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선 선비의 삶과 선비 정신 -『修己治人』, 『知行一致』 추구
治人은 백성을 위한 봉사 인격과 학문을 도야해야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있어
강자를 억누르고 약자는 부추겨줘 함께 더불어 사는 사회 추구
옳은 일 위해선 사약·귀양도 불사 통치자가 부덕할 때엔 벼슬 거부
조선시대 지식인은 '선비(士)'다. 선비는 꼿꼿한 지조와 목에 칼이 들어와도 두려워 않던 강인한 기개, 옳은 일을 위해서는 사약과 귀양도 불사하던 불요불굴의 정신력, 항상 깨어 있는 청정한 마음가짐이 특징이다.
선비란 성리학을 주 전공으로 하여 그 이념을 실천하는 학인(學人)이었다.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근본으로 사대부(士大夫)가 되는 것을 최종 목표로 하는 존재다. 인격과 학문을 도야하는 '수기'가 어느 수준에 도달해야 다른 사람을 다스리는 '치인'으로 갈 수 있다. 치인이란 남을 지배한다거나 통치한다는 권력 개념보다는 자신을 닦아 정의를 실현할 수 있는 군자가 되어 백성(民)을 위하여 이바지하는 봉사 행위를 의미했다.
지행일치(知行一致)를 중시
선비의 전공 필수는 인문학, 특히 철학에 해당하는 경학(經學)이 핵심이었다. 경학이란 성리학의 이기론(理氣論)을 해명하는 것이 최대 과제였다. 우주, 자연, 인간의 모든 현상은 작용으로, 기(氣)와 작용의 원리로서 이(理)에 의하여 일관된 잣대로 생성·변화·소멸한다는 논리다.
또 역사를 중시했는데, 우리 역사와 더불어 동양 문화권의 주도국이던 중국의 역사를 이해하는 게 필수였다. 그 흥망성쇠의 교훈과 변화 요인에서 삶의 지혜를 이끌어 내는 게 목적이었다.
경학과 역사는 '경경위사(經經緯史)'로 이해되었다. 경전의 진리는 세상이 변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날줄인 경(經), 역사는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현상이므로 씨줄인 위(緯)로 이해됐다. 이렇게 파악한 진리를 표현하는 매개체는 문장이다.
아무리 위대한 사상이나 진리도 그에 합당한 문장력이 없다면 여러 사람에게 알릴 수가 없다. 문장이란 진리(道)를 담는 그릇인 기(器)로 이해됐다. 도기론(道器論)은 경경위사와 문장론의 상호 보완 관계로 설정된 논리 틀이다.
또 앎을 삶에 일치시켜야 한다는 지행일치(知行一致) 정신에 충실한 게 선비다. 인문학의 진정한 목표는 삶의 질을 끌어올려 인간적인 생(生)의 실현에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문사철의 보합에서 가능하다고 봤다.
통치자가 부덕할 땐 벼슬을 거부
선비의 길은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 과거를 보는 것이다. 일종의 자격시험인 소과(小科) 시험을 보고 나서 최종적으로 대과인 문과(文科)에 합격하면 벼슬길에 나아가 9품관부터 시작하는 학자 관료가 된다.
둘째, 산림(山林)의 길이다. 조선 중기에 이르면, 과거를 보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대학자를 산림이라 부르며 우대했다. 이들은 세속적인 출세의 길인 과거를 단념하고 몇십 년씩 공부에 몰두, 그 학문적 능력으로 학계는 물론이려니와 정계까지 주도했다. 이때의 정파인 붕당은 학파를 모집단으로 하였기 때문에 정파와 학파가 서로 상호 작용하는 관계였다.
셋째, 부득이한 선택으로 은일(隱逸)이 있다. 세상을 경영할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난세를 당하거나 아직 때가 아니라는 인식에 따라 초야에 은둔해 있던 선비를 말한다. 은사(隱士), 일사(逸士), 유일(遺逸)로도 불린다. 이들은 부덕하고 무도한 통치자가 권력을 휘두를 때 정치판에 나아가는 일을 거부했다.
국가적 위기를 당했을 때 선비는 '처변삼사(處變三事)'를 선택한다. 은둔, 망명, 자결이 그것인데, 어느 것도 맞는 선택이 아니라고 판단될 때는 '거의소청(擧義掃淸)'을 택했다. 의를 일으켜 세워 적을 쓸어버리겠다는 이 마지막 결정은 국가가 존망의 갈림길에 서 있을 때 행하는 극단적 방법이다.
약육강식 논리를 극복하려는 인본주의
선비의 특징적인 면모는 일관주의(一貫主義)에서 잘 나타난다. 유학에서 강조되는 '일이관지(一以貫之)'의 이념은 일관된 가치 지향과 행동 규범으로 선비의 앎과 행동을 규정하였다. 자신과 타인에게 똑같은 기준을 적용하였을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서는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박하되 남에게는 후하게 대하는 박기후인(薄己厚人)의 생활 태도를 보여 주었다.
청빈을 미덕으로 삼아 검약(儉約)을 실천하는 청빈검약(淸貧儉約)의 생활 철학도 중요하다. 조선 선비에게 있어서 호화와 사치는 금기 사항이며, 공적(公敵)으로 치부되었을 정도였다. 그러나 그 청빈은 남의 눈을 의식하거나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며 그 속에서 도(道·진리)를 즐기는 경지에까지 이른 것이었다.
선비가 지향한 가치에서 무엇보다 주목되는 사항은 학문과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학행일치(學行一致)의 방향성이다.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길 때에 비로소 그 배움이 의미를 갖게 된다고 인식하였던 것이다. 실천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이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이었다.
그러나 인간이 사는 세상에서 이익을 도외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때문에 선비는 일에 임하여 명분과 실리를 합치하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양자의 합치가 어려워 선택의 기로에 서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명분을 택하는 것이 선비로서 살아남는 길이었다. 의리를 지키되 인정(人情)과 조화시키려 노력했다. 의리만을 따지면 세상살이가 삭막하고 메마르기 쉽다.
나아가 강한 자를 억누르고 약한 자를 부추겨주며(抑强扶弱), 공적인 일을 우선하고 사적인 일을 뒤로하기(先公後私)를 실천하여 모든 구성원이 함께 더불어 살아가는 공생공존(共生共存)의 이상 사회, 즉 대동사회(大同社會·작은 차이는 있지만 크게 볼 때 함께 어우러져 사는 사회)라는 공동체 사회를 내세가 아닌 현세에 건설하려는 이상을 가진 이상주의자들이었다.
더불어 나의 생(生)을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듯이 타인의 생을 실현하는 것도 중요하다는 인식이 전제되어 약육강식이라는 동물 세계의 논리를 극복하려는 인간화 노력이었다.
▲ 글과 그림 기량을 겨루는 18세기 조선시대 선비들 습속을 그린 풍속화 사인휘호(士人揮毫). 담졸(澹拙) 강희언의 작품이다
학예일치 정신이 멋
선비의 멋은 학문과 예술을 일치시키려는 학예일치(學藝一致) 정신에서 빚어진다. 선비는 시(詩), 서(書), 화(畵)를 교양 필수로 하였기에 생활의 멋을 시나 그림, 글씨로 표현하며 운치 있는 삶을 꾸렸다. 시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시가 있다고 생각하여 시를 음미하며 그림을 그리고, 그림을 보고 시를 쓰기도 하였다. 또한 그림에 화제(畵題)를 써서 하나의 그림 속에 시·서·화가 어우러져 격조 있는 멋을 일구어 내었다.
이들의 풍류 생활을 가능케 한 조건은 물질적, 정신적 여유와 생활 조건에 기초하였다. 선비의 삶의 공간도 그 조건 중 하나이다. 생활 공간인 안채, 교유 공간인 사랑채, 휴식 공간인 초당으로 구성된 선비의 주택 배치는 이들에게 손님을 맞아 교유할 수 있는 기능성을 제공하였다.
선비의 맑고 깨끗한 품격과 맞아떨어지는 백자는 자기의 발달 단계로 보아도 청자보다 안정되고 발전된 상태라 한다. 백자의 태토인 고령토의 순도가 가장 높고 굽는 온도도 높아 노력과 품이 훨씬 많이 드는 고급 자기라는 것이다. 결백하고 청초한 백자, 특히 청화백자는 선비의 이미지를 상징적으로 대변해 준다.
유배와 낙향도 불사
선비가 사대부 생활을 하다가 당하는 좌절은 유배와 낙향이다. 바른 소리를 하여 사약을 받는 일도 불사하는 존재가 바로 선비인지라 귀양살이 정도는 기개 있는 선비라면 한 번쯤 당하는 일이었다. 또한 사직소를 올리고 혼란스러워지는 관계를 미련 없이 떠나 낙향하는 것도 선비가 취하는 선택이자 권리였다.
특히 조선 후기 붕당정치가 본격화하여 당쟁이 격화되자 유배 문화라고 할 만한 현상까지 나타나고 귀양살이는 다반사가 되었다. 특히 북변에 유배되면 노령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기후변화 때문에 목숨을 잃는 일이 흔하였다.
때로는 격화된 정쟁에서 아까운 인재를 보호하기 위하여 잠정적으로 유배형에 처하는 일도 있었다. 그러나 현실에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유배 생활을 한 이야말로 진정한 선비의 자격을 획득할 수 있었다. 이들은 이 좌절의 시기를 재충전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다시 수기의 단계로 돌아가 학문 연마에 골몰하고 유배지의 인재를 모아 양성하여 지방 문화를 살찌우는 데 한몫을 톡톡히 했다.
[츨차] : 정옥자 서울대학교 명예교수/ 조선 선비의 삶과 선비 정신 / 조선일보
Ⅱ. 권력 앞에서도 대놓고 바른말 … 왕도 껄끄러워한 선비
율곡 이이는 썼다.“임금이 선비를 미워할 만하다. 임금을 간할 때는 난처한 일로 책망하고, 임금이 붙들어도 머무르지 않고, 은총도 좋아하지 않으며 오직 자기의 뜻만 실천하려 한다. 참으로 임금이 선비들을 쓰기 어려운데 선비 중에는 과격한 자도 있고 말만 하는 자도 있으며 명예를 좋아하는 자들도 끼어 있으니 어찌 임금이 싫어할 바가 아니겠는가.” (『율곡전서일』 권6) 선비의 대표이며 사림(士林)의 영수인 율곡이 왜 그렇게 말했을까. 그리고 우리는 왜 이 시대에 선비정신이 필요하다고 하는가
스스로를 남인(南人)의 후손으로 인식하는 교육자 출신 김창회씨(79). 불천위(위대한 선비)인 7대 조부 김종덕의 사당 가까이 집이 있어 자주 둘러본다. 그는 “나한테는 가장 뚜렷한 조상이니 모시고 살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게 영남의 선비 가문답게 사는 방식이라고 한다. 조용철 기자
1649년 4월 29일, 이른 새벽. 왕세자(후에 효종)는 기상했다. 간단한 아침 식사 뒤 와병 중인 부왕 인조에 문안드렸다. 오전 6시, 상참(왕과 신하의 국정 논의)에 이어 아침 서연(書筵·왕세자에게 경서를 강론)을 시작했다. 주제는 『중용장구(中庸章句)』. 인조의 병세가 위급해 조강은 다음 날 중단됐다.
5월 8일 왕이 승하하고 6개월 뒤 10월 23일 조강은 재개됐다. 이젠 왕에 대한 경연(經筵)이었다. 『중용장구』를 다시 시작했다. 왕이 됐다고 봐주지 않았다. (김종수의 『효종동궁일기』를 통해 본 경연)
경연 장면은 효종 기록이 없어 선조를 통해 유추해 본다. 1567년 음력 11월 초5일. 즉위 넉 달째인 이날 16세 선조는 경연을 한다. 선왕 명종의 비 인순황후와 대신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선조는 먼저 복습했다. 이어 강학관이 『대학』 ‘정심장(正心章)’의 ‘몸을 닦음이 마음을 바로함에 있다함은…’을 원문으로 두 번 읽고 풀이를 한 번 읽었다. 임금은 원문 한 번, 풀이 한 번을 읽었다. 다시 강학관이 ‘좋아하고 즐거워하는 것의 차이’ ‘찰(察·살핀다)이라는 한 글자가 병을 다스리는 약’을 강론했다. (유희춘의 『미암집(眉巖輯)』)
갑자기 왕세자가 된 효종은 세자 때부터 열심히 공부해야 했다. 조강은 물론 석강, 야대, 소대(대신을 불러 강의를 들음)까지 했다. 세자의 아침 서연은 동절기 오전 9시, 하절기 오전 6시에 시작됐다. 왕세자 시절~즉위 한 달인 33개월 중 4개월간 서연이 없었는데 병 때문이었다. 대신들은 틈을 주지 않고 공부시켰다. 효종의 왕세자(현종)도 신하들의 강권에 8세부터 서연을 시작했다. 강의하는 대신들은 학문과 덕을 갖춘 선비들이었다.
현대와 크게 다른 모습이다. 어느 장관이나 학자가 ‘감히’ 대통령에게 철학을 가르칠까. 큰 가르침으로 왕을 교육하던 조선의 시스템이 현대엔 없다. 대통령은 지시하고 통치할 뿐이다. 조선에선 왜 신하가 임금을 가르쳤을까.
경북 안동에 있는 학봉 김성일의 사당. 퇴계의 학맥을 이은 그를 후손들은 소중히 모신다. 지난 2월 4일 후손들이 사당에서 절을 하고 있다.
서울 명륜동의 문묘(文廟)에 답이 있다. 그곳엔 동방 18현이 종사(從祀)돼 있다. 문묘는 공자를 받드는 사당. 종사는 학덕이 있는 사람의 신주를 모시는 것이다. 이들은 가장 숭앙받는 선비들이다.
선비란 대체 무엇인가. 서울대 정옥자 명예교수는 “수기치인(修己治人)하는 사람이다. 수기는 인격수양과 학문도야다. 자기를 닦은 다음 남을 다스리는 이가 선비”라고 말했다.
동양대 선비사관학교 김덕환 교수는 “경(敬)의 마음을 갖고 수양하는 학인”이라고 말했다. 변창구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한국의 선비정신과 정의사회의 구현’에서 “도(道)를 배우고 실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게 임금-문묘와 무슨 관련이 있을까.
성리학의 나라 조선에서 왕은 임금(君)이자 스승(師), 즉 군사다. 왕은 선비의 주군이자 스승이다. 으뜸 선비다. 선비 없인 왕 없고, 왕이 없으면 선비도 의미가 없다. 왕과 선비는 상호 의존 관계다. 고려대 윤사순 명예교수는 ‘16세기 초 선비정신의 형성에 대해’에서 ‘『조선경국전』은 정치체제로 군주제를 규정하지만 운용상 군주의 독선과 횡포 및 독재를 방지하게 했다’고 지적했다.
왕권은 선비의 제약을 받았다. 정옥자 명예교수는 “조선 성리학은 신권을 강화하고 여론을 중시하고 왕에게 철인(哲人)이 될 것을 요구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는 논문에서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특징으로 ▶군주와 함께 정치함 ▶신하는 의(義)를 위해 군주를 보좌함 등을 꼽았다.
그래서 임금도 선비의 뿌리인 공자에게 머리를 숙였다. 태종이 성균관에서 알성(謁聖·성인 공자를 봄)할 때 왕은 절을 해야 했다. 태종은 “왕인 내가 왜 공자에게 절을 해야 하느냐”고 예조판서에게 물었다. 판서는 “공자는 만세백왕지사(萬歲百王之師)이므로 절해야 한다”고 했다. 왕은 절했다.(『태종실록』 권28, 14년, 7월 임오조)
‘왕은 으뜸 선비이며 나라를 함께 다스린다’는 의식은 조선 선비를 이해하는 핵심이다. 존왕(尊王)은 해도 절대 복종은 안 한다. 그래서 경연과 상소에서 추상같이 말할 수 있다. 경연 내용을 기록한 기대승의 『논사록』을 보자. 명종 19년 2월 13일 기대승은 “언로는 국가에서 매우 중대합니다… 그러나 지금 언로가 크게 열려 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선조 즉위년(1567년) 10월 29일엔 “임금은 이익을 독점하지 말고 백성과 함께 해야 한다”고 했다.
남명 조식은 명종 10년 단성 현감을 사직하면서 을묘사직소를 올렸다. “전하의 국사는 그릇돼 나라의 근본이 이미 망했으며 하늘의 뜻은 떠났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큰 나무가 백년 동안 벌레에게 파 먹혀 진액이 말랐는데 회오리와 사나운 비가 언제 닥칠지 모르는 것과 같으니…”라고 성토한다.
지난 1월 23일 경북 의성에서 만난 김용수씨는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학봉 김성일의 일화를 소개했다. 학봉이 “(임금의) 자질이 고명해 요순이 될 수 있지만 지금 상감께서 바른말을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했다는 것이다. 대놓고 말하는 선비들이 조선 조정엔 흔했다. 오늘날 국무회의 석상에선 수석과 장관들이 보고하고 ‘하명’을 받아 적기에 바쁜 모습이다. ‘대통령을 정면 비판하는’ 수석과 국무위원은 찾아볼 수 없다니 선비정신의 퇴보인가.
조선 선비는 신하이자 학자였다. 신하로선 왕에 복종했지만 학자로서는 유학의 거장이 종사된 문묘의 정신을 따른다. 어명보다 도(道)에 맞는지가 중요하다. 도가 없으면 반정을 생각했다. 연산이 예다. 선비는 임금이 불러도 사양할 수 있었다. 학자이기 때문이다.
퇴계가 올린 소·차·장·계 44회 중 36회가 임금이 부르는 데 대한 거절이다. 율곡은 52회 중 24회가 거절이다. 남명도 13번 모두 거절했다. 성리학 체계에서 선비는 왕의 협조자이자 비판자였다. 선비의 정통성은 협조-비판의 양면성을 가진 인물로 이어졌다.
다시 문묘로 돌아가 보자. 종사된 인물은 선비정신의 구현자다. 가장 먼저 종사된 정몽주는 조선 개국에 반대했다. 정여창·김굉필은 연산군 때 사사(賜死)됐고 조광조는 중종의 사약을 받았다. 이언적은 명종 때 귀양지에서 죽었다.
한국항공대 최봉영 교수는 1983년 조선시대 종묘에 종사된 왕통(王統) 중심 83명과 문묘·서원에 종사된 도통(道統) 중심 75명을 비교했다. 종묘에는 왕가에 공이 있는 사람, 문묘·서원엔 유학을 떨친 인물을 모신다. 태조~중종 전기 153년간 왕통·도통이 중첩되는 인물은 없었다.
훈구 대신에 의해 선비들이 죽어나가던 시절이었다. 인종~숙종 176년간 둘이 일치하는 선비가 나왔다. 김안국·이언적·이황·이이·김집·김상헌·송시열·박세채·김만기 9명이다. 선비의 중흥기다. 둘이 일치하지 않은 경종~고종 173년간 세도정치가 출현했다.
보통 선비의 이미지는 인조~숙종 기간에 이름을 떨치거나 도의 맥을 이어받은 선비다. 명분을 세우고, 현실 개혁의지가 있고 왕에 대해 비판적이다. 물론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선비는 흔히 ‘벼슬하지 않은 처사로서의 선비’ ‘벼슬에 나간 대부(大夫)로서의 선비’로 나누지만 이런 형식적 구별 외에 참된 선비인 진유(眞儒)·통유(通儒)와 썩은 선비 즉 부유(腐儒)로도 나눴다.
어쨌든 참된 선비들은 무엇을 추구하느냐는 물음이 남았다. 취재팀은 선비 연구 학자 20여 명의 말과 논문을 종합해봤다. 그 결과 선비의 핵심 가치는 도(道)와 수기였다. 경상도·충청도·호남을 돌며 서인·노론·남인의 후손에게 물어도 비슷했다. 서인의 영수 율곡은 ‘참된 선비는 나아가서는 도를 행해야 한다”고 했다. 남인의 영수 퇴계는 도의 핵심으로 경(敬)을 최대 가치로 여겼다.
성균관대 이장희 명예교수는 ‘조선시대 선비상’에서 “선비는 덕치주의 실현이 최상의 목표이며 인의예지충신락을 갖춰야 한다”며 “특히 예의염치를 중시했다”고 말했다. 숭실대 철학과 곽신환 교수는 “도는 사람이 사는 진정한 의미다. 오늘날 말로 국민 행복, 당시는 정복(正福)이라 했다”며 “구체적 내용은 ‘편어국리어민’(便於國 利於民·나라를 편하게 하고 백성에 이롭게 하는 것’”이라고 했다. 선비는 신독(愼獨·스스로 삼감)하며 위기지학(자신의 수양을 위한 학문)을 했다.
그렇다면 그들은 왕에게 추상같이 요구하듯 엄격히 살았는가. 참선비의 길은 힘들었다. 어려서 소학을 배우고 10세에 스승을 찾아 집을 떠나야 했다. 40에 벼슬에 나가 70에 물러나는 것이 정통의 길이었다. 10~39세에 수기와 치인(治人)을 위한 공부를 했다.
그 뒤 벼슬길로 나갔다. 그런데 ‘벼슬에 들어가고 물러 나옴’ 즉 출처(出處)가 중요했다. 퇴계는 그 기준으로 ▶어리석음을 숨기고 벼슬을 훔치는지 ▶병든 몸으로 녹봉만 타먹는지 ▶헛된 이름으로 세상을 기만하는지 ▶그릇됨을 알면서도 무턱대고 나가는지 ▶직책을 감당할 수 없는데 물러나지 않는지를 꼽았다.
남명은 “사군자의 대절(大節)은 오직 출처 하나”라고 했다. 율곡도 “벼슬에 나가서 행할 만한 도가 없고 물러나서 수범이 될 만한 가르침이 없다면 선비로 자처해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윤선도도 “선비는 구차하게 벼슬에 나가서 안 된다”고 했다. 오늘날 정치권을 비롯해 사회에서 그런 건강한 기준은 사라지고 혼탁해졌다. 그러나 조선 선비는 그런 가치를 추구했다.
벼슬에서 겪을 고난도 선비는 견뎌내야 했다. 정조가 “선비라면 입신 초기에는 응당 추자도나 흑산도에 유배 갈 각오를 해야 한다”고 말할 정도였다. 은퇴하면 문집을 발간해 자신의 지적 활동을 점검해야 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다.
벼슬하지 않는 처사라도 몸가짐을 가다듬어야 했다. 순암 안정복은 『하학지남』에서 하루를 숙흥장(새벽)-일간장(낮)-야매장(저녁)으로 나눠 일과를 설정했다. 최고 모델은 퇴계 11대손인 향산 이만도가 애지중지했던 윤최식의 『일용지결』이다. 그는 하루를 12등분해 매시간 할 일을 숨막힐 정도로 정했다.<표 참조>
처사가 많은 남인의 본향, 경상북도에는 선비 흔적이 아직 있다. 지난 1월 22일 경북 영덕 출신인 퇴계학연구원 이용태 이사장을 만났다. 그는 “어릴 때 선비를 늘 봤다. 선비로 꼽히는 10여 명은 시를 쓰고 역사를 논하고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회고했다.
지난 2월 4일 경북 의성에 가니 선비적 분위기가 은은했다. 전통 한옥과 사당이 여기저기 있다. 교육자 출신으로 한복을 단정하게 입고 자신을 남인(南人) 후손으로 인식하는 김창회(79)씨는 “다 못살았지만 선비는 일찍 일어나 사당에 가고 아침 식사 뒤 글을 읽거나 아니면 농감(농사 감독)을 했다. 학식이 출중한 선비는 아이들을 가르쳤다”고 말했다. 그의 집은 위대한 선비 불천위를 배출한 가문. 집 가까이 있는 사당에 자주 들른다.
선비정신은 18세기 이후 흐려졌지만 구한말 위정척사, 동학, 개화운동으로 이어져 광복 뒤 재야-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졌다는 평을 받는다. 지금은 거의 잊혀졌다. 그러나 품격과 교양을 갖춘 미래 인간의 원형은 선비정신에 있다. 소중한 우리의 가치다. 세상이 흐리다는 탄식이 나오는 오늘, 선비 담론을 본격화할 시간이 다가오는가. 사마천은 “날씨가 추워진 뒤에 송백(松栢)의 푸르름을 알게 되고 세상이 혼탁해야 맑은 선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사기』 권 61 백이열전 제1)
Ⅲ. “조선인에겐 더러운 피” … 일제가 왜곡한 선비상 아직 못 지워
맹자는 말했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독한 연후에 남들도 그를 모독한다.” 조선 선비들의 이전투구로 여겨지는 당쟁(黨爭)이란 용어. 스스로 선비를 모욕하는 것 아닐까. 조선에서는 당쟁 대신 당의(黨議), 즉 ‘당의 논의’라는 말을 썼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당쟁에 더 익숙할까. 일제 식민사학의 독기 때문이다. 선비의 얼굴에 오물을 던진 일제 5인방을 통해 선비 수난사를 돌아본다.
퇴계를 기념하는 안동시 도산면에 있는 도산서원. 서원은 동서당, 전교재를 갖춘 큰 건물이지만 출발은 사진에 보이는 자그마한 서당이었다. 퇴계 정신은 남인(南人)의 정신적 맥이 됐고 임진왜란과 구한말에는 의(義)의 기치를 내세워 의병으로 발현됐다. 퇴계는 일본의 유학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조용철 기자
1680년, 정원로가 재위 6년 차 숙종에 아뢴다.
“허견(숙종에게 신임받은 대신)이 복선군(인조의 손자·숙종의 5촌)에게 ‘전하 춘추 왕성하지만 자주 편찮으시고 세자도 없는데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왕위를) 사양하실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자 말없이 듣고 있었습니다.”
왕에게 변고가 생기면 복선군을 추대한다니. 병이 잦고 후사도 없던 숙종은 역모로 받아들여 병조에 국청을 설치해 국문할 것을 명한다. 끌려온 남인(南人) 허견은 토설한다. “기미년(숙종 5년 1679년) 정월 복선군과 정원로의 집에 모여 왕에게 불행한 일이 생겨 서인들이 임성군(인조의 손자)을 추대하면 화를 면할 수 없으니 대비해야 한다고 논의하였습니다.” 복선군도 고백했다.
그는 교살됐다. 허견과 나머지 관련자들 가운데 2명은 처형, 1명은 사약, 6명은 곤장을 맞다 죽었다. 남인들도 처벌받았다.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이다. 출척은 관직을 삭탈하거나 올려주는 것이다. 숙종 때는 장희빈 사건도 있었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교수는 숙종조에 정치적 사건으로 죽은 사람을 38명으로 집계한다. 당쟁의 심각성을 보여주는 것일까? 일본의 식민사학자 오다 쇼고(小田省吾)는 “왕권이 가장 미약했던 숙종 때 당쟁이 격화됐다”고 하지만 신 교수는“당쟁이 가장 활발했던 숙종 연간은 조선왕조 가운데 가장 흥륭(興隆)했고 백성이 가장 평안했던 시기”라고 한다.
전남 장성의 필암사원. 호남 사림의 중심으로 선조 때 하서(河西) 김인후를 기념하기 위해 후학들이 세웠다
경신대출척은 오늘날 정치의 비열함과 닮았다는 자조를 불러일으킨다. 하지만 이는 일제 식민사학자들의 식민사관 굴레를 스스로 뒤집어쓰는 것일 수 있다. 일제는 조선사편수회의 작업이 끝나는 1920년대까지 선비상을 왜곡시켰다. 그 중심에 어용학자 5인이 있다.
선두는 시데하라 다이라(幣原坦). 그는 1904년 『한국정쟁지』라는 논문으로 동경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는다. 서론이 고약하다. “조선 정치는 사사로운 권리 쟁탈이다. 음모가 계속되고 참화를 불사한다…당쟁은 음험하다. 뼈를 깎고 시체에 채찍질하는 참화를 연출한다…한국이 일본의 고문(顧問) 정치에 처하게 된 원인은 고질적인 당쟁이다.” 선비의 결사인 붕당(朋黨), 당끼리의 논의(黨議) 역사를 질곡으로 내몬 일제의 첫 공작이다.
훗날 타이베이(臺北)제국대학 총장까지 지낸 그는 뒤틀린 인물이다. 시데하라는 일본에 유학을 전한 왕인(王仁) 박사의 묘가 있는 오사카 출신. 대학 졸업 뒤 1900년 11월 대한제국의 요청으로 학부(교육부) 고문이 돼 관립고등학교(경기고)의 외국인 교사로 온다. “천년 전 받은 문화적 은혜에 보답할 좋은 기회”라는 게 이유다.
그러나 4년 만에 당쟁을 폄하하며 은혜를 원수로 갚는다. 그는 학정참여관으로 소학교 개혁에 참여하지만 봉급만 축낸다는 조선 언론의 비난을 받다 1906년 해고돼 돌아간다.
뒤를 다카하시 도루(高橋亨)가 잇는다. 역시 동경제대 출신인 그는 시데하라의 후임으로 관립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리고 1912년 4월부터 6차에 걸쳐 ‘조선 및 만주’에 글을 쓰며 조선 주자학(성리학)의 특징은 ‘종속성·사대성·분열성’이라고 했다.
1914년 『조선의 이언집 부 물어』라는 책에선 ‘조선사회 내면엔 ▶사상의 고착성 ▶사상의 무창견(無創見) ▶당파심 등 6개 형질이 있다’고 했다. 전주대 이형성 외래 교수는 “다카하시는 시데하라의 영향을 받았다”고 했다. 총독부는 다카하시의 주장을 담은 『조선인 특성의 연구』를 단행본으로 만들어 1920~21년 전국에 배포했다.
경성제대 예과 교수 하야시 다이스케(林泰輔)는 1912년 최초로 한국통사인 『조선통사』(일어판)를 쓰면서 한 장(章)을 당쟁에 할애했다. “당파는 확고한 주의강령이 아니라 형세에 따라 동서남북으로 나뉜 것”이라고 썼다. 대학 교재로도 사용됐다. 신복룡 교수는 “그는 최초로 당쟁사를 확대 재생산한 역사적 책임이 있는 인물”이라고 지적했다.
가장 오염된 일인은 기자 출신 호소이 하지메(細井肇)다. 1921년 쓴 81쪽짜리 『붕당·사화의 검토』는 가관이다. “조선인에겐 특이한 더러운 피가 흐른다…희대의 영웅도 붕당의 악폐는 근절시키기가 어렵다. 그 피를 어쩔 것인가….” 이 때문에 그는 ‘조선 멸시론자’의 대표로 간주된다.
이후 ‘당파성론’은 오다 쇼고에 의해 확대 재생산된다. 그는 동경제대 문과 출신으로 1908년 학부 서기관으로 한국으로 왔다. 조선사 왜곡의 선봉인 조선사편수회의 위원으로 1922~25년 완간된 『조선사강좌』 시리즈의 실무 책임자이자 핵심 역할을 했다. 이 시리즈로 식민사학은 완성된다. 경성제대의 조선사 강의교재로 썼고 오다는 퇴직 때까지 경성제대 사학과에서 식민사학자를 길러냈다.
식민사학의 독은 한국인의 정신을 오염시켰다. 『한국 당쟁사』를 쓴 매일신보 기자 출신 홍승구가 대표적 인물이다. 신 교수는 “홍승구는 ‘개벽’지에 당쟁 망국론, 당쟁 500년, 이조 당쟁사를 썼다. 홍경래란도 당쟁이었다는 식이다. 식민사학의 첨병이었다”고 했다. ‘개벽’지 주간 차상찬도 1934년 ‘사화와 당쟁’을 쓰면서 오다의 글을 베끼다시피 했다.
식민사학자에게 ‘조선인 기질론’은 중독 같은 것이었다. 미시나 쇼에이(三品彰英)는 1940년 『조선사개설』에서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당벌을 결성하는 것은 조선의 국민성, 민족적 결함이다. 붕당의 항쟁 시간은 세계적 기록이다. 한인은 뇌동성이 특징이다”고 했다. 시카타 히로시(四方博)는 1951년 『구래의 조선사회의 역사적 성격』에서 “조선 민족의 특징은 파벌성”이라고 했다.
식민사관의 악영향은 우리 안에도 내재돼 있다.
“17세기 이후 사림파끼리 반목질시하였다. 이해관계와 학파·지연 차이에서 붕당을 만들고, 당에서 당이 갈리고 파에서 파가 갈려 모함·중상을 일삼고…당쟁은 조선 후기 정치사의 큰 오점으로서 민족을 분열시키고 민생을 피폐하게 만든 요인이 되었다.”
일제 식민사학자의 글 같지 않은가? 유감스럽게도 문교부가 발행한 1977년판 인문계 고등학교 국사교과서에서 당쟁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렇게 배운 지금의 50대 이상은 ‘선비’ 하면 ‘당파’부터 떠올리고 부정적일 수밖에 없다.
아산정책연구원이 최근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선비정신을 부정적으로 본 사람들은 그 이유로 권위주의(43.8%)-당파 싸움(22.8%)-융통성 부재(17.8%)를 꼽았다. 당파 싸움을 꼽은 이들 가운데 40대 이상의 비율이 평균보다 훨씬 높거나 웃돈다.
그렇다고 붕당의 심각성을 외면하자는 것은 아니다. 조선 내부에서도 경고는 계속 나왔다. 선조시대 영의정 이준경은 임금에게 보내는 유소에서 “허위지풍(붕당 싸움)을 없애지 않으면 국가가 어려운 근심을 맞는다”고 했다.
형을 당쟁으로 잃고 벼슬길도 끊긴 남인(南人) 이익은 『성호집(星湖集)』에서 “과거를 자주 실시해 사람은 많은데 관직은 적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유수원(柳壽垣)은 『우서(迂書)』에서 “문벌과 주론자(主論者)들로 인해 당쟁이 발생했다”고 지적한다. 언론을 주도하는 3사(사헌부·사간원·홍문관)의 주론자가 배후와 결탁, 여론을 조작해 당쟁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3사의 전횡을 막아야 한다는 대책도 내놨다.
그 자신 당쟁의 희생자인 이중환도 『팔역지(八域誌)』에서 대간을 뽑는 이조전랑제의 문제를 지적했다. 박제형은 『조선정감(朝鮮政鑑)』에서 “사적 이해관계에 따라 공론이 달라져 당쟁이 발생한다”고 했다. 조선말기 이건창도 『당의통략(黨議通略)』에서 “시비가 불분명한 일로 거국적인 붕당 시비가 200년간 계속됐다”고 했다.
그럼에도 비판 논리만으로 붕당 논쟁을 비난할 수는 없다. 긍정론도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율곡 이이가 당의에 가담한 데 대해 선조는 “이이만 같다면야 당이 있는 게 아니라 적어 걱정이다. 나도 주희의 말과 같이 그대들의 당에 들고 싶노라”고 칭찬했다.
‘보수·진보’로 붕당을 설명한 율곡은 “동인은 대부분 연소한 신진이다…이끌고 도와야지 배척하고 눌러 뜻을 저지해선 안 된다. 서인은 대부분 선배 구신(舊臣)인데 결점을 감싸고 장점을 드러내야지 배척해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비판자인 이중환도 “전랑권은 폐해에도 불구하고 300년간 계속된 긍정적 제도”라고 했고, 이건창도 “그들이 자신을 위하여 도모한 것은 적고 나라를 위한 것이 컸다”고 짚었다. 윌리엄 그리피스도 『은자의 나라 조선』에서 “(붕당) 당사자들의 목적은 유럽·미국 정당이 추구한 것과 다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붕당은 유학의 본령에도 어긋나지 않는다. 송(宋)대의 구양수는 “붕당은 예부터 있었던 일이며 자연스러운 이치”라고 했고, 성리학 대성자인 주자도 “붕당은 염려할 것이 아니다. 군자의 당이라면 인군(임금)도 그 당이 되게 이끌어야 한다”고 했다.
일본인 이나바 군잔(稻葉君山)도 “당론은 사회문화 발달에 따라 생기는 보편적 산물이다. 없다면 문화가 저급한 것”이라고 했고, 이시이 도시오(石井壽夫)도 “붕당 출현으로 조선은 회춘을 맞았다…당쟁이 경직되면서 우세한 무리들은 안일에 빠져 무능·무력해졌다”고 했다. 붕당엔 순기능·역기능이 다 있는 것이다. 시데하라류(類)의 ‘민족성론’은 “그렇다면 삼국에서 고려 때까지는 왜 안 그랬는가”라는 반론에 부닥친다.
그리고 당쟁이라는 용어. 서울대 이태진 명예교수는 ‘당파성 비판’이란 글에서 “시데하라의 『한국정쟁지』가 당쟁 개념을 처음 사용했다”고 지적했다. 조선 용어는 당의(黨議)다.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하니 ‘당쟁’은 영조 때 한 번 나올 뿐이며 ‘당의’가 60여 회 나온다.
당쟁이 사라진 영·정조 이후를 면밀히 볼 필요도 있다. 추상 같은 정론이 사라지면서 삼정이 문란해지며 순종·헌종·철종 시대엔 세도정치가 나타났다. 탕평책은 ‘무정치 현상’을 유발한 것이 아닐까.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정조 사후 기존의 붕당이 관료 집단화하면서 권력이 왕의 근신에게 넘어가고 세도정치가 시작됐다”고 지적한다.
그런 흐름은 학문 연구에도 반영된다. 본지가 1981~2012년 당쟁을 주제로 한 논문 19편을 조사했다. 9편의 논문은 부정적으로 인식했지만 10편은 긍정적 요소가 있다고 본다.
이런 글이 있다.
“붕당정치의 원리는 세력 균형을 바탕으로 상호 견제와 비판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상대의 비판을 의식해 책임정치를 해야 했고 정책의 실패가 나타나면 자연스럽게 정권교체가 이뤄졌다…그러나 정치 기강이 문란해지면서 대립과 분열이 격화돼 국가 발전에 커다란 지장을 초래하기도 했다.” 법문사의 『한국사』 교과서 붕당 부분이다. 77년 이후 30여 년 만에 두드러진 변화다.
다시 맹자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본다. “사람은 반드시 스스로가 스스로를 모독한 연후에 남들도 그를 모독한다.”
우리가 먼저 선비의 가치를 회복하면 다른 이들도 높이 받들 것이라는 의미로 새겨도 좋을 것이다.
Ⅳ.『당의통략』 분석으로 본 일제 ‘당쟁 처참론’의 허구
- 조선 당쟁 기간 중 140명 처형 … 日은 텐구당 난 때만 352명 참수
이건창의 『당의통략』. 1575년(선조 8)부터 1755년(영조 31)까지 180년의 붕당사를 정리했다. 양반 중심 정치가 극복돼야 한다는 관점에서 붕당을 비판했는데 일본의 식민사학자 시데하라가 이를 당쟁 폐해론을 주장하는 근거로 교묘하게 악용했다
일제는 조선시대 붕당사를 왜곡하는 데 골몰했다. 민족성, 더러운 피 때문이라고도 했다. 그리고 처참함을 강조했다. 오다 쇼고 같은 이를 비롯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조선왕조 후기에는 당쟁으로 살육행위가 격전처럼 전개됐고 참극이 일어났다고 했다. 그 점은 이건창이 『당의통략』에서 붕당 폐해의 원인을 8개로 지적하며 그 하나로 형벌과 옥살이 벌의 지나친 엄함을 꼽은 것과 유사해 보인다.
시데하라가 ‘조선인 스스로가 고백한 글’이란 식으로 악용한 서적이다. 그런데 실제로 처참했나. 『당의통략』을 직접 분석한 두 연구가 있다.
경남대 김종덕 교수의 1981년 논문 ‘이조당쟁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당의통략』의 갈등분석을 중심으로’에 따르면 사형당한 이는 19명이다. 전체 처벌은 128건이며 사형을 제외하면 귀양 57건, 파면 25건, 관직삭탈 10건, 책망 7건, 외직 5건, 국문 3건으로 분류했다. 그리 잔인해 보이지는 않는다.
건국대 신복룡 명예교수도 1988년 『당의통략』의 사망자를 연구했다. 김 교수의 조사결과와는 다르다. 선조 때 21명, 인조 2명, 효종 7명, 숙종 38명, 경종 38명, 영조 34명으로 모두 140명이 죽었다. 이 중 역모자 63명, 임금을 속인 자 2명, 반정으로 죽은 자 9명, 장희빈 사건으로 죽은 자가 13명이다. 신 교수는 “순수 당쟁으로 죽은 이는 79명”이라고 했다.
신 교수 분석에 따르면 사망자도 당쟁보다 왕실 전복과 관련돼 많았다. 선조 때는 ‘정여립의 난’이 있었다. 숙종 때는 임금을 바꾸려 한 시도 때문에 발생한 ‘경신대출척’, 경종 때는 ‘임금 암살 시도’ 사건인 목호룡의 고변이 있었고, 영조 때는 목호룡의 고변이 거짓으로 탄로나 대형 참사가 일어났다. 인명은 중요하다. 그러나 최대 140명으로 잡더라도 180년에 걸친 사형의 수를 처참하다고 본 것은 과장이 아닐까.
서유럽 정치사는 훨씬 더 참혹하다. 프랑스 혁명 때인 1792년 8월 10일 하루 1300명이 처형됐다. 1795년 7월 21일엔 하루 만에 왕당파 718명이 처형됐다. 파리 코뮌 기간 중 ‘피의 주간’인 1871년 5월 21~28일엔 2만5000명이 피살됐다.
제정러시아의 ‘피의 일요일’인 1905년 1월 22일 하루에 500여 명이 피살됐다(이상 신복룡 『한국정치사』). 신 교수는“조선의 국법은 무분별한 참극을 허용치 않아 영국의 청교도 혁명이나 프랑스 대혁명에서 같은 대량 학살이 없었다”고 지적한다.
일본도 잔혹성엔 유럽을 뺨친다. 에도시대 막부 말기인 1864년 5월 2일 미토번(水戶藩)의 개화파 중 과격파가 반란을 일으킨다. 막부에 대해 쇄국론의 기치를 내걸고 거병한 것이다. ‘텐구당(天狗黨)의 난(1864. 5~1865. 1)’이다. 막부의 미·일 수호통상조약 체결에 반발하는 일왕과 막부의 대립, 번 내 보수파와 개화파의 대립 등 파벌에 얽혀 발생했다.
일제 식민지 학자들이 ‘당쟁’이라 부르는 조선의 붕당 논쟁의 성격임에도 사무라이의 나라답게 칼의 대결이 벌어졌고 피바람이 불었다. 난은 실패로 끝났다. 정리를 담당한 다누마 오키다카(田沼意尊)의 막부군은 사정없었다.
주요 인물은 그냥 감금했지만 나머지는 수갑·족쇄를 채워 비좁은 청어 창고에 짐짝처럼 밀어넣었다. 하루에 주먹밥 하나와 더운 물 한 잔. 사망자가 속출했다. 창고에서 죽은 사람만 20명 이상이었다. 난이 실패로 끝나자 828명의 투항자 중 352명을 참수했다. 일본이 과거사를 돌아본다면 한국의 당쟁만 처참했다고 비난할 수 있을까.
식민사학자들은 당의(당쟁) 기간도 길게 잡으려고 애썼다. 그들의 주장은 ▶230년 설(선조 8년 1575년~영조 말기) ▶290년~330년 설(오다 쇼고 주장) ▶410년 설(시데하라 주장)로 분류된다.
신 교수는 “시데하라는 당쟁의 참혹성을 과장하려고 사화를 포함시켰다. 그러나 사화는 당쟁과 다르다”며 “1680년 경신대출척으로 남인이 추방되고 서인이 득세한 1725년까지 50년 정도를 당쟁 기간으로 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고 강주진 전 중앙대 교수도 『이조당쟁사연구』에서 ‘당쟁은 경신대출척부터 탕평책이 정착된 1772년(영조48년)까지 92년 정도’라는 입장이다.
그런데 일제의 어용 한국 지식인이 기간을 더 늘렸다. ‘개벽’ 주간이었던 차상찬은 『사화와 당쟁』에서 조선개국부터 멸망(1392~1910)까지 520년을 당쟁 기간으로 봤다. 조선조 내내 싸웠다는 것이다. 홍승구(홍목춘)는 1934년 11월 ‘개벽’의 복간 창간호에서 한술 더 떠 고려 초~조선조 말까지 900년간으로 봤다.
Ⅴ. 중·일엔 없는 선비의 공론정치, 조선 500년 버틴 힘인가
선비 정치의 정당성은 천명·민심·공론에 근거한다. 그러나 천명은 말이 없고 민심은 변덕스럽다. 공자는 “많은 이가 미워해도 반드시 살펴야 하며, 많은 이가 좋아해도 반드시 살펴야 한다”고 했다(『논어』 위령공). 그래서 유학이 통치 이념이었던 나라들엔 공론을 위한 장치로 언관(言官)이 있었다. 조선과 명나라에선 성리학 정신으로 충만한 선비·유자가 그 일을 맡았다. 선비와 공론은 한 몸이다. 한·중·일의 양상을 비교했다.
같은 유교문화권이지만 성리학의 영향, 특히 공론(公論)의 강도는 조선·명·에도막부가 달랐다. 에도막부에선 5~6명의 로주(대신)가 비밀 회합으로 대소사를 결정했다. 공론은 없었다. 황제의 권한이 강했던 중국에선 공론이 사실상 허락되지 않았다. 조선만 공론을 지켜냈다. 사진은 쇼군이 거주한 옛 에도성(왼쪽)과 명 황제의 거주처였던 베이징 자금성. [중앙포토]
#사례 1=효종 즉위년(1649) 대동법 논쟁이 벌어졌다. 우의정 김육이 “먼저 호조에서 시험해야 한다”고 소를 올렸다. 좌의정 조익, 연양군 이시백은 찬성. 이조판서 김집, 호조판서 이기조와 정세규는 반대. ‘떠르르한’ 선비들인 김상헌·송시열·송준길·김경여도 반대의 각을 세웠다.
반대의 표면적 이유는 백성의 불만이었지만 실제론 토지 상실을 두려워한 기득권의 반발도 깊었다. 조정 안팎의 논쟁은 치열했다. 그래도 효종은 강행했다. 논쟁은 계속됐다. 1654년 효종이 송시열에게 물었다. 송시열은 “대동법은 좋은 법”이라 답했다. 5년에 걸친 논쟁은 그쳤다.
#사례 2=에도(江戶)시대 말기인 1841년 ‘덴포(天保)의 개혁’이 발표됐다. ▶사치 금지 ▶검약 ▶이자 인하 ▶에도의 농촌 출신 귀향 조치 ▶가부나카마(株仲間독점적동업조합) 폐지 ▶에도·오사카 주변의 다이묘·하타모토 영지를 막부 직할지로 귀속 등이었다.
이 조치로 막부 지배체제는 강화되지만 해당 지역에 영지를 둔 하타모토의 타격은 컸다. 반발이 커져갔고 이를 추진한 로주(老中조선의 대신 격) 미즈노 다다쿠니는 파면됐다. 그에게 무사와 상인들은 돌을 던졌다. 그런데 어떤 대화가 지도부 사이에 오갔는지는 기록이 없다.
대동법, 덴포 조치 모두 개혁이었지만 조선에선 성공, 일본에선 실패다. 개혁 사례 하나만으로 양국을 비교할 순 없다. 그러나 논의 양상은 주목할 만하다. 조선에선 ‘공론’이 있지만 일본에선 찾기 어렵다. 중국에선 어땠을까.
#사례 3=명나라 만력(萬曆) 원년(1563년)이후 10년간 장거정은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고성법으로 관리의 업무를 철저히 감찰·평가하고 감시했다. 전국 토지를 측량해 지방 호족의 불법 경작지를 몰수하고 세법을 정리했다. ▶사적 서원 설립의 불허 ▶이단 사설의 금지 ▶유생의 정치 간여 금지 조치도 내놨다.
그런데 고성법은 탄핵을 맡은 언관의 입을 틀어 막았다. 아침에 결정된 일이 저녁이면 실행돼야 하는 환경에서 공론은 사라졌다는 비판이 제기됐다(『명사(明史)』 권23, 장거정 전). 16차례 탄핵이 올라왔지만 주도자는 대부분 처벌받았다. 남경의 급사중 여무학은 삭탈 관직됐고, 어사 부응정은 변방으로 쫓겨났다. 어사 유대는 곤장 100대를 맞고 변방으로 쫓겨났다. 어사는 언로를 맡은 이들이다.
성리학을 존중한 조선·명·에도막부 가운데 핵심 가치인 공론을 가장 철저히 지킨 나라는 조선이었다. 조선에선 폐해론이 나올 만큼 공론을 키웠다. 건국 초기 정도전은 “나라의 책임은 왕에 있지만 언권은 언관에 있어야 한다”고 했다. 영조 때 택리지를 쓴 이중환은 “300년간 권세를 크게 농간한 자가 없고, 큰 근심이 없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라고 했다.
지방에서는 선비들이 서원을 중심으로 청의(淸議)를 일으켜 조정을 감시했다. 유통(儒通)이라 불린 그들의 격문은 수십 일이면 나라를 돌았다. 글을 아는 백성은 상언(上言)을 하고 모르면 신문고를 두드렸다.
에도 시대에도 공론은 있었다. 그러나 엘리트의 폐쇄적 공론이었다. 막부의 중추인 로주가 그 기능을 했다. 병부를 제외한 조선의 6조 판서쯤 되는 이들은 재정·민정·인사의 실권을 장악했다. 에도 시대 통틀어 143명에 지나지 않는 이들이 전권을 행사했다. 막부 말기에 정사 총재직을 역임한 에치젠 후쿠이 번주 마쓰다이라 요시나가는 “사람들은 귀신을 대하는 것처럼 로주를 두려워했다”고 말했다.
초기 쇼군 3대까지 보좌역에 지나지 않던 이들은 1635년 법령이 마련됨으로써 5대 쇼군 때부터 실세가 됐다. 11대 쇼군 이에나리시대의 수좌 로주인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1787년 간세이의 개혁을 추진하고 1841년 로주 미즈노 다다쿠니가 덴포 개혁을 단행한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그러나 로주는 폐쇄적이었다. 한번에 5~6명끼리만 소통했다. 지식인 혹은 사무라이와의 소통은 없었다. 다이묘 밑에서 ‘관례에 따라 합의제로’ 대소 사안을 처리했을 뿐이다. 합의에 이르기까지 얘기를 거듭해 만장일치를 만들어갔다. 기밀 논의 과정이 새나가지 않게 애썼다. 조선의 실록처럼 일처리를 기록으로 남기지 않았다.
그러나 이는 ‘그들만의 리그’였다. 로주의 자격은 3만 석 이상을 가진 후다이 다이묘. 지주여야 했다. 그들도 사무라이였지만 땅이 없는 사무라이는 칼잡이에 지나지 않았다. 국사는 로주의 일이었고 다른 이들이 참여할 길은 막혔다. 철저한 계급사회였다(야마모토 히사후미 『お殿樣たちの出世』).
지난 2월 11일 도쿄에서 만난 게이센(惠泉)여학원대의 사와이 게이치(澤井啓一) 교수는 “일본에선 로주가 나라(번) 운영을 맡아 이끌었으며 그 전통은 태평양전쟁으로까지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가 소개한 일화.
1940년 미국과의 전쟁이 결정된 일왕 어전 회의.
육군 대표= “미국과 전쟁을 하면 해군 중심 전쟁이어서 우리가 결정할 바가 아니다.”
해군 대표= “굳이 전쟁을 하라면 한다. 하지만 단기적으로 성공할지 몰라도 장기적으로 패배할 것이다.”
일왕이 시를 읊었다. ‘세계 전체가 형제인데 왜 이런 풍랑이 일까’.
지난 2월 13일 센다이(仙台)에서 만난 도호쿠(東北)대학 가타오카 류(片岡龍) 교수는 “천황의 시는 전쟁 결정을 알리는데 이는 로주 방식이다. 대신들의 결정을 천황이 추인한 것”이라고 말했다.
중국은 공론 정치를 탄생시킨 나라. 그러나 서울대 최승희 명예교수는 ‘조선 초기의 언관에 관한 연구’에서 “진대 이전까지 언관은 없었다. 한대엔 진의 제도가 원용됐다. 당·송대엔 어사대와 간관 제도가 정비됐지만 청대엔 사라졌다”고 한다.
황제 권력이 강화됐기 때문인데 명말청초의 양명학자 당견(唐甄)은 “군주는 하늘의 상제다. 대신들은 감히 쳐다보지 못하고 노예만도 못하게 구부리고 앉는다”고 개탄했다. 대만대 황쥔제(黃俊傑) 교수는 “중국의 정치 갈등은 실제론 사대부와 환관의 대결이었다”고 말했다. 대만사범대 판차오양(潘朝陽) 교수도 “현대 중국 공산당의 통치방식은 과거 황제 시대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근대의 조선·명 에도막부 모두 공사를 구별했다. 가타오카 교수는 “공(公)이 무엇인지 중국과 일본에선 황제나 천황·쇼군이 결정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공공(公共)개념이 있어 왕과 선비가 더불어 논의했다”며 “중·일에선 조선과 같은 공론은 없었다”고 지적했다.
그는 또 “로주 방식은 근대까지는 잘 적용됐지만 현대에서 한계가 드러나 조선의 공론 방식을 주목한다”며 “300년 미만 존속한일본·중국 왕조와 달리 조선 왕조가 500년 넘게 유지한 것은 당쟁(당의)이라는 공론 형성 과정이 나라 유지에 큰 기능을 했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정조 사후 선비의 붕당과 당의(黨議)라는 공론 시스템이 사라진 자리에 세도정치가 둥지를 틀었다. 그리고 망국의 길이 열렸다.
[출처] :중앙SUNDAY-아산정책연구원 공동기획] 한국문화대탐사/ 중앙선데0이
Ⅵ.국난 때 빛난 진정한 선비정신 의병 일으키는 ‘거의’ 최고 가치
선비정신은 어려울 때 더 빛난다. 구한말 일제의 침략에 선비들은 분연히 일어났다. 신민회 독립운동가들이 용수를 쓴 채 형무소로 끌려가고 있다. [중앙포토]
시인 이육사, 일제 암흑기 최고의 저항 시인이다.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의(義)를 찾아 독립운동을 했던 그는 퇴계 이황의 14대손이다. 그가 자랐던 안동은 유교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는 곳, 나라가 어려울 때 선비정신이 더욱 빛났던 고장이다.
힘들고 어려울 때, 특히 나라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을 때 진정한 선비정신은 빛을 발한다. 과연 어떻게 ‘절의(節義)’를 지켜낼 것인가. 전주대 이형성 교수는 “국가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선비가 취할 수 있는 길은 대개 세 가지다. 19세기 말에는 거의(擧義), 순절(殉節), 자정(自靖)이 있었다. 모두 의를 지키는 방법으로 여겼다”고 한다.
가장 으뜸은 역시 ‘거의’, 의병(義兵)을 일으키는 것이다. 거병(擧兵). 이미 임진왜란 당시 고경명·김천일이 그랬다. 정옥자 서울대 명예교수는 “임란을 이겨낼 수 있었던 것은 의병 덕분”이라고 단언했다. 당시 의병은 백성들이 스스로 지원하는 군대였다. 왜군이 진격하면 보급로를 끊고 보급품을 태웠다. 19세기에 와서는 면암 최익현과 제자 임병찬, 노사 기정진, 의암 유인석이 대표적인 예다.
참 선비의 응집력은 아주 강하다. 최익현은 자기 고향이 아닌 호남에서 의를 호소했지만 모두 동조하고 거병했다. 최익현과 임병찬은 정읍·순창·금산에서, 그리고 기정진의 손자 기후만은 장성을 중심으로 의병활동을 펼쳤다. 그런 기상을 가진 사람들은 훗날을 기약하기 위해 만주·연해주로 떠났다. 그들은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숭실대 곽신환 교수는 “선비들 가운데 노론에겐 조선 왕조를 지키는 게 여러 가지로 중요했기 때문에 의병이 많이 나왔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일제를 많이 괴롭힌 것도 노론 우암 송시열 계열이었다. 노론이 많은 전라도 쪽에서 의병이 많이 나왔다”고 한다.
실제로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과 도산서원이 자리 잡고 있는 풍기·영주·안동 지역에서는 남인의 강한 선비정신을 엿볼 수 있다. 의성에 사는 남인의 후손 김용수씨는 집안에서 전해들은 일화를 소개한다. 을미년 단발령 때 고종황제가 유림에게 밀령을 내려 1890년대 말 경상북도 의성군에서도 의병이 일어났다. 의병 대장 김상동, 김수욱은 일본 군대와 접전하다가 마침내 피를 흘리면서 전사했다. 김수욱은 그의 증조부이며, 당시 돌아가셨다는 것이다.
소수서원 박물관 박석홍 관장은 “1907년 11월 10일 의병 500명의 아지트인 순흥에 일본군 특공대 1750명이 들이닥쳤다. 불을 질러 한옥 180채를 태웠으며, 그보다 세 배 더 많은 민가가 전소됐다. 이후 열사 선비들이 뿔뿔이 흩어졌으며, 만주 등지로 가게 됐다”고 한다.
다음은 ‘순절’이다. 절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 도저히 현실을 받아들일 수 없을 때 마지막으로 택하는 길이다. 국치(國恥)를 원통해 하면서 자결한 민영환, 매천야록을 남긴 황현, 대한제국 초대 러시아 공사관 이범진 같은 지사들로 죽기를 각오하고 거병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의사 안중근, 의열단원으로 활약하다 옥사한 시인 이육사, 조국의 아픈 현실을 가슴에 품고 시를 썼던 윤동주에게도 그런 선비정신이 이어졌다. 경술국치 때에 안동지방 유생들의 순절이 많았음을 기려수필 등에서 확인할 수 있다.
‘거의’와 ‘순절’ 사이에 있는 제 3의 길이 ‘자정’이다. 어지러운 현실을 떠나 도학(道學)에 매진하는 일이다. 일종의 은거다. 노론 가운데 서울 중심이었던 낙론 계열의 간재 전우(1841~1922)가 대표적이다. 그는 부안 반도 앞 계화도로 들어갔다. “500년 종사도 중요하지만 3000년 도통(道統)을 잇는 게 더 소중하다. 무가치하게 목숨을 버리지 말고, 학문을 일으켜 도로써 나라를 찾아야 한다”며 “총칼 앞에 헛되이 목숨을 버리기보다 학문을 열심히 닦아 뜻을 편다면… 어느 때인가는 우리의 힘으로 이룰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유림계가 파리 강화회의에 독립을 요구했던 이른바 ‘파리장서(巴里長書)’에도 그는 참여하지 않았다. 그런 처신은 많은 비난과 지탄을 불렀다. “죽기가 무서워 의병을 일으키지 못했고, 화가 미칠까 두려워 외세를 배척하지 못했다”는 비판, ‘부유(腐儒, 썩어 빠진 유학자)’라는 비난도 받았다.
이들 세 갈래 길만이 전부는 아니었다. 종래의 ‘의리’가 무용함을 느끼고 새로운 길을 찾아내는 일 역시 식견을 가진 선비들의 몫이었다. 과감한 사고 전환을 시도한 부류도 있었다. ‘개화(開化)’다. 개화파는 세상의 변화를 직감하고 활로를 찾고자 했다. 젊은 혈기로 3일 천하를 구가했던 갑신정변(1884)의 주역 김옥균·박영효·서광범·홍영식과 그 주변 인사 유길준·윤치호는 양반 가문의 핵심 선비였다.
진짜 부유에 해당하는 이들의 못난 처신도 많았다. 친일(親日)을 개화로 알다가 변절한 사람들. 을사오적(乙巳五賊)이 대표적이다. 처음엔 ‘개화’운동으로 시작했지만 나라가 망한 뒤 대안을 찾지 못해서 친일로 기울어진 사람들도 있었다. ‘변절’한 선비들이다.
어려울 때 기꺼이 자신을 던졌던 선비들의 기백은 우리가 자랑스럽게 가다듬어야 할 정신문화 유산이다. 하지만 위기가 닥쳐서 의를 행하기 전에 위기를 피할 수 있는 대안을 찾아냈더라면 또 어땠을까. 큰 선비 홍유(鴻儒)의 통찰력, 통유(通儒)의 예지를 갖춘 선비정신이 그리워진다.
Ⅶ. 한.중.일 3국의 선비 문화
- 日 학자 “조선 500년 지탱한 힘은 선비들 논의로 정하는 ‘공공’ 개념”
『조선왕조실록』에는 ‘공공(公共)’이란 단어가 600건이 넘는다. 중국에선 왕조실록에 해당하는 『이십오사(二十五史)』에 14건, 『자치통감(資治通鑑)』에 6건, 『명실록(明實錄)』에는 10건이다. 일본 센다이(仙台)의 도호쿠(東北)대학 가타오카 류(片岡龍) 교수가 분석한 결과다. 그는 “이 엄청난 차이가 조선왕조 500년이 존속한 이유”라고 말한다.
가타오카 교수에 따르면 중국과 일본에서 ‘공(公)’은 왕이나 위정자를 뜻하고 ‘사(私)는 아랫사람을 말했다. 그러나 조선에선 ‘공’과 ‘사’ 사이에 ‘공공’이 있다. 선비들은 공공을 통해 의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그는 “일본에도 헌법에 ‘공공의 복지’라는 것이 있지만, 이것은 위에서 뭔가를 해준다는 의미여서 조선의 공공과는 다르다”고 말했다. 한국 선비의 독특한 역할에 대한 일본적 진단이다.
한국 특유의 ‘선비’는 어디서 기원한 것일까. 단재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옛날 소도 제단의 무사를 선비라 칭했다. 고구려에서는 검은 옷을 입어 조의선인이라 했고 신라에서는 화랑이라 했다. 선비는 정예 무사집단”이라고 주장한다.
선(仙)의 무리로서 선배 제도는 고구려 태조왕대에 창설돼 고구려 강성의 기반이 됐고 신라의 화랑은 진흥왕이 고구려의 선배 제도를 모방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선배’라는 이름을 유교에 빼앗기고 조선은 무풍(武風)을 천시해 무사적 자취가 전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서울대 정옥자 명예교수는 “고조선의 단군도 선비라는 주장이 있지만 자료가 없다”고 말한다.
우리가 익숙한 선비 개념은 대체로 조선시대에 자리잡은 유학적 인간형이다. 실제로 선비라는 순수한 우리말이 언제부터 쓰여졌는지는 정확한 시기를 알기 어렵다. 세종 25년(1443)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사(士)와 유(儒)의 글자풀이를 ‘선’나 ‘선’로 표기했다. 선비라는 말이 처음 나왔지만 그 이전에 쓰였음을 보여준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박훈 교수의 ‘명치유신과 사대부적 정치문화의 도전’ 논문에 따르면 중국에선 선비적 정치문화가 송대에서 시작해 명대에 꽃을 피웠다. 명대의 과도관(科道官)은 언관의 비판 기능을 발휘했고, 사대부들의 학문 네트워크도 활발했으며, 규제는 있었지만 상서(상소)도 역할을 했다.
그러나 청(淸)대 들어 위축된다. 조정의 정책은 황제와 각부 장관의 협의로 결정하고 집행됐다. 언관인 도찰원(都察院)의 간언 기능도 동결됐다. 사대부의 상서도 거의 없었다. 옹정제(雍正帝)의 『어제붕당론(御製朋黨論)』에 의해 당파도 결성되지 않았다. 19세기 후반 강유위(康有爲)를 비롯한 청말 개혁가들에 의해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활성화될 때까지 이런 상태는 계속됐다.
정옥자 교수는 “조선이 중화라고 생각한 것이 조선 후기 명이 망하고 청이라는 오랑캐가 등장할 때”라며 “오랑캐는 종족을 따지는 것이 아니라 무력으로 남을 침략, 약탈하고 괴롭히고 빼앗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본은 18세기까지 사무라이 사회였지만 18세기 말 이후 다른 유형의 사무라이가 등장한다. ‘독서하는 사무라이’ ‘칼 찬 사대부’다. 이들의 등장은 18세기 말부터 시작된 유학의 급속한 확산에 힘입었다. 사무라이와 그 자제들은 급격하게 늘어난 번교(藩校)·사숙(私塾)·스터디그룹(勉强會) 등 각종 교육·학습기관에 다니면서 학문을 익히고 인맥을 만들어 갔다.
이런 흐름은 사무라이의 정치화를 촉진했다. 이전에는 ‘결당(結黨)의 금(禁)’ ‘월소(越訴)의 금’이라고 해서 당을 만들거나 상소를 하는 게 금지돼 있었다.
사무라이의 새로운 학문 네트워크가 형성되면서 학문 실력과 리더십이 중시됐다. 널리 퍼진 회독(會讀)이라는 학습 방법은 정치토론의 장이 되기도 했다. 그들은 천하국가를 우려하는 사대부적 ‘우환(憂患)의식’을 갖고 있었다. 당도 만들었고 ‘붕당적 조짐’도 나타나 스스로를 ‘정의당(正義黨)’, 상대방은 ‘속론당(俗論黨)’ 등으로 부르기까지 했다.
조선과 청의 정치 엘리트들이 크게 위축된 시기에 일본 사무라이들은 새로운 시대를 맞은 것이다. 전에는 엄격하게 금지됐지만 이젠 정치현안에 대한 상서도 빈번히 올릴 수 있었다. 전에는 어른거리지도 못했지만 이제는 번주의 어전회의에 참석해 의견을 피력하며 두각을 나타냈다. 언로의 활성화를 위해 언관의 설치를 주장했다. 나아가 군주 친정(親政)을 요구했다. 기존의 소수 합의체제를 해체하고 일반 사무라이가 정치에 개입할 수 있는 길을 열려 한 것이다. 조선의 선비 시스템과 유사하다.
박 교수는 “그러나 이것이 조선과 같은 유교의 활성화를 뜻하지 않는다. 문을 숭상하지만 무를 배척하지 않는 ‘문무양도(文武兩道)’다”라고 지적했다.
가타오카 교수는 “일본의 주력은 힘으로 백성을 다스리는 사무라이다. 사무라이라고 말로 다스리지 않은 것도 아니고, 선비도 무력을 사용하지 않은 건 아니지만, 굳이 나누자면 선비는 문(文), 사무라이는 무(武)”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막부 말기 유학에 영향을 받은 사무라이는 동요와 변혁을 일으키는 동력이 됐다.
[출처] 조선시대 지식인 『선비』의 삶과 평가|작성자 ohyh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