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 의원 / 윤복진
우리 동네 차돌이
의원이라오.
동네 안에 이름 난
의원이라오.
앞담 밑에 흙 파서
가루약 지어,
풀이파리 따다가
싸서 주어요.
동네 애들 병나면
솔잎침 놓고,
약 한 봉지 써 주면
당장 나아요.
-『꽃초롱 별초롱』, 아동문예예술원, 1949/ 창비, 1997
감상 – 아동문학가 윤복진(1907〜1991)의 삶과 인간관계를 짚어볼 수 있는 자료가 많지 않은 가운데, 2022년 윤복진의 후손들이 보관하고 있던 상당한 자료가 대구시에 기증되었고 현재, 대구근대역사관에서 ‘동요의 귀환’이란 이름으로 윤복진 기증 유물 특별전(2024.1.30.〜3.31)이 이어지고 있다, 여느 때보다 윤복진에 대한 관심이 높을 때지만 윤복진 삶과 그 시대를 함께 조망하는 작업들은 더뎌 보인다. 먼저 동시 한 편을 읽어 보자.
『꽃초롱 별초롱』에 실린 「동네 의원」은 병원 소꿉놀이 장면을 노래한 것이다. 의사나 간호사가 환자를 진료하고 응급처치 하는 모습은 아이들 소꿉놀이의 단골 소재다. 내용은 간단하나 간단하게 말하고 쓰면서 흥얼거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끔 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동네 의원」은 의원의 여러 가지 일 중에 핵심적인 일을 언급하되 진부하지 않으면서 말을 재밌게 풀고 있다. 동네 의원은 결국 동네 아이 차돌이기도 하니 제목도 이중적인 의미를 잘 살렸다.
처방전이 나오면 가루약을 종이에 담아 몇 번이나 포개고 포개서 한 첩을 내고, 병의 정도에 따라 여러 첩 쓰게 되는 풍경이 그려지지만 소꿉놀이에선 담벼락 밑의 흙이 곧 가루약을 대신한다. 물약일 경우 홈이 파인 돌멩이에 흙과 물을 같이 넣고 더러 꼬챙이로 빻는 시늉도 할 것이다. 그래도 약이 듣지 않는다면 제일 무섭기도 하고 효험도 기대가 되는 주사를 놓아야 한다. 실제 주사기를 장만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주사기 대신 주변에 흔한 솔잎침이면 대용품으로 그만이다.
윤복진은 이런 내용을 압축해서 정감 있게 들려준다. 의도하지 않았어도, 아이들 노는 모습이 구체적이어서 시대 풍속에 대한 기록적 성격도 있다. 시의 형식도 노래로 불리는 것을 감안해서 음보의 반복과 함께 음절이나 음운의 유사성이나 겹침까지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이후 발표한 것으로 보이는 「솔잎침」 (1934)이란 노래까지 읽으면, 침 한 대 제대로 맞은 느낌이 든다.
우리 애기 우습지요
정말 우습죠.
그림책에 병정들이
싸움한다고
이놈, 이놈 가만있어
콕콕 침을 놔.
예끼 이놈! 한 대만
맞아 보아라.
싸움하는 그림책 병정에게 솔잎침을 놓는 아이 모습은 아닌 게 아니라 정말 우스워서, 다들 배꼽을 잡고 웃고 또 웃을 장면이다. 그러다가 현실을 돌아보게 되면 아주 웃지는 못하는 상황으로 몰리기 십상이다. 가까이 멀리 그림책 바깥의 어른들의 전쟁이 언제든 이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솔잎침」을 다시 읽으니, 자라는 아이 세대에게 반전과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고 어른들에게조차 경각심을 심어주는, 조금도 우습지 않은 훌륭한 노래란 생각이 든다. 전쟁을 조장하는 자에게 예끼 이놈! 하는 솔잎침이 듣지 않으면 대끼 이놈! 하는 대나무 회초리라도 들어야 한다는 마음이 생기는 것도 동심의 영향일 것이다.
동요를 접하며 윤복진에 대한 관심은 더 커지는데 윤복진에 관해서 단행본으로 출간된 책이 아직까지 없는 걸로 보인다. 부분적으로 언급되고 소개된 자료를 바탕으로 윤복진과 주변 관계를 대략적이나마 그려볼 필요를 느낀다. 윤복진은 대구 출신으로 1925년, 방정환이 주재하던 잡지 《어린이》에 동요 「별 따러 가세」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한다. 1926년엔 남산동 자택에서 소년 문예 단체인 ‘등대사’를 조직하여 서덕출, 신고송 등과 교류했다. 윤복진은 동요뿐만 아니라 각종 문예 평론에도 능했기에 해방 공간의 대표적인 아동문학인으로 자리매김한 인물이다. 처음에는 경향파 문학을 벗어나서 문학의 순수성을 지향하는 쪽이었으나 1945년 조선문학가동맹 아동문학 분과의 사무장이 되면서 사회주의 문학에 기울었고 그런 전력이 이후 가족을 남겨두고 월북하는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윤복진을 얘기할 때 자연스레 호명되는 장소와 이름이 있다. 장소는 민족자본으로 건립된 대구 최초의 백화점이란 평을 듣는 무영당이다. 같이 호명되는 이름은 윤복진과 더불어 서로 친밀하게 지내던 이근무, 박태준, 이인성이다. 이근무(1902〜)는 개성상인 출신으로 대구에 정착해서 무영당을 지은 사람이다. 대구종로초등학교 아래 무영당 서점(1923)으로 문을 연 이후 서적뿐만 아니라 운동구부, 회화부, 악기부, 잡화부 등을 신설해서 운영하다가 1937년 4층 규모의 백화점 건물로 신축하기에 이른다. 무영당은 물건을 사고파는 단순한 기능에서 벗어나서 예술인 교류의 장이 되었고 그들의 작품 출간과 전시, 각종 공연 등이 수시로 이루어졌던 공간이다.
이후 무영당의 용도도 주인도 바뀌어 가며 폐건물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가 다행히 보존 가치를 인정받아 복합문화공간으로서의 부활을 꾀하고 있다. 서성로 길 건너편 담교장(이상화 시인의 생가 사랑방: 현재 카페 ‘라일락 뜨락’ 운영 중)도 개인의 노력으로 유지가 되고 있는 만큼, 무영당과 담교장을 오가던 문인들의 면면과 발자취가 좀 더 고증이 되면 좋을 것이다.
윤복진은 당시 무영당이 복합문화공간으로 쓰이게끔 중심 역할을 한 인물이다. 박태준도 마찬가지다. 박태준(1900~1986)은 <오빠 생각>(최순애 시), <동무 생각>(이은상 시), <맴맴>(윤석중 시) 등을 작곡한 음악가다. 그의 형 박태원도 <클로멘타인> <켄터키 옛집> 등 주로 외국곡을 번안하고 소개했던 음악가다. 이상화 시인이 3.1 운동 이후 검거를 피해 서울로 달아나서 박태원의 하숙집에서 지낸 인연이 있다. 동생 박태준은 모교인 계성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하면서 이근무의 무영당을 출입한다. 박태준과 윤복진은 동요악곡집인 《중중 때때중》(1931)과 《양양 범버궁》(1932)을 무영당에서 출간하게 되는데 모두 윤복진의 동시에 박태준이 곡을 붙인 것이다. 박태준과 윤복진은 나란히 계성학교와 평양숭실전문학교를 졸업한 선후배 사이이기도 하다.
윤복진과 교류하며 무영당을 출입하던 또 한 명의 인물은 이인성(1912〜1950)이다. 이인성은 조선미전을 휩쓸던 당대 최고 화가다. 《물새 발자국》(교문사, 1937)은 아동문학가 윤복진, 작곡가 박태준, 화가 이인성 셋이 어울려 탄생한 동요집이다. 윤복진의 시에 박태진이 곡을 붙이고 이인성이 판화로 표지화를 그렸다. 이인성은 윤복진의 동요집 『꽃초롱 별초롱』(아동문예 예술원, 1949)의 표지화도 그렸다. 무영당의 이근무는 윤복진의 시에 이인성의 그림이 더해진 시화 작품을 무영당 내에서 전시해 두기도 했다. 관련 시화는 신문에 몇 차례 실리기도 했고 이인성 화첩 ‘운상’에도 세 편 남아있다.
무영당과 관련된 인물로 김용조(1916〜1944)도 빼놓을 수 없다. 1937년의 일이다. 박태준은 무영당 내 음악연구소를 내고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쳤고, 이인성은 동성로 중심에 다방 ‘아르스’를 개업했다. 아르스 역시 동료들의 아지트 역할을 톡톡히 했다. 이 무렵 이근무는 무영당에 화가 김용조를 취직시켜 미술도안과 장식 일을 맡기며 작품 활동을 지원했다.
김용조는 이인성이 그러했듯이 가난한 가계에서 중학교 진학 대신 대구미술사(大邱美術社)의 서동진에게 발탁되어 그림에 전심으로 임했던 인물이다. 김용조는 일본 유학에 이어 <어머니의 상>(1943)으로 조선미전 특선에 이르렀고 이인성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그 순간 폐결핵으로 요절하고 만다. 죽음과 맞바꾼 <어머니의 상>이 어떤 작품인지, 아직 남아있는지도 궁금하다. 이번 ‘윤복진 기증 유물 특별전’에 제2회 영과회 전람회 이후 지역의 예술계 인사들이 조양회관 앞에서 찍은 단체사진(1928)이 보인다. 서동진, 이상화, 이근무, 박명조, 윤복진, 이인성 등 지역의 예술가들이 망라되어 있는 중에 제일 앞에 선 앳된 소년이 김용조다. 이후 윤복진, 이인성, 김용조가 나란히 찍은 사진(1931) 등이 남아 있어 이들의 교류를 짐작해보게 된다.
박태준, 이인성, 김용조는 대구 경북의 대표 예술가들을 소개한 『씨뿌린 사람들』(백기만, 1959)에 당당히 이름을 올렸지만 그 중심에 있었던 윤복진은 월북 인사로 분류되어 언급되지 못했다. 월북 인사인 동향의 김용준, 이쾌대가 조명을 받을 때도 윤복진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뒤늦게나마 ‘동요의 귀환’을 더 반기는 마음이 된다. (이동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