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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 해병대(세계에서 가장 강인한 군대의 족보) |
편집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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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_김재엽 어린 시절부터 국제 정치와 군사 분야에 관심이 많았고, 많은 관련서적과 다큐멘터리들을 섭렵했다.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전쟁사를 주목하게 되었으며, 특히 지난 반세기 동안 숱한 전투에서 상승불패의 신화를 창조해낸 국군 해병대의 역사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현재 한남대학교 국방전략연구소의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서강대학교에서 학사, 연세대학교에서 석사(국제관계-안보전공)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학교에서 박사(정치외교학) 과정을 공부했다. 저서로는 『122년간의 동거-전환기에 읽는 한미관계 이야기』(2004), 『한국형 자력방위-전략과 제언』(2004), 『100년 전 한국사-개항에서 한일합방까지』(2006)가 있다.
추천사 피와 땀으로 점철된 해병대의 발자취 _신현준(초대 사령관) | 6 대한민국 해병대의 역사를 한눈에 _김명환(제24대 사령관·전우회 총재) | 8 해병대 1기생의 혼 _홍우섭(1기생회 회장) | 10 해병대의 미래는 밝다 _송관영(부사관 1기) | 12 서문 해병대, 그 독특한 역사 속으로 | 14
제1부 건국과 건군의 격랑 속에서 창설(1949. 4.~1950. 6.)
1. 상륙전 그리고 해병대 | 26 상륙전과 그 기원 | 해병대의 유래 | 한민족의 상륙전 전통
2. 혼란 속의 탄생 | 40 건국(建國)과 건군(建軍) | 공산세력의 교란 | 상륙전부대가 필요하다 | 초라한 출발
3. 초창기의 해병대 | 62 악조건과의 싸움 | 진주에서의 첫 임무 | 이번에는 제주도로
제2부 구국의 최전선에서 6·25전쟁`-`상(1950.6.~12.)
1. 악전고투(惡戰苦鬪) | 84 다가오는 침략의 마수(魔手) | 군산에서의 첫 전투 | 후퇴는 이어지고 | 함양에서 진주로
2. 반격의 시작 | 106 고사리에서의 첫 승리 | 진동리-반격은 시작되었다 | 최초의 통영상륙작전-‘귀신 잡는 해병’의 탄생
3. 총반격의 선봉으로 | 132 인천상륙의 결정 과정 | 세기의 걸작-인천상륙작전 | 서울을 따라 동쪽으로 | 서울에 다시 휘날린 태극기 | 잔당 소탕
4. 깨어진 북진통일의 꿈 | 166 북진과 원산상륙 | 기약 없는 후퇴
제3부 승리가 아니면 죽음을 6·25전쟁`-`하/전후 정비(1951.1.~1964.)
1. 재반격에 나서다 | 188 안동, 영덕전투 | 영월전투-본격적인 재반격 | 홍천전투
2. 고지쟁탈전 | 216 화천 저수지를 탈환하라 | 도솔산에 새겨진 ‘무적해병’의 전설 | 김일성, 모택동고지를 향하여 3. 전쟁 후기의 작전들 | 254 서해 연안 도서확보전 | 동해안 봉쇄작전 | 수도권을 사수하라
4. 전후 결산과 성장 | 286 6·25와 해병대 | 전후 성장과 재편성 | 5·16과 해병대
제4부 청룡은 간다 베트남전쟁(1965.10.~1972.2.)
1. 건국 이래 최초의 해외참전 | 314 베트남전쟁의 유래 | 한국군도 베트남으로 | 청룡(靑龍)부대의 탄생
2. 첫 전장(戰場), 캄란 | 334 베트남에 첫발을 딛다 | 특수한 전장에서는 특수한 전술을 | 첫 승리-백경, 번개작전
3. 투이호아를 뒤흔든 청룡의 용트림 | 354 이동 배경 | 청룡1호작전의 성공 | 재건, 해풍작전 그리고 이인호
4. 추라이라는 이름의 지옥 | 378 북극성은 빛난다 | 짜빈동의 신화 | 전투는 계속되고 | 용머리, 용화작전-추라이 평정의 마무리
5. 마지막 전장, 호이안 | 418 청룡의 세 번째 이사 | 구정공세와 괴룡작전 | 호이안의 잔당 소탕작전 | 승룡작전-호이안을 호령하라 | 고노이, 베리아를 평정하라 | 피날레-황룡, 기룡작전 |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6. 전후 결산 | 494 그후의 베트남전쟁 | 베트남전쟁이 남긴 것
제5부 불사조는 죽지 않는다, 다시 태어날 뿐이다 시련과 부활, 발전기(1973.10.~현재)
1. 날개 꺾인 불사조 | 504 해체와 통폐합 | 암흑기의 시작
2. 대간첩작전에서의 활약상 | 514 북한의 비정규전을 이용한 대남 도발 | 1960년대 | 1970년대 | 1980년대
3. 돌아온 불사조 | 540 재창설로 기사회생한 해병대 | 제2창군 시대
4. 해병대의 비전 | 554 해병대의 현주소 | 향후 과제 제6부 해병대에는 뭔가 특별한 게 있다! 해병대의 특수성과 문화
1. 해병은 이렇게 만들어진다 | 568 ‘빨간 명찰’을 향한 6주의 지옥훈련 | 무엇이 그들을 해병대로 이끄는가
2.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단결력 | 584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 | 해병혼(魂)-해병대 정신의 결정판
3. 해병대의 주요 상징들 | 600 해병대 상징 | 팔각모 | 빨간 명찰
4. 막강조직-해병대전우회 | 606 해병대전우회의 창립 | 주요 활약상
부록 역대 주요 직위자 명단 | 618 전쟁기념관 선정 해병 출신 호국인물 | 620 주요 전적 기념물 | 633 전사자 명단 | 636 연표 | 748 해병대전우회 주소록 | 768
해병대 - 투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예집단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군인 또는 군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군발이’니 ‘군사문화의 잔재’니 하는 부정적인 수식을 덧붙여 비하하기 십상인 경우가 많다. 굳이 부정적인 관점을 내놓지 않더라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그저 옆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존재처럼, 평상시 군인이나 군대에 대한 고마움을 피력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으로 무(武)를 경시해온 유교 사상의 영향...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군인 또는 군대에 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는다면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군발이’니 ‘군사문화의 잔재’니 하는 부정적인 수식을 덧붙여 비하하기 십상인 경우가 많다. 굳이 부정적인 관점을 내놓지 않더라도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마치 물이나 공기처럼 그저 옆에 있을 때는 소중함을 모르는 존재처럼, 평상시 군인이나 군대에 대한 고마움을 피력하는 사람은 무척 드물다. 이는 아마도 전통적으로 무(武)를 경시해온 유교 사상의 영향과 두 차례의 쿠데타를 비롯하여 30년이 넘게 계속된 정치군인들의 권위주의적 통치, 그리고 그에 따른 군사문화 팽배에 대한 거부감 때문일 것이다. 또한 전 세계적인 냉전 해소와 남북한 관계개선 노력에 따른 평화 정착에의 기대 심리도 결과적으로 군사 부문에 대한 부정적 시각을 부채질했을 것이다. 하지만 정치, 경제, 과학, 문화, 종교 등과 마찬가지로 군사(軍事) 또한 수 천 년 이상 이어져 온 인류 역사의 일부이자 때로는 다른 문화보다 훨씬 소중하고 절박한 자산이다. 무엇보다도 한민족은 반만년의 역사 속에서 열강들의 틈바구니에 끼어있다는 ‘죄 아닌 죄’ 때문에 숱한 전쟁을 치러왔고 해방된 후에는 신성한 민족의 이름을 모독하면서 전 국토를 전제 독재체제의 지배 아래에 놓으려는 북한 공산정권의 침략전쟁과 국지도발, 납치, 테러까지 겪어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처해있는 살벌하기 그지없는 환경 속에서 당장이라도 위기 사태가 터지면 믿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국군 장병들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의무, 명예, 그리고 국가’에 대한 투철한 신념과 헌신으로 국토방위의 임무에 충실해왔다. 이들의 존재와 긍지는 마땅히 존중받아야 하며, 반드시 국민 모두가 그 중요성과 고마움을 가슴 깊이 새겨야만 할 것이다. 대한민국 해병대를 흔히 ‘귀신 잡는 해병대’, ‘무적 해병’ ‘신화를 남긴 해병대’ 등으로 부른다. 해병대는 육?해?공군보다 훨씬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그 차지하는 위상은 실로 대단하다. 세계의 어느 나라 군에서든지 해병대는 자타가 공인하는 ‘소수 정예’와 ‘선봉부대’의 대명사다. 대한민국 해병대도 지난 1949년 창설 이래로 반세기가 넘는 역사 속에서 빛나는 무용(武勇)을 떨쳐 군사 분야에 특별히 관심이 없는 이들에게도 해병대는 ‘투지와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정예집단’으로 알려져 있을 정도다. 해병대는 해병대 출신의 장병들뿐만 아니라 국군 전체, 아니 한국의 국가적인 자랑거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병대 창설의 배경과 과정
1945년 해방에서 1948년 건국까지 소위 ‘해방공간’ 3년은 그야말로 내우외환의 격변과 혼란이 반복된 시기였다. 공산세력의 발호와 선동은 일반 대중에게 쉽게 먹혀들었다. 1946년 9월 23일 서울 철도 공작창 등 전국 각지의 철도 노동조합원들이 가담한 9월 총파업 사건, 10월 1일 대구 폭동, 1948년 4월 3일 제주도 유혈사태 등은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공산주의 세력은 창군 과정의 혼란기를 틈타 군 내부에까지 침투해 들어왔는데, 그것은 공식 군사조직인 국방경비대의 충원과정에서 입대자에 관한 신원조회 실시를 하지 않은 때문이었다. 이는 “어떠한 정치이념에도 치우치지 않는다”는 미군정의 모병 원칙에 따른 것이었는데, 그 결과 공산주의 세력은 자신들의 존재를 숨긴 채 창설과정에서부터 국군 내부에 침투해 들어갈 수 있게 된다. 공산주의 추종세력의 잠입은 곧 국군에게 큰 위협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1948년 10월의 여순 반란 사건, 11월 2일부터 1949년 1월 30일 사이에 대구에서 3차례 반란 시도, 1949년 5월에는 춘천에 주둔한 제8연대 소속 제1, 제2 대대가 38선을 넘어 월북하기까지 했다. 계속되는 반란 사건으로 국군은 내부에 침투한 공산주의 세력들을 색출하는 것이 급선무임을 깨달았다. 6.25 전쟁 직전까지 4차례의 숙군이 단행되었으며, 적발 대상자의 수는 1,327명이었다. 한국군에 해병대가 설치된 계기는 내부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결 과정에서 나왔다. 특히 1948년 10월 여수?순천에서의 제14 연대 반란 사건이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해군은 여수를 탈환하기 위해 육군의 진압작전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해안선이 길고 수많은 섬들이 분포하는 한반도의 지리적 특징 때문에 상륙작전이 갖는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당시 해안 봉쇄 작전을 지휘했던 신현준 해군중령(뒷날 초대 사령관)은 “만일 해군이 육전대(해병대의 일본식 명칭)와 같이 상륙 임무를 수행할 수 있는 특수한 전투 부대를 보유하고 있었다면, 결과는 달랐을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진압 작전 결과보고서를 제출했다. 곧바로 해군본부는 자체 상륙부대의 창설계획안을 작성했다. 제시된 방안은 두 가지였는데 ①상륙작전을 주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로 창설하자는 안과 ②해군기지의 방어를 담당하는 경비부대로 만들자는 안이 맞섰다. 결국 해군은 “1개 대대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갖추고 상륙, 기지 경비를 수행할 수 있는 해군 소속 보병부대”의 창설계획을 제출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곧 커다란 장애에 부딪쳤다. 국군 참모총장인 채병덕 육군소장이 “육군과 같은 성격의 전투부대를 해군에 별도로 창설해야 할 필요가 없다.”면서 계획안을 기각해 버렸기 때문이었다. 해군은 포기하지 않고 “해군 기지 방어를 주요임무로 하는 경비부대 창설”이라는 수정안을 제출했고, 일반 결재 서류들과 섞어 제출하여 결재를 받는데 성공했다. 난센스였다. 이렇게 출발한 해병대는 6.25 전쟁 중 “해병대는 해군작전에 의한 상륙작전을 담당하며, 필요에 의하여 일반 육상전투에 종사할 수 있다.”로 개정되었다. 이로써 해병대가 “상륙작전을 주요 임무로 하는 전투부대”라는 점이 명시된 것이다.
6.25 전쟁 중 치룬 몇 개의 전투
1949년 4월 15일, 진해 덕산 비행장의 썰렁하기 그지없는 격납고에서 신현준 사령관을 위시하여 300명의 제1기 신병과 80명의 기간장병이 해병대 창설 기념식을 가졌다. “국가와 민족을 위해 그 어떤 시련도 흔연히 극복하고 장차 국방의 최강부대가 되도록 모든 장병이 일치단결하여 정진할 것”을 맹세했다. 해병대 창설 직후 대원들에게 지급된 장비는 실망스럽기 그지없는 수준이었다. 훈련용으로 지급된 무기는 일본군이 버리고 간 99식 단발소총과 나무총이었다. 이마저도 수량이 넉넉하지 못했으며, 1인당 5발씩만을 실탄사격훈련에 할당받았는데 명중률은 형편없었다. 심지어 격발되지 않는 불량도 많았다. 당시 기준으로 신식 병기였던 미국제 M1소총은 교육용으로 단 1정만을 보유한 상태였다. 대원들의 훈련복이나 철모, 모자, 군화 역시 제대로 지급된 것이 없었다. 지급받은 군화 가운데서 발의 크기가 맞지 않는 대원들은 아예 맨발로 훈련을 받았다. 오늘날 해병대가 자랑하는 고강도의 훈련, 인내심, 임전무퇴 정신의 전통은 바로 이 시기에 유래한 것이다.
통영상륙작전
창설된 지 겨우 1년여 만에 6.25 전쟁이 발발했다. 오늘날까지도 ‘해병대’하면 자주 인용되는 “귀신 잡는 해병”이라는 표어가 처음 등장한 전투가 통영상륙작전이다. 당시 종군 기자로 한국에서 활동했던 미국 AP통신의 마가렛 히킨스 기자가 통영에서의 상륙전을 보도하는 자신의 8월 17일자 기사에서 “그들은 귀신도 잡을 수 있을 것(They might capture even the Devil)"이라고 인용한 것이 바로 그 유래였다.
▶ 통영상륙작전의 일자별 전투기록
8월 15일 오전 5시 북한군 370명(인민군 제7사단 소속 1개 대대) 원문고개에 등장. 이후 8월 17일 오전 1시에 통영시내까지 점령. 8월 16일 오후 5시 손원일 해군총참모장, 해병대에 “통영에 침입한 적군을 격퇴하기 위한 상륙작전 실시”를 명령함. / 오후 10시 해병대 병력 목적지를 향해 출동. 8월 17일 오전 3시 통영반도 동북쪽의 지도에 도착, 정찰대 투입하여 거제도 서해안 및 견내량 등에 대한 정찰 실시. / 오전 7시 정찰대 정보보고. / 오후 12시 해군 703정으로부터 추가 정보보고. / 오후 5시 통영반도 인근의 해군함정 7척을 김성은 대령의 지휘 아래 두어 해병대의 상륙을 지원하도록 하는 명령 하달. / 오후 6시 제2중대 상륙 시작. / 오후 7시 제3, 제7, 중화기, 본부중대 순서로 통영 해안에 상륙 완료. / 오후 7시 30분 제2, 제3중대 목표지점 1, 7, 6을 향해 공격 및 점령 성공. 동시에 해군함정 3척이 통영 남쪽해안을 향해 포격하는 기만작전 실시. 8월 18일 오전 5시 30분 부대 공격재개. / 오전 7시 30분 제2중대 목표지점 4, 5 점령. 이후 원문고개 방어진지 구축 -> 제3, 제7중대 각각 목표지점 8, 9, 10 점령 성공. / 제7중대 매일봉을 놓고 적 100명과 교전. 8월 19일 제7중대 매일봉에서 적군 격퇴 성공. / 제2중대 원문고개 북쪽으로 도주하는 적군 4명 사살. / 오전 3시 30분 제3중대 178고지 점령 성공. / 오전 10시까지 제7중대 및 수색소대 통영시내 소탕작전 실시. / 중화기중대 박격포반 정양리에서 도주하는 적을 겨냥하여 포격 실시. / 오후 3시 40분 제2, 제7중대 적군 1,000명과 원문고개 인근에서 4시간 동안 전투, 격퇴. 8월 20일 오전 3시 40분, 4시 30분 다시 원문고개 정면 및 해안선 등지에서 적군과 교전 -> 오전 6시 적군 격퇴 완료. 8월 21일 오후 10시 제7중대 적1개 대대의 침입을 원문고개에서 저지(고종석 3등병조 전사). 8월 28일 청년의용대 32명 통영 서북쪽에 상륙하여 적 14명 사살.
인천상륙작전
인천은 상륙작전을 펼치기에는 매우 불리한 조건으로 가득찬 곳이었다. 우선 밀물과 썰물의 조수 간만의 차이가 너무 컸다. 거기다 대규모 상륙부대 및 수송선단을 수용하기에는 항로도 좁고 굴곡이 심해서 함대가 이동하기에 불리하다는 점도 문제점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맥아더 장군은 모든 반대의견을 잠재우고, 오히려 그런 불리한 조건 때문에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논리를 펼쳤다. 적군이 인천을 상륙지점으로 예측하지 못할 것이므로 감행해야 하고 신속한 서울수복이 가능하다는 논리였다.
▶ 인천상륙작전의 일자별 전투기록
9월 6일 제주도에서 모집된 신병3천여 명으로 구성된 1개 해병연대 부산에 도착. 9월 11일 김성은 부대의 제2, 제3중대 부산에 도착. 상륙작전 준비 완료. 9월 12일 오전 11시 제1, 제2, 제3대대 병력 미 상륙함 ‘피카웨이 호’에 승선. / 오후 3시 부산을 출항. 9월 13일 오전 9시 피카웨이 호 사관실에서 합동작전참모회의 개최. 9월 13~14일 제7합동상륙기동부대 소속 해군함정, 항공기가 인천 연안지대의 적 포대 및 진지를 겨냥하여 대규모 타격 실시. 9월 15일 오전 6시 손원일 해군총참모장의 장병 훈시. / 오전 7시 수송선단 인천행수로에 도착. / 오후 6시 제1, 제3, 제2대대 순서로 적색해안에 상륙. / 오후 9시 30분 해병대 전원 상륙완료.
도솔산 지구 전투
1951년 4월 말의 중공군의 춘계공세와 5월 16일을 기한 12만 명 중공군의 두 번째 춘계공세는 중부전선을 크게 위협했다. 그러나 대대적인 화력위주의 반격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개전 이후 세 번째로 38선을 회복할 수 있었다. 역시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에 합류한 해병대가 당시 맡게 된 전투 지역은 양구와 인제 사이에 있는 산악지대였다. 취봉(고도 1,290m), 가칠봉(1,142m), 대우산(1,178m), 도솔산(1,148m)은 태백산맥 내에서도 가장 험준한 산악지대로 개전 이후 국군과 유엔군이 단 한번도 진격하지 못한 곳이었다. 견고한 고지를 구축한 공산군은 이곳을 난공불락의 천연요새라고 호언하고 있었다. 이곳이 적군의 수중에 있는 이상 국군과 유엔군은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할 뿐더러, 양양과 철원 그리고 원산으로 연결되는 삼각형의 중동부 산악지대에서 중심이 되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 군사적 가치는 더욱 컸다. 장장 2주일에 걸친 대혈투가 시작된 것이다. 6월 4일 아침 8시, 드디어 해병 제1연대는 난공불락의 도솔산에 대한 공격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6월 19일 도솔산 고지를 완전 점령하기까지의 2주일 동안의 산악전은 다시 한 번 해병대의 필승 전설을 탄생시켰다. 도솔산 전투를 통틀어 해병대는 적군 2,381명을 사살하고, 51명을 생포하는 한편, 210정에 달하는 적의 화기(火器)를 노획하는 화려한 전과를 거두었지만, 133명의 전우들을 잃고 647명이 부상을 당하는 희생을 치러야 했다. 당시 이승만 대통령이 친필로 쓴 “무적해병(無敵海兵)”이라는 휘호는, 1년 전 통영 상륙 작전에서 얻게 된 “귀신 잡는 해병”과 더불어 해병대를 대표하는 자랑스러운 구호로 남게 되었다.
기수 1,000기 돌파, 100만 명의 강성 대한민국 해병대
해병대에게 6.25 전쟁은 어떤 의미였을까? 창설된 지 불과 1년 만에 국가적 대재앙을 맞게 된 해병대는 진주, 통영, 인천, 원산, 영월, 도솔산, 서해5도, 장단 지대를 비롯한 24개의 전선에서 종횡무진 전투를 치렀다. 한국이 자랑하는 최강의 부대로 국내외에 그 존재를 확고하게 심게 된 것이다. 미 해병대도 한국의 해병대에게 존경을 표하며 “한국 해병대는 우리와 생사를 같이 하여 합동작전을 수행할 수 있는 유일한 부대”라고 극찬, 그 우수성을 인정하게 된다. 그렇게 초라하게 출발한 해병대는 마침내 창대한 군대가 된 것이다. 특히 2005년 8월 5일은 기억할만한 날이다. 358명의 새로운 해병대원들이 훈련을 마치고 수료식을 가진 날이기 때문이다. 이 행사는 국군 해병대의 역사에서 매우 큰 의미를 갖고 있었다. 왜냐하면 이 날 배출된 358명이 바로 해병대의 1,000기째 대원들이었기 때문이다. 해병대를 일컫는 표어 가운데서 가장 잘 알려지고 널리 인용되는 것이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Once a Marine, Always a Marine)”이다. 본래 영국에서 유래한 속담이었던 이 문구는 후에 미 해병대가 차용했으며, 6.25전쟁 당시 국군 해병대도 이를 함께 사용한 셈이 되었다. 혹독한 훈련과 강인한 체력, 정신력뿐만 아니라 장병들 사이의 튼튼한 단결력, 전우애에서도 가히 최고 수준임을 응축하고 있는 것이다. “누구나 해병이 될 수 있다면 나는 해병대를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라는 말도 해병대의 성격을 단적으로 요약하고 있다. 대한민국 해병대는 마침내 100만 명에 육박하는 해병대가 된 것이다. 해병대는 창설 이후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그야말로 극적이라는 표현 외에는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역경과 영광의 시대를 거쳐 왔다. 방치되다시피 한 낡은 비행장에서 단 300여명 규모의 보병부대로 시작하여 창설된 지 1년 만에 6.25 전쟁에 투입되어 상륙, 도서방어, 내륙 고지전을 망라한 모든 전선에 걸쳐 다른 부대들조차 포기했던 전투에서 차례로 승리를 해내고야 만 해병대였다. 6년에 걸친 베트남전쟁에서는 건국 이후 첫 해외파병 전투부대로서 정글과 산악 지역의 베트콩 게릴라, 북베트남군과 싸워 적들의 간담을 서늘케 만들었다. 또한 5.16 군사정변이라는 정치격변의 한가운데 속에 휘말리고, 부대 자체가 해체되는 고난을 겪은 끝에 다시 부활하는 역경을 치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다시 되살아난 해병대는 지금도 북으로는 백령도, 남으로는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 국토 곳곳에서 철통같은 국토방위에 전념하고 있을 뿐 아니라, 100만 여명에 달하는 해병전우회는 퇴역한 이후에도 국가가 부르면 언제나 최일선으로 달려갈 것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국가안보수호에 기여하는 단체로, 또 국민생활 현장에서 봉사하는 단체로 변함없이 해병정신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정체성 혼란은 맥아더 동상 철거사태 등에서 보듯이 해방공간을 연상시킬 수준으로 심하게 요동치고 있다. 이 책 『대한민국 해병대』는 국군 해병대의 자랑스런 역사와 전통, 정신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한 것이지만, 동시에 혼란한 현실에 대한 강렬한 발언이기를 희망하면서 출간된 책이다. 군인을 존경하고 자랑스럽게 여기는 국가는 언제든지 강국이었다. 그들의 숭고한 희생 위에서 국가가 번영하고 국민이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 책의 전사자 명단 앞에서 우리가 눈길을 멈추고 숙연한 심정으로 옷깃을 여미게 되는 이유는 그들의 숭고한 죽음이 오늘의 우리를 존재하게 한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