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에서 / 179> (공연리뷰)
연출의 힘이 돋보이는 시각적 역동의 무대
경남도립극단 정기공연 <도가니 The Crucible>
김 문 홍
연극평론가
아서 밀러의 사회적 리얼리즘
아서 밀러는 미국 연극의 1세대인 유진 오닐의 뒤를 잇는 극작가로, 연극의 사회적 역할과 극적인 감동을 적절하게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리고 사회적 갈등에서 인간의 사회적인 면모뿐만 아니라 개인적인 고통까지 심도있게 묘사하는 힘을 보여, 테네시 윌리암스와 함께 미국의 현대연극을 정착시킨 극작가이다.
그는 연극의 기능 중에서 사회적 기능을 우위에 둔 작품을 여럿 빚어냈다. 즉, 연극은 관객을 감동시킬뿐만 아니라 그들의 생각을 변화시키고 나아가서는 행동으로까지 연결시키는 연극의 사회적 역할을 믿었다. 그의 그러한 연극적 비전이 잘 나타난 작품이 1952년에 발표한 <The Crucible>이다. ‘크루서블’의 본래 뜻은 ‘도가니’이다. 그런데 국내에서는 ‘시련’이라는 제명으로 번역되어 왔다.
이번에 제2대 경남도립극단의 예술감독으로 부임한 최원석은 그 첫 작품으로 아서 밀러의 사회적 리얼리즘을 택했다. 예술감독이 첫 작품으로 선택한 레퍼토리는 앞으로의 그의 작품의 지향점과 방향을 파악하는데 하나의 지표가 된다. 이번에 그의 첫 작품인 <도가니 The Crucible>(아서 밀러 작, 최원석 각색 연출, 165분, 2024.2.3.〜2.4, 김해문화의전당 마루홀)는, 1692년 북아메리카 메사추세츠 주 세일럼 마을에서 일어난 ‘마녀재판’에서 모티브를 가져와 창작한 작품이다.
아서 밀러가 이 작품을 발표한 시기는 2차대전이 끝난 후인 1950년대 미국 상원의원 조셉 메카시의 발언으로 공산주의 동조자를 색출하는 광풍이 일었던 그 무렵의 ‘메카시 선풍’을 17세기 말의 마녀재판으로 은유한 작품이다. 작품명인 도가니는 ‘불순물을 모두 제거하고 그 본질만 걸러내도록 아주 높은 온도에 금속을 녹이는 용기’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청교도의 교리와 교조주의적인 지배 체제에 걸림돌이 되는 주민들을 ‘마녀’로 몰아 재판한 것처럼, 소수의 극한적 이념 맹신자들에 의한 공산주의 동조자들을 색출한 메카시 선풍은 시대를 초월한 유사성이 있다.
애비게일(박예진 분)의 증오와 복수심이 불씨가 되어 온 마을을 도가니 끓듯 몰아세워 수많은 사상자를 낸 세일럼의 마녀 재판은 정의와 진실, 명예와 양심이라는 사회와 인간의 근원적 명제를 관객에게 제시하며, 지금 이곳을 살고 있는 우리는 어떤 도덕적 선택을 할 것인지를 관객에게 묻고 있다. 작가는 존 프록터(한갑수 분)와 그의 아내인 엘리자벳(윤재진 분)의 시련을 통해, 인간으로서의 올바른 품위를 지키는 일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가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연출의 힘이 돋보이는 무대 메커니즘과 연기 앙상블
스타니 슬라브스키가 메쏘드 연기로 배우 중심의 무대를 만들었다면 고든 크레이크는 연출 중심의 무대를 표현했다. 메쏘드 연기가 연기자의 경험과 정서의 융합으로 연기 표현을 유도했다면, 고든 크레이그는 작품의 기조를 이루는 것은 무대장치, 의상, 조명에서의 단순성에 주안점을 두었다고 볼 수 있다. 고든 크레이그는 연출 중심의 무대를 지향한 연출가이다.
이번 작품에서 최원석 연출은 무대 디자인과 장치에 공을 들이고 있다. 가장 돋보이는 것은 무대 디자인을 통한 주제의 상징과 은유이다. 전막에 걸쳐서 무대 디자인의 중추적 시각성은 천정에서 상하로 이동하는 직사각형 모양의 대들보인데, 이것은 곧 보이지 않는 권력적 속성으로서의 위압감을 은유하고 있다. 1막과 2막에서는 청교도의 금욕주의와 절대적 신성의 권력을 의미하고, 2막과 3막의 재판 장면에서는 교조주의적 권력의 위압감을 상징한다. 대들보와 같은 직사각형 구조물이 하강하는 시각적 장치를 통해 정의와 진실을 고수하는 존 프록터와 엘리자벳의 양심을 옥죄는 역할에 대한 은유적 상징을 의미하고 있다.
애비게일을 위시한 소녀들이 조종해 보이는 인형 오브제는 진실과 거짓, 양심과 허위, 순수한 영혼과 악령의 술수, 그리고 진실된 마음과 거짓 허위라는 상반된 감정을 시각화하고 있다. 또한 무대 우측에 실루엣으로 보이는 청교도 교회의 판자벽 일부가 무대 바닥에 떨어지는 것은 결국 청교도의 위선적 교주주의가 추락하는 의미를 은유하고 있는 것 같다. 1막과 2막에서의 무대는 직사각형의 회전 무대로 공간의 변화와 장면의 전환을 기능적으로 수행하고 있다. 또한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소녀들이 등퇴장하거나 마녀 재판의 희생자들의 시신 더미가 던져지는 것은, 페리스 목사가 주도하는 절대적 신성의 음험한 공간의 은유적 상징일 수 있다.
무대 후면의 배경막에 투사된 구조물의 뒤엉킴과 붉은 빛의 조명이 비치는 것은 세일럼의 마녀 재판과 메카시 광풍이라는 시대적 배경으로서의 사회 분위기를 시각적으로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이 작품은 연출자가 작품의 주제와 작가의 현실인식을 시각적으로 형상화하여, 서사의 진행에 따른 관객의 상상력에 하나의 방점처럼 순기능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그러나 관객이 그러한 시각적 기능을 통해 연출의 그러한 극적 상상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은 미지수이다.
연출은 자신의 이러한 극적 상상력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역할을 맡은 배우들의 연기, 움직임과 무대장치와의 접합을 통한 의미 칭출을 위해 끊임없는 연습을 통해, 두 개의 의미 구조가 서로 상충되지 않고 앙상블을 이룰 수 있도록 부단한 연출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흔적이 엿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시각적 효과가 너무 강해 배우들의 대사와 연기가 위축되어 보이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그리고 이 작품은 대사 위주의 연극이기 때문에 배우들의 화술이 정확하고 선명해야 하는데, 존 프록터 역의 한갑수, 존 헤일 목사 역의 장정식, 애비게일 역의 박예진, 판사 역의 몇몇 배우들을 제외하고는 전달력이 약한 것이 흠이다. 호흡 처리와 강약, 고저, 완급, 장단을 세밀하게 구사하는 화술의 정확한 구사는 배우의 필수 요목인 것을 다시 한번 실감하게 한다.
김문홍 제공
죽음을 각오한 진실과 정의의 승리
경남도립극단의 <리어왕>에서 박승규가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쳤듯, 이번 <도가니>에서는 존 프록터 역의 한갑수 배우 역시 명불허전의 연기를 펼치고 있어 단연 돋보인다. 존 프록터의 연기는 4막에서 극치를 이룬다. 한갑수의 연기는 대사와 몸이 따로 놀지 않고, 대사가 행위를, 행위가 대사의 추동력이 되어 서사를 이끌어 간다. 그의 다음과 같은 대사는 거의 전율에 가까울 정도의 에너지를 발휘한다.
“...그것이 내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내 평생 또 다른 이름은 가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 내 이름이 없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겠습니까? 난 당신에게 내 영혼을 주었습니다. 내 이름만은 나에게 남겨 주십시오.”
존 프록터의 대사는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준다. 그는 재판관의 집요한 설득으로 악마의 존재를 인정하는 거짓 자백서에 서명을 하려다가 멈춘다. 그의 서명으로 지금까지 희생당한 모든 사람들은 결국은 악마의 하수인이 되기 때문이다. 서명하면 자신은 살 수 있지만 그것은 구걸에 불과하다. 끝내 서명을 하지 않고 죽음을 택하게 된다. 이 작품은 상대를 시기 질투하고, 자신들의 이념에 굴복하지 않는 사람은 적으로 간주하고 내치며 들끓는 도가니 속 오늘의 사회에 대한 풍자적 비판이다.
이 작품은 모두 4막이지만 각 막마다 긴장과 이완, 대립과 갈등으로 증폭되어 4막에서 존 프록터의 죽음으로 결말을 맺는 구조로 되어 있어, 어느 한순간도 관객에게 빈틈을 허락하지 않는다, 최원석 연출은 음악을 절제하는 대신 시각화된 무대 디자인과 조명 플랜, 그리고 인형 오브제를 통한 연출력에다 반복 연습을 통한 배우들의 연기를 거기에다 접목하는 앙상블의 미학으로 승부수를 던지고 있다. 너무 강화된 시각적 미학 때문에 배우들의 연기가 도드라져 보이지 않는 흠이 있긴 하지만, 원작이 가지는 주제의식과 작가의 현실 인식을 선명하게 표현하는 연출력을 펼쳐 보인다. 배우들의 정확하고 안정된 화술, 각 장면 사이의 긴장과 이완을 적절하게 안배한 리듬과 템포만 잘 조율한다면 한층 더 승화된 작품으로 자리 잡을 것 같다.
일단 경남도립극단 제2대 예술감독인 최원석의 첫 연출은 성공적이다. 고든 크레이그의 무대 미학적인 시각적 요소로서의 연출력과 스타니 슬라브스키의 메쏘드 연기가 잘 접목된다면 보다 더 미학적인 작품으로 거듭나 감동으로서의 재미와 성찰,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능히 잡을 수 있을 것 같다. (2024년 2월 5일)
첫댓글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