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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一麥.)
하나님을 잘못 믿었다. 저자 / 이찬수 목사 구약성경 열왕기하 5장에 등장하는 나아만은 오늘날 시리아에 해당하는 시리아의 군대 장관이었다. 요즘으로 치면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고위직의 사람이었다. 성경은 그가 큰 용사였고, 담대한 사람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나아만 장군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그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었다. 위로는 왕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고, 아래로는 모든 백성에게 존경과 신뢰를 받았다. 남부러울 것 없는 성공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남모르는 심각한 고민이 하나 있었다. ➤열왕기하 5장1절 공동번역은 이 부분을 이렇게 기록한다. “시리아 왕의 군사령관으로 나아만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왕이 매우 아끼는 큰 인물이었다. 야훼께서 나아만을 들어 쓰시어 시리아에 승리를 안겨주셨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나병환자였다.” 이처럼 나아만 장군은 모든 것을 다 갖춘 소위 '성공한 사람'이었지만, 그를 묘사하는 문장 끝에 붙은 접속사 '그러나'로 이어지는 짧은 마지막 한 문장이, 그의 성공적인 삶을 다 망가뜨렸다. 나는 이 장면을 이렇게 상상해보았다. 나아만 장군이 멋진 갑옷을 입고 아름다운 투구를 쓰고 행차하면, 모든 사람이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그들은 모두 나아만 장군의 인생을 찬탄하며, 그 앞에 머리를 조아리고 있다. 그런 아름다운 모습이 연출되는 바깥 상황과 달리, 갑옷으로 싸여 있는 나아만 장군의 몸은 나병으로 썩어가고 있었기에, 나아만 장군은 마음껏 웃지도 못하고 있다. 안과 밖의 사정이 전혀 다른 이중적인 모습이다. 나는 나아만 장군의 이중적인 모습이야말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들의 모습이라고 생각한다. 오늘날 우리는 행복한 가정의 가장으로, 아내와 엄마로, 번듯한 직장인으로, 저마다 그럴듯한 모습으로 이 땅을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 내면 깊은 곳에는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고민과 고뇌가 있지 않은가? 요즘 빈번하게 들려오는 소식이 연예인이나 정재계 유명 인사들의 자살 소식이다. 그들은 누가 봐도 화려한 삶을 살아가던 성공자들이었다. 그런 그들이 그토록 화려한 인생을 접어두고 왜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했는지 그 이유는 알지 못한다.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이 있다. 그들의 겉모습이 아무리 화려했을지라도 그 화려함 이면에는, 나아만 장군같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깊은 고뇌와 아픔이 있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또 하나 확실한 것이 있다. 지금 이 땅을 살아가는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경중(經重:중심을 이룸)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누구나 비슷한 상황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교적 중산층과 부유층이 모여 산다고 하는 강남에서 10년 동안 사역했다. 겉으로 보기에는 부러운 인생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좋은 학벌, 좋은 직장, 아름다운 아내, 멋진 남편, 속 안 썩이는 착한 자녀들까지, 모든 것을 다 갖추고 사는 모습을 보면 그들은 선택 받은 사람들 같아 보였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껍데기에 불과했다.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한 마음과 깊은 고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러면서 또 하나 발견한 것은, 이 땅을 사는 모든 인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나아만 장군이 가지고 있었던 '그러나'의 불행한 꼬리표를 하나씩은 다 달고 산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에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갖추고 부러울 것 없이 사는 사람도 이 범주에서 예외는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우리 인생을 망쳐놓은 '그러나'의 꼬리표를 평생 달고 살아야 하는가? 성경은 그 이유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이다. ➤이사야 57장21절 “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사악한 자에게는 평강이 없다, 하시느니라.” 아무리 화려한 껍데기로 둘러싸여 산다 할지라도, 아무리 그럴듯한 갑옷과 투구로 온몸을 휘감고 산다 할지라도, 그 내면에 흐르는 영적 나병환자로서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우리는 결단코 이 땅에서 본질적인 행복을 누릴 수 없다. 이것이 성경이 진단하는 인간관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우리 인생에 찾아오는 고통에 부정적인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 고통을 허용하실 때는 이유가 있다. 마치 나아만 장군에게 내면 깊은 고민과 살이 썩어가는 아픔이 있었기에, 그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 이스라엘 땅으로 갈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에게 내면 깊은 곳의 고민과 살이 썩어가는 아픔이 없었다면, 스스로 이스라엘 땅으로 갔을 리 만무하다. 이처럼 때로는 고통이 우리에게 축복이 될 수 있다. 물론 모든 사람의 모든 고통이 다 축복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고통이 복이 되려면, 그래서 진정한 삶의 행복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나아만 장군의 경우에 빗대어 몇 가지로 살펴보자. 첫째, 변화의 계기를 기대하라. 우리 삶에 저주처럼 따라다니는 '그러나'의 꼬리표가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꼬리표로 바뀌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에게 변화에 대한 기대감이 있어야 한다. 나병으로 남모를 고민에 빠져 있던 나아만 장군에게, 어느 날 갑자기 그 인생의 터닝 포인트가 이루어지는 계기가 마련된다. 예전에 이스라엘과의 전쟁 중에 포로로 잡혀온 나이 어린 여자아이가 나아만의 집에 하녀로 있었는데, 그 아이가 주인의 병을 안타까워하며 이런 말을 했다. "사마리아에 제가 믿는 하나님을 섬기는 선지자가 있는데, 우리 주인님이 그 선지자를 만나시기만 해도 좋겠습니다. 그 분이라면 나병을 쉽게 고쳐줄 수 있을 텐데요." 거두절미하고 결과를 미리 말하면, 그 보잘것없어 보이는 여종의 권면이 나아만 장군의 치명적인 문제였던, 육신의 질병을 고침 받는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지금도 변화의 계기를 마련해주시기 바라고 계신다. 어쩌면 바로 지금 이 순간이, 우리 인생의 터닝포인트가 일어나는 놀라운 변화의 출발점이 될지 모른다. 그 변화를 기대하라. 기대하는 마음에 하나님이 은혜를 부어주신다. 알프레드 노벨은 1867년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하여 인류를 깜짝 놀라게 했다. 그 덕에 노벨은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게 되었다. 누가 봐도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던 노벨이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그 신문에 충격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죽음의 상인 알프레드 노벨 드디어 사망하다." 멀쩡히 살아서 신문을 보고 있는데, 느닷없이 자기가 죽었다는 기사를 보게 된 것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봤더니 자기 형인 루드비 노벨이 죽었는데, 그를 알프레드 노벨로 오인한 기사였다. 그러나 노벨은 기사가 잘못 나갔다는 사실보다, 자신을 가리켜 '죽음의 상인'이라고 지칭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 다이너마이트가 여러 가지 용도로 유용하게 쓰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그것이 전쟁의 살상무기로 수많은 인명을 죽이는 데 사용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 기사에 충격을 받은 노벨은 그날 이후 자기 삶을 깊이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고 한다. 그 시간을 통해 노벨은 지금까지 자신이 많은 것을 이루었지만, 삶의 의미와 방향에 있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부와 명예를 바라보는 태도가 달라졌다. 결국 그는 자신의 엄청난 재산으로, 인류를 위해 기여한 사람들에게 주는 상을 제정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상이 바로 노벨상이다. 노벨이 신문 오보를 통해, 자신의 삶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로운 삶을 출발했던 것처럼, 나아만 장군이, 보잘것없는 한 여종의 권면으로, 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던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 베푸시는 하나님의 터닝 포인트의 계기를 붙잡기를 간절히 소망하라.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깊이 개입하시며 삶의 터닝 포인트를 제공하실 수 있다. 그것을 기대하라! 우리 삶은 달라질 수 있다. 둘째, 고정관념을 내려놓으라. 변화를 위해서는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내려놓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나아만 장군은 변화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고 자신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스라엘로 떠났다. 그러나 이스라엘에 있던 하나님의 선지자 엘리사는, 나아만 장군의 기대와 전혀 다른 대접을 하며 전혀 상식에 맞지 않는 요구를 했다. ➤열왕기하 5장10절 “엘리사가 사자를 그에게 보내어 이르되, 가서 요르단 속에서 일곱 번 씻으라. 그리하면 네 살이 다시 나와 네가 정결하게 되리라, 하니라.” 엘리사의 이 같은 처사에 나아만 장군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열왕기하 5장11절 “그러나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보라, 나는 그가 분명히 내게로 나아와 서서 {창조주} 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부위를 손으로 쳐서 나병 환자를 회복시킬 줄로 생각하였도다.” 나아만 장군은 화가 났다. 강대국의 국방장관에 해당하는 자신을, 직접 나와서 접대해도 시원치 않은데, 감히 사람을 시켜서, 강물에 일곱 번 몸을 씻으라는 황당한 요구만 하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시리아에는 물이 없어서 여기까지 왔나 싶은 것이, 생각할수록 화가 나는 처사였다. 그런데 나아만 장군의 분노가 표현된 열왕기하 5장11절 말씀을 읽다가, 내 눈에 큰 글자처럼 부각되어 보이는 한마디가 있었다. ➤“그러나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보라, 나는 그가 분명히 내게로 나아와 서서 {창조주} 자기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그 부위를 손으로 쳐서 나병 환자를 회복시킬 줄로 생각하였도다.” 나아만 장군이 화가 난 이유가 무엇인가? 상대방이 자기 생각과 다른 처신을 했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그것이 '내게로 나아와 서서'이라는 단어에 담겨 있다. 그 나아만 장군의 생각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 당연히 자기의 배경과 위치를 바탕으로 한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지금 나아만은 자기 경험 세계를 바탕으로 한 기대와 무언가 맞지 않는 일이 벌어졌기 때문에 화가 난 것이다. 교회에 처음 나온 사람들은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는다. 일단 하나님 앞에 나오는 것 자체도 어려운 일이지만, 교회에 어렵게 발을 들여놓았다 해도 마음을 여는 것이 여간 힘든 일이 아니다. 왜 그렇게 어려운가? '내 생각에는'으로 표현되는 내 경험 세계에 입각한 자신의 생각과 맞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보고 싶은데 쉽지가 않다. 그러기엔 나의 경험 세계, 인식 세계로 형성된 '내 생각'이 너무 강하다. 그런데 하나님도 이상하시다. 나아만이 쉽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처치를 해주었으면 좋을 텐데, 왜 굳이 강물에 몸을 일곱 번 씻으라는 이해하기가 힘든 요구만 하셨을까? 나아만의 기대처럼 환부를 만져주시거나 표적을 보여주시거나 했으면 일이 얼마나 쉬웠겠는가? 나는 그 이유가, 하나님이 아니면 안 되는 방식으로 치유를 허락하고자 하셨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고정관념을 내려놓고, 하나님만 행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방법으로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기를 바라셨던 것이다. 약을 처방해주는 것은 인간도 할 수 있다. 그러나 평범한 강물에, 몸을 일골 번 씻어 낫게 되는 일은, 오직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기적이다. 그 기적을 통해 '내 생각에는'으로 가득한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에는'으로 대치되기를 바라신 것이다. 사실 '내 생각'이라는 것이 얼마나 강한가? 세 아이를 키우는 아버지로서 우리 아이들을 보면, 어릴수록 자기 생각이 강한 것 같다. 지금도 그렇지만 아이가 더 어릴 때는 얼마나 고집이 세고 자기주장이 강했는지 모른다. 막내가 예닐곱 살 무렵, 아이가 앉아서 뭔가 꼼지락거리고 있는 것을 보다가, 내가 조금만 도와주면 쉽게 해결될 것 같아서 도와준다고 하면 절대로 못 건들게 했다. 자기가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기 생각에 이렇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그 아이의 생각이 어디서부터 시작되었는가? 이제 고작 세상에서 산 지 6년밖에 안 된 아이가 그 6년의 경험으로 형성된 자기 생각으로, 50년 가까운 세월을 산 아버지의 생각을 무시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말은 들을 생각조차 안 한다. 나는 이런 모습이 꼭 우리의 모습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성경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이사야 55장 8-9절 “8.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니하니라. {창조주}가 말하노라. 9.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한계가 분명한 인간 세계에 갇혀 사는 우리가, 알량한 경험과 지식으로 우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생각을 거부하는 모순이 바로 우리에게 있지 않은가? 우리가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때, 그때 창조주 하나님의 크신 능력이 내 인생에 개입되기 시작한다. 언젠가 새벽에 차를 몰고 가는데 라디오에서 전설적인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무하마드 알리는 1960년, 18살의 어린 나이에 미국 국가대표로, 로마 올림픽에 출전해 꿈에 바라던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냉전체제였던 당시 구소련 기자들은, 흑인 선수인 알리에게, 미국 사회에 만연한 인종차별에 대한 민감한 질문들을 던져 그를 곤혹스럽게 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 기자들의 집요한 질문들을 잘 피해갈 뿐 아니라,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 "미국을 가장 위대하게 만드는 것이 내 목표다. 그래서 나는 러시아와 폴란드 선수를 이겼고, 미국을 위해 금메달을 따냈다." 알리는 자기가 딴 금메달을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며, 이제 자신이 인종차별로 인해 천대받던 시절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은 알리의 착각이었다. 고국에 돌아온 알리는 여전한 인종차별에 시달려야 했다. 한번은 햄버거를 사 먹기 위해 식당으로 들어가는 알리를 향해 식당 주인이, "당신은 흑인인데 왜 백인 식당에 들어왔소?"라고 말하며 내쫓기도 했다. 그제야 알리는 착각 속에서 깨어났다. 그는 자신이 금메달을 딴 미국의 영웅이 되었으니, 이제는 백인 식당에 갈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곳에서 초라하게 쫓겨나고 말았다. 그 사실에 절망한 그는, 자신이 그토록 사랑했던 금메달을 오하이오 강에 던져버리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착각은 끝났다. 나는 그동안 내 허상에 사로잡혀 살아왔다. 나는 금메달리스트이기 이전에 초라한 흑인에 불과하다." 알리의 이 고백이 내게 아픔으로 전달되었다.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 사라지지 않던 당시의 미숙한 사회가 이런 아픔을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알리가 "착각은 끝났다"고 고백했던 것처럼, 오늘날 우리 역시 실체를 볼 줄 아는 자각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려한 갑옷이, 주변 사람들의 찬사가 내 실체를 말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가 입고 있는 두꺼운 갑옷 내면에는 영적 나병으로 신음하고 있는 우리 자신이 있음을, 정직하게 고백하기 바란다. ➤로마서 8장6절 “6. 육신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사망이요 영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생명과 평안이니라.” 오늘 우리는 번듯한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지만, 범죄 함으로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우리 내면의 영혼은 목말하고 있다. 그 처절한 내면세계를 정직하게 고백하고 드러냄으로써, 어떤 인생도 에수 그리스도 없이는 행복할 수 없다는 짧은 진리가, 우리 내면 중심에 메아리치게 되기를 바란다. 그리하여 단단히 내 생각이 깨지고, 하나님 생각으로 재무장되는 은혜가 있기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한다.-ⓗ - 이찬수목사의 저서 '처음 마음' 中.-ⓗ |