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가난’의 무게는 다르게 다가왔다. 초등학생 노무현은 10여리 길을 걸어서 읍내에 있던 대창국민학교를 다녔는데, 시골 아이들과 읍내 아이들 사이에 빈부 차이가 있었다. 옷차림과 학용품이 구별됐고, 교사들은 읍내 아이들을 편애했다.
신종생 “시골 아이들과 읍에 사는 아이들의 생활 차이가 많이 났습니다. 시골 아이들과 읍내 아이들 간에 패가 갈렸죠. 무현이는 시골 아이들의 리더격이었는데, 자기가 옳다고 생각한 것에는 양보가 없었어요.”
학교에서 경험한 ‘가난’으로 인한 차이는 초등학생 노무현에게 많은 생각을 안겨 주었다. 가난은 소년의 가슴에 상처로 남게 된다.
대통령은 1994년 출간한 자전 에세이집 <여보, 나 좀 도와줘>에서, ‘가난의 상처는 나의 잠재의식 속에 어떻게 해서라도 나만은 가난에서 벗어나야겠다는 열망과 함께 모두가 가난하지 않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막연한 꿈을 동시에 심어줬던 것 같다’고 쓰고 있다.
김종대 “4학년 담임을 맡아 교실에 들어가니 앞자리에 앉은 키 작은 학생이 눈에 들어왔어요. 3학년 성적도 제일 우수했죠. 학년 내내 학습 태도도 좋았고, 반에서 인기가 많았어요. 학급 임원을 맡아 자습 시간엔 아이들 학습 지도도 했어요. 굉장히 부지런했죠.”
신종생 “수업 시간 중 가끔 농땡이 칠 때도 있었는데, 하지만 자기 관심사를 학습할 때는 아주 적극적이었요. 필답고사도 제일 잘했고, 발표력도 좋아 토론 시간에 보면 조리있게 말을 했죠.”
별명은 ‘돌콩’, ‘노천재’
자전 에세이에 보면, 초등학교 시절 대통령의 별명은 ‘돌콩’과 ‘노천재’로 전해진다. ‘돌콩’은 키가 작아 붙여진 것이고, ‘노천재’는 공부를 잘한다고 붙은 별명이다.
두 교사에게 초등학생 노무현은 공부 잘하고, 명랑한 소년으로 기억되어 있다. 그리고 자존심이 강해 꾸중 듣는 걸 싫어한 일명 ‘범생이’었다. 그런 자존심은 엉뚱한 방향으로 발휘되기도 했다.
김종대 “초등생치고 아는 게 많았어요. 한 번은 자연 시간 수업이 다 끝나갈 즈음에 ‘자석이 어떻게 발명됐느냐’고 질문을 했어요. ‘모르겠는데, 너는 아나’고 되물으니 ‘그리스인이 산에서 쇠지팡이가 붙는 돌을 발견했다’는 거예요. 그래 ‘어떻게 알았냐’고 묻자 학원잡지에서 봤다고 해요. 그 잡지는 중고생용이었거든요.”
신종생 “학기 초였는데, 유별나게 질문을 많이 하더라고요. 자기 관심사는 꼬치꼬치 묻는 형이었죠. 그렇게 계속 질문을 해대다가 한 달 정도 지나자 잦아들었어요.”
부끄러워한 기억과 자존감의 회복
공부 잘했던 소년의 우월감, 그리고 가난 때문에 갖게 된 열등감과 그로 인한 반항적 태도, 대통령은 자신의 초등학교 시절을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자서전에서 ‘어리숙한 급우를 꾀어 그 친구의 새 필통을 자신의 헌 필통과 바꾸었다가 들켜 망신당한 일, 사친회비(지금의 기성회비)를 내지 못해 교실에서 쫓겨난 일, 읍내 부잣집 급우의 가죽 책가방을 면도칼로 찢어버린 부끄러운 일도 있었다’고 고백하고 있다.
초등학생 노무현에게 우월감과 열등감이 뒤섞여 발생한 사건이 6학년 때 ‘교내 붓글씨 대회 상 반납’ 일화다. 대통령은 자전 에세이에서, ‘붓글씨 대회에서 2등상을 타게 됐는데, 규정과 달리 습자지 종이 한 장을 새로 받아 고쳐 써낸 급우가 1등을 한 것에 불복해 상을 반납했다’며, 그 일로 ‘학교에 소동이 일었고, 담임선생님(신종생)을 난처하게 만들었다’고 쓰고 있다.
대통령은, 신종생 교사를 ‘어린 시절 가난 때문에 겪은 열등감을 극복하게 도와준 은사’로 꼽는다. 사범학교를 나와 부임한 지 2년이 채 안 된 스무 살 초반의 총각 선생은 자취방에서 방과 후에 과외로 공부도 가르쳐주고, 밥도 차려 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초등학생 노무현은 신 교사의 강권으로 전교 회장 선거에 나가 어린이 회장으로 뽑혔고, ‘이후 남 앞에 나서는 일에 자신감을 갖게 됐다’고 회고한다.
신종생 “처음에는 회장 선거에 나가 보라 하니까 ‘안 나간다’고 했어요. 그래 다음날 또 한 번 불러 ‘자기 성취에 좋은 동기가 된다’고 설득했죠. 학교 운동장에서 회장 출마 소견 발표가 있었는데, ‘내가 이래 고추가 작아도 맵습니다’고 좌중을 웃기더니 연설을 했어요. 대학 다녔던 큰 형님에게 지도를 받아서인지 웅변을 아주 잘했어요. 전교회장 선거에는 읍내 중심지에서 생활도 넉넉하고 공부도 잘하는 아이를 포함해 서너 명이 나왔던 것 같아요. 그래도 전교 어린이 회장에 뽑히고 좀 기가 살고 그랬지 않나 싶습니다.”
대통령은 초등학교를 졸업하면서 교육감상을 탔고, 진영중학교로 진학했다. 그러나 학창 시절 내내 어쩔 수 없었던 ‘가난’의 굴레에 묶여 있었다. 그 굴레를 벗어던지게 된 게 사법시험 합격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가난은 대통령에게는 스승이었다. 바로 ‘사람사는 세상’의 꿈을 꾸게 해준 또 다른 스승….
초등학교 은사들과 그후 인연
두 은사는 노무현 대통령과 언제 다시 만났을까?
신종생 교사는 부산지역에서 43년 동안 교편을 잡았다. 신 교사는 대통령을 사법고시 합격 후 부산 용두산공원 산책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고 한다. 그리고 국회의원 시절엔 두 번 정도 잠깐 스친 적이 있었을 뿐이다.
대통령 재임 중 청와대에서 은사 초청 자리가 있었는데, 개인사정으로 참석하지 못했다. 그때 참석자들로부터 대통령이 “6학년 담임 선생님은 안 오셨느냐”고 물었다는 얘기를 듣고 ‘잊지 않고 있구나’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리고 퇴임 후 김해시청에서 열린 귀향 환영행사 때에야 한 자리에 앉아 식사했고, 서거 후에는 몇 번 봉하마을을 다녀왔다고 했다.
출처/ http://blog.daum.net/aywlrl/453 노무현재단 사료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