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수지가 바닥 났다는 마른 소식에도
미루나무는 길가에서 억센 삶을 살고 있었다.
이 나무의 원래 이름은 미국에서 건너왔다고 미류(美柳)나무 즉 포풀러 였다.
그러나 지금은 표준말로 미루나무가 토착화된 이름이다.
당신은 미루나무를 보고 눈물 흘린적이 있는지?
나중에 안 일이지만 미국 원주민들 사이에는
"미루나무여! 나를 위해 눈물 흘려다오--" 라는 노래가 있단다.
나름의 문화와 전통을 간직하고 사람답게 살아가려는 인디언들에게
서구 문명은 자인했던 시절의 정서가 깔린 글이다, 아니 노래였다.
나는 시골 읍내 중학교에 오가는 길에 신작로 자갈길 가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양가에 늘어선 가로수 미루나무를 아주 잘 기억한다.
그늘도 되고 길동무도 되었던 그 키다리나무.
식목일 때 마다 선생님은 엄지손가락 굴기에 1m가량의 미루나무 줄기
다섯개 이상을 집에서 준비해 오라고 강력한 숙제을 주셨다.
국민학생 우리는 그 미루나무 가로수길를 흙먼지 속으로
학교에서 약 2km떨어진 아랫마을이 있는 상류 낙동강변 마을 앞으로 갔다.
지금은 4대강 사업으로 성같은 뚝을 쌓아 올렸지만
그 때 그저 물가 모래바닥에 그 미루나무 막대기를 쑥쓱 내려꽂고
식목 행사 끝하고, 그 다음은 모래장난, 물장난, 씨름을 하고 하루 즐겁게 보낸 식목일이다.
집에 오면 아버지는 또 나를 데리고 작은 저수지가 있는 <늙은터>라는 곳으로 가셨다.
아버지의 지게 위에는 식목일 내가 강변에 심은 아니 곶은 막대기와 비슷한 크기의
미루나무 토막이 있었다. 나는 부지런히 개울가나 비탈진 밭뚝에 그 나무를 심었다.
그러고 몇 해를 읍내에서 자취생활하느라 그 그 개울가 그 밭을 자주는 못가고
겨우 여름방학 때만 소먹이로 그 옆을 지나가곤 했었다.
아시다싶이 그 미루나문는 잘도 자란다. 내가 고등학교 2학년 때쯤
아버지는 읍내 장날 오셔서 내가 학교을 파하기를 기다리시다가 나롸 만나
나를 쇠전걸 앞에 밥집으로 데리고 가셨지.
흰 무우 조각과 붉은 고추가루 둥둥 뜬 비게 뻑뻑히 든 그 국말이 밥을 한그릇 사주셨다.
그 때 그맛이란- 나는 지금도 돼지비게을 잘먹는다.
아버지가 장에 오신 일은, 전에 나랑 같이 심은 그 미루나무를
성냥공장 사람들에게 전부다 팔았단다.
당시는 성냥공장, 도시락 공장,. 잇쑤시게 ,젓가락 공장하는 사장님들이
커다란 트럭을 몰고 산촌까지와서 나무주인과 거레하고 데리고 온 인부들과
현장에서 베어 싣고 곧장 공장으로 가는 일이 많았다.
우리 아버지 그 몫돈 받은 것으로 송아지도 사시고 생활 용품도 사시고
물런 나에게 그 맛난 국밥도 사주시고--
그 송아지는 잘도 자라 새끼가 또 세끼을 낳아 내가 서울 웃학교 올 때
학자금이 된적이 있지, 고마운 미루나무여!
타향사리 반백년, 역사 공부한답시고 서울 서대문 소위 서대문 형무소를
답사할 때 저 뒷편 구석 붉은 벽돌로 둘려친 담장 안과 밖에
내 어린날 추억이 깃들어 있는 미루나무 두그루가 서 있었다.
듣기만 해도 선듯한 사형집행장 그곳 -형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이
마지막 하늘을 볼때 같이 처다봤다는 그 미루나무
그래서 담장 안쪽 나무는 비실비실 한듯 , 그 한을 받아 거의 같은 시기에 심어도 저리
자람이 넉넉지 못하고 찌들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는 인디언들이 불렀다는" 미루나무여!--읽을 때"
그리고 저 서대문 형무소의 미루나무를 봤을 때
눈물이 났었다.
지금은 미루나무 자체를 보기 힘들다.
내가 한창 띌때만해도 자동차 우마차길가 어디에소 볼수있엇던 가로수 나무였는데
한 때는 미국흰불나방이란 벌레 때문에 아침나절에 멀쩡한 미루나무 한그루가 저녁때가 되면
온통 흰 명주실 거미줄과 앙상한 가지로만 보이던 그나무
그래도 그나무 잎은 다음해 봄이면 연초록 잎을 피고,
여름에 길가는 사람에게 그늘과 쉼터 해가림과
가을이면 황금빛 단풍으로 우리을 기쁘게 해주던 그 나무 미루나무,
지난 봄에 내가 우연한 기회에 동유럽을 돌아볼 기회가 있어 유럽의 오랜 도시들을,
들판을 달리는 데. 글쌔 거기에 미루나무가 찻길 양가에서
내가 중학교 시절 미술 책 원근법 실례, 컬러사진." 미델하이니스의 가롯길" 똑 같은
내 떠나온 옛 고행길과 똑같은
전경을 볼수 있어서 너무나도 감동했던 적이 있었다.
"미루나무" 이름만으로라도 그리운 나무다. 그 나무 따라 오시는 아버지 우리 아버지.
오늘, 아버지 가신지 어언 20년이 지난는 데도. 아이마냥 아버지!당신이 그립다.
<미류나무> 시조 한 수로 그리움을 달래본다.
시조- 미류나무 - 고은
큰 발미에 입 다물고 하루 내내 견디었소
큰 비에 두 눈 감고 지긋이 견디었소
이윽고 비바람 자니 일만 잎새 일어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