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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삼용 요셉 신부님의 묵상글
<너희도 준비하고 있어라>
스쿠버를 배울 기회가 있었습니다.
사실 저도 물에 빠져 죽을 뻔한 기억이 있어서 물은 좋아하는 편이 아니지만
그런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계기도 될 것 같아서 일부러 배워봤습니다.
10미터 이상 내려가서 달랑 호흡기 하나에 목숨을 맡기고 있기란 여간 두려운 것이 아닙니다.
호흡기가 빠지지나 않을까, 산소가 부족하지나 않을까 등의 생각이 머리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그런데 물속에 있다 보니 세상의 삶과 닮아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속에서 두려움 때문에 긴장을 하면 숨을 몰아쉬게 되어 허파 속의 공기가 다 빠져나가지 않게 됩니다.
그러면 몸이 차분히 가라앉지 않고 붕 뜨게 되고 시야는 매우 좁아져서 아무 것도 보이지 않게 됩니다.
공기는 충분히 있으니 한숨을 내쉬듯 끝까지 숨을 내뱉는 연습을 합니다.
물속에서 내 안에 있는 숨을 하나도 남김없이 모조리 내뱉는다는 것은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그 두려움이 가슴으로만 숨을 빨리 쉬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죽으면 죽는다는 생각으로 숨을 끝까지 다 내뱉으면 새로운 세상이 펼쳐집니다.
몸이 아래로 가라앉으면서 아름다운 산호초와 물고기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시야가 넓어지면서 바다 속의 평화로움과 만나게 됩니다.
그때서야 비로소 즐기게 되는 것입니다.
옆에는 항상 나를 지켜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을 믿기만 한다면 산소가 다 떨어져도 마스크가 벗겨져도 발이 산호에 끼어도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두려움에 당황하니까 사고가 생기는 것입니다.
즐기려면 두려움을 없애야 하고
두려움을 없애기 위해서는 믿어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너희들 작은 양떼야, 두려워하지 마라.”고 말씀을 시작하십니다.
양떼는 목자가 있습니다.
목자는 푸른 풀밭으로 양떼를 이끌 책임이 있습니다.
주님은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라고 말씀하시며
그냥 믿기만 하면 영원한 행복의 나라로 우리를 이끄실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믿음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스스로 우리를 챙겨야 합니다.
더 산소를 많이 들이마시기 위해 숨을 가쁘게 쉬는 것과 같습니다.
두려움은 다 내어주지 못하게 하고 더 챙기려고만 하게 만듭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려움을 이기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주십니다.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남은 것을 주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가진 것을 팔아서라도 내 안의 것을 빼어내라는 것입니다.
돈은 마치 산소처럼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 되는 피와 같은 존재입니다.
그렇더라도 피는 돌지 않아도 썩고 죽지 않으면 새 것이 나올 수 없습니다.
아무리 산소를 많이 들이마시려고 하더라도 몇 분을 버틸 수 없습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 때는 숨을 배로 쉽니다.
끝까지 들이마시고 끝까지 편안하게 내뱉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욕심이 생기기 시작하면서부터 무언가를 잃지 않으려고 숨을 가슴으로만 쉬게 됩니다.
긴장이 되면 가슴으로만 빠르게 숨을 쉬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배가 차가워지게 되고 몸에 이상이 오게 됩니다.
돈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자꾸 움켜쥐려고 하는 것이 두려움이고 그 두려움 때문에 세상을 즐기지 못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내어놓을 줄 아는 사람에게 부족함 없이 채워줄 것임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면 계산하지 말고 믿어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 새들까지도 먹이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둔 이들입니다.
결국 두려움이 인생을 경직되게 만들고 병들게 만들고 즐기지 못하게 만드는데,
그 두려움은 믿지 못하는 교만으로부터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하트 오브 더 씨(In the Heart of the Sea)>라는 영화는
두려움이 무엇으로부터 시작되고 또 무엇으로 나타나며 그러면 삶이 어떻게 되는가를 잘 그려주고 있습니다.
이 영화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서 위대한 소설 <모비딕>의 소재가 되게 됩니다.
이 이야기는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부와 권력을 이용해 낙하산으로 선장이 되어 가문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고래 잡는 배를 탄 한 사람과
농민 출신으로 신분 상승을 통해 선장을 해 보려는 야망을 지닌 일등 항해사의 갈등을 배경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1800년대 고래 기름으로 불을 밝힐 수 있음을 알게 된 후 전 유럽은 고래잡이 열풍이 불었습니다.
그래서 씨가 말라가는 고래를 찾아 두 야망을 품은 이들은 여럿의 선원들을 이끌고 아주 먼 곳까지 갑니다.
이 둘은 서로의 야망 속에서 질투하고 미워하며 누가 서로 많은 고래를 포획하느냐 경쟁까지 하게 됩니다.
그리고 배를 공격하는 거대한 고래가 산다는 곳까지 위험을 감수하고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나 결국 그 고래는 이 배들을 난파시키고 작은 보트에서 보잘 것 없이 바다에 표류하는 신세를 만들어버립니다.
그들은 먹을 것이 없어 먼저 죽은 사람의 인육을 먹어가면서까지 연명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깨닫습니다.
결국 가문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는 안 되는 두려움을 가진 선장은
그것 때문에 탐욕을 부리게 되었고 자연의 섭리 앞에 굴복하여 바다 위에서 죽을 운명만 기다려야 하는 초라한 신세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일등 항해사 또한 선장이 되고 싶은 탐욕으로 그 큰 고래를 화나게 하여 많은 사람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 되어버린 것에 대해
더 이상 고래를 향해 작살을 던질 수 없게 됩니다.
이들은 죽기 직전에 기적적으로 구조되었고 이젠 땅 위에서 두려움 없이 살아갑니다.
고래잡이 산업의 하락을 막기 위해 괴물 고래가 존재한다는 것을 감추려고 하는 이들 앞에서
이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포기하며 당당히 진실을 밝힙니다.
자유로워진 것입니다.
두려움이 없어진 것입니다.
왜냐하면 겸손해졌기 때문입니다.
결국 두려움으로 자기만을 챙기려고 하는 것을 잠자는 삶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 없이 나눔의 삶을 사는 것을 깨어있는 삶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주인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그리고 그 깨어있는 종들이란 자신의 믿음으로 두려움 없이 나눌 줄 아는 이들입니다.
“주인이 자기 집 종들을 맡겨 제때에 정해진 양식을 내주게 할 충실하고 슬기로운 집사는 어떻게 하는 사람이겠느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것을 이웃을 위해 내어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닌 집사들입니다.
내 것을 먼저 챙기다가는 노아의 홍수 때처럼 망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두려움으로 세상을 한 번 즐겨보지도 못하고 죽게 되는 이들입니다.
금융 위기 당시 세계 94위 갑부였던 독일 아돌프 메클레(74세) 회장은
재산이 몇 조대로 떨어져서 달리는 기차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이전에는 몇 십조대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재산이 얼마인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느냐 안 받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교만한 사람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 타인과 자연에 해를 입히고 그 벌을 받고야 맙니다.
지금 온난화도 인간의 이기주의가 자연을 훼손하여 벌을 받는 것입니다.
가진 것을 팔아서라도 내어줄 줄 아는 사람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을 즐기지도 못하고 구원받지도 못합니다.
이 연습을 하는 것이 십일조입니다.
십분의 일을 바치는 것도 두렵다면,
오늘 복음말씀으로 치자면 깨어있지는 못하다고 말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의 묵상글
언젠가 인터넷에서 ‘10년 후의 편지’라는 제목의 글이 돈 적이 있습니다.
우선 그 ‘10년 후의 편지’ 전문을 올려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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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4월 13일에 열어봐!
발신인 테일러 스미스, 수신인 테일러 스미스.
'오늘 기도는 했어? 비행기는 타 봤니? 다른 나라엔 가 봤어? 닥터 후는 아직도 TV에서 방영해?‘
- 중략 -
내가 지금 이 편지를 쓰고 나서 10년이 지났다는 거 알지?
살다 보면 좋고 나쁜 일은 일어나기 마련이야.
그게 삶의 이치이고, 넌 그저 거기에 맞춰 살아야 해.
넌 잘 이겨낼 수 있을 거야.
그럼 안녕,
테일러 스미스가.'
미국 테네시주 존슨시티에 살던 12세 테일러의 자신에게 쓴 편지입니다.
그런데 이 소녀는 자신의 편지를 직접 볼 수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이 편지를 쓰고 1년이 지나서 급성 폐렴으로 주님 곁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편지를 그의 부모가 발견했고,
늘 긍정적이었던 딸의 존재를 알리기 위해 인터넷에 공개했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편지를 읽고는 스스로의 삶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저 역시 10년 뒤의 편지를 한 번 써보았습니다.
알 수 없는 미래의 시간이지만, 그래도 잘 될 것 같은 꿈과 희망을 갖게 됩니다.
설마 10년 뒤의 편지를 쓰면서 ‘난 틀려먹었어. 난 안 돼.’라면서 부정적이고 소극적인 생각을 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저 역시 엄청나게 긍정적인 마음, 그리고 대범한 생각을 갖고 미래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바로 그때 이런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어떨까 싶습니다.
이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확실한 준비가 아닐까요?
그런데 더 중요한 준비를 할 시간이 있습니다.
이 역시 미래이지만,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달려 있는 마지막 순간,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대한 준비입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이 준비에 대한 말씀을 해주십니다.
주님께서 다시 오셔 우리를 심판하는 그날과 그때를 모르기 때문에,
언제 올지 모르는 그날을 위해 깨어 준비하고 있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주인이 와서 볼 때 깨어 있는 종들이 행복하다고 하시지요.
성지에서 종종 아이를 데리고 오시는 부모들을 봅니다.
그런데 그 부모의 시선은 거의 비슷합니다.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자기 자녀에게 있습니다.
미사를 봉헌하고, 기도를 하면서도 계속 아이를 살펴봅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아이가 울면 부모는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아이를 향해 달려 갈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근처에서 아이를 계속 살피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을 준비하는 것도 이런 것이 아닐까요?
아이를 계속 살피고 있었던 모습처럼, 주님을 계속 살피고 있다면,
즉 주님과의 관계의 끈을 계속 이어나가고 있는 것이야말로 주님을 맞이하는 가장 훌륭한 준비가 될 것입니다.
지금 나는 주님과의 어떤 관계를 맺고 있을까요?
그래서 얼마나 마지막 날에 대한 준비를 하고 있었을까요?
- 인천교구 갑곶성지
♣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의 묵상글
<허리에 띠를 매고>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은 우리의 생각을 뛰어넘는 큰 사랑입니다.
주인이 오히려 종에게 시중을 드는 역설적인 모습으로 다가오는 사랑입니다.
이 시간 주님의 사랑 안에 머물 수 있는 은총이 함께하기를 바랍니다.
이태리 밀라노의 대성당에는 문이 셋이 있는데
첫째 문은 아치로 되어 있고 “모든 즐거움은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문은 십자가형으로 되어 있는데 “모든 고통도 잠깐이다.”라는 글이 새겨져 있고,
셋째 문에는 “오직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이다.” 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즐거움도 잠깐이고 고통도 잠깐인데
중요한 것은 영원한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로 부름을 받았고,
세례를 통하여 초자연적인 생명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의 상속자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모든 죄의 용서를 받은 것이고,
영원한 생명, 곧 하느님의 나라를 상속받을 수 있는 자격을 얻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여기서부터 영원한 생명을 잘 가꾸고 지켜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은혜가 아무리 풍요롭다 해도 담을 수 있는 그릇이 준비되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 놓고 있어라.”하고 말씀하셨습니다.
허리에 띠를 맨다는 것은 어떤 것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살핀다는 것입니다.
중동 사람들의 옷을 보면 통으로 짠 긴 옷입니다.
평상시에는 띠를 매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슨 일을 제대로 하려고 한다면 띠를 매고 몸을 단정하게 합니다.
거추장스런 것은 정리합니다.
마찬가지로 영적으로 띠를 맨다는 것은 우리 신앙 상태를 다시 추스르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한 순간에 일시적으로 성장하는 것도 아니고,
한 순간의 마음을 가지고 영생을 얻는 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열정적인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매일 매일 기도하며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서 준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매일이 은총의 기회입니다.
준비된 삶에 대해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하느님의 무기로 완전한 무장을 갖추십시오.
그리하여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고 의로움의 갑옷을 입고 굳건히 서십시오.”
(에페6,14-15)
하고 말하였습니다.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라!”
우리가 신앙을 추스르기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진리로 허리에 띠를 두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리는 곧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17장17절에는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디모테오 후서 3장 16절에서
“성경은 전부 하느님의 영감으로 쓰인 것으로,
가르치고 꾸짖고 바로잡고 의롭게 살도록 교육하는 데에 유익합니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느님의 말씀에 자신을 비추어 성찰하는 삶이 준비된 삶입니다.
우리가 매일 거울을 보고 몸단장을 하듯이
하느님의 말씀에 나를 비추어 보고 그에 걸맞는 삶을 다져가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영혼을 비추는 거울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따라서 말씀에 비추어 잘못된 것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라!’ 하였으면 용서해야 합니다.
‘사랑하라’ 하였으면 사랑해야 합니다.
‘선한 일을 행하라’. ‘자선을 베풀어라.’ 하였으면 선을 행하고 자선을 베푸는 것입니다.
그런데 왜 말씀대로 실천하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거울을 보고 얼굴에 흉한 것이 묻은 것을 알았는데 그냥 다니십니까?
아니잖습니까?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에 마음을 비추어 고칠 것은 고쳐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으로 무장된 사람은
다른 어떤 이론이나 유혹에도 당당히 물리칠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상황 앞에서도 당황하지 않고
분명하게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하게 됩니다.
그러나 준비되지 않은 사람은 우왕좌왕 흔들리고 맙니다.
말씀대로 행하기를 주저합니다.
그렇게 하면 불이익이 올 것 같은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야고보 사도는 말하였습니다.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사실 누가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면, 그는 거울에 자기 얼굴 모습을 비춰보는 사람과 같습니다.
자신을 비추어 보고서 물러가면, 어떻게 생겼었는지 곧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야고 1,22-25)
그러므로 여러분은 말씀을 듣고 그대로 행함으로써 행복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또한 등불을 켜 놓고 있으라고 하셨습니다.
등불을 지속적으로 켜 놓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하죠?
예, 기름이 필요합니다.
신앙생활을 하 는데 있어서 그 기름 역할을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기름은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신앙이 불타오르고 열심히 신앙생활을 지속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느님의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많은 분들이 영적인 체험을 하고 차원 높은 신앙생활을 하길 원하면서도
정작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고 말씀을 듣는 데에는 소홀합니다.
그러나 말씀을 듣지 않고는 결코 지속적인 열심을 갖지 못한다는 것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기름이 없으면 불이 꺼집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으로 함께하지 않으면 신앙이 쉽게 흔들리고 결국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말씀과 함께할 수 있는 기회를 자주 만들기를 바랍니다.
교우 여러분,
말씀을 들으십시오!
말씀 안에 모든 답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지혜와 명예와 성공, 부와 영원한 생명의 길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에로 가는 길에서 겪는 아픔의 위로와 힘이 말씀 안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통하여 위로와 기쁨, 평화와 영생기쁨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오늘 말씀 중에도 큰 희망을 주는 말씀은
‘깨어 있는 종들에게 그 주인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 깨어 준비하는 사람에게 천국에서 그만한 환대를 해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마지막 날 주님 앞에 나갔을 때 세상의 삶에서 뿌린 대로 거두게 될 것입니다.
아름답고 행복한 내일은 착실하게 준비한 사람에게만 찾아온다는 사실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주인이 밖에 나가 아직 오지 않았다면 종은 마땅히 주인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혹 주인이 더디 오려니 생각하고 나태하게 지냈다면
그는 주인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없는 법입니다.
그러니 종은 주인이 언제 오든 깨어 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준비한다는 것은 깨어 있는 것이요, 깨어 있다는 것은 곧 준비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는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인의 눈에 들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빛의 자녀이며 낮의 자녀입니다.
우리는 밤이나 어둠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다른 사람들처럼 잠들지 말고, 맑은 정신으로 깨어 있도록 합시다.”
(1테살 5,5-6)
세상에 한 가지 확실한 것과 한 가지 불확실한 것이 있는데,
확실한 것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이요, 불확실한 것은 그 죽는 날이 언제인지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에게도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심판의 주님께서 오신다면 어떤 모습으로 서 있을까 돌아봐야 하겠습니다.
사람의 아들이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오신다는 것이 긴장을 더해 주기도 하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살아있다는 것은 준비할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후회하지 말고 기회를 만들어 사랑을 실천하고, 용서와 화해를 미루지 않기 바랍니다.
이웃을 위한 희생을 감당하며 자선을 베푸는 일,
이 모든 것이 천상에 보화를 쌓는 일이니만큼 생각으로 머물지 않고 행동으로 옮겨야 하겠습니다.
아무쪼록 허리에 띠를 매고 등불을 켜는 가운데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미루지 않는 사랑을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 청주성모병원 행정부원장 겸 청주상당노인복지관장
♣ 송영진 모세 신부님의 묵상글
<보물을 하늘에 쌓아라.>
“너희는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어라.
너희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거기에는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루카 12,33-34)
‘가진 것을 팔아’ 라는 말씀은 “재물을 소유하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재물을 쌓아두려고 하지 마라.” 라는 가르침이기도 합니다.)
사실 재물은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은 잠시 보관하는 것뿐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지상의 재물은 언젠가는 먼지처럼 사라질 허무한 것이라는 점 때문에도 우리는 재물의 주인이 될 수 없습니다.
“자선을 베풀어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가르침입니다.
자선(이웃 사랑)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방법입니다.
반대로, 재물을 움켜쥐고 있으면서 자선을 베풀지 않는 것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을 스스로 거부하는 일이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부자가 와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방법을 물었을 때에도 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루카 18,22)
세속의 재물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해 주지 못합니다.
얻게 해 주기는커녕 방해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세속의 재물에서 해방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냥 버리기만 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 실천을 해야 합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그 부자에게 권고하신 것은 세 가지입니다.
“재물에 대한 애착을 버려라.
사랑을 실천하여라.
나를 따라라.”
이 말씀은 그 부자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하시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이 세 가지를 실천해야 합니다.
“너희 자신을 위하여” 라는 말씀은,
‘자선’의 일차적인 목적은 자기 자신의 구원이라는 가르침입니다.
물론 자선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도와주는 일이고, 겉으로 보기에는 ‘그 사람을 위해서’ 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자선을 통해서 하느님 나라의 시민 자격을 얻게 되기 때문에
결과를 놓고 보면, 자선은 자기 자신을 위한 일이 됩니다.
그래서 자선을 베푼 다음에 생색을 내면 안 됩니다.
우리가 자선을 베푼 것을 다른 사람들이 모르고 있어도 상관없습니다.
하느님께서 다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만일에 자선을 베풀 때 ‘사람들에게 칭찬을 받으려는 욕심으로’ 한다면,
그것은 ‘위선’이 되고, 위선자의 자선은 자선으로 인정받지 못합니다(마태 6,2).
“지금까지 한 말에 대해서 동의하고 공감하지만,
그래도 가족과 내가 먹고사는 문제를 도외시하고 자선만 베풀 수는 없지 않은가?”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열의만 있으면 형편에 맞게 바치는 것은 모두 기꺼이 받아들여지고,
형편에 맞지 않는 것은 요구되지 않습니다 .”
(2코린 8,12)
(가족은 굶주리게 하면서 자선만 실천하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닙니다.)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이라는 말은, ‘영원함’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생명, 평화, 행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보물을 하늘에 마련하여라.” 라는 말씀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보물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여라.” 라는 뜻입니다.
(우리가 마련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무상으로 주시는 것인데,
하느님은 지극히 공정하신 분이기 때문에 우리가 실천한 선행과 사랑을 결코 평가절하 하시거나 무시하시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실상 우리가 마련하는 것과 같습니다.)
“도둑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좀이 쏠지도 못한다.” 라는 말씀도 하늘나라 보물의 영원함을 뜻하는데,
하느님께서 한 번 주신 것을 취소하시거나 변경하시는 일은 결코 없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늘나라 보물의 영원함을 강조하시는 것은,
지상 재물의 허무함을 강조하시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무한 것들에 대한 집착 때문에 영원한 것을 얻지 못하는 것은 ‘어리석음’이고,
어차피 사라질 허무한 것들을 이용해서 영원한 것을 얻는 것은 ‘지혜’입니다.
“사실 너희의 보물이 있는 곳에 너희의 마음도 있다.” 라는 말씀은,
“무엇을 중요하게 생각하는가에 따라서 인생도 바뀌고 운명도 바뀐다.” 라는 뜻입니다.
세속의 재물, 권력, 명예 등을 중요하게 생각해서 그런 것들만 추구하는 사람은,
그런 것들이 허무하게 사라지는 것처럼 그 자신도 허무하게 사라질 것입니다.
원하는 것을 얻는다고 해도...
야고보서 저자는 그런 사람들에게 이렇게 경고합니다.
“자 이제, 부자들이여!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그대들의 금과 은은 녹슬었으며, 그 녹이 그대들을 고발하는 증거가 되고 불처럼 그대들의 살을 삼켜 버릴 것입니다.
그대들은 이 마지막 때에도 재물을 쌓기만 하였습니다.”
(야고 5,1-3)
(이 말을 간단하게 줄이면, “너무 늦기 전에 회개하여라.”입니다.)
그런 사람들과는 정반대로,
하느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것을 얻는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해서 얻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반드시 그렇게 된다는 믿음 속에서 사는 사람이 바로 신앙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세속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추구해서 얻은 사람을(성인을) 존경하고 본받으려고 노력합니다.
- 전주교구 / 함열본당 상지원 공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깨어 충실히 응답하는 복된 삶>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서의 공생활을 마치실 무렵
유대인들의 반대에 부딪쳐 고립되어 가고 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열 두 제자들과 추종하던 소수의 부인들을 가리켜 “작은 양 떼”라 하시며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 아버지께서는 그 나라를 너희에게 기꺼이 주기로 하셨다.” (12,32)
고 하십니다.
아마도 제자들은 적대자들의 반대를 받음은 물론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는 예수님에게서
그토록 기대했던 승리하는 메시아의 모습을 찾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그 상황에서 제자들은 인간적 실망감과 두려움에 빠져들었겠지요.
이런 그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늘 나라, 곧 하느님께서 지니신 모든 것을 기꺼이 주시기로 하셨다는 놀라운 약속을 전해주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이 이미 하느님과 함께 있다는 것이고, 하늘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늘 나라를 차지한다는 것은 세상 그 어떤 것에 비할 수 없는 선물입니다.
이 선물은 죽어도 죽지 않는 삶이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원한 생명 안에 머무르는 삶이며,
하느님과 함께 하는 최고의 행복입니다.
이어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함께 있는 이들이 살아야 할 삶이 무엇이며, 이 엄청난 선물을 받기에 합당한 자세가 무엇인지 알려주십니다.
하늘 나라를 차지하려면 우선
‘가진 것을 팔아 자선을 베풀고, 자신을 위하여 해지지 않는 돈주머니와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마련해야 합니다.’(12,33).
하늘 나라를 소유하고 하느님과 일치하려면
내가 지닌 모든 것을 내놓아 하고 애착을 두고 있는 것들에서 떠나서 다른 이들을 위해 내놓아 합니다.
자신이 아니라 타자에게 삶의 중심을 두고 살 때
축나지 않는 보물을 하늘에 쌓을 수 있다는 말씀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기 일에 바쁘고 자신의 원의와 욕구를 채우기 위해 자신을 떠나지 못합니다.
자신을 떠남으로써 하느님 안에서 자신을 만날 수 있고, 하느님으로 채워지는 행복을 맛볼 수 있는데도 말입니다.
다음으로 중요한 자세는 ‘깨어 있으라’는 것입니다.
깨어 있다는 것은 오시는 분이 누구인지 늘 의식하고 있음을 말합니다.
지금 무엇을 위해 여기에 있는지를 분명히 인식하는 것을 말합니다.
깨어 있음은 늘 하느님과 형제자매들에게 마음을 향하고 섬기기 위해 준비하며 기다리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깨어 준비하고 있는 이들을 행복하다 하십니다(12,37).
그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얼마나 자주 잠든 채 살아가는지 모릅니다.
'지금 이 순간’ 주님을 의식하고 그분께 내 마음과 눈과 몸을 집중하지 못하고 딴 데 마음을 두고 세상 것을 좇는 것입니다.
이미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시는데도 알아보지 못하고 사라져버릴 현세에서 행복을 찾으려 몸부림을 치기도 하지요.
다 헛되고 헛된 일입니다.
어디 그뿐입니까!
더불어 살아가는 이들의 아픔에 무관심하고 사회 문제에 대해 하느님의 말씀이 아닌 인간의 목소리만 따르는 것도 잠들어 있는 것입니다.
끝으로 하늘 나라를 선물로 받으려면,
깨어 기다리는 동안 확고한 믿음 안에서
충실하고 헌신적인 태도로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실행하여야 합니다.
매순간 주님의 은총이 폭포수처럼 쏟아지고 있음을 상기하며
그 은총을 받기에 합당한 삶을 헌신적으로 사는 것이 우리 각자의 몫입니다.
지금이 바로 안일함과 체념, 수동적이고 의존적인 삶의 태도를 버려야 할 때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뜻을 알면서도 자신을 내놓지 않고, 내 뜻을 성취하고 내가 바라는 것에 시선을 빼앗기지 않도록 깨어 있었으면 합니다.
깨어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해 주님 보시기에 좋은 자선과 정의를 실천함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고 하늘 나라를 차지하는 행복을 누릴 수 있길 희망합니다.
- 프란치스코회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의 묵상글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은 오늘 강론 주제입니다.
방금 흥겹게 노래한 ‘복되다, 주께서 당신 기업으로 뽑으신 백성이여!’ 화답송 후렴이
바로 주님 뜻에 따라 충실하고 슬기롭게 산 이들을 지칭합니다.
어제 오전 잠시 침을 맞으러 춘천에 갔다가 뜻밖에 한 가족을 만났습니다.
거의 25년 동안 알고 지내는 가족인데 거의 만나지 못했다가 어제 모처럼 만났습니다.
서울 생활을 접고 부부와 큰 딸, 그리고 장애 아이 작은 딸의 4식구가 시골 산골에 묻혀 13년째 생활하고 있는 가족입니다.
놀라운 것은 가족의 분위기입니다.
전혀 어둡고 무겁고 우울한 침체된 분위기가 아녔습니다.
25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밝고 명랑하고 활기있어 보이는 모습이 정말 좋았습니다.
“아, 은총으로 살아가는 가족이구나!”
찬탄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저희 수도원 역시 수도자들이 잘나서 살아가는 게 아니라 순전히 은총으로 살아갑니다.
제 주변에도 은총으로, 믿음으로 살아가는 이들이 참 많습니다.
바로 이 은총으로 살아가는 강원도 산골의 4식구의 삶의 비결을 발견했습니다.
장애아에 기울인 가족의 전폭적인 사랑이었습니다.
장애 딸 아이의 이름은 은혜(恩惠) 마르셀리나입니다.
나이 30이 거의 가까워지기까지 가족이 쏟은 사랑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그대로 은혜는 가족 일치의 중심이었고
은혜 이름 그대로 하느님의 은혜를 입은 가족임을 그 밝고 선(善)한 분위기에 즉시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은혜의 빛’입니다.
말 그대로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 칭찬받은 충실하고 슬기롭게 살아가는 종들같은 가족입니다.
과연 이 어둡고 혼란한 세상에서 어떻게 하늘의 별처럼 은혜의 빛을 발하며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을지 그 방법을 나눕니다.
첫째, 믿음으로써 살아가십시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
사실 옛 사람들은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아니 어찌 옛 사람들뿐이겠습니까?
오늘날 사람들 역시 믿음으로 인정을 받았습니다.
자산 중의 자산이 믿음이요 신뢰입니다.
불신불립이라 믿음을 잃으면 다 잃는 것이요 설 수도 없습니다.
이 회색 빛 절망의 시대에 믿음 없이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힘 중의 힘이 믿음의 힘입니다.
믿음의 힘은 그대로 하느님의 힘입니다.
끊임없는 간절한 기도를 통해 끊임없이 공급되는 믿음의 힘입니다.
하루하루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결국 하루하루 은총으로, 믿음으로 살아간다는 겸손의 자세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믿음 홀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희망하기에 항구한 믿음입니다.
사랑과 희망이 하나로 녹아있는 믿음입니다.
오늘 1독서 지혜서의 저자는 이집트 탈출의 하느님 위업을 상기시키며 믿음을 자극합니다.
그대로 믿음의 고백입니다.
‘과연 당신께서는 저희의 적들을 처벌하신 그 방법으로, 저희를 당신께 부르시고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고백입니까?
믿음의 고백을 통해서 하느님의 은혜를 깊이 깨닫는 우리들입니다.
오늘 히브리서 저자의 믿음의 고백은 얼마나 웅장한지요.
장강의 흐름같은 믿음의 고백입니다.
오늘 제2독서 히브리서는 원래 11장 40개 구절들의 일부입니다.
믿음으로써, 우리는 세상이 하느님의 말씀으로 마련되었음을, 따라서 보이는 것이 보이지 않는 것에서 나왔음을 깨닫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그는 죽었지만 믿음 덕분에 여전히 말을 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써 에녹은 하늘로 들어 올려져 죽음을 겪지 않았습니다.
믿음으로써 아브라함은 장차 상속 재산으로 받을 곳을 향하여 떠나라는 가르침을 받고 그대로 순종하였습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믿음으로써 살아갔던 이들이 면면입니다.
성서의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바로 믿음의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들은 모두 믿음으로 살다가 믿음 속에 죽어 갔습니다.
약속된 것을 받지는 못하였지만 멀리서 그것을 보고 반겼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은 이 세상에서 이방인이며 나그네일 따름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니 실상 그들은 더 나은 곳, 바로 하늘 본향을 갈망하고 있었고 우리 또한 똑같습니다.
믿음도 보고 배웁니다.
이렇게 믿음의 선배들을 보고 배우는 우리들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믿음을 튼튼히 하는 우리들입니다.
둘째, 보물을 하늘에 쌓으십시오.
‘믿음의 삶’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희망의 삶’ 또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사랑의 삶’ 역시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위에서 인용한 장애아를 둔 4식구의 가정이 은혜의 빛으로 가득했던 것은 바로 하늘에 보물을 쌓았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헛된 보물을 진짜 보물인 줄 알고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여러분의 보물은 무엇입니까?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보물은 바로 그 사람 마음의 수준과 정도를 가리킵니다.
세상의 보물들은 모두가 헛됩니다.
죽어 아버지의 집에 귀가(歸家)할 때 가지고 갈 보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러니 살아 생전에 하늘에 보물을 쌓아두고 귀가할 때는 맨손으로 홀가분하게 가는 것입니다.
죽음의 귀가 시간에 하늘에 쌓아 놓은 보물이 없으면 얼마나 허전하고 당황스러울까요.
과연 얼마나 하늘에 보물을 쌓아 놨습니까?
그러니 저에게 최고의 보물은 하느님이십니다.
저뿐만 아니라 우리 수도자들은 물론 진정 믿는 이들의 보물은 하느님이십니다.
보물인 하느님을 사랑할 때 저절로 우리 마음은 하느님께 향하게 되고 하느님을 닮아갑니다.
하느님의 원하시는 바 신망애(信望愛)의 삶을, 진선미(眞善美)의 삶을 살게 되고, 바로 이것이 하늘에 보물을 쌓는 삶입니다.
특히 사랑의 자선도, 모든 이웃에 대한 선행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저에게 무료로 정성껏 침을 놔주는 침술사 형제님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믿음과 사랑으로 정성껏 이렇게 미사를 봉헌함도 하늘에 보물을 쌓는 것입니다.
지상에 보물을 쌓은 사람들은 부자 같지만 가난뱅이들이며,
하늘에 보물을 쌓은 사람들은 외관상 가난뱅이 같지만 실상 부자들입니다.
사람들이 모두 하늘에 보물을 쌓는 일에 전념한다면 세상은 참 아름답고 밝아질 것입니다.
죽어 아버지의 집에 귀가할 때 찬미와 감사노래 부르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떠날 것입니다.
그러니 매일매일 여러분의 하늘 금고를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깨어 사십시오.
종파를 초월하여 영성생활의 공통적 목표가 오늘 지금 여기 깨어 사는 것입니다.
깨어 있을 때 마음의 순수요 나쁜 생각도 들어오지 못합니다.
환히 영혼의 등불을 켜들고 깨어 기도하며 기다리며 준비하며 사는 것입니다.
막연한 침묵은 불가능하고 무가치 하듯이 막연한 깨어있음도 불가능하며 무가치합니다.
활짝 열린, 빛나는 깨어있음입니다.
주님을 기다릴 때 바로 활짝 열린 빛나는 깨어있음입니다.
기쁨과 설렘의 깨어있음입니다.
누구를, 무엇을 기다립니까?
기다리며 준비함이 없이는 깨어있음도 없습니다.
깨어있음 역시 주님의 은총임을 깨닫습니다.
깨어있을 때 깨달음이요 깨끗한 마음입니다.
모두 ‘깨’자 돌림의 은총입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와서 볼 때에 깨어 있는 종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띠를 매고 그들을 식탁에 앉게 한 다음, 그들 곁으로 가서 시중을 들 것이다.”
그러니 미사나 성무일도의 공동전례 때에는 반드시 깨어 있어야 합니다.
주님이 밤중에 오든 새벽에 오든 종들의 그러한 모습을 보게 되면 종들인 우리는 행복합니다!
“행복하여라,
주님이 돌아와서 볼 때에 그렇게 일하고 있는 종!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주님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그에게 맡길 것이다.”
주인을 주님으로 바꾸니 더욱 실감이 납니다.
그러니 준비하고 오늘 지금 여기서 충실하고 슬기롭게 살아야 합니다.
겸손과 온유, 기쁨과 평화, 찬미와 감사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않은 때에 주님은 오실 것입니다.
아니 죽음도 이렇게 오실 것입니다.
요즘 불볕 더위가 한창입니다.
이열치열(以熱治熱)입니다.
'불과 열아 주님을 찬미하라.
추위야 더위야 주님을 찬미하라.'
다니엘 찬가에서처럼 불볕 찬미로 불볕 더위를 통과해 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연중 제19주일,
우리 모두에게 충실하고 슬기로운 삶의 방법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1. 믿음으로써 살아가십시오.
2. 보물을 하늘에 쌓으십시오.
3. 깨어 사십시오.
이 거룩한 미사 시간 우리 모두 깨어, 믿음으로써, 하늘에 보물을 쌓는 시간입니다.
아멘.
- 성 베네딕토 수도회 성 요셉 수도원
♣ <굿뉴스> 매일미사 묵상글 담당 신부님의 묵상글
오늘 복음은 언제 올지 모르는 주인을 깨어 준비하고 있다가 문을 열어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주인이 온다는 것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넓은 의미로는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를 가리키는 것이며,
좁은 의미로는 하느님께서 개개인을 부르실 때를 의미하는 것이지요.
곧, 언제 어디서 나를 부르실지 모르는 하느님을 만날 준비를 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그 누구도, 언제 주님께 부름을 받을지 그 시기를 모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에서 하느님을 만나야 가장 기쁨이 넘치겠습니까?
나에게 주어진 일을 다 마쳤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일상생활 안에서는 맺고 끊지 못한 일들이 수두룩하지요.
마음먹었는데도, 정작 시작하지도 못한 일, 반도 끝내지 못한 일, 결실 없이 어지럽게 벌여만 놓은 일들이 수두룩합니다.
그러기에 나의 일을 다 마친 다음에 하느님을 뵙는다면 한 삶을 보람 있게 살았다고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잡히시기 전 하늘을 우러러보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하라고 맡기신 일을 완수하여, 저는 땅에서 아버지를 영광스럽게 하였습니다.”
(요한 17,4)
우리도 하느님께서 맡기신 일을 포기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물론 우리는 주님의 일 자체를 포기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가장 손쉬운 유혹은 “다음에 하자.”라는 속삭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미루다 보면 결국 끝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늘 허리에 띠를 두르고, 하느님을 맞을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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