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군인들의 증언록인 '화려한 사기극의 실체 5.18'이 최근에 출간되었는바, 광주사태 때 남파되어 무기고 무기 탈취 등을 주도하였던 북한군의 연인이자 사실상의 부부관계였던 여성의 증언도 수록되어 있다. 그녀의 증언 중 목포를 경유하여 광주에 침투한 북한군 관련 몇가지 핵심 요점을 추리면 아래와 같다:
『잠수함에서 하선하여 남쪽의 안내원을 따라 도착한 곳은 남조선의 전라도지역인 목포라는 해안가 도시의 작은 상점가계 안방이었다』
『그들이 당시 임무내용을 전달받으면서 한순간에 파악했던 것은 조만간 남조선에서 4.19인민봉기를 능가하는 전국적인 대규모의 인민항쟁이 무장폭동의 성격으로 준비되고 있다는 사실이었으며 자신들이 목포지역으로 급파된 것도 그 일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었다.』
『목포에 침투하였던 11명의 요원들이 사북탄광사태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일은 없었다고 했지만 그들의 말로는 그곳에도 북한의 계획적인 지령을 받고 파견된 별도의 특수부대요원들이 잠입하여 사북사태가 강원도지역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배후를 은밀히 조종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여기서 놀랄만한 것은 목포를 중심으로 광주폭동이 시작되기 전까지 5개월 여 동안 목포, 광주를 비롯한 전라도지역에 포진되어 있는 숨은 지하조직들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침투 조 인원들이 직접 목격한 일이지만 그들의 조직들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하나같이 잘 정비되어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마치도 북한 땅에 있는 어느 박사의 사무실을 보는듯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당사자들한테서 직접들은 이야기지만 북한은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1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과 부마사태에 참가했던 7명의 요원들이 합류된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 그들이 광주에서 기본적으로 수행해야 할 임무는 전라도 내에 잠재해 있는 지하조직들을 간접적으로 동원해서 반정부시위에 참가하고 있는 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그들이 사전에 일일이 파악한 정보를 토대로 하여 이루어지게 되었다.』
(* 자세한 증언은 http://cafe.daum.net/issue21/3Fdk/4357 에서 보기.)
위의 탈북여성의 증언을 뒷받침하는 남한 자료
위 증언의 핵심 요점은 광주사태는 북한과 남한의 친북 세력의 합작품이라는 것이다. 위의 증언은 북한자료이다. 그런데, 위의 증언 하나하나가 남한 자료들로 그 사실성이 입증된다.
『그들이 지휘부형태로 사용하는 공간에도 김일성의 초상화는 물론 김정일의 초상화까지 걸려있었고 김일성선집이라든가 김정일의 주체철학 등 북한에서나 볼 수 있는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이 대거 비치되어 있어』 이것은 아주 정확한 객관적 사실이다. 광주사태 당시 김대중은 조총련으로부터 정치자금 지원을 받고 있었으며, 김대중의 국민연합 사무국장으로서 광주사태를 주동하였던 윤상원은 조총련으로부터 북한 사회주의 내용의 북한용 정치서적들을 전국 운동권에 보급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런 서적들의 영향으로 형성된 386 주사파의 함성 "위수김동"(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은 주지의 사실이다.
『5.18사건을 배후에서 계획하면서 철저하게 두 가지 목적을 노렸다고 한다. 하나는 남조선사회를 북한체제가 합법적으로 통치할 수 있는 국가전복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전라도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믿음직하고 충실한 친북정권수립이었다.』 요컨대 적화통일이 그 첫번째 노림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5월 16일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첫 문장에 바로 그러한 문구, "민중적 민족 주체 세력의 형성을 통한 민족·통일국가의 수립으로 귀결되어야 한다"가 들어있으며 "민중의 승리와 민족통일 위한 초석을 견고히 해야 한다" 등의 표현들이 반복되고 있지 아니한가. 만약 원하는 것이 적화통일이 아니라면 통일은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 두번째 노림수는 전라도 지역을 기반으로 친북정권을 수립하는 것이라 하였다. 실로, 광주에 해방구가 설치되었으며, 시위 구호 중 하나가 "전남국을 세우자"였다.
『18명의 소부대는 광주사태의 전 과정이 마무리 될 때까지 목포에 거점을 두고 있었고 그들은 그곳에서 북한과 수시로 교신하면서 광주작전과 관련된 필요한 지시들을 지령 받고 집행하였다. 광주폭동이 진압군의 작전으로 종료될 때까지 두 명의 인원은 고정적으로 목포아지트에 대기하면서 광주시내에서 매일매일 벌어지는 사건내용들을 구체적으로 신속하게 지휘부에 보고했다.』 이 사실 역시 전남대 운동권 핵심부의 증언으로 증명된다. 총학생회장 박관현과 총무 그리고 많은 시민군이 광주사태 동안에 북한방송을 청취하고 있었다.
『안창식을 책임자로 하는 16명의 북한특수부대요원들은 광주사건이 시작된 하루 뒤인 1980년 5월 19일 새벽에 광주시내로 침투하였다고 한다...대학가와 청년학생들의 지도부세력을 우선장악하고 그들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비무장시위의 형태를 폭력적인 무장폭동으로 격상시키는 것이었다. 광주폭동기간 광주지역뿐 아니라 전라도의 전 지역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무기고습격사건들은....』 이 북한 자료 역시 5월 19일 나주에서의 시민군의 최초 무기 탈취 사건의 산증인 김동명 기자의 증언과 짝이 맞는바, 그는 지난 해에 27년간 고이 간직했던 낡은 취재 수첩을 수기 형식으로 공개하면서 북한군 개입 의혹을 5월 19일 당일부터 품었음을 발표하였다. 푸른 눈의 목격자 힌츠페터가 5월 20일 찍은 아래 사진은 5월 20일 나주, 화순, 영암 등 광주 외곽 지역에서 광주로 향하고 있었던 5.18무장단체의 사진을 보여주며, 이 사진은 광주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이미 무장하고 있었다는 김동명 기자의 증언을 분명하게 뒷받침하여 준다.
자, 여기 어째서 북한 자료는 목포라는 지명을 언급하는지의 문제가 있다. 광주사태에 대한 증언인데, 목포에서 있었던 사건들, 목포를 경유하여 북한군 부대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 등이 언급되어 있다. 독자들에게 다소 황당하게 느껴지리라. 그러나 남한 자료에도 처음에는 황당하게 받아들여지는 증언들이 있다. 외부 무장단체가(혹은 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하여 시민군을 지원해 줄 것이라는 선무 방송을 전옥주 본인의 입으로 하였다. 그러나 자기 입으로 방송해 놓고도 그녀는 수년이 지난 후에도 황당하게 여기고 있다. 그 스토리는 이러하다.
탈북군인들이 300 명씩 두 떼로 북한군이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증언하였을 때 일각의 반응은 과연 300 명씩 두 떼거리가 광주로 침투하는 것이 가능할 수 있었겠느냐였다. 여기서 300명이란 숫자가 중요한 것인데, 놀랍게도 5.18측 자료들이 300명씩 두 떼거리의 외부 무장단체가 광주로 침투한 사실이 있음을 입증해 준다.
연고생이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한다는 소문이 시민군들 사이에 파다했다. 그런데, 그 많은 연고생이 광주시민군에 입대할 목적으로 침투한 사실이 전혀 없다. 즉, 연고생 300 명은 위장명칭이요, 실제로는 외부 불순세력 300 명이었다. 전옥주는 광주사태의 핵심인물이다. 그녀의 선무방송만 없었어도 광주사태는 일어날 수 없었을 것이라 하지 않는가. 광주사태 기간 내내 무수한 선무방송을 했던 그녀가 8년후 기억한 것은 연고생 300 명 침투설 뿐이었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3010.html ). 광주시민들조차 그녀를 간첩으로 의심하여 경찰로 연행하였다. 그녀는 간첩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쪽지를 준 이들은 간첩들이었다. 즉, 간첩들이 그녀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이 사실은 5.18 단체들에 누가 전옥주에게 쪽지를 주어 목포쪽에서 연고생들이 오고 있다고 방송케 하였느냐고 물으면 그 답이 나온다. 광주시민들 중에는 아무도 그런 쪽지를 전옥주에게 준 이가 없었다는 것이 사실일진대 간첩들이 광주에서 활동하고 있었음이 여기서도 입증된다. "담양쪽에 연ㆍ고대생이 서울에서 내려와 계엄군의 제지를 받고 있다고 해 그쪽으로 가보면 없고, 그 뒤 곧 송정리, 목포쪽에서 온다는 소문이 계속 나돌았습니다."고 말할 때 그녀가 생각해도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처럼 위의 북한자료를 읽는 독자들도 목포사태가 아니라, 광주사태인데 어째서 목포가 자꾸 언급되는지 황당할 것이다. 그러나 남한 자료들로 그 사실이 여실히 입증된다.
위에서 보듯 1985년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는 광주사태 당시 목포에서 진행되고 있었던 사건들에 대한 북한 자료가 사실임을 보여준다. 해안경찰서를 파괴하면 민주화운동이라는 5.18측 주장이 성립될 수 있는가? 아니다. 해안경찰서를 파괴하는 것은 공산당 군대에 성문의 빗장을 열어주는 꼴이다. 실제로 북한군이 자유로이 목포로 침투하여 활동하였으며, 광주로 침투할 때 광주시민군이 지원하게 하였다. 즉, 광주사태 배후 세력이 북한군에 협조하고 있었던 것이다.
목포 주재 박홍서 기자는 목포에는 단 한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음을 그 전날인 5월 21일 오후 6시에도 이렇게 보고하였다. "경관은 모두 사복으로 갈아입고 피신, 전파출소가 비어 있다. 시내에 군인들은 안 보여." 그렇다면, 북한군이 목포를 아지트로 삼았다는 북한 자료가 사실임이 입증된다. 북한군이 활동하고 있는 목포에 단 한 명의 경관도 군인도 없었다. 자, 여기서 우리는 5.18측에 단 한 명의 군인도 경관도 없었던 목포에서 왜 백 명 단위의 복면 부대가 발포하였는지 물어보자. 목포에서 시민군이 있었다는 말인가? 동아일보 김영택 기자는 목포에 먼저 복면부대가 출현하였다는 사실을 몰랐지만, 그가 광주에서 본 복면부대는 외지에서 온 불순세력이었음을 그의 1987년 8월 기사 <「광주사태」그날의 5가지 의문점> 중 네번째 의문점에서 밝힌다 (http://altair.chonnam.ac.kr/~cnu518/data/data7_4208.html).
김영택 기자는 시민군 편 증인이었음에도 복면무장단체의 정체성에 대한 그의 의심을 또박또박 말하였다. 1989년 1월 26일자 광주청문회를 보도하는 위의 동영상에서 MBC 김석진 기자는 그 증언을 이렇게 요약한다: "김영택 씨는 또 5월 22일에는 서울에서 왔다는 대학생 300여 명이 시위에 합류했으며 오후부터는 복면을 쓴 사람들이 시위 군중 속에 나타나 강경 구호를 외치거나 시민군의 총기 반납을 저지하는 등 석연치 않은 행동을 보여 이들의 정체에 의심이 들었다고 말했습니다" (3:08-3:27).
탈북군인들은 300 명씩 두 떼거리로 광주로 침투하였다고 말한다. 남한 일부 인사들은 그렇게 많은 떼거리가 외지에서 광주로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300 여명이 실제로 외지에서 침투하였음을 증언하지 아니하는가. 그들은 복면부대였다. 김영택 기자는 광주의 언론인, 대표적 광주인이었다. 그는 목소리만으로도 토박이 광주인과 외지인을 식별할 수 있었다. 그러면 여기서 위에 언급한 그의 글 "복면부대의 정체" 몇 단락을 인용해 보자:
<<<[복면부대]의 정체>
만약 복면부대가 수사기관의 카메라에 포착되어 나중에 검거되는 위험을 막기 위해서였다면 경찰이나 정보기관이 정상적으로 활동하던 18일부터 21일까지는 왜 없었을까. 왜 기자의 카메라조차 학생들로부터 의심받아 셔터를 누르기도 어렵던 22일 이후에 복면을 한 사람이 많았을까. 이들 복면부대는 한결같이 강경한 입장을 취한데다 적극적으로 시위를 선동했다. 무기반납을 방해하고, 차량을 타고 시내를 질주하면서 과격한 언사를 거침없이 썼다. 이들은 수습대책위원회가 주최하는 도청 앞 광장의 수습회의나 대책회의에는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기자는 24일 오후 2시쯤 당시 도청 2층에 있던 학생수습대책위원회의 부위원장 김종배씨(35)와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시민수습대책위원회에서 시민군의 무기를 반납하자는 이야기가 거론되고 있을 때 학생측의 반응을 알아보기 위해 찾아갔다가 위원장대신 부위원장을 만났던 것. 이때 김씨는 {우리는 총을 반납하겠습니다. 그리고 경찰과 군이 들어와 질서를 회복하면 맨손으로 금남로에 나가 다시 민주화를 외치겠습니다}며 총을 회수해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이때만 해도 김씨는 온건파였다. 이로부터 수시간 후 그는 조건부 강경파로 선회하게 되지만, 본심은 어떤 조건만 받아들여지면 총을 반납하겠다는 입장이었다.
무기 반납 제지한 [복면부대]
그런데 총을 회수하여 아래층으로 내려가던 김씨를 가로막는 사람들이 있었다. 반납은 안된다는 강경파들이었다. 끝까지 싸우겠다는 것이다. 가로막는 이들 강경파의 거의가 복면을 했던 사람들이었다. 김씨는 이들의 반대에 부딪히자 어쩌지 못하고 다시 2층으로 올라올 수밖에 없었다. 복면의 강경파들은 이렇다 할 수습안을 내놓지도 않았다. 무조건 반대였다. 때문에 이들은 사태를 악화시키려는 [불순세력]이나 [배후세력]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받고 있었다. (....) 21일 계엄군이 철수한 이후의 광주는 객관적으로 무정부의 상태였다. 이미 정부가 없는 상태, 그것은 엄격하게 [내란]의 상태다. 더구나 시위대는 무장을 했다. 정부가 있을 때 그 정부에 대항하여 시위를 벌이는 것과 정부가 없는 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복면을 한 사람들 중에는 이러한 차이를 깨닫고 있는 사람들이 많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계엄군의 철수 후 사태의 수습을 진정으로 원하는 사람들은 이제 더 이상 강경하지 않았다. 무기를 반납하고 시의 외곽을 에워싸고 있는 계엄군과 협상할 것을 시도했다. 복면부대는 이 수습노력을 저지하고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격렬한 선동을 계속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복면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들 중 일부가 만약 [불순세력]으로서 외부에서 들어와 신분을 감추기 위해 복면을 했다면, 그런 사람들은 선량한 시민들의 지탄을 받아 마땅할 것이다. >>
김영택 기자는 복면부대 등장의 이유를 두가지로 설명한다. 첫째 이유는 무정부상태에서 내란에 가담하였을 때는 더 이상 떳떳한 시위가 아니었기에, 둘째 이유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 수습을 막기 위해서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을 풀리지 않는 의문으로 남겨두며, 목포에서 먼저 출현한 복면부대도 그 두가지 이유로는 설명이 안된다. 목포에서는 해방구도 설치되지 않았으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목포에 먼저 복면부대가 등장하고, 곧 이어 광주에도 등장하였다. 만약 정체를 감추라는 상부 지령에 따른 것이었다면 목포 내 불순세력이 먼저 지령을 받았다는 것을 시사하며, 또 불순세력이 목포를 경유 광주에 침투한 것이 사실이었음이 확인된다. 전옥주가 황당하게 여겼던 정보, 즉 연고생(가짜 연고생) 300 명이 목포쪽에서 광주로 침투할 것이라는 정보는 사실이었으며, 그러한 남한 자료가 북한 자료로 그 개연성이 한층 많아지는 것이다.
5월 21일 계엄군 철수 이후의 광주상황은 이러하다. 22일에도 2천여 명의 군중이 도청 앞에 모여 시위를 벌였다. 그리고 3백여 명의 극렬시위자는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복면을 한 모습으로 40 여대의 군용차량을 몰고 송정역에 집결하여 공포를 쏘면서 시위를 하였고, 관광호텔, 전일빌딩, 전남의대, 유진온천 등 건물 옥상에 기관총을 설치하고 광주에 이르는 도로에 바리게이트를 설치하였다. 북한자료가 밝히듯이 300 명 단위의 무장단체가 실제로 경찰복과 공수단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김영택 기자가 목격한 복면부대였다. 비록 우리는 김기자처럼 광주에 대해 잘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아래의 복면부대 사진들을 보면 이들이 광주인인지 외지에서 침투한 불순세력인지 조금은 식별할 수 있다.
광주사태 당시 대다수 총기 사망자들은 카빈 등 시민군만 갖고 있던 총기에 의해 사망하였다. M-16에 의한 사망자 역시 시민군 총기에 의한 사망자들일 수 있음을 위 사진은 보여준다. 위 사진에서 복면한 시민군(어쩌면 북한군)이 들고 있는 총은 M-16이다.
다수의 광주시민들은 이 자들을 군인들로 착각했을 것이다. 물론 북한군도 군인이다. 그러나 북한군의 위장전술에 속아 북한군과 국군을 혼동하는 것은 인식론적 혼동이다. 이들이 군복을 입고 지프를 탔어도 이들은 국군이 아니다. 이들이 북한군이든 시민군이든 이들의 정체성은 5.18무장단체이며, 국군이 아니다.
많은 광주시민들이 저 5.18무장단체를 군인으로 혼동하고 광주사태에 대하여 군인들에게 누명을 씌웠는가? 1985년 발행된 앞의 "미공개 자료·조선일보 취재일지" 22일자 취재 메모에서 기자는 저 복면부대의 정체성을 이렇게 보고한다: "무장한 시위대가 탄 지프·트럭·버스 등은 주택가를 계속 누볐다. 어떤 청년들은 경찰데모진압용 철모에 군복차림이었으나 차량을 운전하는 어떤 청년은 눈만 남긴 채 복면을 하기도 했다. 트럭에 LMG를 장치한 중무장도 보였다. 시민들은 동이 트면서부터 대문 앞에서 불안한 표정으로 웅성웅성댔다."
집총 자세의 이들은 누구인가? 전경이 아니었다. 그때는 아직 시위 진압을 전담하는 전경 부대가 없었던 시대였으며, 또 전경이 M-1 총으로 무장하지도 않았다. 이런 5.18무장단체를 군인으로 혼동한 것도 인식론적 혼동이었으며, 저렇게 불순세력이 전경 복장으로 위장한 것을 민주화운동과 동일시한 것도 인식론적 오류였을 것이다.
위 사진에서 5.18복면부대는 총으로 무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손에 이상한 병을 든 것이 보인다. 무엇에 쓸 어떤 병이었는가? 그 정답이 밑에 있는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에서 보인다. 이 대자보는 <행동강령>을 이렇게 명령한다. "무기를 제작하라! (다이너마이트, 화염병, 사제폭탄, 불화살, 불깡통, 각종 기름 준비)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 저, 5.18복면부대 손에 들린 병은 폭탄의 용도로 쓰일 병, 관공서를 태우는데 쓰일 병이었던 것이다. 도대체 누구에게 관공서를 태우라고 명령할 권한이 있으며, 또 시민들에게 그렇게 명령하는 것이 민주화운동이라는 논리는 타당한 것인가?
그리고 위의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에서 "서울, 대구, 마산, 전주, 군산, 이리, 목포도 봉기!"라는 문구가 우리의 눈길을 끈다. 이 글 상단에 있는 탈북여성의 증언이 사실이었음이 다시 한번 확인되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지난 30년간 우리 국민이 광주사태에 대하여 무수히 들어왔어도 목포에서도 봉기가 일어났었다는 사시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탈북자들은 목포에서 동시에 일어난 봉기가 포인트임을 강조한다. 놀랍게도,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역시 그것이 포인트라고 말하지 아니하는가.
저 위 광주청문회 동영상에서 보듯이 1988~89 광주청문회의 쟁점은 시민군 최초 무장시점이 5월 20일이었느냐 21일이었느냐였다. 이것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으며, 5월단체들은 5월 21일 오후 한시 반 이후라고 우겼으며, 광주특위는 5.18측 손을 들어 주었다. 12.12-5.18 재판 역시 그런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진행되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위의 5월 20일자의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는 "학생 혁명군,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이라고 증언하지 아니하는가. 대자보 발행일이 5월 20일이었으니 5월 20일 이전 혹은 늦어도 20일 시점에는 상무대에서 무기 탈취에 성공했다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렇다면, 북한 자료가 사건의 진행순과 날자까지 아주 정확함이 확인되지 아니하는가!
여기서 우리가 5월단체들에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도대체 학생 혁명군이라는 것이 있었는가? 학생혁명위원회는 또 무엇이었는가? 정말로 그런 단체들이 있었는가? 만약 아니었다면 북한군이 그 명의를 사용한 것이 사실 아닌가? 김동명 기자가 증언하듯 5월 19일부터 무기 탈취가 시작되었으며, 5월 19일부터 시작된 무기 탈취를 북한군이 주도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지 아니하는가? 정말로 5월단체들에서 (혹은 광주의 운동권이) "전시민 관공서를 불태워라!"는 명령을 광주시민들에게 내렸는가? 도대체 무슨 권한으로 그렇게 하였는가?
만약 학생 혁명군의 말뜻을 5월단체들이 설명해 주지 아니하면 시민군이란 명칭은 북한군이 붙여준 것이었다는 가설이 성립된다. 학생 혁명군은 전쟁을 위해서 필요한 군대이다. 누가 학생 혁명군을 조직했다는 말인가? 5월단체들이 시민군에 대해 말하지만 그 명칭의 유래를 우리는 모른다. 단지, 5월 20일자 대자보에서 시민군이 5월 20일에는 학생 혁명군으로 불렸다는 사실이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위의 조선일보 취재일지에서 박홍서 기자는 5월 22일 새벽의 목포 상황을 이렇게 보고한다:
* 새벽 1시20분 무안동 코롬방다과점, 수퍼마케트 일원 식품가게를 부수고 들어가 빵, 음료수를 실어가. * 새벽 2시 목포역 대합실 전부 파괴, 연동 파출소 모기관 목포지부 방화. 항동 파출소 무기고 태우고, 시내 파출소 전부 파괴. 해안경찰서, 세무서 파괴. * 새벽 3시 남양어망 공장 부수고, 열차불통, 시외·시내 버스 불통. 중·고 학교장 재량 휴교령. 각목, 카빈 공포 쏘고 다녀. 무기 휴대한 젊은이 복면하고 1백명 정도. 다른 데모대 1천여 명. 시민호응 안해. 시내상가 모두 철시. 군대는 안보여.
광주단체들의 소행이었는가? 목포에는 군인도 경관도 없었는데 왜 목포에서 여기저기 불을 지르며 관공서들을 파괴하며, 아무데나 발포하였는가? 광주 운동권의 소행이 아니었을진대, 결국 북한군 개입에 관한 탈북자들의 증언이 사실로 입증되지 아니하는가!
☞ 광주사태 선동 대자보 (5월 16일)
통혁당 민중봉기 아지트였던 목포와 5.18
광주에 침투한 300 명의 불순세력과 북한군 300 명
북한군 일부 목포 경유 광주 침투
복면 쓴 5.18무장단체 사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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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기가찬 노릇이군요. 그리고 김대중서거 국장을 치르자고 박지원이가 청와대에 들어가 이대통령에게 엄포를 놓아 이대통령이 변경 했다는군요 그리고 묘도 대전으로 가야 한느데 서울 현충원에 안보내면 그냥안있겠다고 햇다든군요......일국의 대통령이 그런 공갈 협박에 ................넘어가는.진짜 한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