜(들 야)자가 그려져 있었다. 이것은 흙과 나무가 많은 곳을 표현한 것으로 숲이 우거져 있는 '들판'이나 '교외'라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나 소전에서부터는 里자가 교외 지역의 의미를 대신하게 되었고 予자는 발음역할을 하게 되면서 지금의 野자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그래서 野(야, 여, 서)는 먼저 들 야의 경우는 ①들, 들판(야) ②민간(民間: 일반 백성들 사이)(야) ③문밖, 마을, 시골(야) ④성(城) 밖, 교외(郊外)(야) ⑤구역(區域), 범위(範圍)(야) ⑥별자리(야) ⑦야생(野生)의(야) ⑧질박하다(꾸민 데가 없이 수수하다)(야) ⑨촌스럽다, 꾸밈새가 없다(야) ⑩길들지 않다(야) ⑪서투르다, 익숙하지 못하다(야) ⑫거칠다(야) ⑬등한하다(무엇에 관심이 없거나 소홀하다), 사리에 어둡다(야) ⑭비천하다(야) ⑮미개하다(야) ⑯방종하다, 자유분방하다(야) 그리고 변두리 여의 경우는 ⓐ변두리, 교외(郊外)(여) 그리고 농막 서의 경우는 ㉠농막(農幕: 농사짓는 데 편리하도록 논밭 근처에 간단하게 지은 집)(서) 따위의 뜻이 있다. 반대 뜻을 가진 한자는 아침 조(朝), 더불 여(與)이다. 용례로는 지능이 미개하고 문화가 극히 뒤떨어진 상태를 야만(野蠻), 들에서 나는 나물을 야채(野菜), 크게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는 희망을 야망(野望), 산이나 들에 저절로 나서 자람을 야생(野生), 마을에서 좀 멀리 떨어져 있는 들을 야외(野外), 들 가까이에 있는 나지막한 산을 야산(野山), 야망을 이루려는 마음을 야심(野心), 농사를 짓는 사람을 야민(野民), 야심을 품은 욕심을 야욕(野慾), 들에서 하는 싸움을 야전(野戰), 성질이나 행동이 야하고 비루함을 야비(野卑), 좋지 못한 목적 밑에 서로 어울림을 야합(野合), 들에 친 진영 또는 거기서 하는 생활을 야영(野營), 교양이 없고 거친 사람을 야인(野人), 어떤 갈래에 달린 범위나 부문을 분야(分野), 여당과 야당을 여야(與野), 눈의 보는 힘이 미치는 범위를 시야(視野), 지표면이 평평한 넓은 들을 평야(平野), 아득하게 너른 벌판을 광야(廣野), 나무가 무성한 들을 임야(林野), 초야에 파묻혀 있음을 재야(在野), 두더지의 혼인이라는 뜻으로 허영심 또는 동류는 동류끼리 잘 어울림을 비유하는 말을 야서혼(野鼠婚), 현명한 사람이 모두 등용되어 민간에 인물이 없음을 이르는 말을 야무유현(野無遺賢), 아무렇게나 지은 시골집을 일컫는 말을 야옥촌사(野屋村舍),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꿩을 사랑한다는 뜻으로 아내를 소박하고 첩을 좋아함 또는 흔한 것을 멀리하고 언제나 새롭고 진귀한 것을 중히 여김을 일컫는 말을 가계야치(家鷄野雉), 집의 닭을 미워하고 들의 물오리를 사랑한다는 뜻으로 일상 흔한 것을 피하고 새로운 것 진기한 것을 존중함을 비유하는 말을 가계야목(家鷄野鶩), 성벽을 견고히 지키고 들의 작물을 거두거나 가옥을 철거하여 쳐들어오는 적에게 양식이나 쉴 곳의 편의를 주지 아니한다는 뜻으로 우세한 적에 대한 작전 수단을 이르는 말을 견벽청야(堅壁淸野), 외로운 구름이요 들의 학이라는 뜻으로 속세를 떠난 은사를 가리키는 말을 고운야학(孤雲野鶴), 산꿩과 들오리라는 뜻으로 성미가 사납고 제 마음대로만 하려고 해 다잡을 수 없는 사람을 비유해 이르는 말을 산계야목(山鷄野鶩), 이리 새끼는 사람이 길들이려고 해도 본래의 야성 때문에 좀체로 길들여지지 않는다는 말로서 흉폭한 사람이나 신의가 없는 사람은 쉽게 교화시킬 수 없음을 이르는 말을 낭자야심(狼子野心), 산 속에 자리 잡은 넓고 편평한 땅을 일컫는 말을 산중개야(山中開野), 두 다리의 여우라는 뜻으로 마음이 음흉하고 욕심이 많은 사람을 두고 이르는 말을 양각야호(兩脚野狐), 기름진 들판이 천 리에 달한다는 뜻으로 끝없이 넓은 기름진 들판을 이르는 말을 옥야천리(沃野千里), 산과 들에 가득히 뒤덮임을 일컫는 말을 만산편야(滿山遍野), 끝이 없이 넓은 들을 일컫는 말을 무변대야(無邊大野), 한가로운 구름 아래 노니는 들의 학이란 뜻으로 벼슬과 어지러운 세상을 버리고 강호에 묻혀 사는 사람을 나타냄 또는 한가로운 생활로 유유자적하는 경지를 이르는 말을 한운야학(閑雲野鶴) 등에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