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변황소와 아버지 그리고 나 --소해에 소처럼 살고프다
한일송
모아산하면 주은래총리가 생각나고 연변황소하면 주덕해주장이 생각나듯이 나도 연변황소하면 아버지가 생각난다. 농기계가 발달하지 못한 연변지역에서 황소는 농사일에 없어서는 안될 존재였다.하지만 추석이면 오래 부려먹다 더 일할 힘이 없는 소를 잡아 추렴을 하곤 했다.소는 이런것들을 다 운명인양 묵묵히 받아들엿다. 연변은 추운 지역이라 부억건너칸에서 소가 살았으니 사람하고 소가 한집에서 산 셈이다. 아침이면 더운 물끓여 사람들이 식사하기전에 여물을 챙겨주시던 아버지가 그립다. 지금 내 자식들이 이 말을 믿을가? 그러던 어느해 집체우사칸을 벽돌로 짓고 개인집에서 키우던 소를 집체우사로 집중시켰다.그때 현장(군수)의 말씀이 가관이였다.농촌사람들은 아직도 초가집에서 사는데 소가 먼저 벽돌집에서 살게 된다며 소가 농사일에 크게 기여하니 마땅한 대접을 해야한다는것이였다.하지만 집체로 소사양하는것이 초가집에서 주인과 같이 살 때보다 훨씬 못했다. 50여마리 소들을 한세 먹이는것이 어디메 개개인이 알뜰히 챙겨줄 때 하고 비길수 있으랴! 소들은 날따라 여위여 갔다.집체소라 생각하니 사람들이 부릴 때도 마구 부리여 소가 학대받는감이 들었다. 개인이 기를 때는 누구나 소임자눈이 무서워 소를 마구 부리지 못하였다. 개인들이 소를 기를 때는 아침마다 집집의 뜰에서 우렁차게 퍼지던 영각소리가 집체로 사양한 후로는 마을골목에서 그 귀맛돋구던 영각소리가 사라져버렸다.소도 여위니 <<엄매--->>영각소리를 지르지 못하나보다. 평생 땅과 씨름하며 살아온 아버지는 10년너머 친구해온 소를 집체우사에 보내는것을 못내 서운해 하시였다.딸이 시집갈 때 울지 않으시던 아버지가 이른새벽에 일어나 건너칸소구유앞에 가서 소머리를 쓰다듬고 계시였다.그러다 손으로 김이 무럭무럭 나는 여물을 휘휘 저어 주기도 하고 여물속에 쌀에 뉘처럼 섞인 퍼진 콩알을 골라 자신의 입에 넣다 말고 소입에 넣어준다.
<<아부제, 엄마 아침 자시래요?>>
나를 흘끔 쳐다보는 아버지 눈에 이슬이 맺혓다. 내가 아버지 눈물을 본것이 그때가 처음이다. 당황해하는 막내아들한테 눈물보인것이 아니 됐던지 아침자시라는 말에 대꾸 한마디도 안하고 궤춤에서 담배쌈지를 꺼내들고 밖으로 휑하니 나가버리는것이였다. 그때 쾅 하고 닫겨지는 외양간문소리가 내 가슴을 덜컹하게 하였다.
그날 아버지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았다.소들이 저마다 이마에 붉은꽃을 달고 벽돌우사칸에 입주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잔치날처럼 다 모이고 현에서 현장을 위시한 령도들이 많이 모여왔다. 붉은 꽃을 달고 마음청년들이 군대에 가는건 보아도 소이마에다 붉은꽃을 단건 처음보았다.소에 대한 가장 큰 대접인가보다. 근데 그 굉장한 잔치에 아버지모습은 어디에서도 없었다. 정심때가 되자 어머니가 아버지가 강역 자류지밭에 있을거라며 모셔 오라하였다, 강역자류지밭에 가보니 아버지가 우크리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니 문득 오늘 벽돌우사칸에 이사간 우리 집소가 생각났다.그때로부터 아버지는 좋은 친구를 잃어버린것처럼 말수가 더 적어졌다.다른 사람들은 뜨시한 우사칸에 가서 한담하는데 아버지는 거기 가지 않고 기나긴 겨울을 집에서 홀로 보내셨다.보내고 쉽지않은 소를 집체우사칸에 보내고 거기로 발길이 돌려지지 않았나보다.
나도 자라 어른이 되여 집체농사를 짓다 대학에 갔다.1979년도에 도거리농사하며 집체자산을 가가호호에 나누어 주는데 년로하신데다 병환에 있던 아버지가 다른 농쟁기는 다 마다하고 송아지 한마리를 가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병약한 로구를 이끌고 어린 송아지를 동무하여 들녁에 나가 하루해를 보내는거로 만년지락을 누리시였다. 소와 아버지 그리고 나.....저 푸른 하늘아래 뉘연히 펼쳐진 들판의 살진 소를 바라보니 아버지의 무뚝뚝한 모습이 우렷이 떠오른다.소해에 소처럼 살고프다.
.
첫댓글 이야기가 한곬으로 가나요. 저두 소에 대한 짤막한글 쓰다만것 있는데. (어제 아침에요.) 완성해 올려 보리다... 잼있는글에 머물다 갑니다.
소때해에 소 이야기 력사의 한페지를 잘 보았습니다. 민초들의 삶의 애환과 소와의 깊은 인연으로 정의 소중함을 실감하였습니다.
고운 울님 ! 어버지의 삶의 애환이 그려진 것에 눈물 맺히게 합니다. 소는 그집의 재산의며 크나큰 일꾼이였습니다.우리집도 황소 3마리가 농사를 지었는데 조부님은 황소에 많은 애착을 가지셨고 일꾼을 통하여 아침엔 싱싱한 소꼴을 베어와 소를 먼저 먹이고 나서야 일꾼과 조부님 우리 모든 가족은 식사를 할수 있었습니다.그 만큼 소는 없어서는 안될 농사꾼이였지요.그곳 연변에서 황소를 가진실 정도면 그래도 괜찮게 살으신 집안이였네요. 부친님의 그 모습을 보고 느끼고 가르침을 받아서 그래도 대학을 공부 하실수 있는 행운도 누리셨고 오늘날 님은 자녀분도 훌륭하게 학습시키셨고 그 위치에 서 계신지 모릅니다. 다
이것이 소의 부지런 함과 함께 오직 농자대천하지대본을 교훈삼아 살아오신 우리네 부모님의 고달픈 삶속에서도 큰 희망이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도 여기까지 어느 위치에 있는 것이지요.세상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늙어 가지만 소처럼 느릿하게 여유를 가지고 곱게 늙어가고 자식들이 보고 배울수 있는 그런 모습을 보이면서 서로 위하고 배려하는 그런 사랑속에 함께 사는 세상이였으면 합니다.좋은글에 많은것을 느끼게한 시간이있습니다.감사합니다, 즐거운 휴일 되시고 건강 하시고 행복 하세요!.영혼.
글을 보면서 아버님의 부지런하시고 말수 적으신 실농군임을 알것 같습니다. 물고기 자리우다 고 쪼꼬만게 죽어도 가슴이 그렇게 아픈데 하물며 그때 그 시적 소라면 대단한 재산에 속한데 그걸 친히 자리우시느라 정이 들대로 들었는데 집체에 내 놓으시느라 얼마나 가슴 아프셧겠나요 그 심정 지금에 와서도 이해 되여 함께 가슴 아파 나네요. 그때 그시절 시대는 왜서 그랫는지 자기 자신이 하고 싶지 않는 일이라도 말 한마디도 못하게 하는 세월이니깐요.. 락동강님 소박한 글을 보노라니 지나간 시간들이 회억 되네요.. 잘 보고 갑니다.. 항상 건강 하시고 행복하세요
아 ,원래는 개인집에서 키우던소를 집체에서 키웠네요. 처음듣는 얘기구요.한가지 어린시절 일은 기억나네요.그때 소 우사간 가면요,지금 전병보다 더 크고 두꺼운건데 아마 두병이라 기억돼요,그걸 몰래몰래 훔쳐왔는데 ㅎㅎㅎ,유치하죠! [소] 하면 그냥 한마디 불평없이 수걱수걱 일에 게으름없는 부지런한 농군의 이미지로 남습니다.좋은글 잘 보았습니다.
글 보니까 반갑습니다 ㅎㅎ 이전에요 우리 집에서는 아버지가 소를 돌보지 않고 할아버지 소를 돌보앗습니다..글 읽으면서 우리 할아버지 모습을 보는 같습니다...할아버지 모는 소 수레에 앉아서 무슨 도랑 물 같은거 건너가는데 거미리 욱실 욱실 하던게 생각납니다..락동강님 쓰신 좋은 글들이랑 읽으니까 기분이 좋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선생님의 글에서 집체화시기의 어려운 우리 농촌의 모습을 그려보게 되네요.. 소해에 누구나 소처럼 근면하고 성근하게 보낸다면 세계적인 경제위기도 원만히 넘을수 있으리라 믿으면서 좋은글에 머물다 갑니다.
락동강님 좋은 글 항상 구수하게 올려주어서 감사합니다.좋은글 읽을때마다 저 많은 생각 가지게 됩니다. 존경합니다 락동깅님 많은 관심 항상 해주어서 감사 합니다 건강 행복하세요
울집에서 아버지가 소를 키우면서 우리들한데 벼짚을 썰기위해 작두질을 시켰는데 ... 아버지가 먹이고 우리가 작두를 디뎌서 누르고 ... 인젠 다 옛말이 되였네요 아버지를 그리게 하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황소처럼 부지런하고 근면하신 락동강님은 코스모스화원의 튼튼한 버팀목입니다.락동강님의 잼난 글에 잠깐 머물러 봤습니다.언제나 건필하세요.
구수하게 역은 자작글 보노라니 고향집의 소사양간 생각나면서 소똥치던 생각이 납니다 좋은글에 머물다 내립니다 언제나 즐거운 일상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