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보다 더 큰 스승은 없다
누가 ‘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스승은 무엇인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망설임 없이 ‘죽음’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죽음은 내가 삶을 투철하게 성찰하도록 했다.
나는 내 의지와 상관없이 너무도 이른 나이에 죽음과 맞닥뜨렸다. 내가 처음 마주친 죽음의 대상은 불행하게도 어머니였다.
내가 여섯 살 때 어머니는 세상을 버렸다.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불러 주고 항상 나를 가슴에 품어 주었던 어머니가 세상에서 사라진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서른도 채 안된 나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사업가였던 아버지의 외도로 인한 부부간의 불화와 우울증이 원인이었다고 했다.
이른 봄이었을 것이다. 삼베옷을 입고 대나무 지팡이를 짚은 채 화장터로 걸어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화장 시설이 요즘처럼 현대식으로 되어 있지 않을 때여서 화장장 인부들이 쇠꼬챙이로 시신을 뒤집이던 기억도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부산 당감동 화장터에서 어머니는 한 줌 재가 되어 나의 고향 당진에 묻혔다. 딸의 이름을 부르며 애처롭게 울부짖던 외할머니의 울음소리, 산소를 스쳐 지나가던 차가운 바람, 산소 주변에 벌겋게 드러나 있던 황토, 그 밖의 아무 것도 모르고 서 있던 두 살짜리 동생, 그리고 ‘이게 뭐지?’ 하는 물음으로 서 있던 나.
지금까지도 선명한 흑백사진처럼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내 유년의 풍경이다. 어머니의 죽음으로 인한 기억들은 오랫동안 가슴속에 각인되어 내 인생을 지배했다. 어머니를 잃은 깊은 상실감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죽는 건 뭘까? 사람은 왜 살까?’를 묻게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몇 달 뒤에 새어머니가 들어왔다. 스물세 살이던 새어머니는 황해도 해주의 큰과수원 집 딸로 중학교를 나온 인텔리 여성이었다. 새어머니는 우리 형제들에게 잘해 주어다. 그런데 나는 그걸 남들한테 잘 보이려는 행동으로 생각했다. 나는 새어머니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못했고 새어머니를 발로 차면서 집으로 가라고 소리쳤다.
두 살밖에 안 된 동생은 하루 종일 울었다. 밥 먹는 시간을 빼놓고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울었던 것 같다. 곱게 자라 처녀로 시집온 새어머니는 우리 두 형제를 감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동생은 충청도 당진에 있는 할머니 댁으로 보내졌다.
동생과 헤어지게 되자 나는 새어머니에게 더 심하게 반항했다. 새어머니를 한 번도 ‘엄마’라고 부르지 않았다. 얼마나 말을 안 들었던지 어느 날 아침 새어머니가 드디어 나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엄마라고 부르면 용서해 주겠다고 했으나 나는 저녁이 다 될 때까지 울면서 대들기만 했다. 끝내 항복하지 않는 내게 새어머니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엄마라고 부를래 안 부를래?”
고집 세고 못되게 굴었던 여섯 살의 내가 드디어 항복했다.
“알았어!”
새어머니는 그때 내가 항복하지 않았으면 집으로 돌아가려고 했었다고 한다.
출가해서 한참 세월이 흐른 뒤 새어머니와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어쩌면 너는 그렇게도 말을 안 들었는지 몰라.” 라고 해서 함께 웃은 적이 있다.
부산에서 태어나 토성동에 살았던 나는 토성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맞춤 약복을 입고 입학식에 갔으니까 집이 꽤 여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아버지의 운은 아마도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끝이 난 것 같다. 아버지의 사업이 걷잡을 수 없이 내리막길을 걸었다.
아버지는 무슨 일로 고향에 갔다가 다리가 부러지는 골절상을 입었는데 다친 장소가 공교롭게도 어머니이 묘 바로 앞이었다. 어머니의 한이 서린 곳에서 다쳐서 그랬는지 아버지의 골절상은 잘 낫지를 않았다. 비스듬하게 부러진 정강이뼈가 잘못 맞추어진 바람에 다시 맞추어 깁스를 했는데 오랫동안 낫지 않아 큰 고생을 하셨다. 그러던 차에 아버지의 사업은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아버지가 서른 둣 살 때였을 것이다.
그때부터 가족 모두의 고생이 시작되었다. 우리 가족은 토성동 적산가옥에서 살다가 대신동으로 이사했다. 그곳에서 대신 초등학교를 다니다 초량동으로 이사해 초량 초등학교를 다녔다. 내 방랑의 삶이 시작된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방학 때마다 외가댁에 가면 외할머니는 우리 형제를 앉혀 놓고 하염없이 우셨다.
“너희 에미는 너희 애비 때문에 죽었다. 크면 꼭 에미 원수를 갚아야 한다.”
외가댁은 충청도 당진에 있는 송악면 기지시라는 동네였다. 어머니는 외할아버지의 이름을 대면 동네 삶들이 다 알 정도로 부잣집의 귀한 외동딸이었다. 그런 외동딸이 시집가서 마음고생을 하다 자살했으니 외할머니의 상심은 다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당신이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이 아이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친할머니는 친할머니대로 우리를 두고 떠난 며느리를 원망했다. 엄마 없이 크는 손자들을 바라보는 심정이 참담했을 것이다. 조용한 성품의 할머니께서는 동생과 내가 놀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혀를 차곤 하셨다.
“쯔쯧, 독한 것, 저런 어린 것들을 놔두고 죽어?”
그런 소리를 듣고 자란 내 마음속엔 ‘어머니는 자식을 두고 죽은 독한 사람, 아버지는 커서 원수 갚아야 할 사람’이 되어 버렸다.
어머니를 잃고 동생과도 헤어져 살다 보니 나는 굉장히 불행한 사람이라는 피해의식이 늘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마음이 아주 격해지곤 했다. 감당하기 힘든 상황이 닥치면 ‘에이, 죽으면 그만이지 뭐’ 하는 생각을 했고, 누구하고 싸울라치면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탓에 아무도 나를 건드리지 못했다.
나는 온 동네 말썽꾸러기로 통했다. 동네에 무슨 사고가 났다 하면 범인은 바로 나였다. 종이에 고무줄을 뚤뚤 말아 애들 뒤통수를 쏘는 것은 기본이었다. 이런 내가 감당이 안 되었던지 아버지는 나마저 동생이 있는 할머니 댁으로 보냈다.
거기서 신평 초등학교를 다니다 그 옆에 있는 우강 초등학교로 옮겼다.
그리고 나중에 서울로 올라와 마포에 있는 용강 초등학교를 다녔다.
초등학교 육 년 동안 무려 여섯 번의 전학을 했다. 중학교도 숭문 중학교를 다니다가 시골로 내려가 송악 중학교를 나왔으니 아마 나만큼 학교를 많이 옮겨 다닌 사람도 드물 것이다.
그렇게 옮겨 다닌 학교 수 만큼이나 내 정서도 불안정했다.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누가 조금만 머라고 해도 대번에 끝장을 낼 듯 달려들었다. 전학을 다니다 보니 애들이 텃세를 부렸고 그럴 때마다 나는 학교에서 제일 센 애들에게 죽기 살기로 붙어 평정을 해 버렸다. 나는 가는 곳마다 독종으로 치부되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는 내가 훔치지 않은 돈을 훔쳐 간걸로 아신 아버지가 매질을 했다. 나는 너무 억울한 마음에 축대에 서 있는 아버지를 밀쳐 버리고 지금 마포대교 밑에 있는 한강 벼랑천으로 뛰어들었다.
모래를 싣고 지나가던 뱃사공이 아니었으면 내 인생은 열두 살로 끝났을 것이다. 그렇게 죽음이라는 의식은 항상 내 삶 가까이 있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새어머니는 그런 나를 데리고 교회로 다녔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새벽기도에 다녔고 고등학교 때는 신약성서를 읽어 보기도 했다.
나는 종종 목사님들에게 물었다.
“왜 세상은 공평하지 않습니까? 남들은 부모와 같이 행복하게 사는데 나는 왜 친척집으로 떠돌아다녀야 합니까? 어째서 누구는 행복하고 누구는 불행한 겁니까?”
목사님들은 이렇게 대답하곤 했다.
너를 큰 인물로 만들기 위해서 하나님이 시험에 들게 한 것이다. 그 시험을 넘어서 큰 인물이 되어야 한다.”
어린 나로서는 그 대답이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느 곳 하나 의지할 데 없어 가슴팍이 퍽퍽했던 어린 시절, 그 대답은 공허하기만 했다. 다른 사람은 다 행복해서 시험을 치르지 않아도 되는데 왜 나만 시험을 치러야 하는가.
나는 그런 시험을 치기 싫었다.
출처 ; 명진 스님 / 스님은 사춘기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