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부산』 (2024년 5월호) / 연극_들여다보기〛
기성세대의 권력과 욕망에 대한 저항
극단 우릿의 <안차도 : 그 섬의 아이들>
김문홍_극작가, 연극평론가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대한 천착
극단 우릿의 상임 연출자이며 극작가인 강인정은 매번 공연될 때마다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천착한 작품을 쓰고 연출하고 있다. 그녀는 재미를 좇는 상업적 시류에 휘둘리지 않고, 사회나 체제 그리고 인간을 바라보는 현실 인식이 예리한 작품을 선호하고 있다. 연극은 재미를 추구하는 텔레비전의 드라마의 서사적 구조와는 다르다. 인간을 인간답게 하지 못하는 사회 체제나, 그 속의 인간에 대한 비판의식을 지니고 있는
공연예술이다. 공연이 끝나고 극장 밖을 나서는 관객들에게 늘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가 올바른 것인가, 우리는 지금 바른 삶을 살고 있는가에 대한 끝임없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재미있게 공연을 보기는 했지만, 삶에 대한 질문이나 여운이 없는 작품은 그저 쾌락적 기능에 충실한 ‘킬링타임’ 용에 불과하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제42회 부산연극제 개막작으로 선정된 극단 우릿의 <안차도: 그 섬의 아이들>(강인정 작, 연출, 100분, 2024.4.13〜14, 영화의 전당 하늘연극장)은 연극의 사회적 기능에 충실한 주제의 작품으로, 기성세대의 권력과 욕망에 대한 도전과 저항을 다루고 있다. 이 작품의 배경적 공간이 되는 ‘안차도’라는 섬은, 지금 이곳의 우리 사회에 대한 상징적 공간으로서의 축소판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는 어떤가. 기성세대와 신세대 사이에는 친밀감과 소통이 결여되어 있다. 나 아니면 모두 적이고 경쟁자이다. 대가족 사회에서의 유교적 예의와 소통은 무너져 버린지 이미 오래다. 핵가족 속의 개인은 파편화되어 극단적인 이기적 개인주의로 치닫고 있다. 같은 혈연이라도 자기만의 공간에 갇혀 버리면 대화와 소통은 단절되어 버린다. 혈연으로 이루어진 가족사회가 이럴진대 피를 나누지 않는 타인들 간에는, 오직 적이고 경쟁자만이 존재할 뿐인 각자도생의 사회이다.
기성세대는 유교적 규율과 예의로 무장되어 신세대를 가르치고 이끌려고 한다. 신세대는 기성세대의 그러한 구태의연한 자장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견고한 이념과 사고에 갇혀 오불관언이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자신들만의 권력과 욕망으로 신세대의 파편적 이념과 사고를 길들이려고 한다. 이 작품 속 안차도 섬의 이장인 두기와 그의 수하인 기준 부부의 형태와 행동 양식이 바로 지금 이곳의 기성세대를 상징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은 섬 바깥에 있는 육지는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라고 단정한 채, 오직 섬의 규율과 행동 양식만을 따르라고 강요하는 것이다. 그런데 신세대의 은유적 상징인 섬의 아이들은 어떤가. 기성세대의 주장과 권력에 회의를 품은 채 바깥 세계인 육지를 꿈꾸고 동경하면서, 두 세력 사이에 갈등과 균열이 일어나기 시작한다. 기성세대는 신세대의 그런 불온한 태도를 해체하기 위해 강압적인 규율과 규칙을 만들어 군대와 같은 조직사회의 틀을 견고하게 유지하려고 한다.
기성세대의 권력과 욕망 실현에 대한 의구심
기성세대로 대표되는 섬의 이장인 두기, 그리고 그의 수하인 기준 부부는 원시 공동체에 가까운 조직을 운영하며, 아이들 사이에 바깥 세계에 대한 동경의 꿈을 없애기 위해 경쟁이라는 규율로 섬의 아이들을 통치한다. 그런데 이들 사이에 균열이 일기 시작한다. 갈등과 균열을 일으키게 하는 주체적 인물은 현재 이장의 딸로 섬에 은거하고 있는 미친 년인 진실이다. 작품의 후반부에 나타나는 진실의 폭로에서, 우리는 작품의 서사구조로서의 전사(前史)를 유추할 수 있다. 진실은 이장이며 아버지인 두기의 감언이설에 속아 이 섬에 오게 되었지만, 진실은 어느 순간 이곳 안차도 섬의 분위기는 기성세대의 욕망과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속임수였음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진실의 회의에 이장인 두기는 그녀를 미친 년으로 낙인 찍어 이곳 조직사회에서 퇴출시켰을 것이라는 전사의 윤곽을 유추해낼 수 있다.
섬의 아이들 중 이진비와 원태는 주동적 인물로 회의에 쌓이게 된다. 비행기를 ‘큰새’로 교육받은 아이들은 비행기 굉음이 울리면 모두 숨는다. 그런데 그들 중 이진비는 숨지 않은 채 비행기를 그대로 바라본다. 이들 중 원태는 바깥은 죽음의 무법지대로 사람이 살 수 없는 공간으로 생각해 두려워하지만, 우연히 그들과 맞닥뜨린 진실은 “나가야 한다. 다 같이 나가. 이곳의 제단은 곧 배야. 어른이랑 같다. 어른이랑 같으면 안 돼. 아이들이 다 같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진실을 밝히며 아이들의 마음에 균열을 일으키기에 이른다.
진실은 연신 아이들의 행동을 촉구한다. 이곳 안차도는 눈이 가리어진 곳이며 죽음의 섬이다, 이곳을 나가려는 생각은 아이들의 의지여야 한다고 충동질한다. 이장의 방에 숨겨진 열쇠를 찾는 과정에서, 이장은 몇몇 아이들이 미친년으로부터 불길함에 감염되어 버렸다며 섬의 아이들을 다그친다. 결국 원태의 아버지인 기준에 의해 이장 두기가 살해되고, 미친년은 “결국에 다 당신을 위한 거였잖아. 당신만의 이 세상을 누리고 싶었던 거면서 날 위한 척 위선 떨지 말아요.”라고 항의하자, 아직 숨이 끊어지지 않았던 두기가 미친년을 칼로 찌른다. 기준과 달래 부부는 아이들을 배에 태워 섬 바깥 세계로 떠나게 한다.
아이들이 다 떠나고 나자 기준이 섬 바깥의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어 이번에는 말 잘 듣는 유순한 아이들을 여러 명 보내 달라는 주문을 한다. 기준과 달래 부부가 이 섬에 다시 자기들만의 세상을 만들 꿈에 부풀어 있는 가운데 극은 끝나게 된다. 이러한 에필로그의 반전은 상징적 은유를 지닌다. 어른들인 기성세대의 권력과 욕망이 이 섬에 끊임없이 존재할 것이고, 다시 기성세대와 아이들의 갈등과 균열은 계속될 것이라는 욕망과 권력의 섬찟한 무한 반복을 관객의 뇌리에 심어 준다.
인물의 행동에 대한 동기 결여와 무대 구조
기성세대의 권력과 욕망을 통해 지금 이곳의 인간 관계의 파탄과 소통 부재라는 첨예한 주제의식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그러한 주제를 심화시키기 위한 인물의 행동에 대한 동기 부여가 결여된 아쉬움을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에서 섬의 이장과 그의 수하인 기준 부부는 기성세대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들은 아이들에게 바깥 세계는 무법지대이고 사람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고 말하지만, 바깥 세계가 왜 그렇게 되었느냐는 해명이 부족하다. 그리고 그들이 이 섬에 들어와 자기들만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또 다른 권력 구조를 만든 행동에 대한 명확한 내적 동기가 결여되어 있다.
희곡에서의 갈등은 인물의 행동을 통해서 나타난다. 갈등은 행위를 만들어 내고, 그러한 유사한 행위를 통해 장면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그러한 유사한 장면들끼리 집합을 이루어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사건들이 체계적인 논리와 질서에 의해 하나의 구조체를 이룬 것이 희곡의 서사 구조이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결국의 희곡의 서사 구조를 만드는 것은 인물의 갈등과 행위를 통한 사건이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기성세대를 대표하는 이장과 그의 수하인 기준 부부가 왜 자신들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이 섬에 들어오는 행동을 했으며, 또한 그들의 욕망에 대한 심층을 탐구하는 것이 곧 주제의 구현이다. 그들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한 욕망 실현이라는 행동에 대한 명확한 동기 부여가 부족해 그들의 행동에 대한 설득력이 약한 것이 이 작품의 아쉬운 점이다. 거기다 바깥 세계의 정체는 무엇인가에 대한 구체적인 장면과 사건이 약한 것도 하나의 흠이라고 볼 수 있겠다. 그것들이 살아야 기성 세대의 욕망 실현을 위한 권력의 행사에 의한 세대 간의 갈등과 대립이라는 주제가 선명해지는 것이고, 그래야만 관객의 의식이 변화하고 나아가서는 행동까지 변하게 될 것인데, 그것이 약화되어 설득력을 잃어버린 셈이 되었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이 작품은 적절한 공연장의 무대와 결합되어야 하는데, 하늘연극장의 무대는 너무 깊고 폭이 커 인물과 장면의 초점 심도가 약하다. 거기다 무대에서의 인물의 이동에 따라 마이크를 통한 대사의 선명도가 고르지 못하다는 점이다. 어느 부분에서는 대사가 잘 들리는데 어느 부분에서는 잘 안 들려, 희곡의 내용과 서사구조를 잘 모르는 관객들로서는 서사를 따라잡기가 어려워진 것이다.
그렇지만 신생 극단의 젊은 연극이들이 의기투합하여 이렇게 사회성 짙은 작품을 만들어 냈다는 것은 하나의 의미 있는 사건임이 분명하다. 관객 동원을 위해 상업적 재미를 좇는 작품보다는 작품을 통해 연극의 사회적 기능을 구현한 점은, 작품의 몇몇 아쉬운 점을 차치하고라도 가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희곡의 아쉬운 점을 다시 수정 보완하고 적절한 무대를 선택해 재공연을 한다면, 부산연극의 지평을 확대하고도 남을 작품으로 기록될 개연성이 크다.
극단 우릿을 비롯한 부산의 몇몇 신생 극단의 젊은 연극인들이 재미만을 좇는 상업적 시류를 좇지 않고, 젊은 연극인답게 전복적인 주제와 파격적인 무대 미학으로 일관한다면 부산연극의 미래는 밝고 창창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번 공연을 통해 희곡과 연출을 통해 연극의 사회적 기능 실현에 앞장서고 있는 강인정이라는 젊은 연극인을 발견했다는 점은 하나의 큰 수확이 아닐 수 없다. 극작과 연출을 병행하는 연극인들은 한 작품의 공연에서, 공연이 끝나면 연극이 사라지고 희곡만 오롯이 남고, 그때 그 희곡은 문학성으로 평가받는다는 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예술부산』, 2024년 5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