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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을 계발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우리는 여기서 최선을 다해 살고 있지만, 지금 세계에는 전쟁, 기후 위기와 같이 더 큰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요?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아이 다섯 명을 키우는 게 너무 힘듭니다.
1시간 30분 동안 대화를 나눈 후 10시 40분에 미팅을 마쳤습니다.
이주 여성들은 각자 요리 교실, 창업 교실, 협동조합 등 교육을 받기 위해 흩어지고, 창업회장님을 비롯하여 재단 활동가들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인사를 나눈 후 스님은 다시 차를 타고 프랑크푸르트로 향했습니다. 운전은 독일정토회 회원 최순진 님이 스위스 까지 와서 해주었습니다.
스위스 국경을 지나 독일 프랑크푸르트까지 5시간 50분 동안 아우토반을 달렸습니다. 고속도로에 사고가 나서 예상보다 더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오후 4시 30분에 프랑크푸르트 숙소에 도착해 짐을 풀었습니다. 잠시 휴식을 한 후 강연 장소로 이동했습니다.
오늘 강연이 열리는 곳은 프랑크푸르트 도심 한가운데 위치한 유겐트헤르베르게(DJH Jugendherberge Frankfurt) 유스호스텔 대강당입니다. 강연장 주변으로 마인 강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습니다.
스님이 강연장에 도착하자 봉사자들이 반갑게 인사를 했습니다. 곳곳에서 청중들을 맞이하기 위해 봉사자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스님은 대기실에서 잠시 기다리다가 저녁 7시 정각에 강연장으로 향했습니다. 스님을 소개하는 영상이 끝나고 스님이 무대로 걸어 나오자 큰 박수갈채가 쏟아졌습니다.
스님이 반갑게 웃으며 인사말을 했습니다. 이번 한 달 동안의 해외 일정에 대해 소개해 주었습니다.
“저는 이번에 한 달 동안 10개국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해외를 다니고 있습니다. 주로 선진국에서는 즉문즉설 강연을 해서 사람들의 정신적인 괴로움을 해소해 주는 일을 하고, 가난한 나라와 분쟁 지역에서는 주로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할 예정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가장 빈곤하고 어려운 지역은 대부분 분쟁 지역입니다. 필리핀의 민다나오와 시리아처럼 분쟁 중인 지역에서는 아이들의 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JTS는 가장 열악한 곳을 지원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주로 지원하는 지역이 분쟁 지역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지역은 위험 부담이 커서 코이카(KOICA)와 같은 정부 기관에서 지원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JTS는 개인들이 몇 만 원씩 내는 후원금으로 구호활동을 하기 때문에 이런 분쟁 지역에도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어제까지 3일 동안 스위스에서 심리학 심포지엄에 참석한 후 취리히에서 교민들을 위해 즉문즉설을 강연을 했고, 오늘은 프랑크푸르트에서 여러분을 만나고 있고, 내일은 튀르키예와 시리아 지진 피해 복구 현장을 답사합니다. 이후에는 부탄을 방문하여 지속가능한 개발 시범사업을 하기 위해 워크숍을 합니다. 그리고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동티모르를 거쳐 캐나다와 미국 서부로 이동할 예정입니다. 한 달 동안의 계획 중 절반은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강연하고, 미국에서는 영어 통역을 통해 외국인에게 강연할 예정입니다. 나머지 절반은 주로 인도적 지원과 지속가능한 개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일정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어서 다양한 인생 고민에 대해 질문을 받았습니다. 두 시간 동안 여덟 명이 스님과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중 한 명은 독일 사람들 속에서 일하는데 본인만 동양인이어서 늘 위축되는 마음이 든다며 어떤 관점을 가져야 기를 펴고 살 수 있는지 스님의 조언을 구했습니다.
독일 사람들 속에 저만 동양인인데, 항상 위축이 됩니다
“저는 멘탈이 붕괴될 위기에 봉착해 있습니다. 독일에 산지는 15년째입니다. 처음에 취업 사기를 당하는 바람에 독일 생활을 식모살이로 시작했어요. 식모살이를 하다가 어떻게 운이 좋아서 지금은 대학에서 강사로 일하고 있습니다. 제 연령대는 사실 독일에서 인종 차별을 크게 받지 않는 세대인데, 이상하게도 저는 1960년대 한국의 <봉순이 언니> 같은 취업을 하게 되면서 인생이 많이 꼬였어요. 그래서 저는 아직도 독일 사람들을 보면 무서운 마음이 있습니다. 어쩌다 보니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었는데, 저희 파트의 강사 중에는 동양인이 저밖에 없어요. 항상 위축이 되고 학생을 봐도 무섭습니다. 학생들이 저보다 열 살은 어린데도 그러니 제가 이 일을 하기가 너무 힘듭니다. 제가 어떻게 하면 강사로서 권위를 가지고 즐겁게 일을 할 수 있을까요? 독일에서 기를 좀 펴고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한국에 가시면 됩니다.”
“제가 한국에 가면 교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이 제가 여기 있는 이유입니다. 여기서는 이제 교수가 되는 길의 목전에 와 있거든요.”
“그건 질문자가 선택할 문제입니다. 한국에 가서 기를 펴고 그냥 일반 사무직원을 하든지, 독일에서 약간 기가 죽더라도 교수를 하든지, 둘 중에 하나 선택하세요.”
“여기서도 교수가 될지 안 될지는 아직 알 수 없는 상황이라 불안하긴 합니다. 그래도 아직은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독일에서 교수가 안 될 경우에 플랜 B가 없어서 불안한 상태입니다.”
“왜 불안한가요?”
“제가 이공계열처럼 실용적인 분야를 하는 사람이 아니라서요. 저는 미술을 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독일은 미술 하는 사람을 환영하지 않아요. 이쪽 분야의 사람을 이민자로 받아들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독일이 질문자를 이민자로 받고 싶지 않은지 그걸 어떻게 알아요? 대학에서는 질문자가 필요하니까 강사 자리를 줬을 거 아니에요?”
“계약직이다 보니 안정적이지 않습니다.”
“계약직이면 계약 기간까지 일하고 계약이 끝나면 한국으로 돌아가면 되지 뭐가 걱정이에요?”
“제가 한국을 떠난 후 15년의 공백이 있습니다. 그 세월 동안 돈이 없어서 한국에 거의 못 들어갔어요. 이제 저는 한국을 잘 모릅니다. 그래서 너무 무서워요.”
“한국에는 지금 외국인 노동자들이 2백만 명이나 들어와서 살고 있어요. 질문자가 아무리 한국을 모른다 해도 외국인 노동자들보다는 잘 알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 그것도 큰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도 플랜이 없다 보니 두려움이 큽니다.”
“한국에 가는데 플랜이 뭐가 필요해요? 질문자는 한국말도 잘하니까 걱정할 게 없잖아요.”
“제가 이번에 정토불교대학을 신청했습니다. 한국에 가면 혹시 정토회에서 지낼 수 있을까요?”
“정토회는 언제든지 환영합니다.”
“밥은 주시는지요?”
“그럼요. 당연히 재워주고, 밥도 주지요. 정토회 안에는 일거리가 무궁무진합니다. 다만 정토회는 사람을 고용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갖고 있습니다. 사람을 고용하게 되면, 하나는 주인이 되고 다른 하나는 종업원이 되는 갑을 관계가 되잖아요. 정토회 멤버들은 모두 수행자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수평적으로 관계를 맺습니다. 업무에 따라 책임자가 있고 담당자가 있고, 일의 성격에 따라 이 파트가 있고 저 파트가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정토회는 많은 일들을 하고 있지만 월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습니다. 하지만 일을 하려면 밥은 먹어야 되고, 잠은 자야 하고, 옷은 입어야 하잖아요. 그런 것은 다 제공을 해줍니다. 그러나 개인 방은 제공되지 않습니다. 다섯 명이든 열 명이든 한 방에서 공동생활을 합니다. 그러니 질문자도 독일에서 사는 데까지 살다가 계약이 해지되면 언제든지 정토회로 오시면 돼요.
정토회에 들어올 수 있는 조건은 딱 두 가지입니다. 첫째, 정토불교대학을 졸업하여 정토회 회원이 되어야 합니다. 둘째, ‘깨달음의 장’이라고 하는 수련을 마쳐야 합니다. 왜냐하면 공동체에서 같이 살려면 자기 고집이 강할 경우 같이 살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공동체에는 약간의 규율이 있습니다. 정토회에는 ‘삼무’(三無)라고 해서 세 가지가 없습니다. 월급이 없고, 휴일이 없고, 휴가가 없습니다. 정토회는 수행공동체인데, 수행이란 모든 삶이 그냥 그대로 놀이가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노동을 놀이화한다는 원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삼무에 동의하지 않는 사람은 정토회에 들어오지 못합니다. 그것 외에는 나이도 상관없고, 신분도 일절 가리지 않습니다. 언제든지 오셔도 됩니다.
그러니 독일에서 살더라도 두려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는 데까지 하다가 안 되면 한국에 들어오고, 한국에 와서 밥벌이할 만한 게 있으면 그걸 하고, 그것도 없으면 정토회에 들어오면 돼요. 그래서 저는 한국에 실업률이 높을수록 기뻐합니다. 실업률이 높으면 자원봉사자를 확보하기 쉽잖아요. (웃음)
실업 상태에서 빈둥빈둥 놀지만 말고, 정토회에 와서 자원봉사를 하면 됩니다. 그러다 직장에 취업이 되면 일을 열심히 하다가 또 무슨 문제가 생겨서 직장을 그만두면 다시 정토회로 오시면 돼요. 질문자는 영어도 할 줄 알고 독일어도 할 줄 아니까 얼마든지 쓰일 데가 있습니다. 그러니 여기서 살면서 기가 죽을 필요가 전혀 없어요.”
“제가 처음 독일에 왔을 때 ‘나는 식모다’ 하는 멘탈이 형성되어 있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런 걸 트라우마라고 합니다. 이제는 트라우마에서 자유로워져야 됩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어떤 사람을 좋아하게 되면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내가 상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비위를 맞춰야 해요. 내가 상대를 더 좋아하는 관계에서 내가 갑이 되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반대로 상대가 나를 더 좋아하는 관계에서는, 즉 나는 싫은데 상대가 나를 따라다닌다면 내가 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런 관계에서는 나도 모르게 갑질을 하게 됩니다. 상대는 막 좋다고 아우성인데 나는 ‘싫다’ 하고 반응하는 것이 내 입장에서는 그냥 싫어서 싫다고 한 것이지만 상대 입장에서는 그게 바로 갑질이에요. 그래서 좋아하는 쪽이 늘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들은 독일이 좋다고 생각해서 여기에 왔을 겁니다. 독일에서 와달라고 요청해서 왔어요? 그런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은 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걸 자꾸 인종차별이라고 생각하면 안 돼요. 마치 여자가 남자를 좋아해서 을의 입장이 된 것을 성차별이라고 얘기하면 안 되는 것과 같습니다. 내가 상대방을 더 좋아하면 을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을이 안 되려면 좋아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 하고 말씀하신 겁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독일을 좋아해서 온 것이기 때문에 일단 고개를 숙이고 들어갈 수밖에 없어요. 만약 여러분들은 안 오겠다는데 독일에서 자기들이 필요해서 ‘돈을 더 줄 테니 와라’, ‘대우를 잘해줄 테니 와라’ 해서 초청을 받고 왔다면 어떨까요? 여러분들이 갑질을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한국 사람이 독일 사람을 차별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인간관계가 갖는 속성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일 사람들이 마음에 안 들 때 ‘나 한국에 가겠다’ 이렇게 해버리면 누가 잡을까요? 독일 사람들이 질문자를 잡으려 할 겁니다.
한국 사람은 강사를 할 수 없다, 한국 사람은 대학에 못 들어간다, 이런 것처럼 법률을 어기는 차별은 곧바로 고소를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인간 사회에서 서로의 필요에 의해 관계가 맺어지는 것은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에요. 법적으로 다툴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는 겁니다. 그러니 여러분들이 독일에 살면서 조금이라도 자기에게 불리한 일이 있으면 그것이 법률에 보장된 것인지를 빨리 살펴봐야 해요. 법률에 보장된 권리인데 차별받고 있다면 고소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법률에 없는 일이라면, 예를 들어 독일 학생과 나 둘 중에 독일 교수가 독일 학생한테만 발언 기회를 많이 준다든지 하는 것을 차별이라고 여기면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런 걸 차별이라고 느끼면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습니다.
우리도 만약 어떤 일을 할 때 한국 사람이 하나 있고 베트남 사람이 하나 있어서, 둘의 능력이 같다면 누구한테 기회를 많이 줄까요? 고향이 같다든지 종교가 같다든지 출신학교가 같다든지 하는 이유로 기회를 더 주는 일은 인간 사회라면 어디에나 있는 일입니다. 학연, 지연이란 말 들어보셨죠? 물론 이런 것이 지나쳐서 능력도 없는데 후배라고 중요한 일을 주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기도 합니다. 그런 정도의 일이 아니고 그냥 같은 나라 사람을 선호하는 정도를 두고 차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 사회에서 일어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받아들여야 해요.
지금 한국 사람이 독일에 살면서 받는 차별이 심할까요? 동남아시아 노동자가 한국에 와서 살면서 받는 차별이 심할까요? 지금 베트남 사람, 태국 사람, 필리핀 사람 등 약 2백만 명 정도가 한국에 와서 노동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 그 사람들이 느끼는 차별이 더 심합니다. 그렇게 따지면 한국이 훨씬 더 외국인에 대한 차별이 심한 나라입니다. 그러니 이런 일은 인간 세상 어디에나 있는 현상이라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습니다. 질문자처럼 생각하면 외국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약간의 문화적인 차별과 선호는 감수를 해야 됩니다.
그리고 차별받는 것이 꼭 나쁜 것도 아니에요. 왜냐하면 그런 차별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본인 스스로 많은 노력을 하게 되어서 능력이 출중해지는 경우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 나라 사람들과 능력이 똑같으면 차별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누가 봐도 논란이 없을 만큼 여러분들이 노력을 더 해서 능력이 출중하면 아무도 차별을 못 합니다.
이렇게 서로 이질적인 문화가 교류되고 섞일 때 더 창의적인 결과물이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러분들은 모두 지금 문화의 교류와 충돌이 일어나는 지점에서 살고 있어요. 부정적으로 생각하면 낙담과 좌절이 되지만, 그것을 새로운 자극으로 받아들이면 토인비의 역사관에 나오는 것처럼 도전과 응전이 됩니다. 도전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면 오히려 새로운 창조성이 발현될 수 있습니다.
만약 법륜 스님이 영어 통역을 해서 강연하는 내용이 영어가 모국어인 사람이 강연하는 내용과 수준이 비슷하다면 저에게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하지 않을 겁니다. 통역을 거쳐야 하고 많은 품이 들지만 내용이 월등하게 좋으면 강의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거예요. 저는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절에 들어갔기 때문에 대학도 안 나왔고, 영어도 할 줄 몰라요. 인맥도 전혀 없어요. 대학도 가고 외국에 유학도 가야 인맥이란 게 있는데 저는 그런 걸 하나도 안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제가 기가 죽으면 이렇게 외국에 강연을 다닐 수 있을까요? 외국에 나가본 적도 없고,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사람이 이렇게 강연을 다니려면 내공이 좀 있어야 됩니다. 외국 사람들은 저를 보고 ‘저 사람은 무슨 옷이 저래’, ‘말도 못 하는 사람이 뭐 하러 온 거야’ 하고 충분히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 것에 기가 죽으면 ‘승복을 벗어야 하나’ 하고 고민을 하게 되겠지만, 저는 승복 입고 고무신 신은 채 미국이고 어디고 막 다닙니다.
질문자도 스스로 당당해져야 합니다. 다른 나라에 살면서 그런 차별은 감수할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해요. ‘그래, 그 정도는 이해해야지’ 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독일 사람들을 누르고 기를 펴고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지 질문했는데, 남을 누르긴 왜 눌러요? 본인이 눌림을 당해서 힘들었으면 오히려 남을 존중해야죠. 물론 인종적, 문화적으로 경험한 트라우마가 있어서 하게 된 말일 텐데, 그런 트라우마가 꼭 나쁜 작용만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해왔기 때문에 질문자가 지금 이 자리에 와 있는 것이니까요.
질문자가 처한 상황은 괜찮은데, 과거의 경험이 상처로 남아서 지금 마음이 불안한 겁니다. 지금 질문자는 정상에 서 있습니다. 과거의 상처는 떨쳐버리고 마음껏 활동하시다가 나중에 갈 곳이 없어지면 정토회로 오세요. 언제든지 대환영입니다. 숨넘어가기 전에 와서 죽으면 어떡하느냐 해도 괜찮습니다. 화장한 유골로 피리를 만들어도 되고, 재 가지고 거름을 해도 됩니다. 그러니 괜찮아요. 너무 기죽지 말고 당당하게 사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제 진로를 정해 주셔서 이제 계약직에서 잘려도 불안감이 없습니다.”
“그럼 질문자가 빨리 계약이 해지되어서 자원봉사를 할 수 있도록 다 함께 박수를 한 번 쳐주세요.”
청중들 모두 큰 박수로 질문자를 응원해 주었습니다.
다시 스님이 말을 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노동자는 을이고 사장이 갑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죠? 그렇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여러분이 대학을 나오고 재능도 있어서 대기업에 시험을 쳐서 두세 번 낙방을 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어쩌다 요행히 대기업에 들어가게 되면 여러분들은 처음에는 기뻐하지만 결국 을이 됩니다. 월급도 많이 받고, 주위 사람들도 ‘와, 대기업에 다닌다’ 하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진 재능이 그쪽에서 요구하는 것에 비해 항상 부족합니다. 열심히 노력해도 요구에 부응을 못합니다. 그래서 늘 잘릴까 봐 눈치를 보고 살아야 돼요.
그런데 질문자처럼 유학까지 하고 한국에 돌아와서 업무량도 많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인데 월급은 조금 주는 직장을 구하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일을 구하기도 아주 쉽습니다. 그리고 그런 회사에 들어가면 사장의 눈에는 내가 귀한 인재로 보이겠죠. 이런 직장은 당장 내일이라도 구할 수 있고, 모레라도 다른 데로 옮길 수 있어요. 회사에서 내가 별로 눈치 볼 필요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장의 입장은 어떨까요? 오랜만에 괜찮은 사람이 하나 들어왔으니 나간다고 할까 봐 전전긍긍하겠죠.
노동자라고 무조건 을이 되는 게 아닙니다. 노동자도 갑이 될 수도 있어요. 오늘 같은 날 이런 강의가 있으면 이 사람은 ‘사장님, 저 오늘 법륜 스님 강의를 들으러 가야 하니 일찍 퇴근하겠습니다’ 하고 회사를 나와버려도 아무 말도 못 해요. 뭐라고 하면 내일부터 회사에 안 나오니까요. 꼭 사장이 갑이고 직원은 을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여러분들은 왜 자꾸 을이 되는지 아세요? 일은 적게 하고 월급은 많이 받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사장은 일은 많이 시키고 월급은 조금 주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장도 을이 되는 겁니다. 이렇게 우리는 갑이 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다들 을이 되는 것을 좋아합니다. 내가 누구를, 또는 무엇을 좋아한다는 것은 을이 되기를 자처하는 행위입니다. 갑을 관계는 사장과 직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구나 조금만 욕심을 내려놓으면 얼마든지 갑질을 하면서 살 수 있습니다. 여기서 갑질이라는 표현은 나쁜 의미로 쓰이는 갑질이 아니고 당당하게 사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독일에서 사는 동안은 너무 목매달고 살지 마세요. 가볍게 구경삼아 사십시오. 하다가 안 되면 한국으로 가면 되잖아요. 그것도 안 되면 정토회로 오면 돼요. 정토회는 여러분들을 언제나 환영합니다. 독일 사람들이 모두 바보가 아닌 이상, 여러분들이 독일 사회를 휘어잡아서 성공하겠다는 망상을 자꾸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어쩌다가 그럴 수는 있어도 항상 남을 존중해야 합니다. 기가 죽어서도 안 되지만 너무 허황된 생각을 해서도 안 됩니다. 다만 독일 사람들에 비해 불리한 조건을 극복하려면 독일 사람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들이 다섯 시간 일하면 나는 여섯 시간 일하고, 그들이 다섯 시간 공부하면 나는 열 시간 공부해야 한다는 관점을 가져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잘 알았습니다.”
계속해서 질문들이 이어졌습니다.
독일에 산 지 8년, 한국에 계신 부모님을 생각하면 부모님과 시간을 보내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한국으로 돌아가야 할까요?
스님의 즉문즉설을 너무 많이 듣다 보니 스님을 흉내 내며 다른 사람의 고민 상담에 대해 대답을 해주게 됩니다. 제가 어떤 관점을 가져야 할까요?
어떻게 신뢰를 구축해야 할까요? 제가 타인을 더 신뢰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템플 스테이를 종종 가고 싶은데, 추천해 주실 사찰이 있을까요?
독일에서 10년 동안 살면서 인종 차별을 자주 당했습니다. 코로나 이후 더욱더 심해진 인종 차별에 대해 심적으로 어떤 대비를 해야 할까요?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옛날에 사귀었던 애인을 만나야 하는데, 과거의 미운 감정을 성숙하게 극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점점 늙어가는 노인들을 보면 나도 저렇게 될까 봐 무서운 마음이 듭니다. 늙어가는 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요?
모든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니 밤 9시가 훌쩍 넘었습니다.
곧바로 무대에서 책 사인회를 했습니다. 참석자들은 스님과 눈을 맞추며 스님에게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스님 덕분에 정말 많이 행복해졌습니다. 감사합니다.”
청중들이 모두 집으로 돌아가고 스님은 강연을 준비한 봉사자들과 기념사진을 찍었습니다.
“프랑크푸르트!”
이어서 봉사자들과 강연을 준비하며 느꼈던 소감을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암에 걸리고 나서 스님 법문을 들으면서 잘 극복을 했습니다. 스님께서 ‘나 덕분에 나았으면 봉사를 많이 해라’ 하고 말씀하셔서 오늘도 이렇게 봉사를 하러 왔습니다.”
“오늘 노동자도 갑질을 할 수 있다는 말씀이 너무 좋았어요. 저도 독일에서 사장이 아닌 노동자로 근무하고 있는데, 오늘 봉사를 하기 위해 연차를 당당히 내고 왔습니다.”
“스님께서 먼 길을 오셔서 건강이 염려되었는데 오늘 강연을 활기차게 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한 명씩 소개가 될 때마다 박수로 환영을 했습니다. 자기소개를 들어보니 베를린, 본, 함부르크, 하이델부르크, 뒤셀도르프 등 독일 전역에서 먼 길을 달려온 분들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스님이 봉사자들을 격려해 주었습니다.
“전부 푸랑크푸르트에 사는 사람들인 줄 알았는데 독일 전역에서 봉사를 하러 오셨네요. 앞으로 유럽에서는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며 강연을 할 필요 없이 한 곳에서만 강연을 해도 되겠어요. (웃음)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
봉사자들과의 대화를 마친 후 숙소로 돌아오니 밤 10시 40분이 되었습니다. 스님은 숙소에서 원고 교정과 업무들을 본 후 하루 일과를 마쳤습니다.
내일은 튀르키예와 시리아 대지진 피해 복구 지원의 일환으로, JTS가 난민캠프에 건설 중인 학교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하루 종일 비행기를 타고 이동합니다. 오전에는 프랑크푸르트를 출발하여 이스탄불로 이동한 후, 오후에는 이스탄불을 출발하여 가지안텝으로 이동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