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장애인들, 11회 피플퍼스트대회 개최… “‘장애인’이기 전에 ‘사람’”
여의도공원서 발달장애인이 직접 만드는 축제 ‘한국피플퍼스트대회’ 개최
발달장애인들, 탈시설·사회적 참사·노동권 등에 대해 직접 목소리 내
초청공연, 자유발언 통해 춤·노래… 뜨거운 열기
“발달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겨내고 다시 만나 위로를 건네자”
[제11회 한국피플퍼스트대회 슬로건(함께 외치는 구호)]
하나, 발달장애인도 동네에서 함께 살 수 있는 삶을 보장하라!
하나, 1년마다 해고는 싫다! 원하는 만큼 일하자!
하나, 발달장애인도 투표한다! 차별 없는 투표용지 만들어라!
하나, 병원에서 치료받을 때 알기 쉽게 설명하라!
하나, 발달장애인도 필요한 만큼 활동지원제도를 지원하라!
발달장애인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한다. 어떤 이는 준비해 온 발언문을 정해진 시간에 차근차근 읽어 내려가고, 어떤 이는 온몸이 떨릴 만큼 긴장한 채로 말을 이어간다. 말을 하는 대신 노래를 부르는 사람도 있고, 그 노래에 맞춰 춤을 추는 사람도 있다. 취미나 좋아하는 것, 현재 하고 있는 일을 이야기하며 자신을 소개하는 사람도 있고, “다음 피플퍼스트대회에는 애인과 함께 오고 싶다”고 외치는 사람도 있다. 또 누군가는 둘리(만화 ‘아기공룡 둘리’의 주인공)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한다. 각자만의 속도와 목소리로 자신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이야기를 쏟아내는 발달장애인들. 그 수만큼 다양한 이야기가 무대 위에서 펼쳐졌다.
발달장애인들이 직접 기획하고 진행하고, 권리를 주장하는 제11회 한국피플퍼스트대회가 17일 오후 2시에 서울시 여의도공원 문화의 마당에서 열렸다. 이번 대회에는 강원 3명, 경기 52명, 경남 16명, 경북 7명, 광주 11명, 대구 147명, 부산 48명, 서울 93명, 울산 14명, 인천 10명, 전남 49명, 제주 33명, 충북 9명 등 전국에서 총 492명의 발달장애인과 조력자가 참여했다.
제11회 한국피플퍼스트대회가 17일 오후 2시에 서울시 여의도공원 문화의 마당에서 열렸다. 총 492명의 발달장애인과 조력자가 참여했다.
- 발달장애인이 직접 만드는 축제, ‘한국피플퍼스트대회’
‘피플퍼스트(people first)’는 1974년 미국 오리건주에서 개최된 발달장애인대회에서 시작됐다. 해당 대회에 참가한 한 발달장애인이 사람들이 자신을 “mentally retarded(정신 지체)"로 부르는 것에 불만을 갖고 “I wanna be known to people first(나는 우선 사람으로 알려지기를 원한다)”라고 말한 것을 시작으로 발달장애인대회를 ‘피플퍼스트대회’라고 부르게 됐다.
현재 전 세계 43개 나라에서 발달장애인 당사자들이 피플퍼스트대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도 2013년 ‘전국 발달장애인 자조단체대회’를 시작으로 15년부터는 대회 명칭을 바꿔 ‘한국피플퍼스트대회’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발달장애인들은 올해 4월부터 9월까지 총 4번의 워크숍을 거쳐 제11회 한국피플퍼스트대회를 기획해왔다. 5가지의 슬로건과 사회자를 직접 선정하고 발표 주제도 동료들과 의논하여 결정했다.
- 발달장애인들, 탈시설·사회적 참사·노동권에 대해 직접 목소리 내
오후 2시 정각이 되자 사회를 맡은 이다영 피플퍼스트광진센터 활동가가 한국피플퍼스트대회의 시작을 알렸다. 김기백 피플퍼스트서울센터 지역위원장은 “피플퍼스트대회를 열심히 준비했지만 사람이 많아 떨리는 마음에 실수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주인공이기 때문에 실수가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회를 마음껏 누려달라”고 힘차게 말했다.
개회식을 모두 마친 뒤, 김병재 한국피플퍼스트 전남 지역 활동가가 사회를 맡아 주제발표를 진행했다. 주제발표 시간에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 방문기, △발달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참사, △발달장애인의 일자리와 노동권 등을 함께 이야기했다.
박경인 피플퍼스트서울센터 활동가는 지난 7월, 한국 사회의 시설수용 문제를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스위스 제네바에 있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를 방문했다. 박 활동가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에 가서 시설에서 살았던 경험을 말했다. 케싱 고문방지위원회 위원은 ‘의사소통이 어려운 발달장애인에게는 오히려 시설이 안전하지 않다. 한 직원이 여러 장애인을 지원하여 개개인을 존중할 수 없기 때문에 학대가 일어나기 더 쉽다’는 나의 말에 동의해 줬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유엔고문방지위원회의 권고에 따라 발달장애인이 더 이상 시설에 가지 않아도 되는 세상이 되길 바란다. 그런 세상을 함께 만들어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김정훈 한국피플퍼스트 경남 지역 활동가가 ‘발달장애인으로서 겪어야 했던 사회적 참사’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김정훈 한국피플퍼스트 경남 지역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으로 살면서 겪어야 했던 힘든 경험을 이야기했다. 김 활동가는 “학교폭력과 가정폭력에 방치된 채 ‘도움을 받을 수 없다’는 심한 좌절감에 빠져 죽음까지 생각해 본 적이 있다”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정폭력에서는 벗어났지만 여전히 발달장애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힘들다. 발달장애인에 대한 무시와 편견, 혐오와 차별이 여전하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했다.
김 활동가는 “난 죽고 싶지 않다. 그리고 나의 가족도 죽이고 싶지 않다. 발달장애인이 세상에서 함께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우리 사회가 함께 노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박초현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는 발달장애인의 일자리에 대해 발표했다. 박 활동가는 “이전에 근무했던 모자 공장, 장애 인식 개선 보조강사와는 달리 지금 일하고 있는 피플퍼스트성북센터에서는 오래 일하고 싶다”며 “발달장애인의 의견을 소중하게 여기고 발달장애인을 함께 일하는 동료로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박 활동가는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발달장애인을 동료로 받아들이는 일자리가 많지 않다. 발달장애인도 함께 일할 수 있다는 것, 소중한 일자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싶다. 세상이 모르니까 발달장애인이 알려주어야 한다. 우리가 나서서 세상에 알리자”고 외쳤다.
박초현 피플퍼스트성북센터 활동가가 ‘발달장애인의 일자리와 노동권’에 대한 주제 발표를 하고 있다. 사진 김소영
- “발달장애인에 대한 차별 이겨내고 다시 만나 위로를 건네자”
주제발표가 끝난 후에는 브라질리언 퍼커션 앙상블 ‘호레이’와 노래패 ‘노래선언’의 공연이 이어졌다. 발달장애인들 수십 명이 연주와 음악에 맞춰 함께 춤추고 소리쳤다.
발달장애인들이 브라질리언 퍼커션 앙상블 ‘호레이’의 공연을 즐기고 있다.
한 참가자가 ‘호레이’의 연주에 맞춰 손을 번쩍 들며 춤을 추고 있다.
참가자들이 ‘노래선언’의 노래에 맞춰 춤을 추고 있다.
오후 4시 20분부터는 자유발언이 진행됐다. 자유발언 시작을 알리자마자 발언을 원하는 발달장애인들이 하나둘씩 무대 옆에 서기 시작했다. 줄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어졌다.
말 그대로 ‘자유’발언이지만 딱 한 가지 제한이 있었다. 3분 이내에 이야기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야기를 시작한 지 3분이 되기 무섭게 사회를 맡은 김보희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발언을 제지했다. 엄격한 규칙 덕분에 1시간 30분이 넘는 시간 동안 약 45명의 발달장애인이 무대에 올라 발언할 수 있었다.
한 참가자가 자유발언을 하기 위해 무대에 올랐다. 쑥스러운 듯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고 있다. 사진 김소영
김보희 함세상장애인자립생활센터 활동가가 의자에 앉아 자유발언 사회를 보고 있다. 옆에 있는 활동가는 발언이 3분이 지나면 발언을 제지하기 위해 ‘내려가주세요’라고 적힌 팻말을 들고 있다.
오후 5시 50분, 폐회식이 진행됐다. 문석영 한국피플퍼스트 서울 지역 부위원장은 “오늘 대회가 끝난다 해도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발달장애인에 대한 차별과 억압이 반복될 것”이라며 “하지만 그런 시련들을 잘 이겨내고 내년 대회에서 또다시 만나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위로를 전하는 한국피플퍼스트대회를 열어보자”고 힘차게 이야기했다.
문석영 한국피플퍼스트 서울 지역 부위원장이 폐회사를 하고 있다.
문 부위원장은 “오늘 우리의 대회를 통해 비장애인들이 발달장애인에 대한 많은 관심과 사랑을 가져주기를, 발달장애인을 사회의 소중한 일원으로 존중하는 세상이 오기를 바란다”고 덧붙이며 폐회사를 전했다.
발달장애인 및 조력자 참가자들이 무대 앞에 앉아 제11회 한국피플퍼스트대회를 즐기고 있다.
한편 한국피플퍼스트대회는 정부의 보조금 없이 참여비로만 진행됐다. 한국피플퍼스트는 피플퍼스트대회의 지속을 위해 10월 31일까지 후원을 받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