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보(李賢輔, 1467 ~ 1555) 생애 1467년(세조 13) ~ 1555년(명종 10) 분야 문신, 문학 작가 조선 중기의 문신 · 시조 작가. 호는 농암(聾巖) · 설빈옹(雪靈翁). 1498년(연산군 4) 식년 문과에 급제, 76세 때 병을 핑계로 벼슬을 그만둘 때까지 내외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조선 전기 자연을 노래한 대표적인 문인으로,“농암집”외에 고려 가요 ‘어부가’를 장가 9수, 단가 5수로 고쳐 지은 것과 ‘효빈가’ · ‘농암가’ 등의 시조 작품 8수가 전한다 농암(聾巖)이현보(李賢輔)의 “어부단가(漁父短歌)”는 본래 10장으로 된 연시조였다.
이 작품은 이현보의 손녀사위였던 황준량(黃俊良 1517~1563)이 “어부장가”와 함께 구해다 준 것으로, 현재는 이현보에 의해 다섯 수로 정리되어 전하고 있다. 이 노래의 정리 작업에는 인근에 사는 이황도 깊이 관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황과 이현보가 “어부단가”와 “어부장가”를 수정, 정리하는 과정에서 서로의 의견을 주고받은 내용의 간찰을 통해, 현재 전하는 “어부단가” 5수 가운데 1수의 작품이 이현보에 의해 새롭게 창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전체 노랫말은 원래의 것 그대로이거나 약간의 부분적 수정을 거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현재의 “어부단가” 5수는 새로이 창작한 제3수를 포함하여 전체적으로 예전의 어부노래를 거의 그대로 계승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작품 해석(解釋)
이듕에 시름 업스니 漁父의 生涯이로다. 一葉片舟를 萬頃波애 띄워 두고 人世를 다 니젯거니 날 가 주를 알랴.
이중에(이 세상에) 근심걱정(시름) 없는 사람은 어부의 생애로구나. 일엽편주(나무 잎사귀 만한 작은 배)를 만경창파에 띄워두고 인간세상을 다 잊었거니 세월 가는 줄을 알 것인가.
“이 듕에”는 ‘漁父의 生涯’를 근거로 ‘어부로서 살아가는 중에’라고 풀이된다. 이 삶의 단편적인 모습이
“一葉片舟를 萬頃波애 워 두고”로 제시되어 있다. “시름 업스니”는 ‘어부의 생애’를 평가하는 단서이며, 이로써 ‘어부의 생애는 시름이 없다’라고 규정할 수 있다. 이것은 ‘시름이 없음’이 어부의 삶에서 비중이 아주 큼을 뜻한다. 이 작품의 요지를 추리면 ‘시름이 없으나 날 가는 줄을 알랴’가 되는데, 이것은 이 작품에서 ‘시름이 없음’의 비중과 ‘어부의 생애’의 가치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그가 35세 때 예문관 검열이 되어 기록에 소루함이 없도록 임금 앞에 좀 더 가까이 갈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계청을 하여 연산군의 심기를 건드린 일이다. 갑자사화가 일어난 38세에는 이 사화와 관련된 치죄 논의에 참여하기도 하였으며, 사간원 정언으로 승진되었다. 그러나 세자(世子)가 독서에 마음을 쓰지 않는 것을 논계(論啓)했다가 다시 연산군의 노여움을 사고 말았다. 결국 의금부(義禁府)의 추국(推鞫)을 당한 뒤 안동부(安東府)의 안기역(安奇驛)에 정역(定役)되기에 이르렀다. 그의 행장에 의하면 이현보는 연산조에 사관(史官) 재직 시 조정이 혼탁하고 정사가 혼란한데도 직필(直筆)을 서슴지 않아 사람들이 위태롭게 여겼다고 한다. 중종반정으로 방면되었지만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은 이후 그의 정치 행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두 차례의 사화가 진행되는 동안 그 자신이 겪은 시련뿐만 아니라, 스승 홍귀달의 사사(賜死), 혁신적인 사림세력들의 무참한 죽음과 정치적 좌절을 지켜 본 그로서는 중앙 관료세계에 대해 상당한 혐오를 느낀 듯하다. 절실한 필설(筆舌)로 사관(史官)과 간관(諫官)의 직책을 수행하려 하였으나 부도덕한 왕권과 사화로 인하여 경색된 정국에서 오히려 커다란 좌절을 맛보아야 했던 것이다. 반정 이후 비공신계 훈구 주도의 보수주의 정국에서도 강경한 언론을 펼치기도 했지만, 그는 곧 외직(外職)을 자청하고 귀거래(歸去來)의 뜻을 품게 된다. 이후 그의 환력(宦歷)을 살펴보면 42세에 영천군수에 제수된 이래, 가끔 중앙관직에 오르기도 했지만 대부분 수령이나 관찰사 등을 오랜 기간 역임했던 것으로 나타난다. 그 중앙관직이나마 권력구조의 핵심부와는 거리가 있는 한직들이었다. 자의든 타의든 간에 이러한 정치적 입지는 16세기 전반의 변혁적인 역사 무대에서, 또한 이후 사림파의 계보적 관심사에서 멀어지는, 역기능을 초래한 것으로 판단된다. 중앙정치 권력의 부조리에 대한 도전적 열정이 사라진 이후 이현보의 관직생활은 비교적 평탄하였으며 시선을 돌려 향촌사회 개혁운동에 관심을 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