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8:11~15 / 씨 뿌리는 비유의 뜻
(눅 8: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을 당할 때 배반하는 자요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예수님께서 씨 뿌리는 비유를 통해서 제자들과 다른 사람들을 구별하십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하나님 나라의 비밀을 풀어서 가르쳐 줄 수가 있지만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9~10).
예수님의 그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출애굽기를 참조할 필요가 있습니다;
* 출애굽기에서는 여호와의 예언의 말씀을 듣고서 그것이 성취가 되는 줄 믿고서 그 뜻대로 잘 따르고 있는 백성과 그러지 아니하는 완악한 백성으로 나누어지고 있습니다. 따르는 사람은 영적인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 신앙을 지니고 있는 이스라엘 자손입니다. 따르지 않는 사람은 이방신과 우상 문화를 지니고 있는 바로와 그의 백성들입니다.
* 모세는 완악한 바로에 대하여 특이한 표현을 이중적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출8:15) “그러나 바로가 숨을 쉴 수 있게 됨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것과 같더라”,
(출9:12) “그러나 여호와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의 말을 듣지 아니하였으니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심과 같더라”
* 결과는 바로가 그 마음이 완악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따르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원인에 대한 진단이 다릅니다.
(출8:15) 바로가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완강하게 하여 하나님 말씀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출9:12) 하나님께서 바로를 완악한 자로 만드셨기 때문에 거부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 이에 따라 바로는 스스로 자신의 마음을 옥토로 만들 수가 없습니다. 그 이유는 창조주께서 완악한 마음으로 만들어 놓은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무엇보다도 여호와 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좋은 옥토로 변화시키시는 역사를 하셔야만 합니다.
그를 위하여 속죄의 제사를 먼저 드려야 합니다. 그다음에는 바로와 같은 자들이 그리스도의 희생과 헌신을 믿고서 대속의 은혜를 받아들여서 좋은 마음 밭으로 예수님의 성도로 살아가야만 합니다. 그 일을 보혜사 성령님을 보내어 도와주십니다.
그것이 믿음 생활을 올바르게 하게 되는 비결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되어 있으면 하나님의 말씀을 보고 들어도 그 뜻을 깨닫지 못하고 그것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마저 가질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마음이 그 옛날 바로의 마음과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두 가지 사실을 알 수가 있게 됩니다;
(눅 8:11) 이 비유는 이러하니라 씨는 하나님의 말씀이요
(눅 8:12) 길가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니 이에 마귀가 가서 그들이 믿어 구원을 얻지 못하게 하려고 말씀을 그 마음에서 빼앗는 것이요
복음의 씨앗이 길가에 뿌려졌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짓밟고 하늘에서 새가 날아와서 먹어버리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눅8:5).
그 말씀의 뜻을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더 쉽게 설명을 해주십니다;
복음 사역의 현장에서 예수님 일행의 천국 말씀의 선포에 대하여 방해하고 그 치유의 사역마저 율법의 위반이라고 여러 가지 명분으로 비난하고 있는 자들이 유대교 지도자들입니다. 그들이 왜 그와 같은 일을 벌이고 있는 것일까요?
겉으로 보면,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익을 최대한 보호하고 있는 그들의 유대 교리가 예수님 일행에 의하여 훼손되고 있는 것을 방어하고자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눅 8:13) 바위 위에 있다는 것은 말씀을 들을 때에 기쁨으로 받으나 뿌리가 없어 잠깐 믿다가 시련 당할 때 배반하는 자요
말씀의 의미를 깊이 생각하지 아니하는 신앙의 행태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천국 복음의 말씀에 깊이 뿌리를 박고서 그 자양분을 빨아올리는 신앙생활을 하게 되면 시련이 오더라도 말라 죽지를 않습니다.
(엡3:17-19)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너희가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그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눅 8:14) 가시떨기에 떨어졌다는 것은 말씀을 들은 자이나 지내는 중 이생의 염려와 재물과 향락에 기운이 막혀 온전히 결실하지 못하는 자요
가시떨기는 현세주의와 우상 문화 그리고 향락 생활과 황금만능 사상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소원 성취를 하겠다고 날뛰게 되면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 귀에 들어오지를 않습니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자신을 높이 세우고자 하는 그 마음속에 이웃사랑의 정신이 깃들 리가 없습니다. 그와 같은 가시떨기를 모두 제거하지 않으면 복음의 씨앗이 발아하지 못하여 자라날 수가 없게 되고 맙니다.
(눅 8:15) 좋은 땅에 있다는 것은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말씀을 듣고 지키어 인내로 결실하는 자니라
그리스도의 성도 되자면 무엇보다도 그 마음 밭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개간해야만 합니다. 여기서 착하고 좋다고 하는 것은, 선하다고 하는 뜻입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는 피조물을 돌보시고 그 생명을 모두 살리고자 하시는 선한 의지를 지니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마음을 닮아서 착하고 좋은 청지기가 되어야만 합니다. 그러한 착하고 좋은 마음을 지니고 있을 때 만민 구원과 영생 구원을 말씀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천국 복음이 믿는 자들에게 발아(싹이 트는 것)가 되고 자라나며 실천이 되는 것입니다(눅8:15a).
그렇게 마음 밭이 옥토가 되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명을 맡겨 주십니다(마 28:18)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마 28:19)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침례를 베풀고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성령님께서는 내주 역사하시면서 예수님의 제자, 성도의 삶을 돌보십니다.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고 하더라도 말씀과 기도로 그것을 이기고 나아갈 수 있도록 역사해 주십니다. 그리하여 성도들은 믿음 생활에서 승리를 얻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참으로 좋으신 부모님과 같습니다.
피조물인 사람들의 잘못과 허물에 대하여 그 일차적인 책임을 먼저 지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출애굽 당시에도 바로의 마음을 여호와께서 완악하게 하셨다고 창조주의 책임을 말씀하십니다.
사실은 피조물인 바로가 교만하여 여호와의 말씀을 완강하게 듣지 아니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나님께서 귀책 사유를 자신에게 돌리심으로 말미암아 훗날 그리스도를 보내어 대속의 제사를 드리고 회개하는 자들에게 그리스도의 제자로 그리고 여호와의 종으로서 청지기의 직분을 감당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길로 인도하십니다.
그와 같은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를 생각하면서 현세주의와 이기주의를 벗어나서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변화를 받아 그리스도의 성도로 살아가게 되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