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버의 익명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왜 사이버에서 자신의 실제 이름이 아닌 익명으로 행세하고 싶은 걸까?
누구든 그러고 싶을 때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한번쯤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 살아보고 싶은 욕망.
아무도나를 모르는 곳에서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이 되어 내게 금지된 것들을
하고 싶다는 생각은 누구든 한번쯤은 해봤음직하다.
나 또한 그런 적이 있다. 인터넷 음악방송이란 것을 처음 접하고
한동안 거기에 매달렸던 것이 몇 년 전이었나?
당시 내 음악방을 들락거리던 사람 중 혹 누가 이 글을 보게 된다면
그때의 내 거짓 행각이 여지없이 드러날 수도 있겠지만
어떠랴,이미 지난 일.
심신이 극도로 쇠약해져 있던 당시 나에겐 한순간이나마 현실을 잊고
지친 몸과 마음을 쉴 곳이 필요했다.
그때의 나는 다른 이들과의 대화를 극도로 기피했다.
가까이 지내는 사람들과 연락마저 끊은 채 가끔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인사는커녕 안부를 물어오는 상대에게 대꾸조차 않기 일쑤였다.
하루하루지내는 일조차 버거우리만치 그때의 나는 산다는 일에 대하여 회의적이었다.
그럴 수만 있다면 어디 무인도에라도 가 있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현실이란 것이 어디 그런가. 끊으려야 끊을 수 없는 인연의 끈으로
사방팔방으로 엮여진 것이 우리네 삶이다.
모 인터넷 사이트를 알게 된 것은 그즈음이었다. 한 번도 접속을해 본 적이 없던 곳.
나를 아는 사람은 그곳에 아무도 없었다.
삶에대한 온갖 회의와 신경증에 시달리던 어느 날.
나는 그 익명의 공간에 현실의 나와는 전혀 다른 가상의 인물을 한 명 만들어 내었다.
엘리는 그렇게 태어났다.
엘리.쉰다섯 살의 늙은 마담.젊은 시절 레지로 시작해 티켓다방과 창녀촌을 전전하며
시난고난하다가 이윽고 생의 마지막 종착지에 다다른 듯
달동네 입구 종점에서 옛날식 다방을 차려놓고 시답잖은 잡담들로 또래들을 상대하는,
한눈에도 값싸고 경박하게 보이는 여자.
그녀가 살아온 행색만큼이나 종점 다방에 들락거리는 사람들의
그것 또한 얼마쯤 그녀와 닮아 있다.
지치고 늙수레한 모습으로 다방 한구석에 덩그마니 앉아 흘러간 노래에
무심히 귀를 기울이며 도라지 위스키를 홀짝거리는 그들.
닳아빠진 레코드판에서 흘러나오는 뽕짝 소리에 섞여 직직거리는 잡음들은
어쩌면 그들이 겪어온삶의 온갖 상처들로부터 들려오는 소리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밤마다 싸구려 위스키 몇 잔에 취해 지난날을 추억하며
인생은 다 그런 거라며 씁쓸한 웃음을 흘리는 늙은 마담.
그리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종점 다방으로 하나둘 모여드는 그 또래의 사람들.
그럴싸했다. 나는 즉시 내가 새로이 발을 들여놓은 사이버의 공간에
음악방을 만들어 이 풍경을 재연하기로 결정했다.
방 제목은<엘리의 종점 다방 뮤직박스>부제는 “필히 50대 이상입장 가능”이었다.
채팅 자동인사말은“마담은 낮술에 절어 카운터에서 졸고 있음.”
나는 그 방을 딱 두 달간 열었다.
많고 많은 인물 중에 나는 왜 분위기 있고 정숙한 이미지의 장소와 인물을 제쳐 두고
하필이면 싸구려 종점 다방, 그것도 얼굴에 화장독이 덕지덕지 올라붙은
늙고 볼품없는 마담을 나의 분신으로만들어 냈을까.
당시 나는 어떤 일에 대한 좌절과 패배로 매우 건조하고 메마른날을 보내고 있었다.
보고 듣는 주변의 모든 것들에 대해 별다른 느낌도 감정도 없이
그저 모든 것이 귀찮고 나른해지는 권태와 우울의 연속.
돌이켜 보면 아마도 나는 그 시기에 일종의 도덕적 자학증상에깊이 빠져 있었던 듯하다.
때문에 엘리라는 인물을 통하여 스스로를 생의 막다른 구석으로 밀어 넣으면서까지
자신을 학대했는지도 모른다. 정신질환으로 분류되는 이러한 자학증상을 보이는 사람은
대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가 불행해지기를 바라는 자기암시에 빠져있기 일쑤다.
심리학에서는 이들이 이러한 자학증상을 보이는 이유로 다음과 같은 설명한다.
즉 스스로가 불행해져야만 거세와 같은 체벌을 피하고,죄책감,자책,자존심의
손상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방어기전으로 작동되기도 해서
자학증상을 보이는 사람들은 외적인 좌절을 당했을 때 그에 대항하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에게 굴욕을 가하는, 즉 스스로 패배를 만들어 냄으로
현실의 좌절을 무력화시켜 버리려는 경향이 두드러진다는 것이다.
그랬다. 난 그때 스스로를 엘리와 동일시하면서 현실의 좌절과패배에서 도피하고자 했던 것이다.
삶의 온갖 굴곡을 거치며 산전수전 다 겪어 이젠 더 이상 망가질 것도 없는
종점 다방 늙은 마담 엘리.
내가 그렇게 그녀가 되어 버리자 오히려 나는 편안함을 느꼈다.
일을 통하여 사회적 신분 상승을 도모해야 한다는 심리적 중압감도 없어졌고
도덕적 관념에 사로잡힌 현모양처가 아니어도 되었으며
남에게 모범을 보이는 훌륭한 어머니, 부모에게 효도하는 딸자식,
시부모님을 공경하는 효부가 아니어도 되었다.엘리가 된 두달은 마음이 편했다.
그러는 가운데 엘리의 종점 다방 음악방엔 흘러간 가요와 함께
인생의 황혼기를 바라보는 50대들이 하나둘 단골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그들 또한 나와 다름없이 좌절을 겪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무명의 늙은 노 작가, 증권회사 지점장으로 아이엠에프 때 전 재산을 날려 버리고
빚더미에 자살까지 생각했다가 이제 겨우 밥술이나뜨는 금융인,
심한 소아마비로 결혼마저 할 수 없었던50대 노총각등등.
갖가지 생의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를‘종점 인생’이라
생각하며 엘리의 종점 다방 뮤직박스를 찾아왔고 그들은 엘리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 위로하고 기대는 언덕이 되었었나 보다.
하지만 그들 중 누구도 내가 사십대의 여자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는 못했다.
오십대의 늙은 마담으로 교묘하게 위장된 나의 말솜씨는 그들의 상담자 또는
대화 상대자로서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풀어 나가는
역할을 아주 그럴싸하게 연기해 낸 것이다.
그렇게 그들과 대화를 하며 두 달 동안 난 무엇을 느꼈을까.아마도 위안이었을 것이다.
그들이 상처받은 그들의 삶을 엘리로부터 위안받은 것처럼,
엘리로 위장한 나 또한 그들로부터 많은 위안을 얻을 수 있었던 것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던 어느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계속 이런 식으로위안을 얻다 보면
엘리로 위장한 나를 진심으로 연민하고 위로하는그들로부터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씁쓸한 자기 연민과 학대가 계속 지속되고 거기에 흠뻑 젖어들게 되면
나중엔 정말로 영영 내자신을 돌이킬 수가 없을 것이란 자각과 함께
종점 다방을 찾는 그들을 영원히 기만하기 힘들 것이란 것도.
내 나이,아직은 젊은 나이구나.앞으로 십 년이 지나면 오십대 중반.
그 십 년이 내겐 너무나 소중한 시간으로 느껴졌다.
십 년이 지난 후 그때 가서 지금 종점 다방에 모여든 이들처럼
무기력한 허무감에 빠져 허우적이게 된다면 그땐 돌이킬 수가 없다는
생각이들자 한순간 정신이 퍼뜩 드는 것이었다.
고민과 망설임 없이 난 엘리를 자살시켰다.
두 달간의 사이버 친구들에겐 (아니 오십대들이니 친구들이 아니
라 실제론 한참 어른들이다.) 미리부터 엘리의 사라짐을 넌지시 암시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어느 하루, 생의 허무감에 사로잡혀 술에 절어 지내던 늙은 엘리는
위스키에 다량의 수면제를 타서 마시고는 영원히 깨어나지 못한다.
덕지덕지 분가루 칠해진 얼굴과 싸구려 붉은 루즈가 반쯤 지워진 그녀의 입가엔
웬일인지 평온한 미소를 머금은 채.
자학으로 몸부림치던 나의 무기력감과 함께 나의 분신 엘리는 그렇게 생을 마쳤다.
익명의 땅, 사이버의 어느 한 모퉁이 종점 다방에서.
첫댓글 예전에 나름 사타 손구락 핑핑~날리던 시절 저잣거리에 올렸던 글이지 싶습니다만 후에 정서하였고 내가 쓴 시덥잖은 많은 글중 가장 애착이 가는 글이기에 곳간 컴백(?)으로 다시 올립니다.
도요새가 만든 인물...............창작력 좋타.....
가상의 공간에서 써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속임수. 그래도 양심이 버티기엔 힘든 가상공간. 그래도 자신과 이웃에게 잠시나마라도 위안이 되었을 시간.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보는 재미~ 시간이 되면 돌아올 기회가 생긴다는거. 더 이상은 이건 아니라는거. 나도 딱 그런 맘이 들때가 있더라구 그 이후론 모든걸 접었다. 상구 옵빠가 착하게 살자고 늘 꿈꾸는 것도 그것 때문이 아닐까~~~~ㅋㅋㅋㅋ
또 다시 읽어봐도 좋은 글이네...앞으로 도요의 글 자주 접하면 좋겠다..^^
돌아와서 반갑다~
가심팍....한쪽이 시리다......또 다른 엘리가 얼마나 많았을지........
동전.......
한참을 읽고 또 읽어 보는데도 역시 도요의 글은 나를 매료 시킨다.. 가스나야~~ 이젠 자주좀 보여다고...
내어릴적 살던 곳이 버스 종점 근방이였는데.. 그런 다방이 있었었지...그런 마담도 기억이 날듯 말듯...
나와 다른 인격을 갖춘 존재가 가상공간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 수 있을 수 있다는 거 전적으로 동감할 수 있을것 같아..많은 그들에게 동질감을 느끼며 서로 위로하고 기댈 수 있는 언덕이 되어준 엘리가 그리워질때가 간혹 있거든.. 잘읽었어요~
ㅋㅋㅋ,,,도요의 등장이 센세이션이었는데..삶이 묻어나는 그대의 글들이 나를 늘 유혹하게 해...저번에 보고[달마때.]자주 얼굴 비친다더니 아직 못보네..얼굴좀 보여주라,,도요야,,
됴. 이제 한가하냐? 밥 먹자.
밥묵을때 나도 젓가락 논다,,ㅎㅎ
날 잡어~
평일 낮에 묵어라 나도 좀 찡기게`~
도나 잡으면 뭐가 나오나?? ㅎㅎㅎ 헉~!!
역시 됴다~~~ 올만이다 잘지내고 있쟈?
화려한 컴백이군... 방갑다..
됴~ 글마저도 씩씩하게 휘휘~ 반가워
현실도피인가...엘리...삶의 무게가 많이 버거웠나봐.... 즐감하고 갑니다~~
다시 만난 반가움에 죽 읽어보고 갑니다! 그런데 도요새님이 좀 무서워 질려고 그러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