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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불사(源佛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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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게시글
…… 불교♡게시판 Re:탁발음식의 청정경
둑카 추천 0 조회 228 13.07.23 23:49 댓글 49
게시글 본문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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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13.07.24 00:21

    첫댓글 여러 가지로 새로운 내용이 있는 말씀 감사드립니다.
    공과 타인이 거의 동의어로 사용된다는 말씀이시네요.
    그런데 para는 혹시 아함경 쪽에 있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이 아니다에서 '남'에 해당하는 것은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니까야에도 이런 내용이 있는데요.
    경전의 제목과 내용을 그 부분만 짤막하게 올려보겠습니다.

    12쌍윳따 인연의 모음,
    4. 깔라라캇띠야의 품
    12 : 37(4-7) 네 것이 아님의 경
    [세존] "수행승들이여, 이 몸은 그대들의 것이 아니다. 또한 다른 사람의 것도 아니다. 수행승들이여, 이것은 이전의 행위로 만들어진 것이며, 생각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감수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 13.07.24 00:44

    이러면서 연기법을 사유해야 한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문맥상 우선 '나 또는 나의 것'인지를 확인하고, 그 다음 '남 또는 남의 것'이 아닌지를 확인하면서, 소멸하는 것으로 확인하고, 공한 것으로 확인하고, 비아인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으로 구성될 수 있는데요.
    이렇게 본다면 연속선상 또는 동위선상인 것은 확실하지만, '타인'과 '공'은 내용이 좀 다르다는 점이 마음에 걸립니다.
    그나저나 '비아'라는 단어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는데요.
    개인적으로는 무아보다 더 구체적인 듯하거든요.
    정리하고 있지는 않아 꺼내놓기는 어렵지만 한 번 알아볼 만한 것은 같습니다.

  • 작성자 13.07.24 08:46

    아함경은 읽어보지 않아서 잘 모르겠지만, 니까야에서 '남'을 의미하는 단어는, para외에 a??a(안냐-빠알리 표기가 여기도 안 되는 군요^^)도 있습니다. 행복님이 인용하신 위 상윳따 경에서의 '남'(다른 사람)도 a??esa?안녜상(a??a안냐의 소유격 형태, 다른 사람의 것으로 번역된 부분)으로 원전에 나옵니다.

  • 작성자 13.07.24 08:51

    제가 빠라(타인)나 순냐(공)에 대해서 관심을 갖은 이유는, 대념처경에서 21번 반복되는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부분이 계기가 되었습니다. 위 길따라님이 쓰신 글은, 유심히 보셔야 겨우 이해가 됩니다.(저는 그랬습니다~~) 덕분에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부분에 대하여 조금 정리가 되었거든요.. 심념처 부분에서 안으로 밖으로 안팎으로 부분을 잘 연계해서 보시면 도움이 되실 걸로 생각됩니다.

  • 작성자 13.07.24 08:56

    제 개인적으로는, 아낫따를 무아로 번역하는 것보다는, 비아로 번역하는 것이 문법상으로나, 아낫따를 설하시는 경문의 맥락상으로도, 좀 더 타당하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비아로 번역하여 이해할 경우에 무아로 번역하여 이해하는 경우와 비교하여 볼 때 무시할 수 없는 큰 차이가 있기에,,,신중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 13.07.24 13:23

    세상(세계) ----------------------------> 세상(세계)을 초월 = 해탈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다 --------------> 이것과 저것 모두 초월 = 해탈
    양과 음(비양:) -------------------------> 양과 음을 모두 초월 = 해탈
    선과 악 ----------------------------> 선과 악을 모두 초월 = 해탈
    법과 비법 ----------------------------> 비법과 법을 모두 초월 = 해탈
    아(我) 와 비아(非我) --------------------> 아(我) 와 비아(非我)를 모두 초월한 것 = 무아(無我) = 해탈
    我(atta)와 비아(anatta) -------------------> niratta(我와 非我를 벗어난 것) = 무아(無我) = 해탈

  • 13.07.24 13:28

    我( atta)는 욕계의 오온을 나(我) 또는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
    非我(anatta)는 욕계의 천상부터 비상비비상처의 높은 신들을 나(我) 또는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
    저는 이렇게 배워 이해하고 있습니다.

    양(陽) 의 대(對)가 양없음(無陽)이 아니고 非陽, 즉 음(陰)이듯이
    법의 대가 무법(無法)이 아니고 비법(非法)이듯이

    이렇게 놓고 보면 우리의 가장 큰 욕망,
    어떠하든지 존재로 있고픈 욕망, 색계의 집착, 비색계의 집착이 어느 정도 설명이 됩니다.

    오온으로 구성된 나를 벗어나라고 하니 오온이 아닌 것(오온보다 더 수승한 것)에서 또 나(실체)를 찾으려고 하니
    색계나 무색계의 높은 신(유일신, 절대자)에서 실체를 찾으려고 합니다.

  • 13.07.24 13:16

    부처님께서 이 둘 모두를 즉 아(我)와 비아(非我) 모두의 집착에서 벗어나 둘다를 초월하라고 하셨습니다.

    아(我)는 취착하기 마련인 오취온으로 구성된 것으로 무상한 것이고 괴로운 것이며 실체가 아니므로
    비아(非我)는 오취온보다는 거칠지 않고 미세한 수승한 존재이지만 이것도 결국 변하고 멸한다. 그러므로 괴로운 존재이고 실체가 아니므로 이것마저 초월해야 한다.

    이렇게 단계적으로 이해할 때, 그냥 무아라고 하는 것보다 비아를 이해하고 무아를 이해하는 것이
    더 나은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_()_

  • 작성자 13.07.24 18:59

    참괴님 반갑습니다. 그런데,
    "我( atta)는 욕계의 오온을 나(我) 또는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
    非我(anatta)는 욕계의 천상부터 비상비비상처의 높은 신들을 나(我) 또는 실체라고 생각하는 것
    저는 이렇게 배워 이해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씀하신 부분과,
    我(atta)와 비아(anatta) -------------------> niratta(我와 非我를 벗어난 것)라고 설명하신 부분
    에 대한 경전적 근거를 알려주시면, 제가 공부하는데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 작성자 13.07.24 09:09

    도서관에서 읽은 위 책은요,,불교의 왕초보인 저로서는, 부처님 사후 부파불교의 생성(저는 특히 경량부에 관심이 가더라고요)과 대승, 유식, 니가르주나(용수)의 중관에 이어 선불교에 이르기까지, 아주 조금이나마 가닥을 잡을 수 있어서 많은 도움이 되었다고 나름 생각하여 소개한 것입니다. 읽어보신 분이 더 많을 것 같기도 하지만, 저는 위 책을 처음 접했거든요.

  • 작성자 13.07.24 09:13

    저는 3년전에, 처음으로 니까야(초불역)를 접했고, 초불에서 번역한 아비담마길라잡이와 청정도론도 겉핧기 식으로 읽어보았는데 위 책을 읽으면서, 제가 그동안 논장이나 청정도론에 대하여 가졌던 의문이 조금 풀리기도 하였습니다.

  • 작성자 13.07.24 09:16

    특히, 찰나론과 원자론 부분(번역이 맞느지 모르겠네요, 원어가 되시는 분은 원서로 읽으시면 더 좋을 듯)은 저자의 견해의 옳고 그름을 떠나서 필히 정리할 필요성이 있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니까야에 나오지 않는 부분이거든요..

  • 작성자 13.07.24 09:32

    찰나론이나 원자론과 같은, 부처님 직설이 아닌 내용이 가미되면서, 초기부파별로 조금씩 다른 이론체계가 성립되고, 이후 대승이나 용수의 중관이 나오는 과정 등이 제 눈길을 끌었는데요,, 저도 위 책을 정독하지 못한 상태라서(200쪽 정도 되는데, 제대로 정독하려면 하루 온 종일 읽어야 될 것 같아서, 일단,, 대충 읽어둔 상태입니다.) 읽고 기억나는 점만 대충 말씀드립니다. 기회가 되면, 구입하거나 해서 정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책입니다..

  • 13.07.24 13:03

    저는 주로 아함경과 니까야,아비담마,중론 정도만 보았지만 상좌부 경전과 수행에 대해 알고 싶은 내용이 많습니다. 책은 주문하여 보겠습니다. 소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도 역시 무아라는 용어가 논리적 모순이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반면에 비아는 저런 문제를 해소시켜줍니다. 그리고 좀더 알고 싶은 내용들이 있어요. 지금은 시간이 없어서 오후쯤 좀더 정리해보고 나서 몇 가지 여쭈어볼께요. 바쁘시더라도 조금만 더 부탁드립니다. 자세하고 유익한 말씀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7.24 18:30

    예, 저도 고맙습니다. 상좌부 경전은 빠알리 삼장(율장, 경장, 논장-미얀마 6차결집본)입니다. 사실 저와 같은 재가자입장에서는, 경장 중에서 4부 니까야와 소부 니까야 중에서 법구경, 숫타니빠따, 여시어경 정도만 읽기에도 아주아주 벅찹니다. 아함경과 중론은 읽어보지 못했고요(저는 불교를 니까야를 통해서 처음 접했습니다), 아비담마(논장)는 니까야가 도저히 이해가 안될 때에 참고용으로 보시면 될 것 같습니다.(그런데 니까야에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주석서나 논장을 참고했을 때 제 경험으로는 더 헷갈립니다.) 그냥 이해가 되지 않더라도 반복해서 니까야를 읽는게 가장 좋다고 저는 개인적으로 생각합니다.

  • 작성자 13.07.24 18:45

    그리고 혹시, 아비담마(길라잡이-아비담맛타상가하)나 청정도론을 읽으시려 하신다면, 그 전에 저 위에서 소개드린 책 꼭 먼저 읽고나서 읽으시기를 바랍니다. 위 책의 저자가 다 옳다거나 하는 입장이 아니고, 적어도 불교역사의 흐름은 먼저 대충이라도 알고 보셔야 한다는 뜻에서 이야기 드리는 것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수행에 관해서는 제가 뭐라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 13.07.24 20:14

    둑카님 감사합니다.
    책은 주문을 했으니 도착하면 읽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원불사까페에서도 여러 가지 유익한 말씀 많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7.24 21:46

    영문판이 있는지 모르겠는데, 행복님 영어되시면, 읽어보시고 제게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번역본은 저자의 의도가 잘 전달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저기 원자론으로 번역된 부분도 다른 용어가 있을 걸로 보입니다.. 그리고 제가 경량부라고 표현한 부분도 다른 지칭이 있을 거에요..제가 이 부파에 관심 갖은 건, 오히려 어떤 측면에서는 상좌부보다도 부처님의 원음인 경장을 위주로 논을 정립하려 하였다는 점 때문입니다..상좌부를 포함하여 부파불교가 논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대승이나 용수의 중관, 유식사상에 비판의 빌미를 제공한 점도 관심을 끄는 대목입니다.

  • 작성자 13.07.24 21:52

    생활속에서 불교를 실천하는 분이야 말로 진정한 불자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지 못하고 있어서 우선 개념정립이라도 제대로 하자는 입장이고요..행복님은 실천력이 대단하신 분 같습니다. 책 바로 주문하신 건만 봐도 알겠네요..좋은 성과 있으시길 바랍니다..

  • 13.07.24 22:58

    저도 인터넷을 검색하다가 경량부의 역사적 활동에 대해 본 적이 있는데 관심이 많았습니다.
    전해지는 거의 없다는게 조금 아쉬워요.
    영어는 능숙하게 잘하는 것이 아니라서 있더라도 이해할 수 있을런지 모르겠네요.
    책이 오면 한글판을 읽은 다음 영문판이 있으면 한 번 읽어볼께요.
    저도 예전에 흥미롭게 읽었던 책 하나 소개할께요.
    호잔님의 블로그에 가면 이분이 해석하신 실천적 연기라는 책인데요.
    혹시 안 보셨으면 실천적 연기라고 검색해서 한 번 봐주세요.
    남방불교 스님의 책인데 어느 정도 자세하게 설명을 하신 듯했습니다.
    여기 게시판에도 좋은 글 많이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 작성자 13.07.24 23:50

    예 지금 접속하였습니다.. 오늘은 머릿말하고 그 다음 부분의 첫머리만 읽겠습니다. 대인연경(마하니다나 숫따)에 나오는 아난다존자와 부처님의 말씀으로 시작되는 부분이네요..차차 차근히 읽어 보도록 할게요... 고맙습니다... 좋은 밤 되세요...^(^

  • 13.07.24 13:52

    다 아시는 내용이지만 초기불교에 갓 입문하신 분이 초보불자들을 위해서 사족을 붙이면

    초기경전을 읽으실 때나 초기불교를 이해할 때 나(我)라고 번역된 것은
    세 가지 측면을 염두에 두고 읽고 이해하시면 조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초기경전의 나(我)는
    1. 취착하기 마련인 오취온( sakkaaya)을 나(我)라고 나와 있습니다.
    이것은 당연히 버려야할 집착의 대상입니다.
    또한 보통 우리가 유신견(有身見)이라 말하는 것도 조금은 어폐가 있으니
    그냥 원음 그대로 사까야 디티(sakkaaya-dithi)로 이해하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디티란 말은 견해라는 것이므로 '사꺄야 디티 = 취착하기 마련인 오온을 나라고 생각하는 견해' 이렇게 이해하고

  • 13.07.24 13:49

    유신견이라는 말은 되도록 쓰지 않았으면 합니다.

    2. 나(我)가 atta(산스크리트어로는 attman)로 나와 있을 때입니다.
    이때의 atta(我)는 좋은 뜻으로 쓰이는 경우와 나쁜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있으니 구분하는 것이 좋습니다.

    나(atta)를 섬으로 삼고 법을 섬으로 삼아라 할 때의 atta(我)는 좋은 뜻인 궁극의 실체라는 뜻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나쁜 뜻으로 atta(我)가 쓰이는 경우는 바라문들이 말하는 atta로 쓰일 때입니다.
    부처님께서 쓰신 atta(我)란 용어와 바라문들이 쓰는 atta(我)란 용어는 그 의미가 차이가 커니 구분해서 보시길..

    생각이나 의견을 글로 쓰기가 참 어렵네요. ㅎㅎ

  • 13.07.24 15:53

    참괴님 자세하신 말씀 감사드립니다.
    아와 비아를 넘어서는 것으로 무아를 말씀하셨네요.
    그나저나 이 '무아'란 단어 말하기 참 조심스럽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비아로 쓰는 것이 매우 직접적이고 정확해 보인다는 의견이구요.
    그래도 이젠 무아가 통용되고 있으니 무아로 쓰겠다하면 크게 반대하지는 않는데 따져볼 것은 있습니다.
    '무아'란 대체로 '자아'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합니다.

  • 13.07.24 15:58

    '자아'란 '영원 불변하며 상주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무아'라고 하면서 없다고 한다는 것이거든요.
    상당히 무모한 발상 같구요.
    왜냐하면 무아를 증명하려면 영원불멸한 이후에 가능해지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유한하죠.
    영원 불멸 자체가 안 되는 조건입니다.
    논리적 불일치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 13.07.24 16:35

    본래 '무'자는 대표적으로 '없을 무'와 '아닐 무' 두 가지가 있는데요.
    제가 읽은 아함경이나 니까야의 내용을 보면 '아닐 무'가 유력합니다.
    '아닐 무'로 하면 관찰이 가능해지기 때문인데요.
    예를 들어 어떤 색을 관찰한다고 가정하면,
    그것의 시작부터 소멸까지 관찰이 가능한데요.
    어떤 것의 생과 멸을 보게 되는 것이죠.
    그러면 이것이 '무상'입니다.
    여기서 '무'자는 '아닐 무'라서 '항상하지 않은 것이다'는 관찰을 얻습니다.
    그리고 멸하면서 괴로움이 발생합니다.

  • 13.07.24 16:48

    무상을 보면 고는 거의 자동적으로 관찰이 됩니다.
    그동안 모르고 즐겼던 그것의 소멸하는 순간과 흔들림을 감지한 것이라서요.

    여기에서 '무아'가 등장하게 되는데요.
    이것이 판단의 영역이 됩니다.
    그 이유는 유한한 것인줄 알면서도 그대로 지속시키는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우리의 의식에 있는 재물이나 자식이 떠오르면 생하고 잠깐 다른 것에 주의를 돌리기만 해도 소멸하는 덧없는 것임을 알면서도 끈을 놓기는 어려워합니다. 제가 그렇구요.

  • 13.07.24 16:48

    이처럼 '무아'는 결단을 필요로 하는 대목입니다.

    그런데 저 중요한 판단의 순간에 느닷없이 '없을 무'인 '무아'로 둔갑을 합니다.
    그러면서 '색에는 자아가 없다'고 바뀌어 버립니다.
    마치 '오리발 내밀기'나 '잡아떼기' 식의 책임을 회피하는 퇴행적인 장면이 됩니다.
    본인 스스로 한 것이 소멸하는 것을 보고 난 이후의 '자성'이 필요한 시점에서 '색 자체가 없다'는 '사건 자체를 부정하는 형태'로 둔갑을 하니까요.

  • 13.07.24 16:24

    아함경 등에 무수히 나오는 무상고무아에 대한 정형구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색은 무상하다. 무상한 것은 괴로움이다. 괴로운 것은 나가 아니며 또한 내 것도 아니다. 이렇게 관찰하면 세간에 대해 전혀 취할 바가 없게 되고, 취할 바가 없으면 구할 것이 없어지고, 구할 것이 없어지면 스스로 열반을 깨닫는다"는 내용은 일관적입니다.
    보다시피 '아닐 무'의 의미입니다.
    이렇게 본 결과는 책임소재가 분명해져서 무엇을 내것으로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 13.07.24 16:34

    그동안의 삶에 대한 반성도 있고, 앞으로 할 일도 있게 됩니다.
    저 색을 지금껏 타고 돌아다녔지만 이제부터 끊느냐마느냐는 그 사람의 믿음과 근기와 노력에 달려 있게 됩니다.
    따라서 '무아'로 하겠다면 '아닐 무'인 '무아'로 해석하는 것이 명확하다고 봅니다.

    앞의 '없을 무'가 '비었다'는 '공'과 혼합이 되면 문제가 더 커진다고 보구요.
    이러면 반야심경류의 비빔밥이 만들어지니까요.
    앞서 '저 유한한 색의 생성과 소멸을 보면서 나와 내것으로 할건가말건가'를 따지던 자신의 윤리와 도덕, 법의 문제였던 것이...
    한 순간 '없을 무'로 바뀌며 "색은 자아가 없는거야"라고 하면서 그동안의 모든 책임에서 빠져나간다고나 할까요..

  • 13.07.24 16:34

    _()_ 행복님은 많이 사유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부럽습니다.

    공부를 하다보면 한자. 한문으로 머리 아픈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다고 한문을 완전히 제외시킬 수도 없고요.
    우리가 쓰는 단어에서 한자가 차지하는 비중이 엄청나고 어떤 때는 도움이 많이 되기 때문이지요.

    우리가 논어나 다른 사서삼경을 해석할 때 글자 한 자 때문에 많은 학자들이 오랜시간동안 연구하고 그 의미도 달라지는 것을 종종 봅니다.

    한문경전을 계속 본다면 이런한 문제점이 많이 생길 수 있으니 되도록 아함경 등보다는 스리랑카의 초기경전을 본는 것이 훨씬 낫다고 생각합니다. 또 어떤 단어나 용어 문구는 원어 그대로 이해하고 호지하는 것이 더 좋습니다.

  • 13.07.24 16:48

    우리가 한자로 간단히 혜(慧)라고 한 것의 팔리어로 찾아보면 유사한 용어가 많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냐냐, 윈냐냐, 빤야...... (아직 빠알리어는 겨우 기는 수준이라 ㅎㅎ)
    따라서 팔리어 원문에 어떠한 단어가 쓰였는지 알고 다시 보면 이해할 수 있는 것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13.07.24 16:45

    그런데 '없을 무'가 되면서 완전히 상황반전됩니다.
    예를 들어 '색에 자아란 없다'는 말로 바뀐 결과 '색에는 실체가 없다'는 말도 가능해집니다.
    그러면서 '5온에는 실체가 없다'로 확대됩니다.
    '없다'는 의미의 '공'과 연합하면서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는 명제로 변질됩니다.
    오직 '5온에 자아란 없다'는 '무아' 무아 공식에 취한 상태만 남습니다.
    유한한 인간이면 영원한 자아나 실체란 것을 경험할 수도 증명할 수도 없다는 문제는 잊혀진지 오래입니다.
    부처님은 무기로 대응한 것인데도 말입니다.

  • 13.07.24 18:56

    무아를 간단히 정의하거나 이해하는 것은 매우 어렵고 곤란합니다.
    무상, 고, 무아를 어느 정도 이해하고 그 다음 부처님의 법문 전반적인 이해와 체계를 잡으시면
    그때는 많은 발전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위빠사나를 관통하면 예류자(수다원)이라 하겠습니까?
    예류자면 최소한 색계천이상의 신과 같다고 할 수준입니다. 말이 쉬운 예류자이지 굉장히 높은 과정이고 수준입니다.

    그리고 있다, 없다와 공에서 일단 살짝 벗어나 사유해보시기를 권합니다.
    때로는 풀리지 않는 의문은 비켜서서 보는 것이 훨씬 나을 겁니다.

    그리고 색이 공이고 공이 색이다라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을 틀린 말입니다.
    이것을 제가 설명하기가 굉장히 힘이 듭니다.

  • 13.07.24 19:01

    있다, 없다에서 실체가 아니다 에서 먼저 사유하고 발전해 보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세상을 벗어나라고 한 말을 깊이 염두에 두시길 권합니다.
    그리고 시각을 세상 안에서 보는 시각과 세상 밖에서 보는 시각(아라한의 시각)으로 나누어 사유해보십시오.

    세상안에서는 악을 떠나서 최고의 선이라고 생각하여도
    세상을 초월한 아라한의 입장에서는 악=선입니다. 구성요소에 불과할 뿐입니다.

    영원히 나올 수 없는 교도소가 있고 그곳에 죄수와 교도관이 있다고 생각해보십시오.
    교도관은 자기가 선이고 죄수는 악이며 하찮다고 생각하지만

    교도소 밖에서 보는 자에겐 교도관이나 죄수나 감옥에 있는 사람. 똑같은 죄수입니다.

  • 13.07.24 19:07

    그러면 밖에서 보는 자는 죄수나 교도관이나 실체가 아니다 또는 실체가 없다고 해도 무방하지만
    안의 죄수나 교도관은 누가 실체인지 끊임없이 분별만 할 것입니다. 안에서는 영원히 찾지 못하면서...
    안의 죄수나 교도관이 실체가 있다. 없다. 실체가 아니다 맞다고 주장하는 것을 밖의 사람(아라한)의 입장에서 보면 얼마나 우스운 상황입니까. 평생 죄수이면서 그 안에서 오십보 백보를 따지고 있으니..

    세상안에서 보는 시각, 세상을 벗어나서 보는 시각을 3자적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보시면 도움이 될 것입니다.
    있다, 없다, 공을 따지는 것도 어느 관점에서 해야 맞는지를... 잘못하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 13.07.24 19:11

    유여열반의 경우를 다시 한번 가정해보겠습니다.
    해탈은 했지만 몸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그분께 누가 물어본다고 합시다. 세상은 있습니까? 없습니까 라고 묻는다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라고 할 것입니다.(원래는 이렇게 비유하면 곤란하지만..)

    자신이 해탈한 입장의 시각에서 보면 세상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재의 입장에서는 세상이 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연기를 관통하고 해탈한 자의 경우로
    세상의 소멸을 보는 자는 세상이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세상의 생성을 보는 자는 세상이 없다고 말하지 않는다. 라는 경전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 13.07.24 16:45

    팔리어 (또는 인도어, 싱할리어)를 중국어로 번역 그것을 다시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오류가 많을까요?
    팔리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이 오류가 많을까요?

    팔리어를 한국어로 번역한 것을 읽는 것이 이해와 사유의 폭을 넓힐까요?
    팔리어를 공부하여 경전을 읽는 것이 이해와 사유의 폭을 넓힐까요?

    스스로 한 번 생각해 보시면 답이 나올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가 많이 범하는 오류가 선입관입니다.
    초기경전을 공부하면서 대승(?)의 불교 영향의 선입관 때문에 종종 의문하고 잘못된 이해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모든 학문과 배움에 있어 선입관은 방해의 요소라고 생각합니다.

  • 13.07.24 16:40

    선입관 없이 일단 볼려고 노력하고 그 후에 비교 분석하여 정립할려고 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부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얼룩덜룩한 오염원이 있는 천보다는 깨끗한고 맑은 천이 염색이 곱고 훌륭하게 된다고 하셨듯이 선입관을 없앨려고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매우 어려운 것이지만.....

    _()_

  • 13.07.24 18:20

    참괴님 덕분에 자세한 내용들을 많이 알게 되는 것 같습니다.
    팔리어를 직접 공부하면서 보면 더 자세하게 알 수 있을 듯합니다.
    그런데 영어 같은 것을 자막도 달아보고 번역도 몇 개 해보면서 생각하는 것이 있는데요.
    제가 오랫 동안 직업으로 하는 심리나 발달 분야이면 나름 이 분야의 전문가라서 제가 하는 것이 당연하겠죠.
    그런데 불교 쪽은 비전문가이니 어쩌면 전문가들에게 맞기는 것이 더 나을 것도 같구요.
    당분간은 여러 완제품을 가지고 읽고 검토하는 일이 더 효율적일 수도 있는 것 같아요.
    그래도 불교에 입문한다면 바로 전문가가 되는 출발이니 팔리어 배우는 것은 당연할 듯합니다.
    한 번 배워보도록 하겠습니다^^

  • 13.07.24 18:16

    네, 행복님 말씀이 맞습니다.
    저도 팔리어를 배울려고 책도 사고 카페도 찾아보곤 하는데
    페이지가 안넘어갑니다. ㅋㅋ 어학에는 좀 젬병이라

    그래도 조금씩 할려고 합니다. 전문가까지 안가더라도 어느 정도까지만 해도 좋습니다.
    예를 들어 공에 대한 번역에서 공을 팔리어로 찾아보고 또 연관해서 검색해보고 하면 여러가지 도움이 됩니다.

    참 그리고 봉선사산스크리트 편집실 (http://cafe.daum.net/sanskritsil) 여기 가시면 문법책도 공양받을 수 있고
    문법 설명 및 여러 자료를 무료로 받으실 수 있으니 참고하십시오.

  • 13.07.24 18:21

    불교쪽은 입문자 수준이겠지만요.
    저는 심리나 발달분야에서 오랫 동안 일하면서 십여년 전 선불교를 먼저 접하여 모든 선문답들을 모아보았지요.
    그러나 답이 없는 조잡합만 보았습니다.
    그 다음 주로 읽은 니까야는 5온부터 휘청거린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이해를 못하고 있는지 당황하여 아비담마 같은 것들을 보아도 별로 인상적인 것은 없었구요.
    다양한 심리학 책들 속에 있는 내용들 가운데 잘 찾아보면 매우 정교하고 자세하게 심리현상을 다룬 것들 많거든요.
    그러나 한글 아함경류의 경전들은 심리현상과 인생에 대한 정교한 설명이 자세했습니다.
    특히 인간의 삶 자체를 되돌아보며 검토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13.07.24 18:42

    아함경은 ebook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아주 자주 봅니다.
    물론 원불사 까페에서 인용하기에는 어렵지만요.
    여긴 워낙 니까야가 대세적인 분위기이다 보니...
    주로 아함경을 읽은 저로서는 이 경전에 만족해합니다.
    물론 아주 여러 번 읽다 보면 잡아함경과 중아함, 장아함이 다르다는 것도 알게 되구요.
    잡아함경 내에서도 서로 다른 관점들이 보입니다.
    가장 고민되는 점은 상반된 내용이 나오거나 순서가 달라질 때죠.
    이런 내용들 때문에 니까야와 비교해보려고 하고, 그러다보니 팔리어 어원들이나 설명하는 책을 찾게 됩니다.
    예전과 달리 상좌부 불교도 배울 점이 많아져 이곳의 글을 읽으면서 항상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 13.07.24 18:24

    심리학 전공이시네요. 그럼 위빠사나 수행과 사마타 수행을 직접 해보시면 많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제가 가진 책중에서 인지심리학 교수(?)이신 김정호 씨가 지은 마음챙김 명상멘토링이 있습니다.

    이분이 불자이신지는 잘 모르겠지만 불교 용어가 아니고 심리학 용어 측면에서 호흡법과 명상법을 쓰셨는데
    위빠사나 수행과 유사한 것이 많았습니다. 그 때 차안이나 여행다니면서 무료할 때 읽었던 책인데
    '이 분도 위빠사나와 사마타 수행을 접했으면 더 좋은 책을 쓰셨을 것이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계속 부딪쳐보시면 보일 것입니다.
    힘들면 스승을 찾으십시오. 일주일에 한번, 한달에 한번이라도 질문하고 의문을 풀 수 있는....

  • 13.07.24 18:32

    행복님 메일과 쪽지로 시간이 나지 않으면 참고하실 수 있게
    몇가지 정보를 보냈습니다. 꼭 읽어보시고 연락주시길 바랍니다.

    어떻게 보면 부처님께서 최고의 심리학자가 아니겠습니까?(결례의 표현이면 양해를...)
    모든 중생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다 아시는 그 분. 사람을 다루시는 데 최고이신 분.....

  • 13.07.24 19:51

    부처님은 가장 최고이십니다!
    잠깐 시간이 있어 이런저런 말을 하다보니 횡설수설하기만 한 것 같습니다.
    조금 극단적인 말이 있어도 그러려느니... 하고 이해해주시길 바랄께요.
    소개해주신 사이트 방문하여 보면 여러 가지로 많은 도움 얻을 수 있을 듯합니다.
    유익한 말씀 항상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 13.07.24 19:36

    아이고 행복님 그런 말씀마십시오.
    저도 횡설수설입니다. 아직...

    같이 공부해가면서 더 발전이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늘 행복하시고 건강하십시오.
    _()_ 나무 석가모니불

  • 13.07.27 00:13

    오늘에야 이 글을 제대로 읽습니다.
    무아의 정의와 해석에 대한 진지한 견해가 돋보입니다. 제게도 역시 보다 깊은 공부의 단초가 되겠네요,
    둑카님, 자주 오셔서 좋은 글 많이 주시기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평소 존경하는 두 분 법우님의 좋은 법담 글에도 감사합니다.

    사두, 사두.., 사두.._()_

  • 13.08.01 11:21

    대단하십니다,
    덕분에 더 공부가 되었습니다.
    더운 날
    건강하십시요.

    사두 사두 사~두 여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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